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끼며(시,서,화)

글쓰기 - 뼛속까지 내려가서 써라 ...

Gijuzzang Dream 2008. 1. 2. 21:17

 

 

 

 

 

 

 “글쓰기는 지도 없이 떠나는 새로운 여행”

 

 

<‘뼛속까지 내려가서 써라’> 나탈리 골드버그 · 권진욱 옮김 


 


 

책 읽는 것 다음으로 내가 좋아하는 것은 걷기다.

틈이 날 때마다 나는 걷는다.

들길과 산길을 걷고, 도심의 공원을 향해 걷고,

강줄기를 따라 나는 걷는다.

 

지구 위에서 가장 길고 가장 가파르고 가장 높고 가장 오래된

차마고도(茶馬古道)를 오가는 마방(馬幇)이라고 불리는 상인 행렬을 나는 동경한다.

 

차마고도는 실크로드보다 200년이나 앞서 열린 길이다.

마방들은 말들을 끌고 중국의 윈난, 쓰촨에서 티베트 고원을 지나고 히말라야를 넘어, 인도와 네팔로 이어지는 5000㎞의 대장정에 나선다.

그들은 차와 말을 교환하고 소금을 구하기 위해 설산과 고원과 협곡과 거대한 산맥과 강을 가로질러 뻗은 수천㎞의 길을 묵묵히 걷는다.

한없이 펼쳐진 웅장한 자연 속을 걸어가는 마방들은 있는 그대로의 태초의 세계와 하나됨을 경험한다.

하늘 아래 길들을 묵묵히 걸어가는 그들의 걸음을 인도하는 것은 태양과 별들이다.

이 원초의 걸음걸이는 무(無)와 망각(忘却)으로 둘러싸인 세계 속에서

존재감을 뚜렷하게 새기면서 의지와 자유의 존재로 거듭나게 한다.

 

마방들은 욕심을 비우고 걷는 것만으로도 숭고해질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걸을 때 심장박동의 리듬과 세계의 리듬은 비로소 하나로 겹쳐진다.

내가 걸을 때 세계와 나는 둘이 아니다.

“걷는 것은 자신을 세계로 열어놓는 것”(다비드 르 브로통, ‘걷기 예찬’)이며,

“내가 걸을 때마다, 세계가 내게로 돌아오는 것”(크리스토프 라무르, ‘걷기의 철학’)이다.

날숨과 들숨에 집중하고, 발과 다리를 거쳐 골반을 통해 전달되는 몸의 리듬에 온전히 몰입하면,

서로 딴 세계를 헤매던 몸과 영혼이 존재 안에서 화해하고 합일하는 걸 느낀다.

나는 걸음에 집중하며 걸었을 뿐인데 세계는 내게 잃어버린 삶의 리듬을 되돌려준다.

 

현자들은 이렇게 말한다.

“말할 때는 오로지 말 속으로 들어가라, 걸을 때는 걷는 그 자체가 되어라, 죽을 때는 죽음이 되어라.”

걸을 때 나는 대체로 뭔가에 대한 깊은 생각에 빠진다. 걷기와 숙고는 잘 어울리는 한 쌍이다.

걷기와 글쓰기는 닮아 있다.

몸을 써서 걷듯이 글쓰기 역시 머리가 아니라 몸의 동물적 감각과 직관을 쓰면 쉬워진다.

 

나탈리 골드버그는 ‘뼛속까지 내려가서 써라’에서

글쓰기를 “매번 지도 없이 떠나는 새로운 여행”이라고 한다.

 

팔다리가 튼튼한 사람이면 누구나 걸을 수 있듯이

몸을 가진 사람이라면 누구나 글을 쓸 수가 있다.

 

“언어가 배꼽에서부터 올라오는 것을 느끼라. 머리를 위 속으로 끌어내리고 소화시키라.

당신 육체가 양분을 빨아들이도록 내버려두라. 인내심을 가지고 한결같은 균형을 유지하라.

생각이라는 단계 밑에 있는 무의식의 세계 속으로 당신의 핏줄 속으로 글쓰기를 삼키라.”

미네소타 주에 있는 한 선원(禪院)에서 약 8년간 선수련을 받은 사람답게

나탈리 골드버그는 글쓰기와 선수련을 연관시킨다.

 

선사는 “우리의 잠재력은 지구 표면 밑에 있는 보이지 않는 지하수면과 같다”고 말한다.

내면의 잠재능력을 품은 무의식은 한 번도 꺼내 쓰지 않은 자원으로 그득 찬 창고다.

글쓰기는 심오하고 신비한 무의식의 잠재력을 믿고 그에 따르면 된다.

무의식이 나를 이끌도록 하라.

처음 떠오른 착상은 “마음에서 제일 먼저 ‘번쩍’하고 빛을 내는 불씨”다.

엄청난 에너지를 갖고 솟아오른 이 불씨의 뿌리는 무의식에 닿아 있다.

집중하고 귀를 기울이면 무의식에서 나오는 목소리를 들을 수 있다.

 

“자신의 목소리를 스스로 믿을 수 있게 되었을 때, 그 목소리가 이끄는 곳으로 곧장 나가라.”

 

그러나 많은 사람은 제 무의식에서 나오는 소리에 귀를 닫고 산다.

그들은 오로지 이성과 지각(知覺)의 소리에만 귀를 기울인다.

그것은 우리를 무지몽매에서 끌어내기도 하지만 그 안에 가두기도 한다.

 

그러므로 이성과 지각을 버릴 줄 알아야 한다.

사람들은 버릴 줄 모르고 그것에 한사코 매달린다.

 

 

 

안회가 공자에게 이렇게 말했다.

 

“저는 나아가고 있습니다.”

“어떤 길로 말이냐?”

“저는 인의를 잊었습니다.”

 

공자가 안회를 칭찬했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고 말한다.

 

다음 날 안회는 예악(禮樂)을 잊었노라고 말한다.

 

셋째날 안회는 “망각 속에 빠져들었다”고 말한다.

 

공자가 그 뜻을 묻자

안회는 “몸뚱어리와 사지를 버렸으며 지각을 내던졌습니다.

육체와 지식에서 자유로워지면서 저는 무한과 하나가 되었습니다.

망각 속에 빠져들었다는 것, 곧 ‘좌망(坐忘)’이란 이를 이르는 말입니다”라고 했다.

공자는 크게 기뻐하며 “자네가 내 앞에 가게 되었네. 나는 그대의 발자국을 따르리라”고 했다.

 

 

좌망은 완전히 잊는다는 뜻이다. 버린다는 것은 잊는다는 것이다.


글쓰기는 자기를 표현하는 일이자 수행이다.

명상 체험을 하며 비움의 가치를 깨닫게 된 나탈리 골드버그는 이렇게 쓴다.

 

“만약 당신 몸이 진정으로 글쓰기에 실려 있다면,

거기에는 글을 쓰는 사람도 없고, 종이도 없고, 펜도 없고, 생각도 없다.

모든 것은 사라지고, 오직 글 쓰는 행위만이 글을 쓰고 있는 것이다.”

 

비움은 좌망에 이르기 위함이고,

진정한 좌망의 상태란 이성과 지각, 더 나아가 제 존재 자체도 완전히 잊는 것이다.

비우지 않는다면 결코 좌망에 이를 수가 없다.

 

“글이 글을 쓰도록 하라. 당신은 사라진다.”

 

좌망에 이를 때 우리는 비로소 무의식의 소리를 밖으로 토해낼 수가 있게 된다.

 

 
글쓰기의 첫 번째 장벽은 망설임과 근거 없는 두려움이다.

 

사람들은 글을 쓰지 못하는 이유로

재능이 없다거나 시간이 없다고 변명하지만 그 본질은 두려움이다.

그 장벽을 넘어서지 못한다면 결코 글을 쓸 수가 없다.

이 두려움은 얕은 앎과 이성에서 나온다.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바쇼는 “나무를 알고 싶으면, 나무한테 가라”고 했다.

 

나탈리 골드버그는 “강에 대해 쓰고 있다면 그 강에 온몸을 적시라”고 했다.

 

망설임과 두려움을 넘어서서 곧 바로 글쓰기의 심장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그게 용기다. 글을 쓰는데 필요한 것은 지식이나 영감이 아니라 용기다.

 

 

글쓰기의 두 번째 장벽은 게으름이다.

 

글을 쓰려면 해야 될 일들이 마구 떠올라 마음을 흐트러뜨린다.

그러나 진실은 내 앞에 널린 일들이란 것이 진짜 해야 될 일들이 아니고,

글쓰기에서 도망가려는 마음이 만든 핑곗거리에 지나지 않는다.

 

나탈리 골드버그는 이렇게 쓴다.

“바보가 되어 시작하라. 고통에 울부짖는 짐승처럼 볼썽사나운 모습으로 시작하라.”

 


글쓰기의 또 다른 장벽은 내면의 검열관이다.

 

이 검열관은 끊임없이 글쓰기에 끼어들며 온갖 잔소리를 하며 간섭을 한다.

이 검열관의 목적은 결국 글쓰기의 의욕을 꺾고 글쓰기를 포기하게 만드는 것이다.

그 장벽을 넘어서는 방법은 내면의 검열관의 눈과 입을 막아버리는 일이다.

이 내면의 검열관이 간섭하게 놔두지 마라. 그를 내면에서 쫓아내버려라.

너무 잘 쓰려고 하지도 마라. 뭔가를 쓰려고 하면 마음에 길이 열린다.

두려움을 버리고 그 길을 걸어가면 된다. 멈추지 말아야 한다.

밥이 다 될 때까지 불을 지펴야 하는 것처럼 다 쓸 때까지 마음의 불을 꺼뜨리지 말아야 한다.

 

나탈리 골드버그는 이렇게 쓴다.

“뼛속까지 내려가 자기 마음의 본질적인 외침을 적어내라!”


- 2007 11/27   뉴스메이커 751호 [독서일기]
- 장석주 시인 · 문학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