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촌동 백제 고분군
백제인이 왜 고구려식으로 만들었을까?
우리는 흔히 능이라고 할 때 원형의 봉분이 있고 주위로 석물(石物) 등 장식물이 있다고들 생각한다.
실제로 조선시대 왕릉이나 경주시의 신라 왕릉을 보면 그러하다.
고분(古墳)은 옛 분묘로서 대체적으로 평민의 무덤보다는 족장급 이상의 지체높은 사람의 묘를 의미하는데
북한을 제외한 남한에서 볼 수 있는 고분의 대강은 거의 원형이다.
고구려의 대표적인 무덤인 돌로 쌓은 무덤, 즉 적석총(積石塚)을 남한에서 보기는 그 예가 많지 않지만
서울시 송파구 석촌동의 고분이 바로 적석총이다.
석촌동 백제 고분군(古墳群)의 정확한 명칭은 석촌동 백제 초기 적석총이다(문화재 안내판에 표기된 명칭).
그러나 이곳에 적석총만 있는 것이 아니다.
돌무지무덤인 적석총과 흙무덤인 봉토분도 나란히 있기에 넓게 본다면
차라리 백제 고분군이 타당할 듯싶어 제목으로 삼게 되었다.
지하철 8호선 석촌역에서 2~300m정도 걸으면 백제고분공원이 나오는데 이 공원에서 고분을 볼 수 있다.
송파구 석촌동 77번지에 위치하고 있으며 사적 제 243호로 지정되어 있다.
1916년 조사 당시 이 일대에는 90여 기의 적석총과 봉토분이 분포하고 있었다고 하며
‘석촌’이라는 동네 이름도 돌무지무덤이 많다는 ‘돌마리’에서 연유되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그 많던 분묘는 하나둘씩 훼손되기 시작한다.
1950년 한국전쟁 때 미군이 불도저로 이곳을 밀어다가 한강을 메운 다음 도강(渡江)작전을 벌임으로써
통째로 허물어진 사례도 있고,
또한 1970년대 서울시에서 한강과 강남 개발이 한창이던 때
한강변에 면한 잠실 일대도 직접적인 영향을 받음으로 인해 훼손이 진행되었는데,
1974년 잠실지구 유적발굴조사단의 조사 당시
3호와 4호 적석총 2기만이 남아 있었을 정도로 파괴가 심각한 지경이었다.
오늘날과 같은 사적공원으로 조성된 계기는 1988년 서울 올림픽대회 관련 잠실 일대 개발에서 비롯된다.
1985년 이 일대가 문화재 보호구역으로 지정되었으며,
백제고분공원을 조성하는 과정에서 1호와 2호 적석총이 추가로 발굴조사 되기에 이른다.
현재 공원 내에는 6개의 고분과 2개의 토광묘가 있으며,
발굴조사 결과 고분이 조성된 시기는 한성백제 시기인 4세기 후반에서 5세기 전반으로 추정하고 있으며
무덤의 성격은 왕릉으로 보고 있다.
그렇다면 석촌동 고분군은 백제인이 조성한 것인데
어떻게 해서 고구려식으로 만들었을까 하는 의문이 생긴다.
우선 공원 내의 가장 큰 분묘인 3호분을 보기로 한다.
3호분은 남북 길이 43m, 동서 길이 55m, 높이 4.5m의 초대형 무덤으로서,
서기 3세기 중엽에 만들어졌으며, 근초고왕의 능일 가능성이 큰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무덤의 규모로 놓고 보았을 때 중국 길림성 집안(集安)에 있는 장군총(將軍塚)보다 더 크고,
아울러 고구려 기단식 적석총의 외형과 축조 방법이 흡사하다.
유적의 형태를 놓고 본다면
고구려의 유이민이 백제국을 건설하였다는『삼국사기』 백제(百濟)본기(本紀)의 기록을 음미해볼 수 있다.
백제의 건국 주도세력이 바로 고구려의 왕족이라는 점에서
한성백제 초기의 왕릉은 고구려식으로 지었을 것이다라고 판단이 된다.
인근에 위치한 방이동 백제 고분군은 같은 한성백제시기에 만들어졌지만 석촌동보다 후대에 만들어졌고
비록 한성백제 시기라도 방이동의 고분은 모두 원형 봉분 형태로 석촌동과 확연한 차이를 보여주고 있다.
그런데 아무리 고구려식의 묘제를 따랐더라고 하더라도
백제인들은 그들만의 무덤 형태를 견지하였던 것은 사실이다.
즉 이곳의 적석총은 외형상 고구려의 그것과 흡사하지만 내부 구조면에서는 서로 다른 유형이다.
3호 적석총은 무덤의 안팎을,
2호와 4호 적석총은 기단과 계단 외부를 돌로 쌓았지만 내부를 돌이 아닌 흙으로 채웠다는 점에서
고구려식과 구분되는 백제식이다.
기단부만 남은 1호 적석총은 두 기의 무덤이 남북으로 연결되어 있는데
남분은 고구려식이고 북분은 백제식인 것이다.
석촌역에서 공원으로 가서 맨 먼저 만나는 고분은 3호이며
남쪽으로 4호, 2호, 2호 토광묘의 순으로 진행되어 5호 고분까지 보존되어 있다.
한때 한강 유역을 호령하던 백제의 위세와 권위는
강동구와 송파구에서 이제 얼마 남지 않은 유적으로 대별이 되고 있다.
감히 왕릉 주위로는 일반인 출입금지구역이었을 곳이었을 텐데
이제 세월이 바뀌어 시민 모두가 자유로이 왕래하고 산책하는 평범한 곳이 되었다.
그렇지만 공원에서 만나는 장대한 규모의 고분은 그 옛날 백제의 위상을 잘 대변해주고 있다.
1,500년의 세월을 견딘 고분은 호쾌하고 당당한 모습으로 옛 선인들의 기개를 우리에게 선사하고 있다.
- 사종민(서울역사박물관 교육대외협력과장)
- 2011.01.27 하이서울뉴스. [서울역사기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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