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식 유교질서 추구한 사대주의자 김부식
한민족의 역사적 정체성 구현한 민족주의자 일연
김부식과 일연은 각각 우리 고대사를 대표하는 두 역사서인 ‘삼국사기(三國史記)’의 편찬자이자 ‘삼국유사(三國遺事)’의 저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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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학 연구자로서 나이가 들어갈수록 관심이 가는 학문 분야는 철학과 역사학이다. 사회학의 분석 대상이 개인과 사회에 있는 만큼, 개인을 다루는 철학과 사회적 변화를 다루는 역사의 중요성이 점점 더 크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몰라도 갈수록 이 분야의 책을 많이 읽게 된다.
전공과 관련해 그동안 읽은 역사 관련 서적 가운데 가장 인상적인 것을 꼽으라면 프랑스 역사학자 페르낭 브로델(Fernand Braudel)의 ‘물질문명과 자본주의’를 들 수 있다. 자본주의의 역사를 다룬 이 책은 내용도 방대하지만 역사를 보는 새로운 시각을 일깨워준다. 브로델은 이른바 ‘아날 학파’의 제2세대를 대표하는 역사학자다. 일상적인 생활세계의 역사에서 시간도 마모시키지 못하는 구조의 역사에 이르기까지 브로델은 역사의 다층적 측면을 총체적으로 복원하고자 한다.
브로델의 역사학에서 내가 특히 주목하는 것은 그의 시간론이다. 브로델에 따르면 시간은 사회적 창조물이다. 그는 사회적 시간을 시간지속의 길이에 따라 세 개의 범주로 구별하는데, ‘단기지속’ ‘중기지속’ ‘장기지속’이 그것이다. 역사는 이 세 가지 시간의 차원에 따라 각기 ‘사건사’ ‘사회사’ ‘구조사’로 나타난다. 이 가운데 브로델이 특히 주목한 것은 사회사와 구조사다.
먼저 사회사는 주기 또는 국면의 역사다. 사회사가 중요한 까닭은 어떤 사건이라 하더라도 그것이 놓여 있는 국면에 따라 의미와 해석이 달라진다는 점에 있다. 우리 역사를 예로 들자면, 박정희 시대와 함께 시작한 산업화 시대의 ‘61년 체제’와 외환위기와 함께 시작된 세계화 시대의 ‘97년 체제’는 다른 주기 또는 국면의 역사를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구조사는 장기지속에 대응하는 역사다. 그것은 지리적 영역 혹은 문화적 영역에서 매우 더디게 진행되는 시간을 함축한다. 이 장기지속의 역사를 잘 보여주는 것이 다름 아닌 자본주의의 역사인데, 브로델에 따르면 자본주의는 개별 민족국가의 영역을 넘어서서 더욱 넓은 지리적 영역에서 시작됐다는 것이다. 브로델의 이러한 문제틀이 미국 사회학자 이매뉴얼 월러스틴(Immanuel Wallerstein)의 세계체제론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내가 주목하려는 것은 사회사와 구조사라는 다층적 역사인식이 시대정신의 탐구에서 갖는 의미다. 다시 말해, 시대정신 탐구의 과제가 현재를 판독하고 미래를 전망하는 데 있다면, 바로 이 현재와 미래가 놓인 시간을 어떻게 볼 것인지의 문제는 매우 중요하다. 바로 이 시간의 층위로서 중기지속과 장기지속, 즉 사회사와 구조사가 존재한다고 볼 수 있다.
사회사와 구조사로서의 역사
구체적으로 예를 들면 이렇다. 최근 우리 사회에서 각축하는 두 개의 시대정신은 ‘민주화’와 ‘선진화’다. 민주화가 진보세력의 시대정신이라면, 선진화는 보수세력의 시대정신이다. 그런데 이 민주화와 선진화라는 시대정신이 놓인 시간의 지평은 중기지속 국면의 역사다. 진보세력의 시각이 산업화에 뒤이은 민주화를 공고히 하는 것이 우리 사회의 일차적 과제라고 본다면, 보수세력의 시각은 민주화를 넘어선 선진화를 성취하는 것이 우리 사회의 일차적 목표임을 강조하는 셈이다.
나아가 사회사와 더불어 구조사적 시각에서도 시대정신을 생각해볼 수 있다. 예를 들어, 보수세력의 일각에서 주장하는 ‘유교민주주의론’이나 정통 진보세력이 주장하는 ‘자본주의 대안론’이 염두에 두는 시간적 지평은 모더니티(자본주의)의 시간이며, 따라서 이들의 문제의식은 구조사적 시간의 지평에 놓여 있다고 볼 수 있다.
요컨대 시대정신은 시간의 지평에 따라 달리 제시될 수 있다. 현재적 관점에서 시대정신으로 담을 수 있는 가치 또는 비전은 이중적 차원, 다시 말해 모더니티라는 구조사적 차원과 국면이라는 사회사적 차원에서 모두 제기될 수 있으며, 이들은 각기 나름의 타당성을 갖고 있다. 시대정신에 대해 다소 길게 논의하는 이유는 구조사적 차원에서 존재하는 모더니티의 한 층위인 민족주의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어서다. 모더니티를 이루는 핵심적 세 영역은 자본주의, 국민국가 그리고 민족주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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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사기’는 우리 고대사를 이룬 고구려, 백제, 신라에 대한 정사(正史)다. 이 ‘삼국사기’는 앞서 말했듯이 김부식 개인의 저술이 아니라 일종의 편찬물이다. 김부식은 논찬을 집필하고, 사관들이 기존 자료에 기초해 사실을 편찬했다.
‘삼국사기’를 편찬하게 된 이유는 김부식이 이 책의 서문으로 쓴 왕에게 바치는 표문에 잘 드러나 있다. 그는 “우리나라의 사실에 이르러선 도리어 망연하여 그 시말을 알지 못하니 매우 유감”이라고 지적하고, ‘삼국사기’의 편찬을 통해 “임금의 선 · 악, 신자(臣子)의 충(忠) · 사(邪), 나라의 안(安) · 위(危), 인민의 치(治) · 난(亂)에 관한 것을” 후대에 전하고자 한다고 쓰고 있다.
‘삼국사기’의 모범이 되는 사서는 중국 사마천의 ‘사기(史記)’다. 김부식은 ‘사기’의 역사 기술 방법에 따라 ‘본기(本紀, 28권)’ ‘지(志, 9권)’ ‘표(表, 3권)’ ‘열전(列傳, 10권)’을 편찬했는데, 여기에는 당시 존재했던 국내외 여러 사서가 두루 활용됐다. 한 가지 주목할 것은 ‘삼국사기’ 이전에 ‘구삼국사(舊三國史)’가 존재했다는 점인데, 많은 역사학자는 이 ‘구삼국사’를 기본 자료로 삼아 ‘삼국사기’를 편찬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우리 역사에서 ‘삼국사기’가 갖는 의의는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침이 없다. 통일신라가 멸망한 지 한참 지난 다음에 편찬된 책이긴 하지만, ‘삼국사기’를 통해 우리는 고구려 · 백제 · 신라, 그리고 통일신라로 이어진 고대사회의 전체적 흐름을 상세하면서도 포괄적으로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더욱이 후대의 고고학적 발견을 통해 ‘삼국사기’의 기록이 상당히 정확하다는 점 또한 입증되었다.
김부식의 사대주의 논란
내가 주목하려는 것은 ‘삼국사기’에 담긴 편찬자 김부식의 시대정신이다. 무릇 어떤 사상이라 하더라도 그것이 놓인 시대적 구속으로부터 자유로울 수는 없다. 김부식이 활동했던 시대는 고려가 황금기를 지나 무신시대로 들어가기 바로 직전의 시기였다. 왕건이 세운 고려는 광종과 성종 시대를 거쳐 귀족사회로서 안정된 체제를 구축했지만, 거란의 침입 이후 그 기틀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일반적으로 어떤 왕조나 체제든지 탄생, 성장, 절정, 그리고 쇠퇴를 겪게 된다. 거란족의 침입 이후 여진족의 침입이 이어지면서 고려는 연속된 외란(外亂)을 경험하게 됐지만, 유교와 불교를 통치의 양대 이념으로 한 내치(內治)는 나름대로 유지돼왔다. 김부식이 활동했던 인종 시대는 바로 이 내치가 새로운 전환점에 도달한 시대였다.
이 전환점은 개경의 문신을 중심으로 한 지배세력에 대한 도전으로 구체화됐다. 1135년에 일어난 묘청의 난과 1170년부터 시작된 무신의 난은 이 도전을 상징하는 사건들이었다. 묘청의 난이 수도 개경 세력에 대한 지방 서경 세력의 저항이었다면, 무신의 난은 정치를 독점해온 문신 계급에 대한 무신 계급의 저항이었다. 김부식의 활동 시기는 정확하게 무신의 난 직전의 시대였으며, 이러한 시대적 상황은 김부식의 역사인식 및 사회인식에 중요한 영향을 끼친 것으로 보인다.
‘삼국사기’를 둘러싼 논란 가운데 가장 큰 쟁점이 된 것은 사대주의 문제다. 김부식의 역사인식이 갖는 한계에 대해서는 이미 당대에도 제기됐다.
무신 시대에 쓰인 ‘동명왕편’을 보면, 저자 이규보는 지적하고 있다.
“김부식이 국사를 다시 편찬할 때에 (…) 지나치게 이상스러운 일을 후세에 보여주는 것은 타당치 않다고 생각하여 동명왕에 관한 사적을 생략한 것이라고 믿어진다. (…) 하물며 동명왕의 사적은 변화가 신기하고 이상한 것으로 뭇사람들의 눈을 현혹한 것이 아니요, 바로 나라를 창건한 신성한 자취인 것이다. 이러한 사적을 기술해두지 않으면 미래의 후손들이 어떻게 이 역사적인 사실을 접해볼 수 있을 것인가”
김부식은 ‘삼국사기’를 편찬할 때 유교적 시각에서 비합리적인 것으로 생각되는 역사적 기록을 적잖이 제외한 것으로 보인다. 이에 대해 이규보는 신기하고 이상한 것이라 하더라도 그것이 나라의 자취라면 의당 기록에 남겨둬야 한다고 주장한다. ‘동명왕편’은 이규보가 품고 있던 민족주의를 엿볼 수 있는 작품인 것이다.
전통사회에서 민족주의가 왕조중심주의로부터 크게 벗어난 것은 아니었다 하더라도, ‘우리의 것’에 대한 이규보의 자각은 주목할 만한 것이다. 이러한 자각에는 무엇보다 이규보가 대면했던 현실, 몽고의 침입과 원나라의 지배라는 당대의 역사적 현실이 반영돼 있다. 이러한 이규보의 문제의식은 일연의 ‘삼국유사’와 이승휴의 ‘제왕운기’에 직접적으로 이어진다. |
지배적 지식인의 공통된 시대정신
‘삼국사기’에 대한 평가가 가장 예각적으로 드러난 것은 민족주의 역사학자 신채호에 의한 비판이다. 널리 알려져 있듯이, 신채호는 ‘조선상고사’에서 묘청의 난을 ‘조선의 역사 1000년 이래 가장 큰 사건’이라고 명명했다. ‘김부식 대 묘청’이 대립 구도를 이뤘던 묘청의 난은 한학(漢學)의 수구사상(사대파) 대 국풍(國風)의 진취사상(북벌파)의 일대 대결이었다는 게 신채호의 주장이다.
묘청의 난은 앞서 말했듯이 개경의 문벌귀족과 이에 맞서는 지방의 신진세력 간 권력투쟁이 첨예하게 표출된 사건이다. 무릇 어떤 헤게모니 투쟁이라 하더라도 담론이 필요한 법인데, 서경 세력이 내건 ‘왕을 황제라 부르고 금나라를 치자’는 칭제건원론과 금국정벌론은 기존 중앙 세력의 사대주의적 담론에 맞선 일종의 민족주의적 성향의 담론이었다. 한마디로 말해, 김부식의 사상은 사대주의였으며, ‘삼국사기’에는 이러한 경향이 일정하게 반영돼 있다는 게 민족주의 역사학의 평가다. 일제강점기 신채호의 이러한 평가는 이후 ‘삼국사기’를 이해하는 데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삼국사기’가 비록 우리 고대사를 알려주는 가장 중요한 저작이지만, 뒤에서 다루게 될 ‘삼국유사’와 비교할 때 사대주의적 역사기술의 한계를 갖고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평가에 물론 모든 학자가 동의한 것은 아니었다. 역사학자 고병익은 기존의 평가에 대해 이의를 제기한다. 그는 김부식이 유교적인 윤리적 평가와 형식적인 예절론에서 조선왕조 사가들보다 더 신축적이었으며, 특히 삼국의 기사를 중국의 천자에게만 사용되던 ‘본기’라는 편명 아래 취급했다는 점을 주목해 ‘삼국사기’의 서술을 사대주의라고만 파악할 수는 없다고 주장한다. 그에 따르면, ‘삼국사기’에 대한 기존의 비판은 이 책이 편찬되던 당시의 역사적 환경과 사료 부족 등의 객관적 제약을 고려하지 않은 부당한 평가라는 것이다.
이러한 반론에 대한 재비판 역시 존재한다. 역사학자 김철준의 비판이 대표적이다. 김철준은 ‘삼국사기’를 ‘삼국유사’와 조선시대의 역사서들과 포괄적으로 비교해보면 사대주의적 시각으로 쓰여졌다는 비판을 벗어날 수 없다고 본다. 또한 설령 삼국의 ‘본기’를 정해 삼국사를 기록했다고 하더라도, 김부식이 고구려·백제·신라의 세 본기 말미에 붙인 사론에서는 사대주의적 성향이 그대로 나타난다는 점을 강조한다. 김철준의 핵심적 주장은 사관의 사대성 여부는 과거 전통문화 능력에 대한 이해를 정당히 하는가, 그 전통적 체질이 갖는 현재적 문화능력에 대한 평가를 어떻게 하는가에 달려 있다는 데 있다. 나아가 그는 문화의 자주적 개성과 창조능력은 기층문화 체질과의 관련 여하에 달려 있고, 지배계급이 주도하는 상층문화는 사대적이고 모방적일 수밖에 없다는 견해를 더하고 있다.
우리 사상과 문화에 대한 평가절하
신채호로부터 영향 받은 김철준의 견해는 현재적 관점에서 볼 때 온당한 것이다. 삼국시대의 역사적 사실의 옳고 그름에 대한 평가와는 별개로 우리 역사에 대한 김부식의 시각에는 사대적인 요소가 분명히 존재한다. 최치원이 ‘나라의 현묘한 도’라고 표현한 바 있듯이, 김부식이 활동했던 고려 중기까지 중국의 유교사상과는 다른 전통적인 우리 사상 및 문화가 존재했고, 또 사회 전반에 상당히 영향을 끼치고 있었다. 김부식은 이를 상대적으로 평가절하했으며, 이러한 태도는 ‘삼국사기’의 체재구성과 논찬에 결코 작지 않은 영향을 끼쳤다.
시대정신의 관점에서 ‘삼국사기’에 나타난 김부식의 시대정신은 중국식 유교질서의 구현이라는 당대의 문제의식을 넘어서고 있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나무의 시각이 아니라 숲의 관점에서 볼 때, 설령 부분적으로 김부식이 우리 역사의 특수성을 인식했다 하더라도, 삼국의 역사를 파악하는 그의 기본적인 문제의식은 중국적 유교질서를 우리 사회에 실현하고자 하는 데 놓여 있었다.
한 걸음 물러서 볼 때, 김부식의 사대주의는 김부식 개인의 것이라기보다 12세기 당시 지배적 지식인 일반이 공유하던 시대정신이었을 것이다. 이점에서 김부식에 대한 신채호의 비판은 다소 거친 것이기는 하지만 현재적 관점에서 여전히 주목해야 할 대목을 갖고 있다. 그것은 다름 아닌 한 사회의 발전에서 ‘모방’과 ‘창조’가 갖는 의미다.
현실의 영역에서 그 어떤 시대정신이라 하더라도 철저하게 모방적인 것이나 완전히 독창적인 것은 사실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 현실에서 우리가 목격하는 것은 ‘모방’과 ‘창조’가 뒤섞인 혼합물, 즉 ‘하이브리드(hybrid)’다. 문제는 하이브리드적일 수밖에 없는 미래 비전에서 그 무게 중심을 모방과 창조 중 어디에 놓아둘 것인지에 있다. 사대주의는 여전히 모방 전략을 지지한다는 점에서, 그리고 민족의 자율성 및 독창성을 간과하고 있다는 점에서 미래지향적 시대정신으로서 근본적인 한계를 가질 수밖에 없다. |
고려시대를 돌아보기 위해 지난해 연말 강화도를 찾았다.
강화도를 찾은 이유는 바로 이곳이 한때 고려의 수도였기 때문이다. 몽고군이 한반도를 짓밟았을 때 고려는 강화도로 천도를 단행했다. 김포에서 강화대교를 건너가면서 이 정도 가까운 거리를 정말 몽고군이 넘지 못했을까 하는 의구심이 없지 않았지만, 고려는 몽고군이 물에 약하다는 약점을 적극 활용하고자 했다.
강화도에는 당시 고려의 쓸쓸한 흔적이 지금도 여기저기 남아 있다. 고종이 도착했다고 하는 승천포도 그러하고, 읍내 안 고려궁지도 그러하고, 한때 팔만대장경 경판을 보관했던 선원사지도 몽고군을 피해 강화도로 와야 했던 고려가 남긴 서글픈 정취를 느끼게 했다. 앞서 이야기했던 ‘동명왕편’의 저자 이규보의 무덤 역시 여기 강화도 진강산에 있다.
통일신라 이후 우리나라가 수도로 삼은 곳은, 후삼국 시대와 6·25전쟁 시기를 제외하면, 모두 네 곳이다. 경주, 개경, 한양, 그리고 여기 강화가 바로 그곳이다. 몽고의 침입이라는 당시 시대적 환경을 생각할 때 강화에 남아 있는 고려 유적들은 한편으론 어떤 비애감을, 다른 한편으론 민족적 자존심을 동시에 떠올리게 한다. 특히 이곳에서 판각된 것으로 알려진 팔만대장경은 그 효력의 여부를 떠나서 민족적 자존심의 상징이라 하겠다.
野史가 보여주는 새로운 역사관
일연이 ‘삼국유사’를 쓴 시대적 상황은 바로 이러했다. 일연의 속성은 김씨이고, 이름은 견명(見明)이며, 시호는 보각(普覺)이다. 경상북도 경산에서 태어난 그는 1214년(고종 1) 9세에 광주 무량사에 들어가 공부를 하다가 1219년 승려가 됐다. 1227년 승과에 급제했고, 1246년 선사가, 1259년에는 대선사가 됐다. 이후 일연은 당대를 대표하는 승려로 활발한 활동을 벌였으며, 1283년(충렬왕 9)에 국사가 됐다. 승려로서 가장 영예로운 자리에 오른 그는 이듬해인 1284년에 경상북도 군위의 인각사로 은퇴한 후, 이곳에서 머물다가 1289년 84세를 일기로 입적했다. 일연은 ‘중편조동오위’ 등을 포함해 여러 불교 서적을 저술했다.
일연이 우리 역사를 대표하는 인물들 가운데 한 사람으로 우뚝 남아 있게 된 것은 그가 인각사에 머물 당시 쓴 ‘삼국유사’ 때문이다. ‘삼국유사’는 ‘유사’라는 제목이 보여주듯이 정사가 아니라 일종의 야사(野史)다. 전통사회의 관점에서 야사는 정사보다 다소 처지는 역사책으로 평가됐지만, 현재적 관점에서 보면 대다수 역사책은 기본적으로 야사일 수밖에 없다. 야사이기 때문에 오히려 ‘삼국유사’는 우리에게 새로운 역사관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삼국유사’는 ‘왕력’ ‘기이’ ‘흥법’ ‘탑상’ ‘의해’ ‘신주’ ‘감통’ ‘피은’ ‘효선’의 9개 편으로 이뤄져 있다. ‘왕력’이 연대기라면, ‘기이’는 준역사서이고, ‘흥법’ 이하는 삼국 시대에 활동했던 승려들을 중심으로 다양한 인간 군상의 삶을 흥미진진하게 기록하고 있다. ‘삼국사기’와 비교해 ‘삼국유사’가 갖는 가장 중요한 특징은 ‘기이’에서 단군신화를 다루고 있다는 점인데, 이는 ‘삼국유사’가 갖는 민족주의적 성격을 뚜렷하게 보여주는 것으로 평가돼왔다.
하지만 이뿐 아니다. ‘삼국유사’는 신라 시대 향가(鄕歌)를 포함해 삼국 당시의 사회 및 문화생활을 다양하게 기록함으로써 우리 고대 문화의 보고(寶庫)가 됐다. 비록 불교와 연관된 이야기들이 ‘삼국유사’의 상당 부분을 차지하고 있지만, 삼국 시대 당시 불교가 가졌던 절대적 위상을 고려할 때 이는 자연스러운 현상이며, 유교적 성향의 ‘삼국사기’에서 소홀히 됐던 부분을 크게 보완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 가치는 더욱 빛나는 것이다.
전쟁과 민족주의에 대한 자각
이러한 ‘삼국유사’의 등장은 당시 역사적 환경과 분리해서 이해하기는 어렵다. 국문학자 고운기가 지적하듯이 ‘삼국사기’와 ‘삼국유사’ 사이에 동아시아에서는 송나라의 멸망과 원나라의 성립이라는 중대한 역사적 사건이 일어났다. 하늘처럼 알았던 한족의 중국이 변방 오랑캐인 몽고족에 패배한 사건은 당시 고려인의 사대주의적 사유에 일대 충격을 줬다. 이미 그 징후가 요나라와 금나라의 성립에서 나타났지만, 원나라의 등장은 한족 중심의 세계관을 해체하는 데 결정적 계기를 부여한 셈이었다.
여기에 더해 몽고족의 침입으로 한반도 전역이 유린된 것은 ‘우리와 그들’의 차이에 대한 새로운 성찰을 가능하게 했다. 사회학적으로 민족주의의 형성에서 전쟁이 중대한 영향을 끼친다는 것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참혹한 전쟁을 경험함으로써 우리와 그들의 경계는 분명해지는 바, 이런 경계의 자각을 통해 비로소 우리는 과연 누구인가라는 질문을 던지게 되며, 우리의 정체성에 대한 새로운 인식에 도달하게 된다.
같은 언어를 쓰고 같은 문화를 공유하며 또 가까운 공간에서 함께 살아가는 우리는 과연 누구인가. 몽고족의 침입 이전에 물론 거란족의 침입도 있었고, 여진족과의 전쟁도 있었다. 하지만 몽고족의 침입은 이전 전쟁들과 사뭇 달랐다. 우리 삶의 터전인 국토 대부분이 처참하게 파괴되고 수많은 사람이 민족이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무참하게 살상되는 것을 목격하게 됨으로써 비로소 민족에 대한 본격적인 자각이 이뤄졌다고 볼 수 있다.
사회학적으로 민족의식의 형성에는 두 가지 계기가 중요하다. 먼저 대내적으로 새로운 국가의 등장은 사회통합을 제고하기 위해 민족주의를 고취하는 경향이 있다. 분열됐던 세력의 모든 구성원을 동일 민족으로 호명함으로써 민족적 동질성을 자각하게 하고, 이런 동질성 자각을 통해 통치를 위한 사회통합을 강화하고자 했다.
우리 역사에서 민족의식 형성에 대내적 계기를 부여했던 것은 신라에 의한 삼국통일과 고려에 의한 후삼국 통일이었다. (물론 발해를 들어 통일신라시대를 이른바 ‘남북국 시대’로 볼 수도 있다. 하지만 발해가 과연 우리 민족의 역사에 속한 나라인지에 대해서는 논란의 여지가 있다. 발해의 지배층은 고구려인이었으나 피지배층은 말갈족으로 주로 구성돼 있었다는 사실은 발해의 국가 정체성을 여러 시각에서 해석할 여지를 남긴다).
민족의 역사적 정체성에 대한 당당한 선언
대내적 계기 못지않게 중요했던 것은 전쟁이라는 대외적 계기였다. 우리 역사 전체에서 민족의식의 형성에 큰 영향을 끼친 중대한 전쟁으로는 몽고의 침입과 임진왜란, 그리고 병자호란을 지목할 수 있다. 전통사회에서 이 전쟁들은 그 격렬한 체험으로 인해 민족의 존재를 새롭게 발견하게 했을 뿐만 아니라, 이러한 민족의 발견은 새로운 국가 개혁의 방향 모색에 큰 영향을 끼쳤다.
다른 말을 하려는 게 아니라, ‘삼국유사’에 담긴 시대정신으로서 민족주의를 이야기하려는 것이다. 시대정신은 과거·현재·미래를 바라보는 역사의식이자, 개인과 사회를 포괄적으로 이해하는 세계관이다. ‘삼국유사’에 담긴 세계관이 불국토를 지향하는 불교적 세계관이라면, 그 역사의식은 민족의 주체성과 독창성을 주목하려는 민족주의라 할 수 있다. 고조선 시대부터 통일신라 시대까지 우리 선조들이 이 땅에 남겨 놓은 놀라운 이야기들을 생생히 전달함으로써 일연은 다름 아닌 민족의 재발견, 다시 말해 민족주의를 고취하고 있다.
물론 ‘삼국유사’에 담긴 민족의식은 현재적 기준에서 볼 때 그리 높은 수준이라고 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일연이 삼국이 남겨놓은 이야기를 정리하면서 ‘삼국사기’에 담겨 있지 않은 여러 이야기를 적극적으로 포함시킨 것은 김부식과는 다른 역사의식, 다시 말해 시대정신을 갖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삼국유사’의 머리에 놓인 단군신화는 일연이 품고 있던 이러한 시대정신을 단적으로 증거한다. ‘2000년 전쯤 단군 왕검이 아사달에 도읍을 세웠다’는 첫 번째 구절은 ‘삼국유사’가 전달하고자 한 의미를 극적으로 상징한다. ‘나라를 열어 조선이라 불렀는데, 요 임금과 같은 때다’라고 이어지는 구절은 중국에 대응하는 우리 민족의 역사적 정체성에 대한 당당한 선언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삼국유사’의 백미 중 하나인 향가도 마찬가지다. 어느 시대, 어느 사회이건 노래로 대표되는 음악은 지배계급이든 민중계급이든 일상생활의 주요 영역 가운데 하나다. ‘삼국사기’에서는 다뤄지지 않은, 그러나 삼국시대에 수없이 불린 향가들을 수록함으로써 ‘삼국유사’는 삼국시대와 통일신라시대의 문화를 생생히 전달할 뿐만 아니라, 그들의 의식세계를 새삼 돌아보게 한다.
예를 들어, 고등학교 시절 배우는 월명사의 ‘찬기파랑가’를 보면, 우리는 신라시대 화랑들이 가졌던 고고한 정신세계를 엿볼 수 있다.
“열어제치자/ 벗어나는 달이/ 흰 그름 쫓아 떠난 자리에/ 백사장 펼친 물가에/ 기랑의 모습이 겹쳐져라/…/ 아, 잣나무 가지가 높아/ 눈이라도 못 덮을 화랑이여” 삼국통일에 기여했던 화랑의 드높은 기상을 살펴볼 수 있는 구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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