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화이야기] 조개껍질 위에 피어난 ‘사랑의 여신’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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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여신 비너스는 세상에 아름다움을 가져온다. 비너스의 아름다움을 표현한 많은 작품 중에는 산드로 보티첼리(Botticelli, Sandro, 1445~1510)의 ‘비너스의 탄생’이 가장 유명하다. 여인의 신비한 아름다움이 절정을 이루고 있는 이 작품은 그의 대표작이다. 그녀는 ‘비너스의 탄생’뿐 아니라 보티첼리의 대표작 ‘봄’의 모델이다. 그녀는 15세기 피렌체를 대표하는 미인으로 메디치 가문의 한 사람이었던 줄리아노의 정부다. 다방면에 재능이 많았던 그녀는 요절하고 만다. 16세기 초부터 ‘봄’과 함께 메디치 가문의 시골 별장을 장식했다. 나무에 그리는 패널화보다 제작비용이 적게 들어서 주로 별장을 장식하기 위한 개인적인 주문으로 제작된 것이다. 평온하게 휴식을 취할 수 있는 곳을 장식하기 위해 기분 전환할 수 있는 전원적인 주제로 표현된 그림들이었다. ‘비너스의 탄생’도 이와 같은 배경을 가지고 주문제작한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고대 로마 신화를 보면 비너스는 바다의 물거품에서 탄생했는데 이 물거품은 하늘의 신 우라노스의 잔인한 행위에 대한 복수로 아들 크노소스가 잘라 바다에 버린 우라노스의 생식기 주위에서 만들어졌다.
검은색 선으로 인물의 윤곽선을 뚜렷하게 표현해 인물의 명료함을 강조했으며 비너스의 탄생을 알려주기 위해 고대 전설을 인용했다. 고대 전설에서는 장미꽃이 비너스의 탄생과 함께 생겨났다고 한다. 그 두 사람은 사랑의 여신 비너스를 해변으로 불어 보내려 하고 있다.
화면 오른쪽에 있는 계절의 여신 호라 중 하나가 해변에서 비너스를 맞으며 그녀를 위해 옷을 펼쳐들고 있다. 호라의 옷을 장식하고 있는 꽃은 그녀가 봄의 여신임을 알려주고 있다. 손으로 가슴과 음부를 가리고 있는 비너스의 자세는 고대 조각을 연상케 한다. 이 작품은 고대 시인 호메로스의 비너스의 탄생에 대한 찬가에 감명받은 보티첼리가 여신의 탄생을 묘사한 것이 아니라 탄생 후에 키티라 섬에 도착한 여신의 모습을 표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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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디치 가문(Medici family)
우피치 미술관(Galleria degli Uffizi) 문 밖으로 나온다.
미술관 앞 도로는 표를 끊고 입장을 하는 관람객으로 여전히 만원이다.
바사리(Giorgio Vasari, 1511~1574)는 선 원근법의 원리를 표현하기 위해
건물을 저렇게 설계한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을 문득 해본다.
우리는 건물을 지을 때 도로를 먼저 만들고, 그 도로에 접한 건물을 짓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런데 여기서는 건물과 도로의 선후 관계가 뒤바뀌었다.
건물이 먼저 만들어지고, 건물 사이로 형성된 좁고 긴 공간을 사람들이 다니면서
자연스럽게 도로가 만들어졌다. 그 도로의 어떤 지점에 서서 건물을 보더라도
내 눈앞에는 선 원근법으로 그려진 그림이 펼쳐져 나타난다.
바사리는 이 건물을 완성하지 못하고 죽었다.
지금은 세계적으로 유명한 미술관이 되었지만
사실 우피치 미술관은 미술관 용도로 건축된 것이 아니라 메디치 가문이 일을 보는 집무실이었다.
이탈리어로 '우피치'라는 말은 영어의 '오피스'에 해당한다.
그래서 이 건물은 '우피치 宮'으로도 불린다.
메디치 가문이 집무하던 우피치 궁이 전 세계에서 온 관람객으로 들끓는 우피치 미술관으로 바뀐 것은
메디치 가문의 마지막 혈통인 안나 마리아 루이사가 후손 없이 숨을 거두면서
메디치 가문의 전 재산을 피렌체 시민의 것으로 하라는 유언을 남겼기 때문이다.
이로써 초기 유럽 근대사의 숨어있는 주역으로 300년 동안 역사 무대에서 활약했던 메디치 가문은
피렌체 시민에게 큰 선물을 남기고 그 무대에서 내려왔다.
끝이 특히 아름답다. 끝이 좋으면 모든 것이 아름다운 법이다.
메디치 가문은 세 명의 교황과 두 명의 프랑스 왕비를 배출했다.
공화제 도시국가였던 피렌체 공화국을 이끈 지도자들도 그 대부분이 메디치家 출신이었다.
메디치 가문이 가진 힘의 원천은 은행이었다.
세계 최초로 복식부기를 사용했다고 전해지는 메디치은행은
최고의 신용과 금융기법을 지니고 있었으며, 막대한 부를 쌓아 올렸다.
1412년 교황청과 전속은행 계약을 맺었으며, 유럽 각지에 16개의 현지 은행을 가지고 있었다.
요즈음 식으로 표현하면 프랜차이즈제를 도입한 글로벌 금융기업이었던 셈이다.
유럽 주요도시의 정보와 자금 흐름을 손바닥에 놓고 있었으며,
마음만 먹으면 유럽의 모든 도시들을 단번에 파산시킬 수 있는 능력이 있었다고 한다.
큰 과장은 아닐 것이다.
정치적으로도 메치디 가문은 로마나 토스카나 지방을 아우르는 중부 이탈리아를 실질적으로 지배했다.
그러나 메디치 가문의 명성이 높은 것은 재력 때문이 아니다.
정치적인 영향력 때문도 아니다. 르네상스 시대의 인물들을 후원했기 때문이다.
메디치 가문을 '르네상스의 대부'라고 말하는 이도 있다. 동의한다.
르네상스 인물들 뒤에는 어김없이 메디치 가문이 등장한다. 다빈치와 미켈란젤로 역시 예외가 아니다.
그들은 메치기 가문에 의해 발탁되고, 메디치 가문의 지원을 받고,
메디치 가문의 의뢰를 받아서 예술활동을 한 메디치 그룹의 사람들이었다.
다빈치와 미켈란젤로 뿐이 아니다.
바사리가 쓴 <전기>에 등장하는 거의 모든 예술가가 그렇다고 보면 된다.
우피치 미술관에 전시되어 있는 모든 작품이 그렇게 태어났다고 보아도 된다.
우피치 미술관의 간판 그림 가운데 하나인 산드로 부티첼리의 <비너스의 탄생>은
메디치 가문의 별장에서 태어났다.
르네상스 회화의 컬렉션으로 질이나 양적으로 세계 제일인 우피치 미술관은
다른 세계적인 미술관과 비교할 때 전시물 사이의 공간이 좁다. 그래서 좀 답답하다는 느낌을 준다.
그런데 사실은 전시 공간이 좁다기보다는 전시할 작품이 너무 많기 때문이라고 봐야 할 것이다.
이에 따라 미술관 측은 꾸준히 전시 공간을 넓혀 가고 있다.
2006년에는 1만6천㎡(약 4천평)으로 확대했다.
그러나 아직도 상당수의 작품이 빛을 보지 못한 채 창고에 보관되어 있다고 한다.
로마 바티칸 궁에 있는 작품들도 메디치 가문과 깊은 관계가 있다.
바티칸 궁을 장식하고 있는 많은 작품들은 그 대부분이
메디치 가문 출신의 교황 레오 10세와 클레멘스 7세가 의뢰한 것이기 때문이다.
교황 레오 10세와 클레멘스 7세는 사촌간이다. 메디치 가문 출신답게 그들은 예술을 사랑했다.
재정이 궁핍했던 로마 교황청은 메디치 가문 출신을 교황으로 선출했고,
부와 예술의 소양을 갖춘 메디치 가문 출신 교황들은 그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바티칸 궁을 화려하게 장식했던 것이다.
레오 10세는 씀씀이가 컸다.
전임 교황이 아껴 모아놓은 교황청 예산은 그가 재위한 지 2년 만에 바닥이 났다.
그는 성 베드로 대성당 건립자금을 모으기 위해 '면죄부'를 대대적으로 팔았다.
이에 항거한 마틴 루터를 파문해서 종교개혁의 원인을 제공한 교황이 바로 레오 10세이다.
클레멘스 7세는 알프스 북부지방에서 종교개혁의 불길이 퍼져 나가고 있을 때도
그 심각성을 제대로 깨닫지 못했다. 그는 영국 국왕 헨리 8세와 이혼 문제로 갈등을 일으킨 교황이다.
헨리 8세가 '천일의 앤'으로 불리는 앤 불린과 결혼하기 위해 캐서린 왕비와 이혼하려고 했을 때,
클레멘스 7세는 이를 허가하지 않았다. 캐서린 왕비가 당시 독일황제의 숙모였기 때문에
눈치를 살피다 이혼을 허락하지 않았다는 것이 정설이다.
이는 결국 영국 성공회가 떨어져 나간 계기가 된다.
메디치 가문은 근세를 예비한 두 역사적 사건, 곧 르네상스, 종교개혁과 깊게 관여되어 있다.
르네상스에서는 유능하고 지혜로우면서도 선한 배역을 맡았으나,
종교개혁에서는 무능하고 민초의 어려움을 외면한 채 사치만 좋아하는 고약한 악역을 담당했다.
빛이 있으면 그림자도 생기는 법인가?
메디치 가문의 역사에는 이렇게 영욕이 교차한다.
- <철학, 도시를 디자인하다 Ⅰ>, 정재영, 풀빛, 2008, p159-1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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