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강경>에 이르기를, 그때 세존께서 게송으로 말씀하셨다.

“만약 형상으로써 나를 보려 하거나,

음성으로써 나를 찾으려 하면 그 사람은 길을 잘못 가는 것이다.

그러므로 결코 여래를 볼 수 없으리라.”


이 말은 모두가 다 알고 있다고 믿고 있다. 그러나 참으로 깨닫는 사람은 드물다.

우리는 역사적으로 32상 80종호로 규정된 여래의 모습을 표현하려 했고,

학자들은 그것을 갖춘 모습을 보고 여래라고 지식으로 알고 있어서,

평생 동안 형상에 억매서 연구하여 왔으므로 결국 여래의 본 모습을 보지 못할 것이다.

 

나도 그랬었다. 그런데 용을 연구하면서 여래의 모습이 어떤 것인지 비로소 알게 되었다.

용도 모두가 알고 있다고 믿고 있다.

용에 대하여 1초도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고, 한 때 얼핏 보았던

옆으로 긴 용의 모습만을 머리에 입력하여 두고는 다 알고 있는 듯 살아오고 있다.

 

용에 대한 책은 여러 권 있지만 용의 조형을 분석하며 본질을 연구한 사람은 없다.

지금 연재하고 있는 용에 대한 이야기는

아직까지 아무도 이야기한 적이 없는 혁신적 내용이다.

사람들은 용을 공부한 적이 없으니 나의 이야기가 얼마나 혁신적이고 충격적인지

알아 차리는 사람은 극소수에 불과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중들이 알아듣도록 그림을 그리고 채색까지 하며 자세히 설명하고 있다.

매번 극적인 다른 내용을 담고 있으며

서로 연결되어 있으니 줄을 쳐가며 숙독하여 주기 바란다.

 

 

용을 보지 못하는 자는 여래를 보지 못하리라

용을 형상으로 보려는 자는

용을 결코 보지 못할 것이므로 여래 역시 보지 못하리라

 

도(道)처럼 용의 본질을 인식한다는 것은 지극히 어려운 일이다.

더욱이 역사적으로 용의 조형은 변화무쌍하여 도무지 파악하기 어렵다.

가장 궁극적인 존재나 개념일수록 변화무쌍하고 규정하기 어렵다.

수만(數萬)의 용을 조사하여 사진을 찍고 그림 그리고 채색 분석하여 보아도

갈수록 알 수 없는 것이 용이다.

돌이켜 보면 평생 수만(數萬)의 불상을 손으로 들고 만지며 공부하였어도

여래가 무엇인지 알 수 없었던 것과 같다.

 

나의 반평생은 여래를 추구하는 것이었다면,

또 다른 반평생은 용을 연구하는 일에 바치기 시작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데,

이제 겨우 용과 여래가 만나 같은 속성을 지닌 존귀한 존재라는 것을

비로소 어렴풋이 알게 된다.

 

용은 여래이고 왕이다. 여래는 용이고, 왕이 용이다.

 

이런 인식이 없는 한, 건축을 비롯하여 조형미술의 모든 장르가 풀려지지 않는다.

우주에 충만한 보이지 않는 영기가 한 분의 용으로 형상화하여

하늘이 열리며 땅이 진동하는 가운데 분노의 모습으로 폭소하며 나타나듯,

우리 앞에 영기가 폭발하며 한 분의 여래의 모습이 미소 지으며 몸을 우리 앞에 홀연히 나툰다.

 

 

부여군 규암면 외리(外里)에서 백제시대의 화상전(畵像塼) 8종류가 발견되었다.

 

1936년 3월 우연히 발견된 문양전은 파편이 150점을 넘고, 그 중 완제품은 42점이 채집되었다.

그 당시의 발굴조사자 아리미쯔(有光敎一)씨의 보고에 의하면,

그 전들은 나지막한 대지와 보리밭사이의 얕은 지표 하에 남북 방향으로

길이 9m의 열을 지어 일렬로 배열되었다고 한다.

문양전들은 문양의 순서에 아무런 질서가 없고 상하가 뒤집어지기도 하여

그 광경이 본래의 구조가 아닌 것으로 보고 있다.

 

문양전은 문양의 종류에 따라 분류하면 크게 8종류로 구분된다.

학계에서 흔히 다음과 같이 말한다.

 

“산수문전 2종, 괴수문전 2종, 반룡문전, 봉황문전, 연화문전, 연화와 운문전이라 부르고 있다.

가로와 세로 각 29.7cm이고, 두께 4cm의 정방형으로,

전 뒷면의 네 귀퉁이에는 측면에 작은 홈이 있어서

나무판 등에 끼워 연결하여 벽을 장식하였을 것이다.”

 

   
도 1. 서 있는 용, 연화-영기화생하는 당당한 모습.

 

 

단지 이런 상태에서는 올바른 논문이 나올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몇 편의 논문이 쓰여졌는데,

우선 화상전 가운데

산수문전, 괴수문전(怪獸文) 2종, 반룡문(蟠龍文塼), 운문전(雲文塼) 등의 명칭은 틀린 용어다.

 

우선 그 가운데 괴수문전만을 여기에서 다룬다.

이 같이 그림을 부조(浮彫)로 나타낸 화상전은 중국에도 있지만,

이 백제의 화상전은 우아하고 역동적이고 아름다워 비교할 만한 예가 없을 정도로 압권이다.

물론 괴수문 혹은 귀신전이라고 알려져 있는 두 종류는 용의 모습이다.(도1)

 

한 분은 용이 연꽃 위에 서 있고,

다른 한 분은 물결 위에 서 있어서 영기화생한다는 광경은 같다.

무엇인지 모르면 괴운문(怪雲文)이라 부르듯,

무엇인지 모르는 동물은 모두가 귀신 혹은 괴수(怪獸) 라 불렀는데

요즈음은 도깨비라고 부른다.

그런데 ‘사람처럼 서있는 용’은 상상할 수 없어서 아무도 용이라고 알아보는 사람들이 없다.

 

이미 언급하였듯이 용이란 존재는

동양의 우주생성론의 중심에 있는 것으로 가장 근원적인 존재여서

모습을 원래 볼 수 없는 것이지만, 형상화시키되 변화무쌍하여 종잡을 수가 없다.

그런 가운데서 용은 사람 모습을 띠기도 하여,

<山海經>에는 ‘사람의 몸에 용머리를 한’ 영수(靈獸)의 표현이 여러 번 나온다.

우리는 옆으로 본 긴 용의 모습만을 용이라 인정하고 그 밖의 용의 모습들은 모두 부정한다.

 

채색분석해 보면 더욱 분명히 용임을 알 수 있다.

백제 화상전의 주인공은 바로 용의 당당한 모습이다.

그 떡 벌어진 어깨는 여래의 어깨를 닮았다.

그런데 우선 이 용은 연꽃잎마다 영기가 가득 차서 탄력성이 있는 영화된 연꽃에서 화생한다.

이러한 영화된 연꽃에서는 아무나 화생하지 못한다.

여래나 보살, 그리고 용만이 영기화생할 수 있는 자리이다.

괴수는 연꽃 위에 자리 잡을 수 있는 자격이 없는 악한 존재이다.

 

 

괴운문(怪雲文)이나 괴수(怪獸)가 아니고

'영기문'과 '용'이라 불러야

 

물결 위에 서 있는 또 다른 용은 똑같은 모습인데

영수(靈水)에서 화생하는 광경이어서 영기화생의 범주에 든다.

팔 다리는 용의 모습이고 얼굴도 용의 모습이지만 서 있는 것만은 인간의 모습처럼 보인다.

더구나 허리띠는 무령왕릉에서 발굴한 왕의 허리띠의 구성과 같다.

내림띠가 하나만 있어서 허리에 둘리면

긴 내림띠가 화상전에서처럼 중앙에서 한 줄 내려오게 되어 있다.

그러므로 연꽃이나 허리띠만 보아도 매우 존귀한 존재임을 알 수 있다.

 

젖가슴은 보주처럼 양감 있게 표현하고 유난히 크고

둥근 젖꼭지는 유방에서 보주가 무량하게 나오는 것을 상징하고 있다.

물론 그것이 젖꼭지라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아니다. 그것을 보주라고 하면 비웃을 것이다.

그러나 시시한 선비가 비웃지 않는 것은 도(道)가 아니라고 했다.

몇 년 보주를 공부하면 보주로 보일 것이다. 탱탱한 젖가슴에 어찌하여 주름이 생긴단 말인가.

 

 

   
도 2. 용의 영기화생을 채색분석한 것.

 

불화를 살펴보면 보주에는 이런 동심원을 그린 예가 많고 그 끝에서 보주가 무량하게 나온다.

얼굴은 전형적인 용의 얼굴이다.

눈은 보주처럼 나타냈고 귀는 제1영기싹으로 만들어 불꽃모양 영기문이 발산하는 형국이다.

입가에서는 초록색으로 칠한 영기가 발산하고 있고,

양 어깨에서도 역시 영기가 발산하고 있다. 팔과 다리는 영기문으로 이루어져 있다.

 

앞으로 다루겠지만 여래 역시 몸 전체가 영기문으로 구성되어 있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뿔이 없다거나 보주를 발산하지 않는다고 하여 용이 아니라고 말하지 말라.

거듭 말하거니와 용의 모습은 일정하지 않다.

 

나는 이 용 화상전을 볼 때마다

여래가 입상으로 용후(龍吼)하며 영기화생하는 모습으로 보이곤 했다.

여래는 항상 미소만 짓는 것이 아니다.

분노가 극치에 이르러 크게 폭소하는 얼굴인 폭대소상(暴大笑像)이

십일면관음보살 뒷면에 있는데 모두가 대중을 교화하는 방편이다.

분별심에서 보면 용과 여래는 둘이지만, 지혜의 눈으로 보면 하나다.

용을 보고 괴수라고 말하는 것은, 여래를 보고 괴물이라고 부르는 것과 같다. 나는 말한다.

 

“용을 보지 못하는 자는

여래를 보지 못하리라.

용을 형상으로 보려는 자는

용을 결코 보지 못할 것이므로

여래 역시 보지 못하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