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9년, 한 사내가 싸구려 그림엽서 한 장을 산다. 엽서에는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모나리자'(1503~1506)가 인쇄돼 있었다. 레오나르도 사망 400주년을 기념해서, 같은 해에 제작된 엽서였다.
사내는 검정색 연필로 모나리자의 얼굴에 콧수염과 턱수염을 그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엽서 아래쪽에 대문자로 'L. H. O. O. Q.'라고 또박또박 적었다.
일명 '수염 달린 모나리자'가 탄생하는 순간이다.
이 희대의 낙서범이 바로 마르셀 뒤샹(Marcel Duchamp, 1887~1968)이고, 낙서한 그림이 'L. H. O. O. Q.'다.
마치 유명 연예인의 얼굴에 안경이나 흉터를 그리듯이 명화의 주인공에게 낙서를 한 엽기적인 작품이다.
이 패러디 작품은 뒤샹의 의도와 상관없이, '모나리자'의 명성을 껴안으며 또 하나의 명화가 된다.
'모나리자'의 농담 같은 수염
레오나르도의 '모나리자'는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그림이다.
2000년대에는 베스트셀러 소설 '다 빈치 코드'와 동명의 영화로 더욱 유명해진 루브르박물관 최고의 스타이기도 하다.
마력을 지닌 불가사의한 미소, 연결 부위를 부드럽게 처리한 '스푸마토' 기법,
공기 원근법, 해부학, 삼각형 구도 등 르네상스의 조형기술이 총동원된 그림이다.
뒤샹은 이런 '모나리자'에 수염을 그렸다.
'L. H. O. O. Q.'는 단순한 낙서화가 아니다.
그렇다고 레오나르도가 호모였음을 고자질하는 작품도 아니다.
이 작품의 진의와 접속하려면, 우선 그의 작품세계부터 알아야 한다.
뒤샹은 남성용 소변기에 사인을 한 작품 '샘'으로 서양미술사에 굵은 획을 그었다.
1917년 뉴욕의 '독립미술가협회전'에서였다.
레디메이드(Ready made: 기성품)인 소변기를 출품하며,
미술에 대한 정의를 바꿔 놓았다. '샘'이 등장하기 전까지 사람들은
기성품이 작품이 되리라고는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그런데 작가의 선택만으로도 작품이 되는 세상이 열린 것이다.
'수염 달린 모나리자'도 이 같은 맥락에 있다.
이 작품에서 뒤샹이 한 일은 수염 그리기와 제목 붙이기뿐이다.
단순하기 짝이 없는 해괴한 짓거리였다.
그런데도 '모나리자'는 새로운 작품이 되었다.
손가락보다 달을 봐야
먼저 수염의 의미를 생각해보자.
'모나리자'는 피렌체 부유한 상인의 부인이었던
리자 게라르디니 델 조콘다의 초상으로 알려져 있다.
뒤샹은 이런 귀부인의 얼굴에 수염을 그려 넣었다.
그가 훼손한 것은 단순한 귀부인의 이미지였을까?
아니다.
'모나리자'라는 권위 있고 성스러운 그림에 '똥침'을 놓듯이 수염을 그린 것이다.
다음으로 제목이다.
흔히 작가의 생각이 압축된 키워드로 '제목'을 꼽는다.
그렇다면 작품을 감상할 때,
제목의 의미를 알면 작가의 의도가 알 수 있다는 말이 된다.
'L. H. O. O. Q.'를 프랑스식으로 읽으면 '엘(L). 아쉬(H). 오(O). 오(O). 퀴(Q).'다.
그런데 이것을 붙여서 읽으면 '엘라쇼퀼(Elle a chaud au cul)',
즉 "그녀는 뜨거운 엉덩이를 가지고 있다"라는 통속적인 은어가 된다.
모나리자가 뜨거운 엉덩이를 가지고 있다니 무슨 뜻일까?
이 작품은 제목에 사로잡히면 안 된다.
제목과 작품의 연관성을 심각하게 고려할 필요가 없다.
음성과 의미 간의 근친관계를 통해, 작가가 천박한 농담을 던진 것이다.
이처럼 수염과 제목은 '그 자체'로는 별 의미가 없다.
대신 수염을 그려 넣고 제목을 붙이는 행위 자체에 작품의 무게가 실려 있다.
이를테면 손가락(수염과 제목)보다
손가락이 가르치는 달(행위의 의미)에 의미가 있다. 이 점에 주목해야 한다.
이런 행위는 결과적으로, 미술의 정의와 작가의 독창성 같은
기존의 케케묵은 관념을 의문에 붙인 작업이었다.
또 명화의 권위와 천재성 따위에 대한 딴죽걸기이자
하나의 이미지가 문자와 결합하면서
새로운 작품으로 거듭난다는 사실을 보여준 작업이었다.
'L. H. O. O. Q.'는 단지 수염 하나 그렸을 뿐인데,
미술사가 무시할 수 없는 중요한 작품이 되었다.
뒤샹에게 작품은 더 이상 완결된 의미의 덩어리가 아니라
작가의 의도와 개념을 전달하는 수단이었다.
"나는 아이디어에 관심이 있지 가시적인 생산물에는 흥미가 없다."
이런 작업태도는 팝아트에서부터 개념미술에 이르기까지 싱싱한 영감을 제공했다.
몇 년 뒤, 뒤샹은 디시 한번 레오나르도의 작품에 우스꽝스런 농담을 보탠다.
이번에는 'Rasee'라는 제목으로 수염을 제거한 모나리자 작품을 발표한 것이다. 'Rasee'는 '수염을 깎은 여자'라는 뜻. 뒤샹다운 경지다.
- 정민영의 그림 속 작은 탐닉 (주)아트북스 대표
- 2008.09.24 ⓒ 국제신문(www.kookje.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