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끼며(시,서,화)

현판문화

Gijuzzang Dream 2008. 1. 20. 18:13

 

  

 

 우리의 현판문화 

 

우리의 공공 전통건물에는

입구인 문이나 본 건물의 중앙에 어김없이 현판(懸板)이 걸려 있음을 보게 된다.

건물을 둘러보는 사람들은 그 현판에 쓰인 글씨를 보고도 그 건물의 성격 같은 것을 짐작하게 된다.

때로는 달필의 큰 글씨를 보고 “아, 잘 썼네”라고 감탄사를 자아내기도 한다.

시쳇말로 하면 현판은 건물의 성격을 알려주는 간판인 셈이다.


현판은 ‘이마에 건다’는 뜻을 따서 편액(扁額)이라고도 부른다.

또 건물의 이름을 쓴 글씨를 액자(額字)라 부른다.

액자는 보통 큰 글자로 쓰기 때문에 큰 글자라는 뜻으로 전이되어 사용되기도 했다.

현판은 전통적인 공공 건축물에는 어김없이 걸렸기에 하나의 문화를 형성했다.

현판 문화는 한자문화권에서 이루어진 특징을 지니고 있었다.

본디 고대 중국의 진나라에서 현판을 걸기 시작한 때부터 그 기원을 두었다고 한다.

우리나라에 한자가 전수되면서 자연스레 현판 문화도 묻어왔으나

결코 중국에 못지 않게 널리 유행을 탔다.

초기에는 주로 국가의 공공건물에 달았으나 후기에 와서는 민간 건축물에도 걸었다.


 

- 삼국은 사찰, 조선은 서원에 달아 -

삼국시대에는 사찰의 모든 건물에 현판을 걸었다.

사찰 건물의 현판을 보면 그 건물의 용도를 환하게 알 수 있었다.

곧 대웅전(大雄殿)이라 걸려 있으면 석가모니불을 모신 곳임을 알게 된다.

 

이런 사찰의 현판은 고려와 조선시대로 그대로 이어졌다.

조선시대에 들어서는 유교 교육을 시키고 공자를 모시는 모든 서원에 현판을 걸었다.

서원에도 그 용도에 따른 액자를 쓴 현판을 걸었음은 말할 나위도 없었다.

사찰과 서원의 액자는 명필이나 유명 인사의 글씨를 받아 새겨 걸기도 했으나

임금의 어서(御書)를 받아 새겨 걸기도 했다.

그 대표적인 곳이 풍기의 소수서원이다.

이 서원은 조선조 최초로 건립되었으나 운영이 어려웠다.

이황이 풍기군수로 부임하여 명종이 쓴 ‘소수서원’이라는 액자를 받아 걸고

국가로부터 토지 · 노비 등을 받아 국가공인의 서원으로 만들었다.

그 뒤 서원들은 임금의 사액을 받으려는 풍조가 일어났다.

개인이 세운 건물인 정자, 재실이나 학당에도 어김없이 현판을 걸었다.

경치 좋은 곳에 정자를 세우고 정자 이름을 지어 걸었다.

정자 안에는 정자를 세운 유래와 경치를 적은 기, 시와 부 등을 판에 새겨 걸었다.

당대의 유명 문인들이나 그 지방 수령들의 작품이 걸리게 마련이며

글씨는 명필을 동원하여 쓰게 했다.

 

현판 액자의 경우 때로는 예전 명필이나 선현의 글씨를 집자(集字)하는 수도 있었다.

운치를 한껏 살리려는 정서에서 나온 것이다.

선비들은 흔히 무슨 당(堂), 무근 재(齋), 무슨 산방(山房) 등의 현판을 걸어 정자의 운치를 흉내냈다.

정약용은 자신의 당호를 ‘늘 조심한다’는 뜻을 따서 여유당(與猶堂)이라 하고 현판에 새겨 걸었다.

현판 문화의 두 가지 구체적 실례를 들어보기로 한다.

 

조선은 1394년부터 한양천도공사를 벌였다. 정도전이 천도공사를 총지휘하고 감독했다.

궁궐이 먼저 완성되자 태조는 궁성의 문에 이름을 지어 현판을 달라고 지시했다.

그리하여 신하들이 머리를 짜낸 끝에 오행설에 따라

궁성의 동쪽 문은 봄을 상징해 건춘문(建春門), 서쪽 문은 가을을 상징해 영추문(迎秋門),

남쪽 문은 여름을 상징해 광화문(光化門, 光은 불과 통함)이라 했다. 이때에는 북문을 만들지 않았다.

이어 모든 궁궐 건물이 완성되자 정도전이 도맡아 대궐과 전각의 이름을 지었다.

새 대궐은 큰 복을 누리라는 뜻을 따 경복궁(景福宮),

큰 침전은 늘 평안하라는 뜻을 따 강녕전(康寧殿),

정사를 보는 건물은 정사를 부지런히 하라는 뜻을 따 근정전(勤政殿)이라 붙였다.

그밖에 여러 작은 건물에도 어김없이 그 역할에 맞는 이름을 붙였다.

마지막으로 8개의 도성 출입문이 완성되었다.

북쪽 문은 숙정문(肅靖門, 뒤에 肅淸門), 동북쪽 문은 홍화문(弘化門, 동소문),

동쪽 문은 흥인문(興仁門, 동대문), 동남쪽 문은 광희문(光熙門, 수구문),

남쪽 문은 숭례문(崇禮門, 남대문), 서북쪽 중간의 작은 문은 소덕문(昭德門, 서소문),

서쪽 문은 돈의문(敦義門, 서대문), 서북쪽 문은 창의문(彰義門)이라 했다.

 

사방의 대문은 오상(五常)인 인의예지신(仁義禮智信)에서 따와 이름을 붙였던 것이다.

그런데 북쪽 대문인 숙정문만은 ‘엄숙히 다스린다’는 뜻을 따서 간접적으로 지(智)를 나타냈다.

북쪽은 임금자리이다.


- 규장각엔 ‘客來不起’로 학자 배려 -

도성에는 중앙의 대문을 만들지 않아 신(信)을 붙일 수 없었는데

나중에 중앙지대에 보신각(普信閣)을 지어 보완했다.

정작 현판을 달 때 흥인문만은 지(之)를 더 붙여 흥인지문이라 했다.

도성의 동쪽은 지대가 낮아 이를 보충하려고 한 글자를 더 붙였다거나

동쪽에 큰 산이 없어 지세가 기운다고 하여 ‘지’자로 보충했다고도 한다.

 

또 숭례문만은 화기를 누르기 위해

일반적으로 가로로 쓰는 관행을 어기고 세로로 써서 현판을 달았다.

이처럼 모든 전각과 문의 이름은 유교이념을 표현하거나 풍수지리설과 결부시켜 이름을 붙였던 것이다.

그 나름의 운치가 있다고 할 수 있지 않은가?

다음 정조가 세운 규장각의 경우를 보자.

정조는 1776년 규장각을 설치하고 많은 부속건물을 지었다.

그리고 각기 이름을 붙이고 현판을 달았다.

그 이름을 보면 봉모당(奉謨堂), 열고관(閱古觀), 개유와(皆有窩) 등 수십가지였다.

또 일을 보는 건물 안에는

객래불기(客來不起, 손님이 와도 일어나지 말라),

좌의대관(坐椅戴冠, 의자에 앉고 관을 써라) 등 근무수칙을 적은 편액을 걸었으며

자신의 의지를 담은 만천명월주인옹(萬川明月主人翁, 정조의 자호) 등을 새겨 걸기도 했다.

정조는 활도 잘 쏘고 문장도 잘 짓고 글씨도 잘 쓰고 전각 솜씨도 뛰어난 예술가였다.

그는 현판이나 도장을 스스로 파서 건물에 걸기도 하고 책에 찍기도 했다.

규장각의 여러 현판은 정조 개인의 예술적 취미를 나타내기도 했다.

한편 애써 자신의 의지를 신하들에게 전달해 자신의 정책을 원활하게 펴려는 의지도 스며 있었다.

현판 문화도 분명히 우리 전통문화의 한 흐름이다.

따라서 오늘날 현판은 전통성과 역사성을 살려야 할 것이다.

한자 문화권의 소산인 옛 한자 현판을 한글로 바꾸어서는 원형을 훼손하는 꼴이 될 것이다.

한글을 사랑하는 것과는 구분해야 한다.

- 2005년 2월 2일, 경향 [한국사바로보기] /이이화, 역사학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