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도(粧刀) 문화 | ||
| ||
'장도(粧刀)’ 가 ‘패도’와 ‘낭도’의 복합어로서 평소 몸에 치장한다하여 ‘치장(粧) / 칼(刀)’, '장도'라 부른다고 하는데, '장도(粧刀)’ 란 사전에서는 칼집이 있는 작은 칼을 일컬으며, 차는 위치에 따라 각각 명칭이 다르다. 주머니 속에 넣고 다닌다하여 주머니 칼 ‘낭도(囊刀)’ , 때론 허리춤에 차고 옷고름에 찬다하여 ‘ 패도(佩刀)’라 한다.
패도의 크기는 큰 것이 전장 5치(약 15cm), 도신 3치(약 9cm) 정도이고 작은 것은 전장 3치, 도신 1.5치 정도가 보통이며, 낭도는 전장 3치, 도신 1.5치 정도이다.
장도는 노리개 등의 장식을 목적으로 몸에 지니기도 하고, 남을 공격하거나 때로는 자결하기 위해 지니는 칼로써 금, 은, 백동, 옥, 비취 등 여러 가지 재료로 만들어졌다. 그러나 그 다양한 형태와 종류 중에서도 은으로 만들어진 은장도를 제일로 꼽는다. 실용성과 더불어 충절이나 정절의 의미를 지니는 금속공예품으로 생활 속에서 널리 애용되었다. 그 중 은젓가락이 칼과 함께 칼집에 들어가는 '첨자도'의 은젓가락은 혹 음식에 독이 들어있는지 확인하기도 하였다. 은장도는 또한 행복을 기원하는 뜻에서 남녀를 구분하지 않고 패용하였는데, 특히 노리개의 한 부분으로 장신구의 역할도 담당하였다.
우리나라에서 장도를 차는 풍습이 생긴 것은 고려 후기부터이며, 유교를 숭상하는 조선시대에는 널리 보편화되었다. 그리고 칼에 갖가지 장식을 함으로써 실용적인 용도와 함께 점차 장식용으로도 쓰였다.
남성용 장도는 보통 15cm 내외로 문자, 산수, 누각, 운학, 편복 등 선비의 기상과 호운을 나타내는 것이 많고, 여성용은 10cm 내외로 화초, 초엽, 국화, 매화 등 여성취향의 장식적 표현이 두드러진다.
장도의 종류에는 을자모양을 한 을자도, 네모가 진 사모장도, 여덟모가 진 팔모장도, 칼자루와 칼집이 원통형인 맞배기장도 등이 있다.
'금은장 갖은맞배기장도'
장식에 따라 '갖은 장식'과 '맞배기'로 나누는데 갖은 장식은 장식이 복잡하고, 맞배기는 단순하다.
칼을 꾸미는 재료인 금 · 은 · 오동 · 백옥 · 청강석 · 호박 · 대모 · 산호 · 상아 · 쇠뼈 · 후단 · 먹감 등에 따라 그 이름을 머리에 붙여서 부르기도 하여 백옥장도, 대모장도, 먹감장도 등으로 부른다. 뿐만 아니라 장식의 무늬에 따라 안태극장식장도, 오동입사장식장도 등으로도 부른다.
결혼을 축하하거나 성인이 된 것을 기념하여 장도를 주는 풍습이 있었는데 이 풍습에는 본인의 행복을 바라며 온갖 불행에서 보호해주는 뜻이 담겨 있었다. 그러나 장도는 가격이 비싸 부유한 계층에서만 찰 수 있었고, 일반인들은 마음대로 찰 수 없었다.
남자들은 주머니, 담배쌈지와 더불어 허리띠에 찼는데 장도끈은 실용적이면서도 장식용으로 사용되어 허리띠와 같은 끈목으로 하기도 하고 비단으로 접어 만들기도 하였다. 여자는 치마 속 허리띠에 차거나 노리개의 주체로 삼았다. 주로 은으로 만들고 장도집에 칠보나 파란으로 장식을 한다. 부녀자들은 장식용으로서만이 아니라 호신용으로, 정절의 상징으로 중요하게 여겨졌다.
최남선의 《고사통(故事通)》에서 "지금은 구습이 되었거니와 남녀의 옷고름에 차는 그 형체와 패용법은 순전히 몽고풍임이 분명하다.”고 하여 장도의 패용은 고려가 원나라에 복속한 후부터이며 조선시대에 들어와서도 그대로 답습된 것으로 보고 있다. 연산군 4년(1498)에는 서인(庶人)의 은장도 사용을 금하였으나 잘 시행되지 않아 현종 11년(1670)에는 유생 잡직 및 서인남녀 중 은장도를 차는 자를 논죄하라고까지 하였다. 이것은 금과 은의 사용이 봉건사회에서 상하, 존비, 귀천을 가리는 기준이 되었기 때문이며 또한 明나라에 금과 은의 공물을 바치지 않기 위한 조치로 취해진 것이었다. 은장도의 칼집이나 자루의 재료는 은이며 칼은 강철이며 일편단심(一片丹心) 등의 글씨를 문양화하여 새기기도 하였다.
또한 우리 옛 선조들은 신분에 따라 각각 다른 종류의 칼을 몸에 지녀 신분의 등위를 가리는 목적으로 이용되었으며 이러한 칼의 형태는 외형 장식 재료에 따라 구분되고 그 재료들은 귀금속에 주안점을 두었다. 이렇듯 ‘장도’는 실용성, 장신구, 예물용, 호신용 등 용도별로 크게 나눌 수 있다. |
광양 장도박물관
刀(도)는 베기에 편리한 날이 한쪽에 있는 무기로써 이용되어 왔고, 劍(검)은 찌르기에 편리한 쌍날의 무기인데, 처음에는 돌로 만들었으며 금속이 발달하면서 청동의 쌍날이 있는 단검(短劍)이 만들어 졌다. 이때의 刀(도)는 대부분 소도(小刀)이며, 그 후 단검(短劍)이 장검(長劍)으로 변화되었고, 철기시대에 접어들어서 劍(검)은 刀(도)로 통용화되었다.
삼국시대 이후로 刀(도)와 劍(검)은 수많은 명칭으로 불리어지고 있으며, 그 대표적 명칭은 佩刀(패도), 刀子(도자), 小子(소자), 劍(검), 粧刀(장도), 長刀(장도), 裝刀(장도), 環刀(환도), 匕首(비수), 刀筆(도필), 大刀(대도), 太刀(태도), 短刀(단도) 등이 있다.
장도(粧刀)의 명칭 사용은 조선시대 초기에 처음 나타나게 되는데 그 전 시대는 비수(匕首), 도자(刀子), 소도(小刀), 패도(佩刀) 등의 명칭이 보이며 장도(長刀)의 경우 대도(大刀), 검(劍), 패도(佩刀) 등으로 쓰여 왔다.
예로 성종 16년 간행된 경국대전에서는 공장(工匠)에 도자장(刀子匠)과 환도장(환도장)을 제시하고 있는데, 이때의 도자장(刀子匠)은 장도(粧刀) 즉 손칼을 만드는 사람이며, 환도장(環刀匠)은 군도(軍刀)를 만드는 사람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사전에 의하면 칼집이 있는 작은 칼이 장도(粧刀)라 하였으며, 장도는 주머니 속에 넣고 다닌다하여 줌치칼 내지는 주머니(낭, 囊) 칼(도, 刀) = 낭도라 하며, 때론 허리춤에 차고 옷고름에 찬다하여 찰(패, 佩) 칼(도, 刀) = 패도라 하는데, 이 패도는 구전에 의하면 때끼칼이라고도 한다.
장도란 패도 낭도의 복합어로서 박용기 선생에 의하면 평소 몸에 치장한다하여 치장(장, 粧) 칼(도, 刀) = 장도라 부른다고 한다.
장도의 칼자루와 칼집은 신분에 따라 금, 은, 주석, 대모, 호박, 밀화, 산호, 수정, 금강석 및 여러 종류의 뿔과 뼈로 장식하고 만들었다.
장도의 칼날은 강철을 쓰며 장도의 모양새는 원통형, 팔각형, 네모형, 을자형 등으로 갖추고 있으며 명칭은 재료와 생김새 기법 등을 따져서 불리어진다.
刀(도)라 하면, 칼의 뜻으로 물건을 베고 썰고 깎는 연장으로 날카로운 날에 자루가 붙어 있는 것을 뜻하는 것으로 장도는 그 일반적인 구실을 모두 갖추고 있으며, 특히 장도는 일반 칼과는 달리 자기 몸을 보호하기 위한 호신용, 여인들의 노리개와 더불어 쓰여진 장식용, 그리고 실생활에 널리 이용되는 문방구와 예물용 등의 구실을 해왔다. 한편 칼의 주 목적인 사용보다는 권위자의 권위와 상징, 의식용 등으로 이용하기 위해 제작된 칼이 있는데 이러한 칼은 대부분 장도보다 전장길이가 길며, 칼의 겉치레 및 꾸밈새가 상당히 조형적이고 호화스럽게 장식되어 장도(裝刀)라 부른다. |
장도의 종류 및 용도 | |||||||||
|
'나아가는(문화)' 카테고리의 다른 글
한창기의 '뿌리깊은나무의 생각' '샘이깊은물의 생각' '배움나무의 생각' (0) | 2008.01.02 |
---|---|
차마고도 (0) | 2008.01.02 |
대항해시대 탐험 (0) | 2008.01.01 |
위령제 - 광화문 복원용 소나무 벌채 (0) | 2007.12.06 |
생태계의 보고, 비무장지대(DMZ) (0) | 2007.11.3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