척화파와 주화파의 갈등 | |
척화파 (항전파=강경파=수구=김상헌=친명=노론=집권=주자학파) 주화파 (화의파=온건파=진보=최명길=친청=소론=은둔=양명학파)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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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이 끝난 뒤 만주 일대에서는 여진족이 일으킨 청나라가 욱일승천의 기세로 세력을 떨쳤다. 명나라는 심한 압박을 받고 있었다. 이와 달리 조선은 8년 전쟁의 뒤끝을 정리하느라 온 국력을 기울이고 있었다. 이 무렵 조선의 조야는 오랑캐 청나라를 배척하고 명나라에 대해 재조자소(再造字小 · 다시 나라를 만들어주고 작은 것을 사랑해준 은혜)의 의식, 곧 배명친청 의식이 팽배했다.
청나라는 거대한 적 명나라를 타도키 위해 온 국력을 기울이면서 조선과는 타협을 끊임없이 모색했다. 광해군은 적당히 타협을 모색했다. 그리하여 명의 요구에 따라 청을 공격하는 군사를 보내면서도 현지 사령관인 강홍립에게 정세를 보아 향배를 결정하라고 일렀다. 특히 광해군을 몰아내고 집권한 세력들은 광해군의 실리외교를 모조리 뒤엎고 청나라에 더욱 적대감을 보였다. 국제정세를 외면하고 해바라기가 해를 바라보듯 발톱이 빠진 늙은 사자만을 쳐다보고 있었다.
그리하여 사신을 보내 회유하기도 하고 1차로 침략전쟁을 벌이기도 했다. 그런데도 조선은 결코 심복하지 않았다. 마침내 청나라는 1636년 전면적 침략을 단행했다. 적군이 서울을 장악하고 횡행하는데도 인조는 남한산성에 갇혀 꼼짝도 못했다. 서울 주변의 모든 백성은 엄청난 대가를 치르고 있었다. 이럴 때 김상헌이 주도하는 항전파와 최명길이 주도하는 화의파로 갈라졌다. 다시 말해 화의하는 문제를 두고 서로 이견을 노출하며 갈등을 빚고 있었다. 화의를 하여 백성을 살려야 한다고 주장하는 계열을 주화파, 죽어도 오랑캐에게 무릎을 꿇고 화의를 할 수 없다는 계열을 척화파라 부른다. 최명길은 일단 화의를 하여 항복을 하고 후일을 도모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척화파는 철저한 명분론자, 주화파는 실리논자였던 셈이다. 일단 화의는 성립되었다. 조선 최초의 치욕적인 사건이었다. 이제 조선은 명을 대신하여 청을 임금으로 받들겠다고 서약했다. 항복을 한 뒤 김상헌과 최명길은 함께 전범으로 몰려 볼모로 잡혀갔다. 뒤이어 명나라도 멸망했다.
척화파들은 철저히 명나라를 받드는 주자학파들이었다. 주자는 북방민족인 금(金)나라가 중국을 침입하자 철저 항전을 주장하는 존왕양이(尊王攘夷)의 논리를 폈다. 중화주의 가치관에 따라 오랑캐와는 한 치도 타협할 수 없다는 논리이다. 바로 금나라와 청나라를 같은 오랑캐 무리라 본 것이다. 힘과 힘의 대결이므로 힘이 부칠 적에는 한 발 후퇴해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이들은 대개 주자학보다 양명학에 경도되었다. 곧 왕양명은 사변적 학문보다 실천을 중시했으며 직업과 신분의 차별을 배격했다. 따라서 중화주의 이론에 충실치 않았다. 주화파들은 양명학적 무실(務實)에 충실했다. 역사의 전개과정에서 누가 옳다고 말할 수 있을까? 진정 국민을 살리는 길이 무엇인지와 연관되는 문제일 것이다. 청나라가 중원을 차지하고 명나라가 멸망한 뒤에도 척화파들의 의식은 한 치도 변하지 않았다. 더욱 청나라에 증오감을 드러내며 존화(尊華)의식에 사로잡혔다. 멸망한 명나라의 연호를 쓰고 아무리 청나라가 유화정책을 써도 심복하지 않았다.
주화파들을 대의명분을 저버린 역적의 무리로 몰아갔다. 주화파들은 정치적으로나 학문적으로 탄압을 받았다. 그리하여 소수로 전락했다.
주자학의 교조성은 결국 정치적 수단으로 이용되었다.
주화파들은 정치적 입지가 약화된 속에서 소론으로 갈라져 정치적으로 몰락했다. 주화 계열의 소론들은 정치적 압제를 피해 은둔하거나 양명학 연구에 몰두했다. 한 무리의 재야 지식인 그룹이 있었다. 곧 실학자들 속에서도 박지원, 박제가 등이 이를 주도했다. 이들은 중국이 천하의 중심이 아니라는 것, 오랑캐도 문화적으로 수준이 높게 되면 중화가 될 수 있다는 것, 우리나라는 공리의 주자학을 불식하고 실질의 학문을 숭상해야 한다는 것 등에 모아졌다. 하지만 이들도 소수 그룹에 지나지 않았다. 이들의 전통을 이은 이항로 · 최익현 등은 19세기 외세 침투의 상황에서 철저한 척화의식으로 단련되어 있었다. 이들은 묵은 이론을 끄집어내서 척사(斥邪)를 표방하고 새로운 시대의 변수에 대비했다.
그리하여 새로운 시대상황이 전개될 때마다 묵은 관념과 몽롱한 의식 속에서 헤맸다.
척화이론이야말로 대의명분이란 그럴 듯한 위장술로 포장하고서 시대의 진보를 외면하고 퇴행의 길을 걸었다. 이들은 기성의 신분제도 봉건가치를 고수하여 기득권을 계속 누리려 했다. 때로는 주체의식이 부족한 듯이 보이기도 했으나 현실타협의 노선을 추구했다. 대체로 19세기 끝 무렵, 개화파들이 척사파에 맞서 신문물의 수용을 외치면서 이 주장에 접근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미국 · 중국 등 패권국가들과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남북관계에 있어서 화해 협력으로 가야 할지, 인권과 정의에 토대를 둔 과거사 청산은 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등의 문제가 가로놓여 있다. 우리는 여전히 이 과정에서 강경파와 온건파, 수구와 진보가 어우러져 갈등을 빚고 있다. 우리는 냉철한 현실인식을 요구한다. (이이화, 역사학자)
- 치욕의 삼전도碑 : 청태종의 공덕 새긴 뼈아픈 역사 상징물 - 청나라는 항복식을 거행한 삼전나루에 청 태종의 공덕비를 세우라고 강요해왔다. 그야말로 돌출행동이었다. 그리하여 인조는 너도나도 기피하는 분위기 속에서 세 사람의 문사들에게 글을 지으라는 분부를 내렸다. 그들이 지은 내용은 부실했다. 청나라는 마지막 경고를 보냈다.
막다른 골목에 이른 인조는 이경석에게 이 일을 지시했다. 그 비문의 끝에 ‘마른 뼈에 다시 살이 붙고 차가운 뿌리에 다시 봄이 오도다… 삼한에는 만세토록 황제의 덕이 남으리’라는 구절을 넣었다.
이 글을 받아본 청나라에서는 이제서야 만족하여 비를 세우게 했다. 여진문자와 몽골문자로 번역해 보내고는 세 문자로 비를 세우라고 강요했다. 청의 사신이 와서 공사를 감독했다. 이 공덕비는 높이 395㎝, 너비 140㎝의 규모로 만들어졌다. 앞에는 여진문자와 몽골문자로 이루어진 비문을 새기고 뒤에 한문의 비문을 새겼다. 또 화려한 단청을 한 비각을 지어 비바람을 막게 했으며 주변에는 담을 둘러 보호케 했다. 여느 사람들은 감히 근접하지 못했다. 이 비의 정식 명칭은 청태종공덕비였으나 보통 삼전도비라고 불렀다.
그런데 이 비문은 정치투쟁의 빌미가 되었다. 이경석도 주화파의 한 사람이었으나 뒤에 전범의 한 사람으로 지목되어 압록강변의 백마산성에서 유배살이를 했다. 그런데도 척화파들은 치욕의 비문을 지어 나라의 체면을 잃었다고 매도했다. 당시의 사정에 비추어 사세가 부득이한 데에서 나왔다고 변명했으나 척화파들은 막무가내로 욕설을 퍼부었다. 그 결과 논쟁과 분란이 꼬리를 물고 연이어졌다. 당쟁의 빌미가 된 하나의 사례가 되었다. 그러다가 해방 뒤 다시 발굴해 본래 있던 자리에 세우고 보호했다. 치욕의 역사도 후세의 교훈이 된다는 소박한 의식에서 나온 조치일 것이다. 한데 이를 남몰래 조각을 내서 없애려는 시도도 있었고 비문을 쓴 이경석의 이름을 지우기도 했다. 공허한 대의나 명분만 먹고 살 수 있었던가? 삼전도비는 잘못된 역사의 한 상징물이 되고 있다. |
- 2004년 12월 22일, 경향, [한국사 바로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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