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 성산성 (上) | ||
- 지뢰밭 넘자 숨어있던 성벽 ‘우뚝’ - ‘어!’
비무장지대 일원 조사에 잔뼈가 굵은 이우형씨(현강문화연구소장)가 성큼성큼 내딛는다. 이번에는 정말이다. 내색은 정말 하기 싫지만 이번만큼은 그를 따라가는 게 내키지 않는다. 녹슨 철책에 걸린 ‘지뢰’라는 빨간색 삼각표지판을 휙 걷어내고 들어가는 것이니…. 사진기자를 쳐다보니 그 역시 뜨악한 표정이다.
취재단 일행을 안내한 ○○사단 정훈장교도 한몫 거든다. 모골이 송연해 질 수밖에. 그러나 벌써 저만치 걸음을 내딛은 이우형씨가 “괜찮다”며 “내 뒤만 따라오라”고 한다.
이곳은 철원군 김화읍 읍내리 성재산(해발 471m). 이곳에 방치된 채 숨어 있는 성산성을 찾는 길이다. 철의 삼각지대(철원~김화~평강) 가운데 김화 쪽 꼭짓점. 격전지였던 탓에 지뢰와 불발탄이 묻혀있는 이곳은 비무장지대 안에 있었다. 그러나 1970년대 중반 이후 남방한계선이 북쪽으로 조정되면서 조사할 수 있는 곳으로 거듭났다. 조유전 당시 국립문화재연구소장(현 토지박물관장)은 생각하기도 싫다는 표정을 짓는다. 조사단이나 군장병들이나 죽을 노릇이었을 거예요.” 성실하게 임무를 수행했으며, 이우형 조사원이 솔선수범했다.” 모두 부들부들 떠는 상황에서 이씨는 미친 듯 수풀을 헤치고 다닌 것이다. 그랬던 이씨가 2007년 초여름 부들부들 떠는 기자 일행을 그림자에 두고 휙휙 발길을 재촉하는 것이다.
성벽 위를 따라 불안한 발걸음을 옮기는데…. 앞선 이씨가 걸음을 멈춘다. 그랬다. 저편에 새끼 멧돼지가 보이는 것이었다. 최전방 지뢰지대에 들어가 보는 것만 해도 ‘행운이라면 행운인데’ 들어가자마자 말로만 듣던 멧돼지와 조우하다니…. 안내 장교도 “나도 처음 보는 장면”이라고 신기해 한다. 새끼 멧돼지였으므로 그다지 위협적인 모습은 아니었다. 불안에 떨면서도 제법 널려있는 삼국·통일신라시대 기와편을 여러점 수습했다. 이것도 직업 의식인가. 순간 그런 생각도 들었다. 성벽 위와 비탈길을 따라 200m 정도 내려갔을까. 이씨가 덤불을 젖힌다. 그랬다. 성벽은 하얀 속살을 드러냈다. 때마침 내리쬐는 햇볕에 우윳빛 색깔을 발했다. 켜켜이 쌓은 높이 5.2m가량의 성벽은 65m 정도 완벽한 상태로 남아 있었다. 얼핏 봐도 우뚝 선 장승처럼 견고한 모습이다.
2000년 조사결과 성산성의 총길이는 982m였으며, 높이는 7m가량이었다. 성내에서 성황당지와 우물지가 확인됐다. 또 5곳의 건물지 또는 추정건물지가 확인됐고, 현문(懸門)식으로 된 서남문지를 포함해서 두 곳의 문지가 보였다. 전문가들은 이 성을 처음 쌓은 것은 최소한 통일신라 때였으며 고려, 조선대에 이르러 증·개축을 했으리라 여긴다. 특히 이 산성은 ‘가등(加藤)산성’으로 전해져 내려오기도 하는데 그 악명높은 가토 기요마사가 이끄는 왜군의 주둔지였을 가능성도 있다. 그런데 이 성산성을 둘러싼 김화 일대는 병자호란 때 2대 승첩인 이른바 김화지구전투가 벌어진 유서깊은 곳이다. 이 김화대첩과 함께 전라 병사 김준룡이 지휘한 용인 광교산 대첩을 말한다. 하지만 조선은 병자호란이 발발한 지 두 달도 되지 않아 그토록 멸시했던 ‘만주족 추장’에게 삼배구고두(三拜九叩頭)의 치욕을 당했다. 그런 참담한 패배 와중에서 승첩이 각광받을 리 만무했다.
북쪽으로는 이른바 철의 삼각지대가 훤히 펼쳐졌다. 저 멀리 북한 땅에 오성산(1062m)이 보였다. 한국전쟁 때 김일성이 “육사 군번 세 도라꾸(트럭) 하고도 안 바꾼다”고 했을 정도로 중요한 산이다.
동쪽으로는 계웅산(604m)이 보이고 그 가운데 저격능선이 손에 잡힐 듯하다. 능선을 따라가면 저격 받기에 딱 알맞다고 해서 저격능선이라 했단다. 금단의 비무장지대만 아니었던들 오성산 아래 형성된 드넓은 평지 사이로 가는 평강행 도로를 타고 여행을 떠날 수 있을 것이다. 남대천변의 넓은 대지가 눈앞에 펼쳐진다. 성산성과 김화는 서울, 철원, 평강, 화천, 회양, 안변, 개성 등으로 갈 수 있는 사통발달의 요지이며 요충지였다. 바로 그곳 즉 성산성의 남쪽 남대천 변 평지가 병자호란 2대 승첩의 개가를 올린 전투가 벌어진 곳이다. 청나라 태종이 직접 12만8000명의 대군을 이끌고 압록강을 도하한다. 병자호란의 발발이었다. 청태종은 영악한 인물이었다. 조선의 산성방어전술을 단숨에 깬 것이다. 이미 9년 전 정묘호란 때 후금(청의 전신)의 침략을 받았던 조선은 나름대로 산성을 수축하고 정예병을 평안도에 배치하는 등 산성방어전술을 썼다. 고구려 때부터 수·당을 괴롭혔던 바로 그 작전. 하지만 기병으로 구성된 청나라군은 조선이 쌓은 산성을 거들떠 보지도 않고 한양으로 직행했다. 그야말로 파죽지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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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눈물의 땅 ‘김화’ 어찌 보듬어야 할지
김화처럼 팔자 센 곳도 없을 것이다.
이리 터지고 저리 터져서 지금은 역사 속에만 남아 있는 텅 빈 고을이 되었다.
이 모든 것이 한국전쟁과 분단 때문이다.
군청을 중심으로 금강산선 김화역을 중심으로 펼쳐졌던 읍내리의 융성했던 시가지였던 곳인데….
숱한 사연을 담고 있는 김화 오성산, 그리고 꽃을 피운 ‘붉은 병꽃나무’ (조선금대화). 김화/이상훈기자 |
지금은 부서진 건물 잔해의 단서조차 남아 있지 않다.
그저 휑한 농경지로 변해버렸다.
한국전쟁으로 함께 사라져 버린 경기도의 장단읍내보다 더 상처가 크다.
역사를 회고해보니 김화의 번복되는 시련이 왜 이리도 저리고 깊은가?
그리고 그 굵직한 전투들이 꼭 이곳을 거쳐가야 했는가.
그 시련의 역사를 열거해 보아도 김화는 참 알 수 없는 공간이다.
고려 공민왕 10년(1361) 20만의 병력으로 고려를 침입한 홍건적은 원주의 영원산성에서 1차 패전한다. 그 뒤 북쪽으로 후퇴하던 대부대는 김화의 근남면 마현리 일대에서 고려군의 포위작전에 대패한다.
이어 고려 우왕 9년(1383) 왜구의 대부대가 강원도 내륙의 깊숙한 곳인 회양과 평강까지 진출한다. 하지만 남시좌(南時佐) 등이 이끄는 고려 관군에 의해 역시 김화에서 대패한다.
그리고 임진왜란 당시인 선조 25년(1592) 6월19일.
강원도 조방장 원호(元豪)가 이끄는 부대가
20대 약관의 왜장인 시마즈 다다도요(島津忠豊)의 전략에 휘말려 참패한다.
안개 낀 하소리의 남대천이 피로 붉게 물들었다고 한다.
이로부터 45년 뒤,
김화읍의 중심에서 청군과 기념비적인 일전인 홍명구와 유림의 김화전투가 또 벌어진 것이다.
근대 한말 의병들의 무장투쟁은 어떠한가?
그리고 한국전쟁의 처참함은 무엇으로 표현할 것인가?
또한 이곳을 중심으로 일어났던 수많은 신흥종교는 더더욱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1930년대를 떠들썩하게 만든 그 악명높은 백백교의 본거지였던 오성산,
그리고 조선 숙종때 요승 여환이 반란의 계시를 받았다는 천불산 등이 바로 김화에 있으니 말이다.
마지막으로 이 지역의 경계 또한
부대이름도 범상치 않은 백골부대가 담당하고 있음은 무얼 의미하는지….
이 특수한 피눈물의 진행형을 멈출 수 있을까.
이름 그대로 쇠의 기운이 번뜩이면서 피와 눈물의 상흔이 즐비한 김화를 어찌 어루만져야 할꼬.
- 이우형 / 현강문화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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