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켜(연재자료)

1. <인(仁)> 조선의 선비정신 - 율곡과 心

Gijuzzang Dream 2011. 2. 14. 16:27

 

 

 

 

 

 

 

 조선의 선비정신 - 율곡과 心

 

 

 

‘폐정(弊政)의 원인은 간의 소통 단절’

 

 

 

율곡은 임금이 정치를 잘하겠다는 마음(心)만으로는 정치를 잘할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 마음 자체가 없다면 시작 자체가 불가능하게 된다고 여겼다.

여기서 율곡은 선조에게 임금의 마음을 강조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인심도심설(人心道心說), 이기론(理氣論) 등은 인간의 정치적 실천방법에 대한 근거 제시 때문에

그가 선조에게 진언한 것이었다.

 

 

 

 

‘양반이란 무엇인가?’란 글(<월간조선> 2010년, 2월호)을 쓴 인연으로

<월간조선> 측에서 1년간 연재를 해 보자는 제안을 해 왔다.

글쓰기에 영 소질이 없어 글 잘 쓰는 사람들에게 항시 콤플렉스를 느끼며 살아온 필자는

꽤나 부담이 되어 망설였다. 하지만 <월간조선>의 제안에 매력을 느껴 엉겁결에 떠맡게 되었다.

 

<월간조선>의 제안은 인(仁) 의(義) 예(禮) 지(智) 신(信) 등의 글자를 통해

조선 선비들의 정신세계를 살펴보자는 것이었다.

조선조 선비들의 인식과 실천을 살펴보자는 것이었는데,

정말로 중요하게 다가온 구절은

바로 ‘사변적(思辨的) 논의보다는 실제사례’를 중심으로 정리해 보자는 내용이었다.
  
사변적 논의보다는 실제사례라! 이것은 아직 일천하지만 필자가 계속 추구해 온 공부 방식이었다.

주저할 이유가 없었다. 실제사례 연구에 앞서 주제어부터 선정해 봤다.

 

앞으로 총 12글자를 따라가게 될 것이다.

인(仁) · 의(義) · 예(禮) · 지(智) · 신(信) · 성(誠) · 경(敬) · 중(中) · 화(和) · 충(忠) · 효(孝) · 심(心)

 

이 글자들은 우리가 우리의 전통과 역사를 다룰 때, 자주 마주치는 글자들이라 익숙한 느낌이 들지만

왠지 오늘날과는 어울리지 않는, 그래서 자녀들에게 알려주기에 약간 부담스러운 글자들이다.

그런데 우리가 이런 글자들을 말할 때 느끼는 부담은 우리의 말하기 방식에서 시작되는 것이기도 하다.
  
위의 글자들은 모두 뜻글자이므로 각각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하지만 그 의미를 글자 자체에서 찾으려 한다면 그 작업 자체가 공허해진다.

 

‘어짊(仁)’이라는 뜻을 도대체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필자는 그 글자가 사용된 실제사례를 통해서 살펴볼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비유하자면 모든 색은 실체가 없는 것과 같다.

‘붉은 색’ 자체는 실체가 없다. 하지만 ‘붉은 꽃’, ‘붉은 종이’ 등 그 구체적인 대상과 만남으로써

우리는 그것이 ‘붉은 색’임을 알 수 있게 되는 것과 같은 이치다.

 

- 최진홍/ 서울대 한국정치연구소 선임연구원 · 정치학 박사

⊙ 1963년생.
⊙ 고려대 정치외교학과 졸업. 서울대 정치학 박사.
⊙ 현 서울대 한국정치연구소 선임연구원.
⊙ 저서 : 《법과 소통의 정치》.

  

 

 


율곡과 理氣論
  
그 구체성을 찾아가는 여행길의 첫 동반자는

조선조 중기의 인물 ‘율곡 이이(栗谷 李珥·1536~1584)와 마음 심(心)’으로 결정했다.

율곡으로 결정한 이유는 필자에게 조선조 인물 가운데 가장 익숙한 분이 율곡이기 때문이다.

필자는 율곡이라는 인물을 연구하여 학위논문을 썼고, 또 그 논문을 정리하여 책으로도 출판하였다.

이러한 이유로 율곡으로부터 시작하는 것이 가장 무난하고 또 솔직한 태도라고 생각한다. 
  
그동안 필자가 율곡에게 주목한 점은 ‘차가운 이론’이 아니라

그의 처절하면서도 뜨거운 ‘삶’이란 측면이었다. 흔히 ‘아는 만큼만 보인다’고들 말하지만,

필자는 그 말에 앞서서 ‘살아본 만큼만 알 수 있다’는 표현을 좋아한다.

산다는 것이 안다는 것보다 선행(先行)한다는 생각이다.
  
처절하고 생생한 삶의 현장은 결코 세련됨을 추구하지 않는다.

투박하고 진솔한 한 인물의 삶 속에서 우리에게 필요한 지혜를 발견할 때,

우리는 우리의 역사적 사료들을 ‘역사(歷史)’ 자체로 남겨두지 않고

우리의 소중한 ‘국사(國史)’로 자리매김할 수 있게 된다.
  
하지만 율곡의 동반자로 ‘심(心)’을 택한 이유는 좀 설명이 필요하다.

우리 학계에서 ‘율곡’과 함께 떠올리는 대표적인 용어는 이기론(理氣論)이다.

하지만 도대체 그 이기론이 과연 현실 문제와 구체적으로 무슨 관련이 있는지에 대해서는 설명이 부족했다.

부족한 정도가 아니라 현실 세계와는 다른 차원의 이야기처럼 설명되어져 왔다는 것이

더 정확한 표현일 정도로 율곡의 이기론은 그다지 현실과는 관련성을 맺지 못했던 것이 사실이다.
  
율곡을 연구하면서 필자는 항상 궁금했다.

과연 율곡의 이기론이 현실과는 관련 없는 공리공담(空理空談)이었을까?   

사실 율곡이 이기론 등의 성리학적 주장을 언급한 사례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는 조금 다르다. 율곡 하면 이기론이 가장 먼저 떠오를 정도로 너무나 많이 들어 왔기 때문에 우리는 율곡이 평생 이기론을 이야기했을 것으로 착각하기 쉽다.

하지만 율곡이 국왕 선조(宣祖·재위 1567~1608)에게 직 · 간접적으로 이기론 등을 언급한 경우는 <성학집요(聖學輯要)>의 ‘궁리(窮理)’편과 ‘인심도심설(人心道心說)’이 전부이다. 
  
그런데 율곡은 길지 않은 삶(49세에 작고)을 사는 동안에 130여 편의 상소문(上疏文)을 남겼다.

그 상소문의 주요 내용은 당시의 부조리에 대한 고발과 그에 대한 처방책을 제시하는 것이었다.

율곡은 당시의 수많은 문제점을 폐(弊)라는 말로 집약했다.

그가 남긴 상소문은 자연스럽게 폐의 내용으로 가득 채워졌다. 
  
그렇다면 폐와 이기론은 무슨 관계가 있을까?

필자는 이 글에서 율곡의 이기론이 그가 평생을 주목했던 당시 현실의 수많은 폐와 무슨 관련을 갖고 있는지 살펴보고자 한다.

그리고 이를 위해 마음 심(心)이란 글자를 주목했다.
  
  
임꺽정의 난을 현장에서 체험 

조선일보에 연재됐던 홍명희의 소설 <임꺽정> 속의 임꺽정의 모습.


글의 전개를 위해 율곡이 전하는 당시의 상황을 먼저 살펴보기로 한다.

 

율곡이 본 당시의 민생(民生)은 기본적인 삶조차 영위할 수 없을 정도로 비참한 상태였다. 먹고살 길이 막연하게 되자 ‘장정들은 사방으로 흩어지고, 약한 자들은 도랑과 구덩이를 메울 정도로 죽어 가, 울부짖는 백성들이 마치 나뭇가지에 걸려 말라 죽는 풀잎과 같아서 마침내는 곤경이 극도에 달해 난리를 일으키는 지경에 이르고 말 것’이라는 것이 율곡이 전하는 당시의 민생이었다.

율곡은 당시의 민생을 민란(民亂)과 관련시키고 있었던 것이다.
  
양주의 백정출신으로 전해지는 임꺽정이 도적이 되어 출몰했던 1559년은 척족(戚族) 윤원형(尹元衡·?~1565, 명종의 외숙)과 이량(李樑·1519~1563, 명종비 심씨의 외숙)의 일파가 발호하여 온 나라가 그들의 세도에 눌려 있었다.

반대로 왕의 권위는 땅에 떨어져 있는 상황이었다.

사회는 온통 부정과 부패로 얼룩져 있었고,

학정(虐政)과 수탈에 시달리던 백성들은 그 고통을 호소할 곳조차 없었다.

설상가상으로 몇 년 째 흉년이 계속되었으며,

이에 앞서 섬나라 왜구(倭寇)에 의한 을묘왜란(乙卯倭亂)이 1555년에 일어났었다. 
  
임꺽정은 이러한 상황에서 등장했다.

처음에 민가를 돌아다니며 도둑질을 일삼던 임꺽정은 세력이 커지자 황해도로 진출하여

구월산 등지에 본거지를 두고 주변 고을을 노략질하기 시작했다.

조정에서 보낸 선전관(宣傳官)이 그들에게 잡혀 죽는 사건까지 발생했다.

임꺽정 무리는 1560년에는 마침내 서울까지 세력을 넓혔다.

임꺽정은 이후 1562년 체포되어 처형을 당하기까지 황해도 경기도 강원도 등지에서 활동하였다.
  
공교롭게도 임꺽정이 활동하던 바로 그 시기, 그 지역에 율곡이 머물고 있었다.

율곡은 1561년 5월에 부친상을 당하여 그의 친가인 파주에서 3년상(喪)을 치르게 된다. 
  
필자는 오래 전에 율곡의 자취를 좇아서 파주 여행을 해 본 적이 있다.
이 여행길에서 흥미롭게도

파주 인근의 경치 좋은 지역마다 옛날 임꺽정이 출몰했었다는 기록들을 만날 수 있었다.

율곡은 바로 임꺽정의 난을 현장에서 경험했던 것이다.

그리고 이 경험은 그의 생애 내내 그가 풀어내야 할 화두가 되었다.
  
  
愛民과 安民
 

율곡의 자취가 남아 있는 파주 화석정.

율곡은 파주에서 시묘살이를 하면서 임꺽정의 난을 겪었다.


사회과학의 영원한 화두는 ‘개인’과 ‘사회’라는 두 개의 축을 어떻게 관계 짓는가에 있다.

‘개인’을 강조하는 사람들은 말한다.

‘사회란 결국 개인들로 이루어진 것에 불과한 것이다.’

하지만 사회를 강조하는 사람들은 이렇게 반박한다.

‘사회를 떠난 개인을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느냐?

사회를 떠난 개인은 이미 우리가 아는 개인이 아니다.’

‘계란이냐, 닭이냐?’와 비슷한 이 논지에서

우리는 우리의 입장을 선택하게 된다. 
  
율곡은 임꺽정의 난을 임꺽정 개인의 문제보다는 사회의 문제로 인식하였다. 율곡이 생각하기에 백성들이 도적이 되는 까닭은 바로 위정자들이 해야 할 일을 제대로 하지 않은 것에 있었기 때문이다.

율곡은 ‘백성이 나라의 근본’이라는 막연한 수사를 좋아하지 않았다.

하지만 당시의 많은 지식인들은 백성이 나라의 근본-민유방본(民惟邦本)-이란 용어를

입에 달고 살았음에도 불구하고 정작 그 구체적인 내용에는 침묵으로 일관하였다.
  
하지만 율곡은 달랐다. 율곡은 추상적이고 관념적인 용어에 살을 붙여 실체를 만들었다.

나라의 근본이라고 인식되었지만 그 실체를 갖지 못한 채

원칙적인 용어에만 머물던 '백성(民)'이란 단어가 자신의 몸을 가질 때, 자신의 실체를 가질 때,

그 모습을 율곡은 '민생(民生)'이라 불렀다. 민생이란 백성들의 실제 삶의 모습을 말한다.

그런데 당시의 민생은 앞에서 본 바와 같이 노약자들은 죽어 나가고 장정들은 도적이 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으며, 임꺽정은 황해도 강원도 경기도 등을 그들의 ‘해방구(解放區)’로 만들어 버렸던 것이다.
  
'민(民)'이 아닌 '민생(民生)'을 주목한 율곡은 백성들의 삶이 편안해야 한다는 안민(安民)을 주장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애민(愛民)’이 아니라 안민이란 점이다.

백성‘이’ 편안하다는 안민과 백성‘을’ 사랑한다는 애민은 일견 비슷한 용어처럼 보이지만

상당한 차이를 가지고 있다. 애민주의는 ‘백성이 나라의 근본’이라는 원칙론에 머물기 쉽다.

그렇게 되면 백성은 사라지고 ‘애민’이란 구호만 남게 된다.

하지만 안민을 주목하게 되면 구체적인 민생을 고민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그렇다면 율곡이 생각한 안민의 방법은 무엇일까?

안민의 방법에 대해 율곡 또한 어진 정치, 즉 인정(仁政)을 주장하였다.

그런데 율곡이 말하는 인정이란 거창한 구호도 아니고 막연히 좋은 것이란 의미도 아니었다.

율곡이 말한 인정은 백성들로 하여금 제자리를 찾게 해 주는 것, 그래서 생업(生業)을 즐기게 해 주는 것,

바로 그것이었다. 그렇다면 백성들은 왜 제 자리를 찾지 못했던 것일까? 
  
정치란 결국 세금과 재판의 문제이다.

세금을 혹독하게 부과하고, 백성들의 억울함을 풀어 줄 재판이 공정성을 잃게 된다면,

국가는 ‘조직폭력배’와 다른 것이 없게 된다.

도적으로 태어난 사람은 없다. 도적들도 원래는 모두 백성이었다. 
  
  
弊法을 개혁하라
  
율곡은 역설한다.

죽기를 좋아하고 살기를 싫어하는 사람은 없고 편안함을 버리고 위태로움을 택하는 자가 있을 수 없는데도,

백성들이 도적이 된 것은 결국 그럴 수밖에 없는 사정이 있기 때문이라고.

백성이 도적이 된 것은 정치의 결함 때문이다.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의 문제인 것이다.

율곡은 계속 말한다.

정치가 제대로 행해진다면, 백성들을 날마다 때리면서 도적질을 강요한다 해도 절대로 하지 않을 것이라고.
  
율곡이 시묘살이를 하는 동안에 임꺽정의 난은 진압되었다.

3년상을 마치고 율곡이 출사(出仕)를 한 것은 그의 나이 29세인 1564년 8월이었다.

그런데 율곡이 관직 생활을 시작한 다음해인 1565년(명종 20년)에 문정왕후가 사망함으로

조선 정치는 새로운 국면에 접어든다.

명종의 생모인 문정왕후는 명종이 성인이 될 때까지(12~20세) 수렴청정(垂簾聽政)했던 인물이다.

이러한 이유로 문정왕후의 사망은 단순히 왕실 어른 중 한 사람의 죽음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

당시의 정치 상황에서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문정왕후의 사망은 명종이 왕위에 오르자 을사사화(乙巳士禍)를 일으켜

명종 시대 내내 최고 권력자로서 독점적 지위를 향유한 윤원형 등을 중심으로 한 권간(權姦) 세력의 몰락과,

을사사화로 중앙 정치와 제도권으로부터 소외되었던 세력들의 정치적 복권을 의미했다.

또한 문정왕후가 자신의 정치 세력을 강화하기 위한 목적으로

보우(普雨)라는 중을 통해 추진했던 숭불(崇佛) 정책의 해체를 의미했다.
  
한 번 기가 꺾인 권력이 몰락하는 데는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문정왕후의 장례식이 끝나기도 전에 이미 보우는 제주도 유배에 처해졌고 그곳에서 죽음을 당한다.

7월에 문정왕후의 장례식이 치러진 지 한 달 만에 영원할 것만 같던 윤원형은

그 ‘유명한’ 동반자 정난정과 함께 축출되어 생을 마감한다. 바야흐로 새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실록은 ‘춤을 추며 환호’하는 백성들의 모습으로 당시의 분위기를 전해 주고 있다.
  
율곡이 관직 생활을 시작한 시기는 바로 이렇게 새로운 희망으로 한껏 마음이 부풀어 오른 시기였다.

그런데 참으로 이상했다. 새로운 시대가 도래했는데도, 민생은 조금도 나아지지를 못했다.

나아지기는커녕 윤원형 등이 집권했을 때보다도 오히려 민생은 어려운 부분이 많았다.

하지만 사람들은 권간이 사라졌다고,

요즘 식으로 말하면 ‘민주화’가 되었다는 그 감격만으로 당시를 ‘태평성대(太平聖代)’로 여기고 싶어했다.
  
율곡의 작업은 바로 새로운 시대가 도래했음에도 불구하고,

왜 민생은 하나도 나아지지 못하고 오히려 더 악화되었는지를 규명하는 것으로 모아진다.

그 이유를 고민한 율곡이 내린 결론이 바로 폐(弊)였다.

율곡의 관직 생활은 전(前) 시대의 권간들이 남긴 유폐(遺弊)를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 하는 문제로

시작되었다. 율곡의 유폐에 대한 관심은 이후 폐법(弊法)이라는 조금은 더 구체적인 문제로 발전하였다.
  
그 이유는 전 시대의 폐가 여전히 성행하는 원인이

잘못된 법, 즉 폐법의 형태로 존재하는 데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폐에서 폐법으로 옮아갔던 율곡의 현실정치에 대한 관심은

후기에 이르러서는 폐정(弊政)이라는 주제로 옮아가게 된다.

율곡은 20년 가까운 그의 관직 생활 내내 폐법을 개혁하고자 눈물겨운 노력을 기울였지만

그가 거둔 성과는 미미했다.

율곡은 그의 생애 후반부에 와서 폐법이 개혁되지 못하는 이유를 폐정이란 요소로 정리한다. 
  
  
마음 자체가 없다면 시작 자체가 불가능하게 된다
  
그렇다면 율곡이 지목한 폐정은 무엇일까?

율곡은 폐정의 핵심으로 ‘소통의 단절’을 생각하고 있었다.

어머니 문정왕후의 그늘에 가려 변변한 목소리를 내지 못하던 명종은

문정왕후의 사후 나름대로의 개혁을 시도하였다. 하지만 어머니의 기에 너무나 눌려 살아온 탓인지,

문정왕후가 사망한 지 2년 만에 34세의 나이로 명종은 승하하고 만다.

명종이 후사를 남겨 놓지 못한 채 승하한 까닭에 중종의 7남인 덕흥군의 셋째 아들이 그 뒤를 이으니,

그가 조선조 14대왕 선조이다.
  
율곡에게는 두 개의 근본이 있었다.

하나는 나라의 근본인 백성이었고, 다른 하나는 정치의 근본인 임금이었다.

선조는 정치의 근본으로서의 자신의 모습을 낯설어했다.

하지만 율곡은 정치에서 임금이 갖는 위치를 강조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이유는 임금과 신하는 근본적으로 차이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신하들이란 사적인 욕망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울 수 없는 존재이므로 임금과는 확연한 차이가 있었다.
  
물론 역사상 공적인 삶을 살다 간, 그래서 후세에 존경을 받는 인물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이러한 사람들의 행위를 모든 정치인들에게 강요할 수는 없는 일이다.

그리고 공적인 삶을 살다 간 인물들조차 그 공적인 삶은 순간이었을 뿐이다.

다시 말하면 완전한 공적인 사람은 있을 수 없다. 다만 공적인 순간을 살았을 뿐이다.

율곡 역시 모든 관리를 공적인 인물들로 채우는 일이 무리라고 인식한다.

하지만 율곡은 임금이란 지위는 유일하게 공적인 삶을 살 수 있으며, 또 살아야 한다고 인식하였다. 
  
율곡은 임금이 정치를 잘하겠다는 마음(心)만으로는 정치를 잘할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 마음 자체가 없다면 시작 자체가 불가능하게 된다고 여겼다.

여기서 율곡은 선조에게 임금의 마음을 강조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인심도심설, 이기론 등은 인간의 정치적 실천방법에 대한 근거 제시 때문에 선조에게 진언한 것이었다. 
  
  
준비론과 결정론
  
여기서 필자는 정치를 방해하는 두 가지 요소를 생각해 본다. 첫째는 ‘준비론’이고, 둘째는 ‘결정론’이다.
  
선조는 ‘수신제가치국평천하(修身齊家治國平天下)’라는 원론적(原論的)인 이야기로

자신의 소극적인 자세를 변명한다.

학문을 쌓아서 덕행(德行)이 완성된 다음에야 좋은 정치를 할 수 있다는 것이 선조의 주장이었다.

선조의 이러한 소극적이고 원칙적인 자세를 율곡은 반박했다.

선조가 인용한 수신제가치국평천하란 원칙적인 설명일 뿐이라고. 
  
이유는 간단하다.

덕행이란 것은 하루아침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며, 정치란 것은 잠시도 폐지할 수 없는 것이다.

선조 말대로라면 공부를 통한 덕이 완성되기 전까지 정치를 방치할 수밖에 없게 된다.

이렇게 되면 정치를 할 수 있는 순간은 어쩌면 영원히 오지 않을 수도 있다. 
  
율곡은 군주(君主)의 수신(修身)을 중요하게 인식하였지만,

군주가 수신이 될 때까지 마냥 방치할 수만은 없는 것이 바로 정치가 갖는 속성임을 주목했다.

‘수신’을 윤리적이며 규범적으로 강조하는 입장이 확장되면 ‘준비론’으로 흐르게 되어

결국에는 군주의 수신이 완성될 때까지 정치는 뇌사(腦死)상태로 놓이게 되고,

마침내 개점휴업 상태에 들어갈 수밖에 없다는 점을 율곡은 인식하고 있었다.
  
한편 인심(人心)과 도심(道心)의 출발이 처음부터 다르다고 보는 견해는

인간사 모든 사안들은 이미 결정되어 있다는 ‘결정론’으로 흐를 수 있다.

‘이(理)와 기(氣)가 서로 발한다’고 하면, 인간이 정치의 세계에서 할 일이 없어지고,

되는 대로 맡겨버리는 결과를 초래한다는 것으로 정리할 수 있다. 이 점을 염려한 율곡은

‘사람은 도(道)를 넓힐 수 있되, 도는 사람을 넓힐 수 없다’는 공자(孔子)의 말을 이용해 문제를 해결한다.
  
율곡은 ‘발하는 것은 기(氣)이고 발하는 까닭은 이(理)이다.

기가 아니면 발할 수 없고 이가 아니면 발할 까닭이 없다’고 단언한다.

그리고 자신의 이 말은 ‘성인(=공자)이 다시 태어난다 해도 고치지 못할 것’이라고 못 박는다. 
  
율곡이 이 점을 이토록 강력하게 주장한 이유는

정치란 바로 인간들이 만들어 가는 ‘과정’이란 점을 강조하기 위해서였다.

결과가 아닌 과정이기에 정해진 것이 있을 수 없다.

우리네 인생도, 우리네 역사도 정해진 궤도가 있어서 그 궤도를 그대로 따라가는 것은 아니다.

따라서 당연히 정답이 있을 수 없다. 그때그때의 상황에 맞게 최선을 다하는 길이 있을 뿐이다.
  
율곡은 말한다.

‘만약 이와 기가 서로 발한다고 하면 이 이와 기라는 두 물(物)이 각각 마음속에 뿌리를 박고서,

발하기 전부터 이미 인심·도심의 싹(묘맥 · 苗脈)이 있어,

이가 발하면 도심이 되고 기가 발하면 인심이 될 것이다.

그렇다면 내 마음에 두 근본이 있는 것이니, 이는 크게 잘못된 생각’이라고.
  
  
군주의 소통 강조
  
율곡이 당시의 폐정이 해결되지 못하는 원인으로

실제 정치의 담당자인 군주와 신하들 간의 소외(疏外)라는 문제를 지목하였고,

군신 간의 소외를 극복하기 위해서 무엇보다도 군주가 소통 지향적 태도를 가져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였다.

그 소통지향적인 태도를 갖게 하기 위해서

율곡은 선조에게 ‘마음(心)’이라는 글자를 설명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그 마음 자체는 실체가 있는 것이 아니다.

 마치 ‘붉은 색’은 실체가 없지만 ‘붉은 꽃’은 실체를 가질 수 있듯이

우리네 마음도 그 사용(용심·用心)에 따라 실체를 가지게 될 것이다.

- 최진홍 서울대 한국정치연구소 선임연구원 · 정치학 박사

- 2011년 1월호 월간조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