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끼며(시,서,화)

자크 루이 다비드 作 - 알프스를 넘는 보나파르트

Gijuzzang Dream 2008. 1. 11. 00:50

 

  

 

[명화이야기]  완벽하게 미화시킨 영웅의 이미지

 

 

'알프스 생베르나르 산맥을 넘는 보나파르트'

  Bonaparte Crossing the St. Bernard Pass.

1800. Oil on canvas. 260 x 221. Musée National de Malmaison, Rueil-Malmaison

  

 

현대의 가장 큰 권력은 홍보다. 숨어서 선행을 베풀지 않고서는 무슨 일이든지 알려야 하기 때문이다.

현대는 홍보 전략이 뛰어난 사람일수록 성공할 수 있다.

역사적으로 홍보 전략이 뛰어난 사람은 나폴레옹(Napoleon Bonaparte, 1769-1821)이다.

그는 가장 빠르게 성공한 사람으로,

정치 선전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잘 알고 있었고 또 적절하게 이를 잘 이용했다.

나폴레옹의 이미지를 극대화한 작품이

자크 루이 다비드(Jacques-Louis David. 1748~1825)의 ‘알프스를 넘는 보나파르트’ 이다.

나폴레옹은 프랑스 혁명시절부터 선전 미술과 정치 · 신문 · 삽화 등을 통해

정치적 이미지를 만들고 그 이미지가 가질 수 있는 파급력을 일찌감치 깨달았다.

 

나폴레옹은 그림의 주문과 검열, 수상제도를 철저히 운영해나갔다.

화가들은 정부의 주문을 받기 위해서는 정부 입맛에 맞는 그림을 그려야 했다.

나폴레옹 시대의 화가는 황제의 이상적인 모습을 선전하는 도구로 전락하고 만 것이다.

나폴레옹에게 화가는 군인과 마찬가지로 정치인으로서 자신의 입지를 높여주고

훗날 자신이 만든 정책을 빛내줄 수 있는 존재였다.

나폴레옹은 그 당시 프랑스 미술의 흐름을 자신의 취향대로 이끌어갔고

황제 양식이라는 새로운 것을 등장시킨다.

나폴레옹은 장르의 구분 없이 미술의 모든 분야에 영향을 끼쳤다.

다비드의 ‘알프스를 넘는 보나파르도’는

나폴레옹이 스페인 왕 카를로스 4세의 초상화를 보고 의뢰한 작품이다.

다비드는 새로운 시대에 등장한 영웅의 이미지를 완벽하게 미화한 이 작품의 성공으로

그 이후 3년 동안 조수들과 네 점의 복제화를 더 그렸다.

이 작품을 제작할 당시 나폴레옹은 황제가 아니었지만 시대를 열었다.

사나운 말 위에 앉아 나폴레옹은 비탈길을 행해 돌진하고 있다.

그는 자신감 넘치는 모습으로 알프스 저 너머를 손으로 가리키고 있다.

나폴레옹 발밑에는 알프스를 넘는 한니발 대제와 샤를마뉴 대제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역사적 기록에 따르면

1800년 나폴레옹 보나파르도는 말 대신 산길에 강한 노새를 타고 알프스를 넘었다고 한다.

다비드는 이 작품을 제작하면서

나폴레옹에게 직접 모델을 해달라고 청했으나 나폴레옹은 이를 거절했다.

“초상화와 내가 닮고 안 닮고는 중요하지 않다. 천재의 창의력을 발휘해서 그리면 된다”고 했다.

또 그는 전쟁터를 배경으로 칼을 들고 있는 모습을 보고

앞발을 든 말 위에 평온한 모습으로 그려달라고 주문했다.

다비드는 나폴레옹이 타고 있는 말을 표현하기 위해

러시아 황제 표트르 대제의 기마상에서 말을 보고 묘사했으며

말에 앉아 있는 나폴레옹을 그리기 위해 제자를 말에 태워 모델로 삼았다.

다비드는 이 작품에서 역사적 장면을 묘사한 것이 아니라 이상화한 통치자의 모습을 표현했다.

그는 프랑스 혁명에 가담해 수석 궁정화가가 됨으로써 나폴레옹 시대에 가장 중요한 화가가 된다.

다비드는 당대의 역사를 기념하는 그림을 그렸지만 나폴레옹의 몰락으로 망명길에 오른다.
- 박희수〈작가 · 아트칼럼니스트〉

 - 2008 01/15  경향. 뉴스메이커 758호

 

 

 

::::: <나폴레옹 & 죠세핀> 특별전내용 중에서 :::::

 

이탈리아에서 위급한 상황으로 인하여,

나폴레옹은 그의 군대를 최대한 신속하게 전장으로 이끌어야 하는 상황이었다.
시간에 쫓기고 있던 나폴레옹은 1800년 5월14일,

가장 가깝지만,가장 험난한 길인, 알프스 산맥을 넘는 방법을 선택한다.

그는 프랑스로 다음과 같은 편지를 썼다.
‘우리는 얼음과 사나운 눈보라, 폭설과 사투를 벌이고 있다 ...

3일 내에 모든 군은 이 곳은 통과할 것이다... ’


이 대담한 작전으로 인해, 나폴레옹은 오스트리아군의 방해를 피해, 이탈리아로 진입하였고,

1800년 7월14일의 메랭고 전투에서 승리할 수 있었다.
나폴레옹의 열렬한 찬미자 였던 스페인의 왕 찰스4세가, 다비드에게 이 초상화를 그리도록 하였다.

그림은, 기운 넘치는 말 위에서 평온하게 앉아있는 나폴레옹의 모습을 묘사하고 있다.

그러나 실제로 나폴레옹은 노새를 타고 알프스를 넘었다고 한다.

- 2003년 7월10일-9월21일 서울역사박물관 특별전

 

  

 

 

- 나폴레옹 에피소드 -

 

우측통행과 좌측통행

나폴레옹 시대 유럽의 기마병들은 말 고삐를 오른손으로 잡고, 왼손으로 창을 잡고 공격을 했다.
따라서 공격자의 정면에서 보면 [사람-말머리] 처럼 보이게 된다.

그걸 달리 생각해 보면,
사람-말머리 = 나에게로 다가오는 적,

말머리-사람 = 나에게서 멀어지는 적으로 인식하게 되는데

나폴레옹은 이를 역으로 이용하였다.

 

프랑스의 기병대는 말고삐를 왼손으로 잡고 우측에서 좌측으로 공격하게 하여

적을 혼란 시켜 연승할 수 있었다.

나폴레옹이 유럽을 정복하자

영국과 그 일부 식민지를 제외한 다른 나라들에서는 프랑스의 기마법을 따르게 됐고,

이것이 마차와 자동차의 우측통행으로 이어졌다는 게 정설이다.

 

 

네잎클로버의 유래

나폴레옹이 일개 포병장교였을 때다.

전투 중이던 어느날 그는 네잎 클로버를 보게 되었다.

하도 신기해서 꽃을 따려고 고개를 숙인 순간

적의 총알이 머리를 스쳐 지나갔다. 그 덕분에 그는 목숨을 건졌고

이 때부터 네잎 클로버는 행운을 상징하게 되었다고 한다.


 

통조림의 기원

나폴레옹은 군인들이 행진을 할 때 공복을 느끼면 절대로 안된다고 생각한 장군이었다.
그래서 그는 1795년, 행진중에도 음식을 먹을 수 있도록

음식을 저장하는 방법을 고안해낸 사람에게 상과 상금을 수여하겠다고 발표했다.

그 상은 프랑스의 발명가인 니콜라스 아페르트에게 돌아갔는데,

그가 고안해낸 방법은 유리병에 식품을 넣고, 코르크 마개를 헐겁게 막은 다음

끓는 물에 담가서 충분히 가열한 후, 뜨거울 때 코르크 마개를 단단히 막는 방법이었다.

이 때 아페르가 받은 상금은 1만 2000프랑이었다고 한다.
그후 1821년 미국이 통조림공장을 세워 기업화함으로써 발전하게 되었다.

 

베토벤교향곡 3번 "영웅"

프랑스혁명 이후 두각을 나타낸 나폴레옹의 용감한 행동을 베

토벤은 항상 경이와 존경의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마음에는 나폴레옹이야 말로 인류에게 자유와 평화를 가져다 줄 구세주로 비쳤던 것이다.

그는 1803년 여름 약 5년 전부터 준비하고 있었던 대 교향곡을

이 '코르시카의 영웅'에게 헌정 하려고 본격적인 작곡에 들어갔다.

그리하여 그 이듬해 1804년 봄에 그것을 완성 하였다.그것이 제3번 '영웅'인 것이다.

베토벤은 악보가 완성되자 그 표지에 '나폴레옹에게 바침'이라고 써놓고 헌정의 날만 고대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5월 18일에 나폴레옹이 황제로 즉위했다는 소식을 들은 베토벤은

악보 표지를 지우고 방바닥에 내동댕이 쳤으며, 헌정을 취소하고 말았다고 한다.

 

 

나폴레옹과 아이스크림

조세핀을 향한 나폴레옹의 사랑은 너무도 끔찍하여 그는 더운 여름날이면

반드시 사랑하는 아내를 위해 아이스크림을 준비했다고 한다.


당시에는 특별히 냉동기술이 없었으므로

그는 새벽마다 5명의 장정과 10여 마리의 말이 끄는 커다란 마차를

알프스로 보내 산꼭대기의 눈을 가득 싣고 파리까지 급히 달려오도록 했다.

도착하고 나면 산더미 같은 눈은 다 녹고 고작 몇 사발만이 남았을 뿐이었지만

여기에 과일즙과 꿀을 넣어 조세핀에게 바쳤다고 한다.

 

나폴레옹과 이집트

1798년 5월9일. 5만 군사와 선원은 물론이고, 함께 징발된 167명의 학자들 모두 행선지를 알 수 없었다.

그저 사르디아나 크리미아일 거라는 막연한 추측뿐이었다.

물론 사령관인 나폴레옹 보나파르트는 정확하게 알았다. 바로 이집트 원정이었다.

이집트를 무력으로 정복하고 인도 진출 때 영국이 이용하던 통로를 차단하기 위한 원정이었다.
3년간의 이집트 원정기간 동안 파견학자 가운데 32명이 사망했으나 이들이 남긴 유산은 엄청났다.

이른바 ‘이집트학’ 열풍이 불었고 기념비적인 ‘이집트지’가 출간되었다.

 

수에즈 운하가 완성됐고 그 유명한 ‘로제타 스톤’의 발견으로 이집트 상형문자가 해독되었다.
“나는 이집트에서 모든 것을 꿈꾸었고 꿈꾸었던 모든 것을 실현시킬 수 있는 수단을 발견했다.

모든 역사를 경험한 영토를 내 이익을 위해 뒤지고…

두 세계의 체험들을 군사작전 속에 집결시킬 수 있었다.

나의 인생에서 가장 아름다운 순간이었다. 그것이 가장 이상적인 순간이었기에…”
이집트 원정을 정리한 나폴레옹의 이 말은 이집트 원정을 상징적으로 함축하고 있다.

 

 

나폴레옹과 다비드
프랑스 혁명이전의 18C 프랑스 미술의 궁정은 화려한 장식과

인테리어로 대변되는 로코코 양식이 지배적이었고

이에 대한 반감은 고전주의에 대한 동경으로 이어졌다.

고전주의 미술의 대표자인 쟈코 루이 다비드는

프랑스 혁명 당시 고전주의 부활에 대한 심한 열병을 앓고 있었고 혁명의 선봉장이었던

나폴레옹 역시 혁명의식을 고취하고 시민계급의 감정을 표현하기 위해

다비드의 그림이 절실히 필요하였다.

이후 다비드는 나폴레옹의 궁중화가로 당대의 중요한 역사적 사건을 그림으로 기록하게 되었고

이는 다비드의 고전주의의 미술세계를 구축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톨스토이의 '전쟁과 평화'

《전쟁과 평화》는

1805년 제 1차 나폴레옹 전쟁 직전부터 러시아 건국 이래로 최대의 역사적 사건이라 할 수 있는

1812년 대나폴레옹 조국 전쟁을 거쳐

1820년까지 15년 동안에 걸친 러시아 역사에서 중요한 시기를 재현한 것이다.

러시아 인들에게 잊혀지지 않는 노불(露佛)전쟁 당시 양대군의 보로지노 벌판의 대전투,

나폴레옹의 모스크바 점령, 모스크바 대화재, 그리고 프랑스군의 후퇴를 중심으로 펼쳐지는

대 서사시라 할 수 있다.

 

작가 자신의 모친 가계와 부친 가계를 모델로 하여 만들어진

두 가문 볼콘스키 가문과 로스토프 가문을 축으로 러시아 국민 생활의 일대 파노라마가 펼쳐진다.

종래의 장편소설이라는 형식적인 장르 개념을 깨고

역사소설과 가정소설의 혼합으로 이루어진 대하소설이라 할 수 있다.

톨스토이의 《전쟁과 평화》는 19세기 유럽 소설이 해내지 못한

소설의 영역과 지평을 확장시킨 대서사시이기도 하다.

 

 

시단의 나폴레옹 '바이른'

"모두 끝나고 말았다 - 하지만 어제는 제왕 !'

이름보다 ‘하루 아침에 깨어나보니 유명해졌다’ 는 말로 더 잘 알려진

로맨스 주의자이며, 천재시인이었던 바이른은

자기 자신을 시단의 나폴레옹이라고 하며 유럽 전역에서 그에 대한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고 한다.
그가 나폴레옹의 정치적인 면을 좋아했다는것은

잉글랜드가 프랑스에 의해 고역을 겪고 있을때도 호의를 나타낸 것을 보아 짐작할 수 있으며,

나폴레옹의 몰락 후 이에 대한 아쉬움으로
‘모두 끝나고 말았다- 하지만 어제는 제왕!’ 으로 시작하는 장문의 송시에서 잘 나타나 있다.

 

 

괴테와 하이네

나폴레옹은 생존 당시부터 오늘날까지 프랑스인들만의 영웅이 아니었다.

괴테 하이네 등 동시대를 살았던 지성인들을 비롯,수많은 사람들의 존경과 흠모를 받았다.

그의 박학다식하고 교양있는 풍모는 다름아닌 그의 독서열에 기인했다
나폴레옹은 유년 시대부터 생애 마지막에 도달할 때까지 탐욕스러운 독서가였다.
특히 괴테의 작품인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을

전쟁터에까지 휴대하고 다니면서 여러 번 읽었다고 한다.
그래서 괴테와 나폴레옹이 만났을 때,

그 작품을 7번이나 읽었다고 하여 괴테로 하여금 감탄케 했다고 한다.


괴테와 하이네 이들은 나폴레옹을 직접 만났으며, 두 작가 모두 나폴레옹에게 매료된다.
괴테는 1821년 만초니가 쓴 나폴레옹에게 헌정하는 시를 번역했고,

하이네는 『여행그림 Reisebilder』에서

헬레나섬에 유배된 나폴레옹을 신화적인 인물로 부각시키고

나폴레옹을 민중의 왕의 모델로 만들었다.

 

장군 나폴레옹의 일화

전쟁중 어느 한밤중.

그가 순찰을 돌던 도중 선 채로 잠을 자는 병사를 발견했다.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 병사대신 날이 샐 때까지 그 자리에서 대신 보초를 섰다.
날이 새자 자고 있던 병사가 잠을 깨고 놀라며 그의 앞에 무릎을 꿇고 죽여 달라 하였으나

그는 '너와 나밖에 본 사람은 없다, 그것으로 됐다'하며 그 자리를 떠났다.
날이 밝아 전투가 시작되자 그의 병사들은 추위에 고전하며 조금씩 밀리기 시작하였다.
그때 어느 병사가 적진을 향해 죽음을 무릅쓰고 싸우는 것을 목격한 다른 병사들은 사기가 올라

자신들도 죽을 힘을 다해 적군과 싸워 그 전투를 승리로 만들었다.
전투가 끝난 후 나폴레옹은 그 병사를 찾았으나 그 병사는 보이지 않았다.
한참 뒤 나폴레옹은 싸늘한 시신으로 남아있는 병사를 보고 그 자리에 주저앉고 말았다.

 

 

 

 나폴레옹을 사로잡은 조세핀의 체취

 고유의 체취를 결정짓는 것은 유전자?

 

 

“가장 관능적인 냄새는 어린 까마귀에게 사십 일 동안 삶은 계란만 먹여서 죽인 후

그것을 도금양잎과 아몬드오일에 넣어 뽑은 정수의 냄새다.

모든 여자들이 갖고 싶어하며 모든 남자들이 원하는 냄새.” (조경란의 소설 ‘혀’ 중에서)

예로부터 이성을 유혹하는 향으로 널리 사용된 것은 사향이었다.

암컷 사향노루의 배꼽 근처에 있는 향낭에서 방출되는 향으로 여인들은 남성을 유혹하곤 했다.

사람의 몸에서 나는 고유의 체취도 이성을 유혹하는 효과를 지니고 있다.

“일주일 후에 돌아갈 것이니 그때까지 몸을 씻지 말고 기다려 주시오. 당신의 냄새가 그립소.”

전쟁터에서 돌아오던 나폴레옹이 그의 연인 조세핀에게 보낸 이 편지는

여인의 몸에서 자연스레 배어나오는 체취가 얼마나 훌륭한 페로몬 역할을 하는지 잘 보여준다.

▲ 대관식에서 나폴레옹이 조세핀에게 관을 씌워 주고 있다 (다비드의 그림 중에서) 
영국의 국왕 에드워드 7세 역시 더운 여름날 연인에게 두꺼운 옷을 입혀 산책을 하게 한 다음 그 냄새를 맡으며 사랑에 빠져들었다고 한다.

엘리자베스 여왕 시대에는 연인들끼리 체취가 흠뻑 배인 사랑의 사과를 교환하는 풍습도 있었다. 껍질을 벗긴 사과를 겨드랑이에 끼어두었다가 땀에 흠뻑 젖게 한 다음 애인에게 보내 냄새를 맡게 한 것이다.

지금도 브라질 농촌 여인들은 남편이 바람을 피울 기미가 보일 경우 오랫동안 입었던 자신의 팬티를 끓여서 만든 커피를 먹인다고 한다.

실제 실험에서도 체취의 효과가 증명된 바 있다.

핀란드 연구팀이 이틀 동안 입은 여인들의 티셔츠를 실험대상자들에게 주고 냄새를 맡도록 했다.

그 결과 남성들이 가장 매력적으로 느끼는 냄새는 배란기에 있는 여성들의 티셔츠였다.
그에 비해 여성들인 선호한다고 고른 다른 여성들의 티셔츠 분포에는 배란기 특성이 나타나지 않았다. 즉, 남성들은 여성들의 배란기 냄새를 선호하는 반면,

여성들은 같은 여성들의 배란기 냄새에 그다지 끌리지 않는 셈이다.

프랑스 연구팀은 용모 수준이 비슷한 남성들에게 땀이 날 정도로 운동을 시킨 후

여성들에게 그 셔츠의 냄새를 맡게 했다.

그러자 여성들이 호감을 표시한 티셔츠의 주인공은 실제 맞선 자리에서

자신이 선호한 남성과 대체로 일치하는 결과를 보였다.

이는 외모를 보기에 앞서 냄새만으로 이미 호감을 가지는 이성을 선택한다는 의미다.

그런데 최근 각자의 체취를 결정짓는 요인이 유전이라는 연구결과들이 속속 나오고 있다.

2006년 미국 시카코대 연구팀은

후각이 사람보다 훨씬 뛰어난 쥐를 이용해 피실험자의 체취에 익숙해지게 훈련시켰다.
그 후 새로운 사람들의 체취를 맡게 한 결과

아무 관계가 없는 사람보다 이미 익숙해진 피실험자와 친척 관계에 있는 사람들의 체취에

훨씬 더 빨리 반응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후각이 예민한 쥐는 체취만으로도 유전적 관계가 있는 사람들을 구분할 수 있다는 내용이다.

올해 8월에는 스위스 연구팀이 유전자가 똑같은 일란성 쌍둥이의 경우 체취도 비슷하다는

연구결과를 발표했다. 일란성 쌍둥이 12쌍의 겨드랑이에서 나는 체취를 분석한 결과,

혈연 관계가 없는 사람보다 분비된 체취의 원인 물질이 10배 이상 비슷하게 나왔다는 것.
이는 체취에 유전적 요인이 있다는 사실을 보여준 것인데,

며칠 전에는 포유동물에서 나오는 고유한 체취를 이용해

지문처럼 개체의 신원 확인을 할 수도 있다는 연구결과가 발표되었다.

보통 체취는 섭취하는 음식물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고 여겨져 왔다.

그러나 이번 미국 연구팀의 실험 결과 먹이가 달라져도 유전적으로 결정된 생쥐 개체 고유의 체취는

그대로 유지되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에 따라 연구진은 이것이 사람에게 적용될 경우

체취로 신원을 확인하는 장치도 개발할 수 있을 것이라는 전망을 내놓았다.

피비린내 나는 전쟁터에서도 나폴레옹이 조세핀을 그토록 그리워한 것은

그녀의 유전자만이 만들 수 있었던 고유의 체취 덕분이었던 모양이다.

- 이성규 기자, 2noel@paran.com

2008.11.07 ⓒ ScienceTim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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