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켜(연재자료)

2. <예(義)> 조선의 선비정신 - 趙光祖와 義

Gijuzzang Dream 2011. 2. 14. 16:35

 

 

 

 

 

 

 

 조선의 선비정신 - 趙光祖와 義

 

 

임금이 나라를 잘 다스리려면 利의 근원을 막아야 한다”

 

 

 

 조광조는 당시 선비들의 행태가 바르지 못한 원인을

“이익(利)만 알고 의리(義)를 모르는 데서 나온 것”으로 진단했다.

따라서 “외람되게 정해진 훈공을 고치지 않는다면

이익의 근원을 막을 길을 원천적으로 차단할 수 없다”고 본 것이다.


 

 

2010년 한국 출판계의 화두는 ‘정의(正義)’였다.

하버드대 교수인 마이클 샌델이 쓴 《정의란 무엇인가》라는 책이 출판계를 휩쓸었다.

인문 · 사회과학 책은 2쇄(刷)를 찍기가 힘든 우리의 출판 시장에서

이 책의 판매량은 가히 경이(驚異) 그 자체였다.

하버드 대학의 최고 인기 강좌라는 지적(知的) 호기심 내지는 지적 허영심에 기인한 것인지,

한국 사회 내부의 정의에 대한 갈증에 기인한 것인지는 단정할 수 없지만,

아무튼 이 책을 계기로 정의에 대한 관심이 높아진 것만큼은 사실이다. 
  
필자는 진솔하게 물어보고 싶었다. 정의란 과연 무엇일까?

샌델은 이 책의 부제를 ‘옳은 일(right thing) 하기’로 정하면서 그 대답을 대신했다.
  
정의에 대하여 관심이 높아진 이 좋은 기회를 놓칠 수 없었다.

<키워드로 풀어보는 조선의 선비정신>의 두 번째 주제를 ‘정의’로 정한 이유가 그것이다.

‘정의’라는 단어와 관련지어서 생각해 볼 때 가장 먼저 떠오른 선비는

정암 조광조(靜庵 趙光祖 · 1482~1519)였다.

사실 조광조를 정리하고 싶었던 차에 글을 샌델로 시작하는 것이 괜찮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솔직히 고백하고 싶다. 조광조의 삶 자체를 읽어가는 그 자체에서 우리는 자신도 모르게

‘정의’, ‘옳은 일’ 등의 실제 모습을 만나게 될 수 있다는 생각으로 이번 호의 글을 시작한다.
  
조광조 시대에는 정의라는 두 글자가 아닌 '의(義)'라는 한 글자가 주로 사용됐다.

조광조가 자신의 목숨까지 버리면서 지키고자 했던 의란 과연 무엇일까.

조광조가 그토록 소중하게 생각한 의라는 말은 이익(利)과 상대되는 의미였다.

맹자(孟子)가 말하지 않았던가? 이익(利)보다는 의로움(義)이 중요하다고.

오늘날 우리는 승리라는 단어를 많이 사용한다.

남아공 월드컵 경기에서, 그리고 나이 어린 여자 축구선수들의 승리로 우리는 즐겁게 보냈던 기억이 있다.
  
승리란 단어는 ‘이(利)를 이긴다(勝)’는 의미다. 그렇다면 이익을 이기는 주체(主體)가 있어야 할 것이다.

그 이익을 이기기 위해 필요한 것이 바로 의(義)다.

순자(荀子 · BC298?-BC238?)가 말했다.

의로움이 이익을 이겨내면 치세(治世)를 이루게 되고, 이익이 옳음을 제압하면 난세(亂世)가 되고 만다.

(義勝利者 爲治世, 利克義者 爲亂世).

승리라는 단어는 바로 ‘이익(interest)이라는 욕망을 정의(justice)라는 올바른 정신으로 이겨낸다’는

의미와 연결되어 있다.
  
조광조는 바로 이 이익이라는 욕망을 정의라는 가치로 이겨내고자 자신의 소중한 목숨을 버렸던 것이다.

그렇다면 조광조는 왜 이익으로부터 정의를 지켜내고자 했을까?

이하의 내용은 조광조에 대한 그간 연구물(정두희 이종호 최이돈 정옥자 이상성)을 참고하여

특히 그가 선비로서 현실 정치에서 보여준 활동을 ‘의(義)’라는 측면에서 정리해 본 것이다.
  
  
김굉필에게 수학
  
조광조의 본관(本貫)은 한양이고 자(字)는 효직(孝直), 호(號)는 정암(靜庵), 시호(諡號)는 문정(文正)이다.

개국(開國)공신 조온(趙溫)의 5대손이며, 감찰 원강(元綱)의 아들이다.

어천(魚川)찰방이던 아버지의 임지에서 무오사화(戊午士禍)로 유배 중인 김굉필(金宏弼)에게 수학했다.

1510년(중종 5) 진사시(進士試)를 장원(壯元)으로 통과하고 성균관에 들어가 공부하던 중,

성균관에서 학문과 수양이 뛰어난 자를 천거하게 되자

유생(儒生) 200여 명의 추천과 이조판서 안당(安?)의 천거로 1515년 조지서 사지(造紙署 司紙)에 임명됐다.

하지만 종6품이라는 파격적인 대우에도 불구하고 과거 출신이 아니었기에

정치의 중심에는 들어갈 수 없었다.

아쉬움을 느낀 조광조는 다시 성균관 알성시(謁聖試)에 응시하여 2등으로 합격했다. 
  
과거에 급제한 조광조는 성균관 전적(典籍)에 임명됐고,

이어 사헌부(司憲府) 감찰(監察)을 거쳐 1515년 11월에 사간원(司諫院) 정언(正言)이 됐다.

이후 조광조는 4년 동안 정치활동을 대부분 홍문관(弘文館)에서 한다.

홍문관에서 조광조는 왕을 교육하고 정책 자문에 응하고 신료들의 의견을 왕에게 전달하는 일을 했다.

1518년에 천거를 통해 과거 급제자를 뽑는 현량과(賢良科)의 실시를 주장하여

이듬해에는 천거로 올라온 120명을 대책(對策)으로 시험하여 28인을 선발했다.
  
1519년에는 중종반정(中宗反正)의 공신들이 너무 많을 뿐 아니라 부당한 녹훈자(錄勳者)가 있음을 비판, 

2등 공신 이하 76명에 이르는 인원의 훈작(勳爵)을 삭제했다.

1519년 11월 11일 공신 삭적이 이루어졌으나, 4일 뒤인 11월 15일에 비극적인 기묘사화(己卯士禍)로

조광조는 실각하게 되고, 결국 12월 16일에 붕당(朋黨)을 이루었다는 죄목으로 조광조의 사형이 결정된다.
  
이상이 조광조의 간략한 이력이다.

 

그렇다면 잘못 제정된 공신들을 바로잡은 지 4일 만에 조광조를 실각하게 만들었던

당시의 정치지형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조광조가 등장하기 이전부터 사림(士林)은 당시 정치 상황을 비판적으로 인식하고 있었다.

특히 세조의 집권, 연산군의 학정(虐政), 중종의 반정 등의 과정을 냉철하게 검토해 나갔다.
  
  
士林의 도전
  
사림은 먼저 세조의 집권과정에 문제를 제기했다.

훈구(勳舊) 세력이 이때부터 형성된 것으로 파악했기 때문이다.

사림파는 1512년(중종7)부터 소릉(昭陵) 복위문제를 제기했다.

소릉은 문종(文宗)의 비(妃)이며 단종(端宗)의 어머니인 현덕왕후(顯德王后)의 능으로,

단종이 폐위(廢位)되면서 함께 폐위됐다.

소릉 복위 논의는 단종 폐위의 부당성과 세조의 집권과정에 대한 문제점을 부각시키는 것으로

결국 1513년 소릉은 복위됐다. 
  
한편 이 시기에 중종반정의 주축이었던 3인, 즉 박원종(朴元宗), 유순정(柳順汀), 성희안(成希顔)이

각각 1510년, 1512년, 1513년에 사망한다. 중종은 1513년에 친정(親政)체제를 강화하겠다고 선언한다.
  
이후 사림은 연산군의 폭정에 피해를 입은 사림들을 주목했다.

먼저 김굉필, 정여창(鄭汝昌) 등 사림파의 지주(支柱)였던 인물들에 대한 처우 개선을 시작으로,

나아가 김굉필의 문묘배향(文廟配享)까지 추진하게 됐다.

문묘배향은 실패했으나 문묘배향 논의 자체가 이미 사림파의 정치적 입지를 강화해 주었다.

이러한 과정을 거치면서 사림파는 중종반정 공신을 형성하는 과정에 대한 문제까지 제기했다.
  
중종의 폐비(廢妃)인 신(愼)씨 복위(復位)문제를 제기한 것이다.

중종비 단경왕후(端敬王后)는 신수근(愼守勤)의 딸이었다.

그녀의 아버지인 신수근은 연산군 밑에서 좌의정을 지냈는데,

반정을 함께 하자는 박원종 등의 제의를 거절한 까닭에 반정 성공 이후 살해당했다.

그리고 단경왕후는 반정 직후 정국(靖國)공신들에 의해 폐출됐다.

시간이 흐른 1515년 계비인 장경왕후 윤씨(인종의 생모)가 죽자 사림은 신씨의 복위를 주장하고 나섰다.
  
폐비 신씨의 복위를 주장한 것은 단순히 복위 주장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중종반정 공신의 정당성을 문제 삼는 것으로, 박원종, 유순정, 성희안 등 반정 핵심인물들의 이름까지

거론하면서 이 문제를 제기했다. 상소가 올라간 지 3일째 되는 날,

사헌부와 사간원에서 사특(邪慝)한 의논을 올렸다는 이유로

상소를 올린 담양 부사 박상(朴祥)과 순창 군수 김정(金淨)을 문초할 것을 건의했다.
  
사태는 이제 신씨의 복위 여부가 아니라 이 문제를 제기한 김정, 박상 등의 처벌 여부로 번졌다.

의정부, 육조, 홍문관의 관원들은 임금의 구언(求言·절실한 사안에 대해 임금이 신하의 직언을 구하는 것)에 의한 상소를 벌줄 수 없다는 입장이었으나,

사헌부와 사간원의 처벌 요구가 강경해 결국 이들 2인은 유배됐다. 
  
  
“臺諫을 모두 파직하라!”
 

조광조 위패를 모신 경기도 용인의 심곡(深谷)서원. 조광조의 묘소가 함께 있다.


이런 상황에서 조광조는 사간원 정언에 임명됐다.

정언이 된 지 이틀 만에 조광조는 자신이 속한 사간원과 사헌부 관원을 모두 파직(罷職)시키라는 강경한 상소를 올렸다. 이들이 박상과 김정을 처벌하라고 주장한 행위는 정치에서 아주 중요한 요소인 언로(言路)를 막는 행위가 된다. 그러므로 언로를 막아버린 기존의 대간(臺諫)들과는 같이 일을 할 수 없다는 것이 조광조의 주장이었다.

이러한 조광조의 주장에 중종은 기존의 대간을 파직하고 새로운 대간을 임명했다. 조광조가 사림의 중심에 서게 된 것이다.
  
이후 조광조는 홍문관 부제학(副提學)에 이어 사헌부 대사헌(大司憲)에 오르면서 고속 승진을 하게 된다.

그리고 부제학과 대사헌으로 조광조의 활동 핵심은 현량과 실시와 정국공신(靖國功臣) 76인의 삭제였다.

그러나 잘못된 공신록을 바로잡은 지 4일 만에 조광조는 실각했고, 그의 실각과 더불어 현량과는 폐지됐다.

때문에 이 두 가지는 조광조의 실각과 직접 관련된다고 말할 수 있다.

따라서 조광조가 자신의 목숨을 담보로 추진했던 이 두 가지 행위를 주목할 필요가 있다.
  
먼저 현량과에 대해서 살펴보자. 한번 생각해 보라.

공직에 진출한 사람들이 모두 자기 자신의 이익(利)과 자기 집안의 영달이라는 이익을 위하여 질주할 때,

덕(德)이라는 의로움(義)으로 순화시켜 주지 못한다면 이 사회가 어떻게 될까?

정치란 결국 사람이 하는 일이다. 인사(人事)가 만사(萬事)이다.

그런데 인사 문제의 핵심은 현재 있는 자원의 활용에 있다. 
  
세종대왕의 시대에만 특별히 좋은 인재들이 넘쳐났던 것은 아니다.

세종대왕은 그 시대의 인물들 가운데서 필요한 사람을 적재적소(適材適所)에 활용했던 것이다. 
  
세종 시대가 너무 멀리 있다고 생각되면 현대로 내려와 보자.

우리에게 감동을 주었던 2002년 월드컵 4강 신화 역시 같은 맥락에서 말할 수 있다.

2002년에만 특별하게 우리나라에 뛰어난 축구 선수들이 넘쳐났던 것이 아니다.

히딩크 감독 역시 ‘있는 자원’을 활용한 것에 불과하지 않은가. 
  
그런데 사람의 자질은 성격만큼이나 제각각이다. 능력이 뛰어난 사람이 있다.

국가라는 큰 기구를 움직이는 데 능력은 필수이다. 하지만 능력과 인격이 정비례(正比例)하는 것은 아니다.

한 시대를 잘못된 방향으로 이끌어 간 사람들 또한 모두 뛰어난 능력의 소유자들 아닌가.

능력만 강조될 때의 폐해를 이 자리에서 굳이 서술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여기서 능력을 보완할 필요가 있다. 무엇으로 보완할 것인가.
  
  
임현사능(任賢使能)
  
조광조는 1518년 3월 경연에서

기존의 과거가 “문장에 따라 선발하면서 관원들이 부박(浮薄)한 폐가 있다”고 주장하고,

“문장과 더불어 덕행을 살펴 관원을 선발하자”고 주장했다.

말하자면 화려함만을 뽐내는 폐단을 지양하고 인간 됨됨이를 보아 선발하자는 취지다.

조광조는 바로 인간의 덕성이라는 가치로 능력이라는 우월성을 순화시켜 줄 필요를 느낀 것이다. 
  
사림들이 생각한 인사문제의 요체는 임현사능(任賢使能)이란 말에 잘 나타난다.

임현사능이란 문자 그대로 현명한 사람에게 맡기고, 능력 있는 사람은 부리자는 의미인데,

여기서 우리는 관작(官爵)이란 용어를 떠올릴 필요가 있다.

관(官)이란 능력 있는 자에게 주는 것이라면, 작(爵)은 덕이 있는 자에게 주는 것이다.

관원들의 능력만을 중시할 때의 폐해를 작이라는 덕성으로 보완해 주어야 한다고 인식했던 것이다.

여러 차례 사화를 겪으면서 능력보다는 인품과 덕망에 의한 인사의 중요성이 절실하여 이에 주목했다. 
  
사실 천거제를 활성화하려는 사림의 노력은 성종(재위 1469~1494) 때부터 구체화됐다.

천거제의 대상은 지방의 선비들이었으나 성종 때 이후 성균관 유생들의 주류가 지방 선비들로 채워지면서

성균관 유생도 그 대상에 추가됐다. 이처럼 천거제는 점차 활성화됐으나

그 활성화의 정도, 즉 얼마나 많은 인원을 어느 정도의 직급에 임명할 것인가에 대한 논의가 계속됐고,

사림파의 계속된 노력으로 천거제는 더욱 활성화되어 6품직까지 줄 수 있게 됐다.

조광조가 성균관의 천거를 받아 종6품직에 오른 것도 위와 같은 사림의 노력에 따른 결과였다. 
  
그런데 이제 활성화의 목표는 한 차원 높아져서 천거로 관직에 진출한 이들이

과거 출신자와 같은 자격을 얻도록 하는 것이었다.

천거로 과거에 오른 경우 중요한 직책에는 오를 수 없었기에 조광조 또한 과거를 보아야 했다.

이를 위해 제기된 방안이 현량과라고 알려진 천거 별시(別試)였다.

이는 과거제의 별시와 천거제를 조합하여 과거제 안에서 천거제를 실시하려는 것이었다.

조광조 등의 강력한 주장에 의해 결국 현량과가 실시됐고,

앞에서 본 바와 같이 천거로 올라온 120명 중에서 28인을 선발했다. 
  
  
위훈(僞勳)삭제 논란
 

조광조의 위패를 모신 서울의 도봉서원.

서울에 있는 유일한 서원이다.


다음은 공신(功臣) 삭제에 대해 살펴보자.

연산군을 축출하고 중종이 즉위한 직후, 박원종, 성희안, 유순정 등 반정에 공이 있는 이들을 공신에 올리는 논공(論功) 작업이 있었다. 문제는 공신의 수가 무려 109명이나 됐다는 사실이다. 공이 있는 자에게 상을 준다는 것은 당연한 일이지만 문제는 공이 없는 자까지 포함됐다는 것이다.

정치에서는 명분이 필요할 때가 있기 마련이다.

신상필벌(信賞必罰)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기강을 세울 수가 없기 때문이다.
  
건국 초기부터 조선 왕조에서는 여러 번의 공신 책봉이 있었다.

건국 직후의 개국공신(開國功臣) 39인, 제1차 왕자의 난 후의 정사공신(定社功臣) 18인,

태종 즉위 직후 좌명공신(佐命功臣) 39인, 계유정난 후의 정난공신(靖難功臣) 36인,

세조 즉위 후의 좌익공신(佐翼功臣) 41인, 이시애 난 후의 적개공신(敵愾功臣) 41인,

남이(南怡) 장군 옥사(獄事) 후의 익대공신(翊戴功臣) 37인,

성종 즉위 후의 좌리공신(佐理功臣) 75인 등이다. 
  
그러나 중종 즉위 직후의 정국공신처럼 공신의 수가 많았던 적은 없었다.

이처럼 공신의 수가 많다는 것은 공신 책봉의 기준이 엄격하지 않았음을 의미한다. 
  
조광조는 당시 선비들의 행태가 바르지 못한 원인을

“이익(利)만 알고 의리(義)를 모르는 데서 나온 것”으로 진단했다.

따라서 “외람되게 정해진 훈공을 고치지 않는다면 이익의 근원을 막을 길을 원천적으로 차단할 수 없다”고 본 것이다. 
  
하지만 중종은 “작은 공이라도 이미 공을 정했는데, 뒤에 개정하는 것은 옳지 않다”며 반대했다.

이후 삼사(三司 · 사헌부 사간원 홍문관)를 중심으로 이 문제를 적극적으로 제기했으나

중종이 허락을 하지 않자 사헌부와 사간원의 관원들은 사직을 청하는 강공으로 대응했다. 
  
조광조는 단언했다. 
  
“공신을 중하게 여기면 공을 탐하고 이로움을 탐해서

왕을 시해(弑害)하고 나라를 빼앗는 일이 이로 말미암아 일어나게 된다.

임금이 만약 나라를 잘 다스리고자 한다면 이(利)의 근원을 막아야 한다.

지금 정국공신을 개정하지 않는다면 국가를 유지할 수 없다.” 
  
  
‘있는 정치’보다는 ‘있어야 할 정치’에 초점
  
조광조는 당시를 위기의 시대로 단정했으며

이 위기는 공자(孔子)의 가르침을 정치 현장에서 제대로 시행하지 않는 데서 비롯된 것이라고 확신했다.
  
세조의 찬탈, 연산군의 학정, 그리고 또다시 반정. 이러한 일련의 사건들은

지성인들이라면 눈 감고 방관해서는 안 되는 사안들이 아닌가?

직접 부딪혀서 풀어내야 할 시대의 화두(話頭) 그 자체들일 수밖에 없지 않은가?

충효(忠孝)를 강조하는 조선왕조에서 어떻게 신하가 군주를 죽일 수 있으며,

모든 정치행위를 학문과 덕성의 발로로 이해하던 당시에

어떻게 연산군 같은 반유교적인 학정이 자행될 수 있는가. 행하지 않는 지식이 무슨 필요가 있는가. 
  
조광조는 중종 10년에 있었던 알성문과에서 제출한

그의 대책문(중종이 출제한 시험문제의 내용은 자신이 재위 10여 년 동안 온갖 노력을 다했음에도 아직

국가의 기강과 법도가 서지 못하는 까닭과 이에 대한 대책을 말해 보라는 것이었다)에서

공자의 말대로 다스리면 그 다스림의 효과는 반드시 나타날 것이라고 주장했다. 
  
조광조는 중종대의 정치사회적인 문제는 왕을 비롯한 사대부들의 마음이

공자의 도에서 멀어졌기 때문이기에, 당시 조선 사회의 문제점에 대해서 현실적인 접근을 모색하기 이전에

공자의 가르침이 그 사회의 명백한 목표가 되어야 할 것임을 무엇보다도 강조했다.
  
이러한 조광조의 입장은 ‘있는 정치’보다는 ‘있어야 할 정치’에 초점이 있는 것이다.

이 점은 오늘날 조광조에 대해 또 다른 측면에서 생각해 보아야 할 우리의 숙제다.

하지만 이 글에서는 이 문제를 더 이상 거론하지 않기로 한다.

그 대신 서론에서 언급했던 이(利)와 의(義)를 다시 상기해 보기로 한다. 
  
  
샌델과 조광조
 

《정의란 무엇인가》의 저자 마이클 샌델.

이익이라는 측면을 과연 부정적으로만 볼 것인지를 논하기에 앞서 한 번 생각해 보자. 사회지도층 인사들이 모두 이익만 추구한다면 국가의 위기를 이겨낼 방법은 영원히 없는 것 아닌가. 
  
오늘날 현대 자본주의는 인간의 욕망을 극대화하고 그에 따른 경쟁을 부추김으로써 성장해 왔다. 이러한 체제의 유지 논리인 공리주의(功利主義)나 실용주의(實用主義)에서 도출된 실리주의(實利主義)가 현대인의 삶의 기준으로 자리 잡았다.

 

샌델은 이러한 현대 사회의 문제점을 반성한 사람 가운데 한 명이다.

샌델은 ‘가격’만 중시하는 풍조를 비판하면서 ‘가치’의 의미를 부각시킨다. 한편 조광조는 아예 가격을 제외시켰다.

조광조가 보기에 가격이란 이 세상을 타락시키고 오염시키는 주범이었다. 
  
샌델은 수많은 사례를 들고 있다. 하지만 아쉽게도 정의가 무엇인지 명쾌한 결론을 내려주진 않는다.

그 대신 수많은 사례들을 통해 무엇이 옳은 일인지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하도록 유도한다.

실제 정의라는 추상적인 개념을 규정하는 것 자체가 사실상 불가능하며,

설사 규정한다 해도 오류가 많기 십상이다.

따라서 세련된 말장난에 그치기 쉬울 수밖에 없는 정의(正義)를 정의(定義)내리기보다는,

오히려 진솔해 보이는 샌델의 이러한 전개방식에 우리 독자들은 큰 관심을 보였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엄청난 판매부수를 자랑하는 샌델의 저서는

어디까지나 정의에 대한 진지한 고민 이상을 뛰어넘을 수 없다. 
  
여기서 필자는 샌델과 조광조의 차이를 비교해 본다.

샌델이 정의에 대하여 진지하게 생각해 보고자 했다면, 조광조는 정의 그 자체를 위해 자신의 삶을 살았다.

반복하면 샌델은 정의에 ‘대하여(about)’ 말했고, 조광조는 정의 그 ‘자체(itself)’를 살았던 것이다. 
  
그래서 조광조를 통해서 보는 정의는 명료하다.

샌델의 저서는 우리들로 하여금 정의가 무엇인가라는 고민을 안길 수는 있지만,

우리의 심장을 뛰게 하지는 못한다. 하지만 조광조의 삶을 읽어 가는 그 과정에서

우리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정의’, ‘옳은 일’ 등의 실체를 만나게 될 수 있다.
  
조광조가 훈구파들과의 권력투쟁의 일환으로 공신록을 개정하고
자신들의 세력을 키우기 위해

현량과를 시행했다고 아주 단순하게 권력 정치의 측면에서 그의 행적을 평가절하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조광조는 의(義)로운 국가를 실현할 수 있다고 믿었고,

실천했던 열정적인 인물이었다. 조광조의 초상은 나에게 묻고 있다. 
  
샌델을 읽고, 조광조 나를 읽고 이해하기에 앞서 네가 서 있는 이 땅은 지금 과연 정의로운가.

너는 과연 네가 서 있는 이 땅의 부조리와 불합리를 얼마나 심각하게 주목하고 있는가.

그리고 그것의 개선을 위해 네 몫을 다하고 있는가.

- 최진홍 서울대 한국정치연구소 선임연구원 · 정치학 박사

- 2011년 2월 14일 ⓒ 월간조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