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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도(粧刀)

Gijuzzang Dream 2008. 1. 1. 15:23
 

 장도(粧刀) 문화

 

 

'장도(粧刀)’ 가 ‘패도’와 ‘낭도’의 복합어로서

평소 몸에 치장한다하여 ‘치장(粧) / 칼(刀)’,  '장도'라 부른다고 하는데,

'장도(粧刀)’ 란 사전에서는 칼집이 있는 작은 칼을 일컬으며,

차는 위치에 따라 각각 명칭이 다르다.

주머니 속에 넣고 다닌다하여 주머니 칼 ‘낭도(刀)’ ,

때론 허리춤에 차고 옷고름에 찬다하여 ‘ 패도(刀)’라 한다.

 

패도의 크기는 큰 것이 전장 5치(약 15cm), 도신 3치(약 9cm) 정도이고

작은 것은 전장 3치, 도신 1.5치 정도가 보통이며,

낭도는 전장 3치, 도신 1.5치 정도이다.

 

 

 

 

 

 

 

 

 

 

 

 

 

 

상세설명

 

장도(粧刀)

 

 몸에 지니는 자그마한 칼로 일상생활에 쓰기도 하고

 호신 및 장식의 역할도 한다.

 장도 중 차게 되어 있는 것은 패도(佩刀)라 하고,

 주머니 속에 넣는 것은 낭도(囊刀)라 한다.

 

 고구려에서는 남자들이 이 작은칼과 숫돌을 차고 다녔는데

 왼쪽에는 숫돌을 차고 오른쪽에는 오자도를 찼다.

 작은칼은 당시 호신용으로 쓰이면서

 고기나 과일 같은 것을 먹을 때뿐만 아니라

 생활의 여러 측면에서 이용되었다.

 그리고 칼에 갖가지 장식을 함으로써

 실용적인 용도와 함께 장식용으로도 쓰였다. 

 

 장식에 따라 갖은 장식과 맞배기로 나누는데

 갖은 장식은 장식이 복잡하고, 맞배기는 단순한 편이다.

 

 칼을 꾸미는 재료에 따라

 금 · 은 · 오동 · 백옥 · 청강석 · 호박 · 대모 · 산호 · 상아 · 쇠뼈 · 후단 ·

 먹감 등의 이름을 머리에 붙여서 부르기도 하여

 백옥장도 대모장도 먹감장도 등으로 부른다.

 뿐만 아니라 장식의 무늬에 따라

 안태극장식장도 또는 오동입사장식장도 등으로도 부른다. 

 

 칼날의 한 면에는

 남녀간의 사랑과 의의를 표시하여 '일편단심'이라는 글자를 새긴 것,

 칼자루와 칼집에 십장생무늬와 길상문을 새긴 것도 있었다.

 

 결혼을 축하하거나 성인이 된 것을 기념하여 장도를 주는 풍습이 있었는데

 이 풍습에는 본인의 행복을 바라며

 온갖 불행에서 보호해주는 뜻이 담겨 있었다.

 그러나 장도는 가격이 비싸 부유한 계층에서만 찰 수 있었고,

 일반인들은 마음대로 찰 수 없었다. 

 

 남자의 경우 저고리 고름이나 허리띠에 명주실로 짜서 만든 끈목을

 고리를 꿰어서 차고,

 여자의 경우에는 치마 속 허리띠에 차거나

 노리개의 주체로 삼아 삼작노리개 중 하나로 차기도 하지만

 따로 단작으로 꾸며 겉에 보이지 않게 차기도 했다.

 난리 때 정절을 지키기 위해

 자신이 차고 있던 장도로 자결한 이야기도 있다.

 

 - 국립민속박물관 "장도" 유물에 대한 설명 中

 

 

 

장도는 노리개 등의 장식을 목적으로 몸에 지니기도 하고,

남을 공격하거나 때로는 자결하기 위해 지니는 칼로써

금, 은, 백동, 옥, 비취 등 여러 가지 재료로 만들어졌다.

그러나 그 다양한 형태와 종류 중에서도 은으로 만들어진 은장도를 제일로 꼽는다.
은장도의 재료는 은이며 도신은 강철인데,

실용성과 더불어 충절이나 정절의 의미를 지니는 금속공예품으로 생활 속에서 널리 애용되었다.

그 중 은젓가락이 칼과 함께 칼집에 들어가는

'첨자도'의 은젓가락은 혹 음식에 독이 들어있는지 확인하기도 하였다.

은장도는 또한 행복을 기원하는 뜻에서 남녀를 구분하지 않고 패용하였는데,

특히 노리개의 한 부분으로 장신구의 역할도 담당하였다.

 

우리나라에서 장도를 차는 풍습이 생긴 것은 고려 후기부터이며,

유교를 숭상하는 조선시대에는 널리 보편화되었다.

그리고 칼에 갖가지 장식을 함으로써 실용적인 용도와 함께 점차 장식용으로도 쓰였다.

 


장도는 형태에 따라 적절한 장식과 무늬가 곁들여졌는데

남성용 장도는 보통 15cm 내외로

문자, 산수, 누각, 운학, 편복 등 선비의 기상과 호운을 나타내는 것이 많고,

여성용은 10cm 내외로 화초, 초엽, 국화, 매화 등 여성취향의 장식적 표현이 두드러진다.

 

장도의 종류에는 을자모양을 한 을자도, 네모가 진 사모장도, 여덟모가 진 팔모장도,

칼자루와 칼집이 원통형인 맞배기장도 등이 있다. 

 

 '금은장 갖은맞배기장도' 

 

장식에 따라 '갖은 장식'과 '맞배기'로 나누는데

갖은 장식은 장식이 복잡하고, 맞배기는 단순하다.

 

칼을 꾸미는 재료인

금 · 은 · 오동 · 백옥 · 청강석 · 호박 · 대모 · 산호 · 상아 · 쇠뼈 · 후단 · 먹감 등에 따라

그 이름을 머리에 붙여서 부르기도 하여 백옥장도, 대모장도, 먹감장도 등으로 부른다.

뿐만 아니라 장식의 무늬에 따라 안태극장식장도, 오동입사장식장도 등으로도 부른다.

 

결혼을 축하하거나 성인이 된 것을 기념하여 장도를 주는 풍습이 있었는데

이 풍습에는 본인의 행복을 바라며 온갖 불행에서 보호해주는 뜻이 담겨 있었다.

그러나 장도는 가격이 비싸 부유한 계층에서만 찰 수 있었고, 일반인들은 마음대로 찰 수 없었다.

 

남자들은 주머니, 담배쌈지와 더불어 허리띠에 찼는데

장도끈은 실용적이면서도 장식용으로 사용되어

허리띠와 같은 끈목으로 하기도 하고 비단으로 접어 만들기도 하였다.

여자는 치마 속 허리띠에 차거나 노리개의 주체로 삼았다.

주로 은으로 만들고 장도집에 칠보나 파란으로 장식을 한다.

부녀자들은 장식용으로서만이 아니라 호신용으로, 정절의 상징으로 중요하게 여겨졌다.

 

 

최남선의 《고사통(故事通)》에서

"지금은 구습이 되었거니와 남녀의 옷고름에 차는 그 형체와 패용법은

순전히 몽고풍임이 분명하다.”고 하여 장도의 패용은 고려가 원나라에 복속한 후부터이며

조선시대에 들어와서도 그대로 답습된 것으로 보고 있다.

 

연산군 4년(1498)에는 서인(庶人)의 은장도 사용을 금하였으나 잘 시행되지 않아

현종 11년(1670)에는 유생 잡직 및 서인남녀 중 은장도를 차는 자를 논죄하라고까지 하였다.

이것은 금과 은의 사용이 봉건사회에서 상하, 존비, 귀천을 가리는 기준이 되었기 때문이며

또한 明나라에 금과 은의 공물을 바치지 않기 위한 조치로 취해진 것이었다.

은장도의 칼집이나 자루의 재료는 은이며 칼은 강철이며

일편단심(一片丹心) 등의 글씨를 문양화하여 새기기도 하였다.

 

 

또한 우리 옛 선조들은 신분에 따라

각각 다른 종류의 칼을 몸에 지녀 신분의 등위를 가리는 목적으로 이용되었으며

이러한 칼의 형태는 외형 장식 재료에 따라 구분되고

그 재료들은 귀금속에 주안점을 두었다.

이렇듯 ‘장도’는 실용성, 장신구, 예물용, 호신용 등 용도별로 크게 나눌 수 있다. 

 

 

 

 

                           광양 장도박물관

  

 

 

 

刀(도)는 베기에 편리한 날이 한쪽에 있는 무기로써 이용되어 왔고,

劍(검)은 찌르기에 편리한 쌍날의 무기인데,

처음에는 돌로 만들었으며 금속이 발달하면서 청동의 쌍날이 있는 단검(短劍)이 만들어 졌다.

이때의 刀(도)는 대부분 소도(小刀)이며,

그 후 단검(短劍)이 장검(長劍)으로 변화되었고,

철기시대에 접어들어서 劍(검)은 刀(도)로 통용화되었다.

 

삼국시대 이후로 刀(도)와 劍(검)은 수많은 명칭으로 불리어지고 있으며,

그 대표적 명칭은 佩刀(패도), 刀子(도자), 小子(소자), 劍(검), 粧刀(장도), 長刀(장도), 裝刀(장도),

環刀(환도), 匕首(비수), 刀筆(도필), 大刀(대도), 太刀(태도), 短刀(단도) 등이 있다.

 

 

장도(粧刀)의 명칭 사용은 조선시대 초기에 처음 나타나게 되는데

그 전 시대는 비수(匕首), 도자(刀子), 소도(小刀), 패도(佩刀) 등의 명칭이 보이며

장도(長刀)의 경우 대도(大刀), 검(劍), 패도(佩刀) 등으로 쓰여 왔다.

 

예로 성종 16년 간행된 경국대전에서는

공장(工匠)에 도자장(刀子匠)과 환도장(환도장)을 제시하고 있는데,

이때의 도자장(刀子匠)은 장도(粧刀) 즉 손칼을 만드는 사람이며,

환도장(環刀匠)은 군도(軍刀)를 만드는 사람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사전에 의하면 칼집이 있는 작은 칼이 장도(粧刀)라 하였으며,

장도는 주머니 속에 넣고 다닌다하여 줌치칼 내지는 주머니(낭, 囊) 칼(도, 刀) = 낭도라 하며,

때론 허리춤에 차고 옷고름에 찬다하여 찰(패, 佩) 칼(도, 刀) = 패도라 하는데,

이 패도는 구전에 의하면 때끼칼이라고도 한다.

 

장도란 패도 낭도의 복합어로서

박용기 선생에 의하면 평소 몸에 치장한다하여 치장(장, 粧) 칼(도, 刀) = 장도라 부른다고 한다.

 

 

장도의 칼자루와 칼집은

신분에 따라

금, 은, 주석, 대모, 호박, 밀화, 산호, 수정, 금강석 및 여러 종류의 뿔과 뼈로 장식하고 만들었다.

 

장도의 칼날은 강철을 쓰며

장도의 모양새는 원통형, 팔각형, 네모형, 을자형 등으로 갖추고 있으며

명칭은 재료와 생김새 기법 등을 따져서 불리어진다.

 

刀(도)라 하면, 칼의 뜻으로 물건을 베고 썰고 깎는 연장으로

날카로운 날에 자루가 붙어 있는 것을 뜻하는 것으로

장도는 그 일반적인 구실을 모두 갖추고 있으며,

특히 장도는 일반 칼과는 달리 자기 몸을 보호하기 위한 호신용,

여인들의 노리개와 더불어 쓰여진 장식용,

그리고 실생활에 널리 이용되는 문방구와 예물용 등의 구실을 해왔다.

한편 칼의 주 목적인 사용보다는

권위자의 권위와 상징, 의식용 등으로 이용하기 위해 제작된 칼이 있는데

이러한 칼은 대부분 장도보다 전장길이가 길며,

칼의 겉치레 및 꾸밈새가 상당히 조형적이고 호화스럽게 장식되어 장도(裝刀)라 부른다.

 

 

장도의 종류 및 용도

 

장도는 크게 일곱 가지로 나눈다.

첫째, 도심(刀心)이 붙은 칼자루가 칼집에서 쉽게 빠지지 않도록 하고 실생활에 쓰일 수 있는

젓가락, 귀이개, 과일꽂이 등을 꽂아서 쓰는 첨자도(添子刀).
둘째, 나무로 된 칼자루와 칼집 끝을 버선 코 모양으로 만든 몽개칼 즉 을자도(乙字刀).
셋째, 칼자루와 칼집의 끝머리 코 에다 흰색을 덮어씌우는 까치장도.
넷째, 칼집과 칼자루를 순 은으로 한 은장도.
다섯, 칼집과 칼자루를 화려하게 장식하고 귀한 재료를 쓴 갖은장도.
여섯, 구하기 힘든 흑시 대신 보통 감나무를 태워서 칼집과 칼자루를 만들고 간단하게 장식한

맞배기장도.

 


우리의 선조들은 오래전부터 신분에 따라 각각 다른 종류의 칼을 몸에 지니게 되는데

그것은 분수와 예의를 갖추고 사치를 금하는 한편 신분을 가리는 목적으로 이용되었다.

이러한 칼의 형태는 물론 이거니와 외형 장식 재료에 따라 구분되며

그 재료들은 귀금속에 주안점을 두었다.

 


粧刀(장도)는 특히 조선시대 많이 애용되어왔다.

장도)는 용도별로 크게 나누어 실용성, 장신구, 예물용, 호신용으로 나눌 수 있다.

粧刀(장도)의 크기가 정해진 것은 아니지만

사용 씀씀이에 따라 대개 큰 것은 전장 5치에 長身(장신)이 3치,

작은 것은 전장 3치에 刀身(도신) 1치 5푼의 치수였으며,

 

때에 따라 실제 사용과 거리가 먼, 치레의 구실만을 하는

칼몸(刀身)이 박혀있지 않는 벙어리장도도 있다.

 

장도출현 및 발달과정

일반적으로 고려의 미술은

전기가 후기에 비해 매우 활발한 것으로 그 시대 유물을 통해 보면 쉽게 느낄 수 있다.

 

금속공예에 있어서도 불교를 받침으로 눈부신 발전을 보여 왔으며

특히 장도는 고려초부터 중국와의 교류에 있어서 필수적 요소로 갖추고 있었다.

 

반면 중국은

고려와의 궁중 및 민간교류에 있어서 단 한건의 도검을 보내온 사실이 없음을 확인하게 되었다. 이러한 사실을 입각하여 생각해 보면 고려의 도검술은

그 시대 중국의 그것보다 우수했을 거라고 추정케된다.

또 이러한 사실들을 문헌에 입각하여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고려 923년 후당으로 간 장분 등 53인의 사행은 인삼, 향로, 도검 등 광범위한 물자를 가져가고

반면 후당으로부터 은기, 비단 등을 가져왔으며,

때로는 중국의 청루에서 시장을 행한 일도 있다.”

이 때의 물품교환은 조공사역의 형식을 벗어나 일반적인 교역이라고 하겠다.

이러한 사실들은 1031년, 1071년, 1078년에도 중국으로 보내는 물품의 품목 속에

장도, 은장장도, 도검 등이 들어 있으며 중국에서는 각종 서적과 비단 등이 들어온다.

반면 고려사 색인에 산견 되어지는 도자에 관한 기록을 살펴 볼 수 있는데,

이는 중국으로 보내는 물품으로 추정되며 그 종류는 다음과 같다.

 

“장도, 검, 장검, 금은중구중양도자(金銀重口中樣刀子), 금은중구대양도자(金銀重口大樣刀子),

금은중구소양도자(金銀重口小樣刀子), 금은장계금초세루운천장도, 금은장초세루운천옥검(金銀裝梢細縷雲天玉劍), 금은장계금초비수(金銀裝계錦梢匕首), 금은장초비수(金銀裝梢匕首)”
등의 기록이 보이며

 

이 장도들은 귀한 금은으로 장식하고 그것도 부족하여 칼자루와 칼집을 옥으로 꾸미고

정교한 누금(樓金)기법과 더불어 계금, 즉 푹신하고 질긴 고급스런 천으로

화려하게 겉치레를 한 것은 고려시대 장도의 우수성을 입증하는 예라 하겠다.

반면 고려사 삭인에 표출된

금은세루전도(金銀細縷剪刀), 금은지철문전도(金銀地鐵文剪刀), 금은세루전자전도는

장도가 아닌 현재의 “가위”임을 밝혀둔다.

 

宋 元嘉(원가) 3년 “원나라의 사신 원신 등이 고려에 왔을 때 접견하여

옻으로 칠한 상자를 선사 하였는데 그 속에서 금식장도 및 비수등이 들어있다.”

여기에서 말하는 금식장도는 금으로 꾸민 장도를 뜻하고 비수는 현재의 장도를 말한다.

우리의 선인들은 고려시대에 접어 들어서도 평소 장도를 몸에 지니고 다녔다는 것을

확인하게 된다.

고려 8대 현종 5년 4월 “여름 4월에 백성들에게 비수 차는 것을 금 하였다.”

고려 10대 정종 11년 10월 “겨울 10월에 다시 백성들에게 비수 차는 것을 금 하였다.”
이때 패비수금지령을 두 차례에 걸쳐 내렸는데

그 당시 사회가 상당히 문란하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또한 고려도경에서도 고려인들이 칼을 차는 풍습이 있었음을 다음과 같이 논하고 있다.
“고려인들은 오랜 풍습속에서 칼과 붓이 함께 달린 칼을 차고 다니는데

칼과 붓의 집은 나무로 깎아서 만든다.

그 만듬새는 세칸인데 그 중 하나는 붓을 꼽고 그 중의 둘은 칼을 꼽는다.

칼은 튼튼하고 잘 들게 생겼는데 칼 하나는 약간 짧다.

산원(散員)이하의 관리와 지응(祗應), 방자(房子), 친시(親侍)가 다 그것을 찼다.”

 

이렇듯 우리의 선인들이 장도를 평소에 몸에 패용하였지만

이 장도의 제도가 몽고의 풍습이라는 설이 있다.

최남선의 「故事痛(고사통)」에 의하면

“시방은 구풍이 되얏거니와 남여의 옷구름에 파는 장도는

그 형제(型制)와 패용법이 순전히 몽고풍 일시 분명 한 것이다."


최남선은 장도의 제도가 몽고의 풍이라고 확신하고 있는데 그 이유를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충렬왕이 원의 제국대장공주와 장가든 이래로

고려의 왕은 요졸한 이를 빼고는 다 원의 황실로써 배우를 엇고,

그중에는 일인으로서 삼녀를 속취한 이도 있어서

전후 1세기쯤 사이에 몽고 귀녀 7인이 고려의 궁중으로 들어오고

이네들은 「겁련구」라 하야 사용인을 만히 더리고 왔다.

이리하는 동안에 몽고의 언어 풍속이 따라 드러와서

궁중 및 상류사회에 적지 아니한 영향은 귀족층에 까지 미치었다."


이러한 최남선의「故事痛(고사통)」은

려시대를 살펴 보았듯이 그의 견해는 시대적 착오에 의한 발상이라고 생각된다.

반면 고려시대 장도의 형태 유물에 의해 살펴보면

대체로 그 전장길이가 조선시대 장도에 비해 길며

배가 약간 부른 원통형으로 칼자루가 극히 짧아 사용이 어렵다.

또한 겉치레는 장식이 없는 한편 칼자루와 칼집의 금속을 두껍게 이용하여

전면에 龍(용), 花(화), 連珠紋(연주문), 線紋(선문) 등을 정교하게 양각하였다.

이 원통형의 장도는 사실상 실용에 목적을 둔 것 보다는 장신구에 치중을 둔 것으로 이해되며,

이 원통형은 삼국시대 요패와 조선 세종실록 오례의에서와 같이

궁중에서 형성된 유물로 추정된다.

 
장도는 조선시대 접어 들어서

그 종류와 씀씀이가 광범위하며 차츰 그 전장 길이도 눈에 띄게 축소된다.


이 시대 관청에서 관할하는 공장을 경국대전에 의해 살펴보면,

도자장과 환도장을 두고 있는데 그 공장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서술하고 있다.

 

“공장이란 물건을 만드는 것을 업으로 하는 사람을 말한다.

공장을 말하고 외공장은 지방 관하에 소속된 공장을 말한다.

공장은 명부를 작성하여 공조와 소속조와 당해관사와 그 도, 그 고을에 배치하며

모두 양민과 간혹 공천으로 충당하고 사천은 뽑지 않으며

나이가 60세가 되면 공장의 역을 면제한다. 중외의 공장은 백여종이 지정되고 있다.”

 

한편 “이 시대의 장인이라 함은 그 신분이 사회적으로 천대받는 상황에서

장인을 물론이거니와 그 가족, 친척까지도 장인의 신분을 밝히기를 꺼려 했다.” 하는데

이러한 사실을 문헌에 의해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세종 16년 6월 11일

병조와 군기감제조가 공장들을 격려하고 인수를 증가할 조건을 의논하여 아뢰기를
“이 앞 본감의 장인이 7~8백여명이었는데 이제는 3백여명에 불과하옵니다.

그 거관한자는 사람을 천거하여 자기 대신으로 집어 놓고는 도망 갔으므로

그 빈 자리에는 본번의 거인으로 그 결원을 보충 하소서.”

 

다시 그 주에는 30여종의 인원이 부족한 공장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금장은 27명이니 13명을 더하고, 조각장은 9명이니 1명을 더하고,

환도장은 2명이니 4명을 더하고, 소복장은 9명이니 11명을 더하고,

첨장은 7명이니 2명을 더하고, ......”


이러한 사실들은 군기감의 종전 인원의 반 이상의 장인이 도망을 했다 하는데

이는 오랜 노역에 힘이들고 고통스러운 나머지 다른 사람을 천거 해가며 도망한 것으로 추정된다.


또 다른 예를 살펴보면

연산군일기 12년 5월 “시인을 미리 가두고 사인검 제작에 필요한 내물을 바치도록 하라.”

풀이하면 四柱(사주)에 맞추어 칼을 제작하는 만큼

공은 물론이거니와 칼에 부정타는 것을 미리 막기 위한 것으로 해석되며

더 나아가 장인을 천하게 여기는 까닭으로써 고려시대의 영향이 이 시대까지 미치었다.


한편 도자전에 관한 기록으로는

순조 9년에 편찬된 만천요람의 재용편 무분각전에서 살펴보면

이 廛案(전안)에는 도자전, 족두리전, 망건전 등 40여종의 가게를 나열하고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이 밖에 소소한 각전의 명색이 심히 번다하나 다 기록하지 못하고

전안에 없는 드물게 사용하는 물품은 평시서로부터 육주비전에 나누어 정하여 사들이고

가본에 낙본된 것은 무분각전에 분배하여 첨가한다.”


위 사항을 풀이해 보면

물건값의 낮음을 검사하는 평시서에서는 가격의 인하로 손해를 보게되어

부득이 나라의 일을 맡아볼 수 없는 가게를 선별하여 가격을 인상시켜주고

또한 시장에서 취급하는 품목을 등록한 명부에 빠졌으나

드물게 사용하는 물품들은 자면전 중 으뜸인 6개의 전 즉 육주비전에서 사들여 보충함으로써

나라의 정사를 원활하게 한 것으로 보여진다.

 

또 여기에서 나타난 도자전의 출현은

이미 이 시대에 장도를 전문적으로 판매하는 가게가 성행 하였음을 보여주는 좋은 예이기도 하다.

 

조선시대의 장도는 오랜 역사속에서 형성되어온 시기여서 여러모로 발전을 보여왔다.

예를들면 장도의 어의가 정착 되었으며

여인들에게는 삼대 소지품의 하나로까지 대두되어 가장 아낌받는 장신구가 되었다.

장도 외형에 있어서도 여러 종류의 재료와 기법, 형태 등에 이르기까지 다양하게 제작되었는데

이러한 사실들은 현존하는 조선시대 유물에서 충분히 찾아 볼 수 있다.

 

반면 그 형태와 기법들을 기술상으로 자세히 살펴보면

이 시대 장도 장인들의 높은 예능수준을 단번에 느낄 수 있으며

더 나아가 각기 다른 손재주 속에서 제작되어진 것으로 확인된 장도들은

이 시대 많은 장도장이 활동 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는 좋은 예라 하겠다.

 

궁중에서도 의식용의 금장도와 은장도를 제작하고 사용하였다.

문종 원년 8월 10일 의정부에서 예조의 정문에 의하여 아뢰기를

“중국의 천추절과 성절에 축하사절을 보내는데 필요한 금장도와 은장도 등

여러 종류의 의식용을 위의색(威儀色)으로 하여금 제조하게 하였다.”

- 광양장도박물관 홈페이지  www.jangdo.or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