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끼며(시,서,화)

늘 푸른 소나무

Gijuzzang Dream 2008. 1. 17. 19:32

 

 

 늘 푸른 소나무에 대한 상념

 

황산의 설경


2006년 1월 중국 안휘성(安徽省)에 있는 황산(黃山)을 찾았다.

험준하고 척박한 바위 사이에 심하게 휘어져 강한 생명력을 자랑하며

멋지게 서있을 소나무의 절경을 기대하면서

우리 일행들은 명말 유민화가 석도(石濤, 1642~1717)의 황산그림을 가슴에 새겨두었으며

직접 눈으로 확인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였다.

 

하지만 행운인지 불행인지 황산은 하얀 눈으로 덮여 있었다.

눈 구경하기가 힘든 황산이었기에 많은 중국인들은 들뜬 마음으로 사진기를 들고 황산에 오르고 있었다.

우리 일행도 발에 아이젠을 끼고 황산에 올랐다.

온통 눈으로 뒤 덮인 바위와 나무들만이 우리 눈에 들어왔다.

흑과 백으로만 이루어진 세상처럼 보였다.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쭉 뻗은 장송들은 온몸에 눈옷을 입고 있었다.

척박한 바위산에 하얀 눈으로 덮인 그야말로 혹한에 우뚝 서있는 소나무들이었다.

황산의 설송


한 겨울의 소나무는 혹독한 시련을 이겨내는 지조와 절개의 상징으로

동양에서는 예로부터 시문은 물론 그림 등에 즐겨 다루어졌다.

『논어』의 「자한(子罕)」에 ‘세한연후(歲寒然後) 지송백지후조야(知松柏之後凋也)’ 라는 문구는

‘추운 시절이 된 후에야 송백이 늦게 시드는 것을 안다’는 내용으로

소나무의 지조와 절개 등의 덕성과 품격을 핵심적으로 묘사한 글이라고 할 수 있다.

 

소나무는 우리나라의 굽이굽이 산길에서, 마을 앞 입구에서, 혹은 바닷가에서 흔히 볼 수 있으며

발산하는 강렬한 생명의 빛으로 인해 늘 우리의 눈길을 끌어왔다.

따라서 지천으로 자라는 소나무는 우리의 산수화에 늘 등장하는 단골 소재였다.

 

 

전 이경윤, <설송도>(《산수인물화첩》중)/ 비단에 먹, 31.1 x 24.8cm/ 고려대학교박물관


혹독한 추위에 푸르른 빛을 발산하여 자신의 기개를 유감없이 드러내는 소나무는

그림에서 더욱 빛을 발했다.

조선 중기 이경윤(李慶胤. 1546~1611)의 작품으로 전하는 <설경도(雪景圖)>는

눈 덮인 설산을 배경으로

화면 왼쪽 아래에 아담한 집과 그 위로 각이 심하게 진 소나무 한 그루를 담고 있다.

이 때는 밖으로 임진왜란, 병자호란 등 전쟁을 치루었고, 안으로는 사화, 당쟁이 계속되어 혼란스런 시기로

탁족(濯足)이나 어부(漁父) 등 은일의 주제가 크게 유행하였다.

 

속세와 떨어진 깊은 산속 은자(隱者)의 집 위로 장송(長松)이 화면을 압도하며 우뚝 서 있다.

용트림하는 소나무 기둥과 솔잎들은 짙은 먹으로 강하게 표현되었는데,

설경의 배경으로 인해 그 푸르른 빛이 강조되었다.

아담한 집을 둘러싼 세한삼우의 대나무와 더불어 소나무는 은자의 고고한 기개를 유감없이 드러내었다.

 

소나무의 상징성을 강조하는 그림은 조선후기에 더욱 다양하게 그려졌다.

특히 소나무만을 단독으로 그려 그 품성을 강조하려는 그림들이 많아졌다.
능호관(凌壺觀) 이인상(李麟祥, 1710~1760)의 <설송도(雪松圖)>는

바로 이인상 자신의 내면의 지조를 유감없이 드러낸 것이다.

화면 가득 올 곧게 솟은 장송과 그 뒤로 크게 휜 소나무가 교차한 모습을 담았는데,

흰 눈에 덮여있어도 그 당당한 기개가 잘 드러나 있다.

특히 화면 아래 예리하고 각진 바위는 소나무가 뿌리 내린 곳마저 척박한 환경임을 보여주고 있다.

이인상은 인조조(仁祖朝)의 명신(名臣) 이경여(李敬轝)(1585~1657)의 현손(玄孫)이나

서자의 신분으로 사회적 편견 속에 살아야했던 인물로

바르게 살고자하는 자신의 지조를 설송(雪松)에 은유적으로 표현했음을 알 수 있다.

 

 이인상의 <설송도> / 종이에 수묵, 117.2×52.6㎝/ 18세기/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소나무만을 압도적으로 그려낸 명작으로는

겸재(謙齋) 정선(鄭敾, 1676~1759)의 <사직노송도(社稷老松圖)>를 들 수 있다.

화면 가득 구불구불 용트림 하며 올라간 노송을 세 줄기로 포치하였고

짙고 옅은 녹색의 솔잎들을 세세히 표현하였다.

늘어진 가지를 받쳐주는 받침대만으로 그 깊이감이나 높이 등 공간감을 제시할 뿐

일체의 배경 없이 반송(盤松)의 기고(奇古)한 모습을 요점적으로 부각시켰다.

 

줄기의 구불거림이나 솔잎 등은 현실감의 효과가 충분히 드러나도록 묘사하였다.

그러나 줄기의 흐르는 선은 ‘노(老)’자를 연상되도록 은밀히 구성하였으며

다양하게 뻗은 줄기의 포치나 무성한 잔가지들은 관자(觀者)를 위해 의도적으로 노출하여 부각시켰다.

이처럼 그림의 시점을 중요하게 구성할 수 있었던 것은

정선이란 화가 자신의 독창성이 맘껏 발휘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정선, <사직노송도>/ 종이에 먹과 엷은 색, 61.8 x 112.2cm/ 고려대학교박물관


소나무는 오랜 세월 동안 그 형상과 생태적인 특징을 인간의 덕성과 품성으로 연결하여

인간 곁에서 장수, 그리고 사람에 대한 변함없는 지조, 절개 등 길상의 의미를 얻게 되었으며

그로 인해 그림 등 예술품의 소재로 즐겨 다루어왔다.

 

소나무그림은 너무도 바쁘게 돌아가는 세상에 살며

자신의 믿음과 지조가 무엇인지도 모르며 살고 있는 우리들에게

진정한 의미의 인간의 덕성이 무엇인가 생각하게 한다.

혹독한 시련 속에서도 굿굿하게 한계상황을 극복할 수 있는 넘치는 기개를 배울 수 있으며

변치 않는 인간에 대한 믿음을 유지할 수 있는 지혜를 생각해보게 한다.

 

자연물에 인간의 덕성을 대비시켜 자신의 지조와 기개를 지키고 표현하고자 했던 우

리 조상들의 슬기를 소나무 그림에 대한 감상을 통해 그 의미를 되새겨보고자 하였다.
- 문화재청 김포국제공항 문화재감정관실 이순미 감정위원
- 게시일 2008-01-14

 

 

 

 

 

 

능호관 이인상 ‘설송도(雪松圖)’

 

 

 

言行一致의 삶을 담은 ‘선비의 자화상’

 

그림은 마음의 표현이다. 마음의 움직임을 형상으로 나타낸 것이 그림이다.

특히 문인화는 그림의 소재인 사군자(매화 난초 국화 대나무)를 빌어

자신의 뜻을 표현한다.

 

비록 사군자에는 들지 않았지만 문인화가들이 즐겨 그린 나무가 있다.

‘애국가’에도 등장하는 소나무가 그것이다.

우리의 옛 그림 중에서 소나무가 등장하는 그림은 쉽게 찾아볼 수 있다.

 

통일신라시대의 솔거가 황룡사 벽에 그린 나무도 소나무였고,

추사 김정희의 ‘세한도’와 겸재 정선의 ‘노송영지도’,

능호관 이인상(1710∼60)의 ‘설송도’,

이재관의 ‘송하처사도’,

북산 김수철의 ‘송계한담도’, 허유의 ‘노송도’, 민화 등에도 소나무가 등장한다.

 

옛 시인묵객들은 물론 일반인까지 소나무에 의지했다.

소나무는 삶의 동반자였다.

사철 푸른 소나무의 생태에 감동한 사람들이 소나무를 통해 자기심경을 표현했다.

이는 옛 그림의 두 가지 경향,

즉 ‘사실(寫實)’과 ‘사의(寫意)’ 중에서 사의로 소나무를 그리고 대했다는 말이다.

여기서 사실은 실재 있는 것을 그대로 그린다는 뜻이고,

사의는 사물의 외형을 취하되 마음속의 뜻을 표출되게 그린다는 뜻이다.

문인화는 주로 사의적인 요소가 강하고,

화원이나 전문가의 그림은 사실적인 경향을 띠었다.

 

시와 글씨와 그림에 능했던 능호관은 사의의 대가였다.

미술사가 이동주에 따르면,

원래 우리나라 그림에서는 사의에 비중이 많은 편이 아니었는데,

능호관에 와서 사의적인 그림이 많이 나타났다고 한다.

‘설송도’는 능호관의 청정한 인품이 고스란히 담긴 대표작이다.

 

 

소나무로 그린 지조와 절개

 

때는 눈 오는 날인데, 날씨마저 흐리다.

화면 가득 두 그루의 소나무가 클로즈업 되어 있다.

한 그루는 화면의 중심에서 기둥 역할을 하듯이 위를 향해 곧게 뻗어 있고,

다른 한 그루는 옆으로 비스듬히 눕혀서 교차되게 그렸다(직선과 곡선의 조화).

또 소나무의 윗부분을 과감하게 잘랐다.

이로 인해 소나무의 곧고 힘찬 모습이 더 잘 살아난다.

 

이 대담한 화면구성은 능호관의 다른 그림인 ‘검무도’에도 나타난다.

인물의 배경에 이와 동일한 포즈의 소나무 두 그루가 그려져 있다.

 

이 소나무는 ‘홀몸’이 아니다. 등걸과 가지마다 눈이 가득 쌓여 있다.

눈은 엄동설한 같은 거친 세파를 의미한다.

또 소나무는 바위틈에 뿌리를 내렸다. 바위는 토양의 척박함을 상징한다.

그럼에도 소나무는 거친 세파와 척박한 토양에서도 꿋꿋하다.

속된 일에 물들지 않고자 하는 절개가 느껴진다.

전봇대처럼 직립한 굵직한 등걸은 굳은 지조와 기상을 상징하기에 충분하다.

소나무는 한곳에 뿌리를 내리면 여간해서 다른 곳으로 옮겨심기가 어렵다.

그만큼 심지가 곧다. 또 변함없이 푸르다. 듬직하다.

이런 생태가 소나무를 흠모하고 예찬하게 만든다.

 

 

삶을 담은 그림, 그림을 닮은 삶

 

이 그림의 가치는 능호관의 인물됨에서 극대화된다.

그는 강직한 성품의 소유자였다.

효종의 뜻을 받들어 북벌론에 찬성하며,

청나라에 대한 깊은 반감과 청나라 문화의 유입을 못마땅하게 생각했다.

사대부들은 이런 능호관의 배청사상과 지조를 높이 평가하며 존경했다.

 

또 부와 권세에 굽히지 않는 곧은 성격의 지사였다.

‘능호관’이라는 호도,

가난한 그를 위해 친구들이 남산 기슭에 사준 집의 이름에서 따왔다.

이 집에서 내려다보는 서울의 경관이,

신선들이 산다는 ‘방호산’을 능가할 만큼 빼어났던 모양이다.

그래서 호를 ‘방호산을 능가하는 아름다운 경관’이라는 뜻으로 능호관이라고 지었다.

그는 이 작은 초가집에서 글을 읽고 그림을 그리며 심신을 가다듬었다.

자신의 신념과 어긋나는 일에는 일절 마음을 두지 않았다.

세상의 흐름을 좇지도 않고 바른 길만 걸었다.

그런 모습이 곧추선 소나무의 굳센 기상으로 표현되어 있다.

 

‘설송도’는 언제나 꼿꼿하고 원칙을 중시했던 능호관의 초상을 보는 듯하다.

그에게 그림은 자기수양의 방편이 아니었을까.

강성한 자태의 소나무를 그리며, 흐트러지려는 마음을 추스르지 않았을까.

 

사실 인간은 시간의 흐름을 거스를 수 없는 존재다.

시간은 모든 것을 변화시킨다. 그런 변화는 인간의 굳은 결심마저 균열을 낸다.

문인이라고 예외일 수 없다.

그래서 그들은 ‘자성록’을 써듯이 시를 짓고 그림을 그리지 않았을까.

같은 맥락에서 능호관의 소나무도 치열한 자기성찰의 산물이 아니었을까.

언행일치의 삶이 낳은 ‘그림의 진신사리’가 소나무라고 말이다.

만약 그림이 삶을 담고, 삶이 그림을 닮는다면, 능호관의 그림이 천상 그 꼴이다.

그에게 그림과 생활은 둘이 아니라 하나였다.

- 2007. 2.1 [정민영의 그림으로 배우는 자기계발 전략] 박현주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