나아가는(문화)

임진왜란 때, 이순신장군의 전술신호 연(鳶)

Gijuzzang Dream 2008. 2. 2. 0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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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순신장군과 전술신호연(戰術信號鳶)  

 

 


어릴 적 시골 들판에서 언 손 호호불며 날리던 연은

옛날부터 전승되어 내려오던 우리의 전통 민속놀이다.

창호지 여러 번 접어 가위로 오려내 동그랗게 구멍을 내고,

해진 대나무 우산살 깎아 살대를 만든 후, 그 살대 정성스레 밥풀을 발라 창호지에 붙여 만든 연은

날리지 않을 때에도 늘 하늘에 떠오르게 했다.

가운데 꼬리 길게 단 연을 띄워 올리기 위해 넓은 들판 달릴 때 다가드는 바람 시원했고,

얼개에 감긴 연실 추스르던 손끝의 그 느낌 팽팽했다.

정월 대보름날 그동안 날리던 연 하늘로 멀리 날려버리면서 늘 아쉬움을 느끼곤 했다.

경기도 성남시 분당구에 자리잡고 있는 한국통신 본사건물 1층에는 한국통신 과학관이 있다.

연 10만여명이 방문하고 있는 한국통신 과학관에는

일반인들에게 정보통신의 문화와 정보통신의 기본원리를 설명하고,

초고속정보통신망을 이용하여 인터넷과 친숙해지는 계기를 마련,

이를 통해 정보통신에 대한 궁금증을 해결하고

정보통신사회에서 각종 정보통신 매체의 활용성을 키워주는 교육 공간으로서의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현재 한국통신 과학관 기획전시실에는 ‘한국통신의 발자취’란 이름으로

정보통신의 과거와 현재, 미래를 한 눈에 살펴볼 수 있게 하는 기획 전시회가 열리고 있다.

그 전시물 사이로 각각 무늬가 다른 연들이 다수 걸려있는데,

이순신 장군이 임진왜란 때 통신용으로 활용했다는 연을 재현해 제작한 것이다.

임진왜란 당시 옥포에서 왜선 30여척을 격파하고 사천에서 거북선을 사용,

왜선을 분쇄한 것을 비롯하여 당포에서 20척, 당항포에서 100여척을 각각 격파하고

한산도에서도 왜선 70척을 무찔러 한산대첩의 큰 무공을 세웠던 이순신 장군이

통신용으로 사용한 연은 모두 31가지로, 그 문양과 색깔에 따라 통신의 내용이 달랐다.

 

그때 그때의 전투 상황에 따라 적절한 명령을 이미 정해진 그림의 연을 하늘로 날려

군사들에게 전달하는 통신매체로서의 역할을 수행하였으며,

평상시에도 왜군의 상황을 알려 만반의 준비를 갖추라는 통신 신호로 활용했다.

세계 최초의 연은 BC 400년 경,

그리스 대 학자 플라톤의 벗이었던 ‘알투스’라는 사람이 만든 연이라고 한다.

그 후 동양에서는 BC 200년 경 중국 한나라 때의 장수 한신이

군사적 목적으로 연을 사용한 것이 최초라고 전해진다.

당시 한신은 전쟁이 있을 때마다 연에 사람을 태워 적의 성을 정찰하게 하였으며,

항우가 이끄는 초군과 싸울 때에는 소가죽으로 만든 커다란 연 아래 바구니를 달아

피리를 잘 부는 사람을 태운 다음, 그로 하여금 구슬픈 망향곡을 부르게 함으로써

적병들의 마음을 동요시켜 항복하게 만들었다는 기록도 있다.

우리나라의 연에 관한 최초의 기록은 ‘삼국사기’의 ‘열전’에 나타난다.

신라시대의 김유신 장군이 민심을 수습하기 위해 연을 사용했다고 하는 기록이 바로 그 것이다.

신라 진덕여왕이 즉위한 정미년(647·선덕여왕 16년)에 일부 신하가

여자에게 나라를 다스리게 할 수 없다는 구실로 내란을 일으켜 여왕을 폐위시키려 했다.

이로 인해 여왕이 이끄는 군사들은 월성에서, 반란군은 명활성에서 대립,

10여일 동안 싸웠으나 승부가 나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날 밤, 하늘에서 큰 별똥이 떨어지자 왕군이 패망할 징조라 하여

왕군은 물론 백성들이 크게 동요하기 시작했다.

당시 왕군의 지휘관이었던 김유신 장군은 군사의 사기를 진작시키고 민심을 수습하고자

허수아비 인형을 만들어 그것을 큰 연에 매단 후에 불을 질러 하늘로 올려 보냈다.

마치 별이 하늘로 솟아오르는 것같이 보이게 하기 위한 것이었다.

김유신 장군은 이를 통해 “어젯밤에 떨어진 별이 다시 하늘로 올라갔다”고 소문을 내어

병사의 사기를 돋운 다음 반란군을 진압하였다는 내용이다.

고려와 조선시대를 거치면서 연날리기는 아이들의 놀이로 세시풍속화 되었으며,

그 기록이 <동국세시기(東國歲時記)>  <경도잡지(京都雜志)>  <지봉유설(芝峰類說)>을 비롯한

여러 문헌에 나타나 있다.

연의 종류는 100여종을 헤아릴 수 있을 만큼 많지만,

그 중에 한국 연의 대표격이라 할 수 있는 연은 직사각형 중앙에 방구멍이 뚫려 있는 것으로,

이순신 장군이 통신용으로 활용하던 형태의 방패연이다.

 

임진왜란 당시 왜적의 근거지였던 부산으로 쳐들어가 왜선 100여 척을 부숴

남해안 일대의 적 수군을 완전히 격파한 후, 한산도로 진을 옮겨 본영으로 삼고

최초의 삼도수군통제사가 된 이순신 장군이 전략상 사용한 통신용 연은

무늬와 색상에 따라 각기 고유 명칭과 통신법칙이 있었다.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신호 연 

 

 

방패연(防牌鳶, Bangpai-Kite)은 '참연'이라고도 한다.

직사각형(장방형) 연의 이마에 둥근 달을 오려 붙이고

중앙 방구멍 옆 좌우에도 4각의 색종이를 붙인다.

하반부 양쪽 구석에 가운데가 팬 방패형의 색종이를 붙여 장식한다.

 

직사각형의 연 몸체에 붙이는 색지(色紙)의 색과 모양에 따라

(원 · 반원 · 사각형 등 / 빨강 · 파랑 · 노랑 · 흰색 · 검정 등))과,

또는 그림에 따라 각각 명칭이 다르다.

 

가운데의 방구멍은 연이 올라가고 내려오는 것을 쉽게 해 주고,

센바람을 흡수하여 연을 잘 뜨게 할 뿐만 아니라 조종을 자유롭게 한다.

 

가운데 방구멍이 뚫린 방패연은 특히, 견고함과 유연성 면에서

세계에서 유례(類例)를 찾기 힘든 뛰어난 구조를 가지고 있다.

 

얼레로 줄을 풀고 감아 높이를 조정할 수 있고,

조종하는 사람이 이동하면서 좌우로 방향을 바꿀 수 있는 등

공중에서 종횡무진 활약할 수 있어 연싸움에 많이 사용된다.

 

임진왜란 때 삼도수군통제사였던 충무공 이순신(李舜臣)이

군사 작전용으로 띄운 전술신호연(戰術信號鳶)은

전투신호를 위한 암호 전달에 중요한 수단으로 활용되었는데,

일종의 통신위성의 역할을 한 이 연은 역사적으로 중요한 방패연이었다.

 

군사작전 신호용으로 사용된 이 연은

연에 그려진 문양과 색깔에 따라 명령 내용을 달리하여 사용되었는데

전투 중에 사전의 상황을 알려 지휘관 또는 병사들에게

전투준비를 갖추라는 예지신호이자 작전명령으로,

적군이 알지 못하도록 문양에 각기 다른 암호를 넣어

전투명령 전달의 중요한 수단으로 사용되었다고 한다.

 

예를 들어 연의 문양에 따라 명령이 달랐는데

삼봉산 문양이 있는 ‘삼봉산연’을 띄우면

흩어져 있는 군선과 군사들은 삼봉산 앞 바다로 집결하라는 뜻이 된다.

 

삼각형 모양을 2층으로 크게 그려 넣은 ‘기바리연’이 올라가면

병전으로 왜적과 싸우라는 뜻이며,

‘돌쪽바지기연’을 올리면 병참이나 병기의 보급을 알리는 뜻이 된다.

 

임진왜란 당시 연의 크기는 가로가 90~120㎝로,

하늘에 높이 띄워도 연에 그려진 문양이 아군들에게 뚜렷하게 보이도록

대형 연을 제작했다고 한다.

 

가운데 방구멍이 있어 바람이 약하거나 강하게 불 때도 자유자재로 날릴 수 있으며,

날리는 사람의 손놀림에 따라 급상승과 급하강, 전진과 후퇴 등이 가능한

과학적 구조를 가진 방패연의 제작과 이 충무공의 과학적인 연의 이용은

우리 민족의 슬기와 과학적 지혜를 엿볼 수 있게 한다.

 

신호연에 사용된 빛깔은 오행사상의 기본색인

빨강(홍), 파랑(청), 노랑(황)의 유채색과 까망(흑), 흰색(백)의 무채색을 사용하였다.

이 색은 각각 오행사상의 오방위를 상징하는데

황은 중앙, 청은 동쪽, 흑은 북쪽, 백은 서쪽, 홍은 남쪽을 뜻한다.

또 하나는 하늘에 연을 띄웠을 때 붉은 색, 흰색, 검은색이 눈에 가장 잘 띄기 때문이었다.

 

   

  

머리연 - 산 능선을 공격하라 (야간)

머리눈쟁이연 - 산 능선을 공격하라

                     (주간)

   

   

이봉산연 - 이봉산 앞바다로 집결하라

              (야간)

이순신 장군이 “나의 죽음을 알리지 말라”고 명령한 후 사용

이봉산눈쟁이 - 이봉산 앞바다로

                    집결하 (주간)

    

    

삼봉산연 - 삼봉산 앞바다로 집결하라

               (야간)

삼봉산눈쟁이연 - 삼봉산 앞바다로

                       집결하라 (주간)

 

 

기봉산연 - 기봉산 앞바다로 집결하라

               (야간)

기봉산눈쟁이연 - 기봉산 앞바다로

                       집결하라 (주간)

 

 

 

 

   

     

기바리연 - 맞붙어 싸워라, 백병전 (야간)

기바리눈쟁이연 - 맞붙어 싸워라 (주간)

    

    

덴방구쟁이연 - 보름날 공격하라

수리당가리연  - 계속 정찰 탐지하라

    

   

아래갈치당가리연 - 오후, 저녁 해질 때

                          전투를 개시하라

윗갈치당가리연 - 아침, 해뜰 때

                       전투를 개시하라

   

   

외당가리연 - 적의 서쪽을 공격하라

홍치마당가리연 - 적의 남쪽, 서쪽 산

                       능선을 공격하라

 

 

청홍외당가리연 - 동쪽, 남쪽에서 동시에

                       공격하라

치마당가리연 - 남쪽, 서쪽에서 동시에

                     공격하라

    

   

반장연 - 소형선의 지휘관을 소집할 때,

            소형선의 우두머리에게 알릴 때

반장눈쟁이연 - 맞붙어 싸워라 (주간)

 

 

중머리연 - 적을 사방에서 에워싸라

중머리눈쟁이연 - 산 능선을 공격하라

                       (주간)

   

    

돌쪽바지기연(창고의 문고리문양) -

                병참이나 병기의 보급 (야간)

돌쪽바지기눈쟁이연 - 병참이나 병기

                             의 보급 (주간)

    

     

짧은고리연 - 태풍에 대비, 배와 배를

                  짧게 매라 (야간)

짧은고리눈쟁이연 - 태풍에 대비, 배와

                        배를 짧게 매라 (주간)

   

   

긴고리연 - 태풍이 대비, 배와 배를 길게 

               묶어라 (야간)

긴고리눈쟁이연 - 태풍에 대비,

               배와 배를 길게 묶어라 (주간)

    

 

치마고리연 - 태풍에 대비, 병선의 머리

          를 남쪽으로 두고 줄을 짧게 매라

 

 

삼봉산 모양을 딴 삼봉산연은 흩어져있는 모든 전선들과 병사들은 삼봉산 앞바다로 집결하라는 뜻이며,

돌쪽 바지기연은 창고의 문고리 문양을 사용하여 병참이나 병기의 보급을 알렸으며,

수리당가리연은 적의 상황을 정찰하라는 내용의 통신신호다.
반장연은 소형선의 지휘관을 소집할 때,

중모리연은 사방으로 적을 완전 포위하라는 명령이 떨어질 때 사용되었으며,

기바리연은 맞붙어 싸우라는 명령을 뜻하며

머리연은 주·야간에 산능선을 공격하라는 명령의 통신 신호이고

윗 깔치 당가리연은 오전에,

아래 깔치 당가리연은 오후에 전투를 개시하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특히 이봉산의 모양을 딴 이봉산연은

이순신 장군이 전사하기 직전, “나의 죽음을 알리지 말라”고 명령 한 후 사용되었던 것으로,

이봉산으로 군사들을 집결시키기 위해 날렸다고 한다.

 

 전투를 위한 통신용 연과는 별도로 일기예보를 알리는 데에 사용된 연도 있다.

태풍이 밀려올 것이니 소형 병선들의 줄을 길게 매도록 하라는 내용의 긴고리연과

역시 태풍에 대비, 소형 병선들의 줄을 짧게 매어두도록 할 때 날렸다는 짜린고리연

그리고 우천을 알리는 용연 등이 그 것이다.

이순신 장군의 통신용 연의 색상은 우리 민족의 오행사상을 바탕으로 제작되었다.

기본색으로 빨강, 노랑, 파랑 등 세가지의 유채색과 흑색, 백색 등의 무채색을 활용하였다.

즉 음양오행사상에서 나오는 오방위를 상징적으로 활용한 것이었다.

 

이순신 장군이 통신용으로 활용한 연의 원형을 재현시킨 것은

15년 동안 충무와 사천 지역을 돌아다니며 구전으로 내려오는 자료를 수집한

한 인간의 집요한 노력에 의해서였다.

이한욱씨(당시 사천군 거주)의 현재 근황은 알 수 없지만

몇 년 전 필자와 만난 그는 이순신 장군의 통신용 연에 모든 것을 다 바치고 있었다.
당시 이한욱씨는 임진왜란 때 이순신 장군이 통신용으로 활용한 연의

문양이 지닌 의미는 극비사항으로, 외부에 거의 알려져 있지 않아

기록으로 남은 것이 없기 때문에 재현하는 데 많은 어려움을 겪어야 했다고 한다.

현재 한국통신 과학관에 전시되고 있는 연도 이한욱씨 작품이며,

해군사관학교와 진해문화원 그리고 독립기념관 등에도 전시되어 있다.

연날리기는 지금도 행해지는 민속놀이로,

이순신 장군이 활용한 통신용 연과는 달리 오락성과 민속 신앙적 의미도 지닌다.

 

민속 신앙적 의미로 ‘액막이 연날리기’가 있는데,

옛날부터 정월 대보름날이 연에 ‘액(厄)’자 또는 ‘송액(送厄)’이라 써서 높이 날려보냄으로써

액을 쫓아보낸다는 풍습으로 현재까지도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이순신 장군이 나라를 지키기 위해 통신용으로 활용한 연을 바라보면서

우리나라의 모든 액을 하나의 연에 실어 하늘 높이 날리고

그 연실을 툭, 끊어버리고 싶다는 생각을 해본다.
- 2001년 8월 25일 전자신문
- <김영근의 정보통신 문화산책> 작가 / 한국통신문화재단(한국통신 과학관장)


     

 

 

 

 

   

  연(鳶)은 "소리개"를 의미하기도 한다.

  소리개는 매과에 속하는 사나운 새로 부리와 발톱이 날카롭게 굽어 있고,

  날개가 커서 잘 나른다.

  연이 하늘 높이 바람에 날리는 모습이

  소리개가 커다란 날개로 여유롭게 나르는 모습과 흡사한 데서 붙여진 것 같다.

  연 날리기를 한자로 지연(紙鳶), 풍연(風鳶)이라고 한다.

   

  연은 언제부터 하늘을 날게 되었을까?

  기록에 따르면 기원전 200년경 진(秦)나라와 항우의 초(楚)나라를 무너뜨리고

  전한(前漢)을 세운 장수 한신(韓信)이 적의 성을 공략할 때 연을 사용하였다고 한다.

  당시 한신 장군은 전쟁이 있을 때마다 "연"에 사람을 태워 적의 성(城)을 정찰하였다.    

  또한 구몽록(鉤夢錄)에 의하면 항우(項羽)가 이끄는 초군(礎軍)과 싸울 때는

  소가죽으로 만든 커다란 "연" 아래 바구니를 메달아 대나무 "피리" 잘 부는 사람을 태워

  구슬픈 망향곡(望鄕曲)을 부르게 하여 적병(敵兵)들의 마음을 동요시켜

  항복하게 하였는데 그 "연"을 풍필(風筆)이라 불렀다고 한다.

  중국에는 연의 재료인 대나무와 비단실이 풍부했기 때문에

  일찍부터 연이 등장한 것으로 추측된다.

  

  우리나라에서는 삼국사기 열전(三國史記 列傳)에는

  신라시대의 김유신장군이 민심을 수습하기 위해 연을 사용하였는데

  신라 진덕여왕이 즉위한 정미년(647년, 선덕여왕 16) 신하 비담(琵曇)과 염종(廉宗)은

  여왕이 나라를 다스릴 수 없다는 구실로 내란을 일으켜 여왕을 폐위시키려 했다.

  선덕여왕이 이끄는 군사들은 월성(月城)에서, 반란군은 명활성(明活城)에서 서로 대립,

  10여 일 동안 싸웠으나 승부가 나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날 밤,

  하늘에서 큰 별똥이 떨어지자 이것은 바로 왕군(王軍)이 패망할 징조라 하여

  왕군은 물론 백성들이 크게 동요하고 있을 때, 당시 왕군의 지휘관이었던 김유신장군은

  군사를 진정시키고 민심을 수습하고자 우인(偶人: 허수아비)을 만들었다.

  그것을 큰 연에 매달아 불을 질러 올려보냄으로,

  마치 별이 하늘로 솟아오르는 것 같이 보이게 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리하여,  "어젯밤 떨어졌던 별이 다시 하늘로 올라갔다" 라고 소문을 내어

  병사들의 사기를 돋운 다음 반란군을 진압하였다고 기록하였다.

    

  이러한 여러 가지 역사적 기록 가운데서도 일반적으로 우리나라 연의 기원은

  최영장군의 탐라 정벌 때부터 비롯된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고려 말(1374) 최영장군이 탐라국에 남아있는 목호(가축을 기르던 몽고인)의 반란을

  평정하기 위해 군대를 이끌고 탐라에 다다랐으나,

  섬의 사방이 절벽이라 상륙할 수가 없었다.

  결국 꾀를 낸 최영장군은

  군사를 연에 매달아 병선(兵船)에서 띄워 절벽 위에 상륙시켰으며,

  수많은 대지연(大地鳶)에 불을 달아 지자성(只子城)을 덮치게 함으로써

  그 성을 공격하였다고 동국세시기(東國歲時記)에 기록되어있다.

     

  또 조선조에는 세종대왕 때(1455) 남이장군이 강화도에서 연을 즐겨 날렸다는 기록과

  임진왜란 당시 삼도수군 통제사 충무공 이순신장군이 섬과 육지를 연결하는

  통신수단으로, 때로는 작전지시 전달 암호로 색과 문양을 달리한 신호용 연을 이용했다.

  충무공이 전략상 사용한 신호연은 무늬와 색상에  따라 각기 고유명칭과 신호법이 있다.

  또한 각 문양은 자연 만물을 상징으로 하고 있음이 신호연의 특징이었다.

   

  특히 영조는 대궐에서 청, 홍편을 나누어 연을 날렸고 

  동,리 별로는 백성들의 화합을 도모하고자 연 날리는 것을 장려하고 즐겁게 관전하여 

  1725-76년 무렵에는 우리나라에 연날리기가 널리 보급되었다고 한다.

  삼국 이후 군사적 목적으로 사용되던 연이

  조선 중기 이후부터는 놀이로 자리매김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우리나라를 통해 연을 전해받은 일본에서는

  정월에 부, 행운, 다산 등을 의미하는 학, 용, 물고기, 거북모양의 연을 날리며,

  크리스마스 선물처럼 설날에 어린이들에게 연을 선물한다.

  이처럼 동양에서는 연을 군사적, 주술적 목적으로 많이 활용했다.

 

  이에 비해 서양에서는 기원전 4세기경에 그리스의 철학자 플라톤의 벗이었던

  알투스라는 사람이 처음 만들었다는 기록이 있으나, 연이 좀 더 실용적으로 사용되었다.

  15세기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계곡이나 강의 거리를 측정하는데 연을 이용했는데,

  이 방법은 1850년대 나이아가라폭포에 세계 최대의 현수교를 세우는 데에도 쓰였다.

  또 1749년 스코틀랜드의 윌슨은 여러 개의 연을 한 줄에 매달아

   ‘고도에 따른 온도차’를 측정하는 실험을 수행했다.

 

  연을 이용한 과학실험은 미국대통령을 지낸 프랭클린의 번개 실험이 가장 유명하다.

  프랭클린은 연실에 비단 손수건을 매달고 여기에 열쇠를 장치한 다음

  번개가 치는 날 연을 띄워 열쇠에 불꽃이 생기는 것을 관찰했다.

  그 결과 대기 중의 전기가 실험실에서 발생시킨 전기와 성질이 같다는 점을

  실험으로 증명했다.

 

  또한 연을 이용해 하늘을 날려는 시도는 다빈치로부터 시작되었는데,

  1903년 11월7일 코디는 연에 매단 통을 타고 영국해협을 건넜다.

  이런 노력이 글라이더를 거쳐 오늘날의 비행기를 탄생시킨 것이다.

 

 

  한편, 연날리기는 지방에 따라서는 12월 중순께부터 시작하기도 하나

  대개는 섣달부터 정원 대보름까지 노는 놀이이다.

  대보름이 지나면 날리지 않는 것이 본래의 풍속이다.

  정월에 연을 날리는 이유는 농한기이기도 하며

  이때가 되면 북서풍이 불어 연날리기에 가장 적합한 바람이 불기 때문이다.

  한편 연을 날릴 때 이웃마을과 때로는 마을의 또래끼리 연싸움을 하여

  이기는 편이 그 해의 액운을 피할 수 있다는 속설이 전해오고 있다.

 

  정월 대보름날 밤,

  연 꼬리에 "액은 멀리 떠나가고, 복이 깃들어 달라."는 송액(送厄) 기원 문구를 붙여

  하늘 높이 띄우거나 불을 붙인 다음 하늘에 날리기도 한다.

   '액(厄)연(鳶)띄운다' 하여 연에다 "액(厄)"자 하나를 쓰기도 하고

   "송액(送厄)"이니 "송액영복(送厄迎福)"이라고 써서 얼레에 감겨있던 실을 모두 풀어

  멀리 날려 보낸다. 이것을 '액연 띄운다' 혹은 '액연 날린다' 라고 하였다.

  언제 찾아올지 모르는 액을 연에 실어 하늘에 띄움으로 근심을 잊으려 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