찾아 떠나고(답사)

태화관 터

Gijuzzang Dream 2011. 2. 8. 00:44

 

 

 

 

 

 태화관 터 - 삼일독립선언 유적지

 

 

 

 

 

‘吾等은 玆에 我朝鮮의 獨立國임과 朝鮮人의 自主民임을 宣言하노라’

(오등은 자에 아조선의 독립국임과 조선인의 자주민임을 선언하노라)

 

이렇게 시작되는 독립선언서가 엄숙하게 낭독되는 동안 방안에는 무거운 긴장이 감돌았다.

때는 일제의 식민치하에 있던 1919년 3월 1일 오후 3시, 장소는 종로에 있는 태화관이었다.

 

독립선언서에 서명한 33인 중에서 길선주, 유여대, 김병조, 정춘수가 빠진 29인이 함께 했다.

참석자는 손병희를 비롯해 권동진, 오세창, 임예환, 나인협, 홍기조, 박준승, 양한묵, 권병덕, 김완규,

나용환, 이종훈, 홍병기, 이종일, 최린, 이승훈, 박희도, 이갑성, 오화영, 최성모, 이필주, 김창준, 신석구,

박동완, 신홍식, 양전백, 이명룡, 한용운, 백용성 등 민족대표들이었다.

 

‘우리는 이에 조선이 독립국임과 조선인이 자주민임을 선언한다.

이 선언을 세계 온 나라에 알리어 인류 평등의 크고 바른 도리를 분명히 하며,

이것을 후손들에게 깨우쳐 우리 민족이 자기의 힘으로 살아가는 정당한 권리를

길이 지녀 누리게 하려는 것이다,’

 

독립선언서에 이어 ‘공약3장’이 낭독되고 행사가 끝난 시간은 오후 4시 무렵이었다.

이들은 곧 일제의 총독부 정무총감 야마가타 이자부로에게 전화를 걸어 독립선언 사실을 알렸다.

우리민족과 나라가 자주민족임과 자주국가임을 알리는 독립선언을 한 사실을 당당하게 통보한 것이다.

 

곧 총검을 든 60여명의 일제 헌병과 순사들이 들이닥쳐

이들을 남산의 정무총감부와 지금의 중부경찰서로 연행해갔다.

저녁 무렵에 현장에 도착한 길선주와 유여대, 김병조, 정춘수도

동지들이 붙잡혀간 경찰서로 스스로 찾아들어갔다.

 

 

 

왕실 사당 터, 매국노의 집, 구국운동 장소로...


본래 독립선언서는 태화관에서 500여 m 떨어진 탑골공원에서 낭독하기로 했었는데 장소가 바뀐 것이다.

본래의 약속장소인 탑골공원에는 오후 2시부터 학생들이 모여들었다.

이들은 3시가 지날 때까지 민족대표 33인이 보이지 않자 처음에는 당황했으나

경신학교 출신 정재용이 공원 중앙에 있는 팔각정에 올라가 독립선언서를 낭독했다.

 

며칠 전부터 거사에 대비하여 인근 승동교회에 모여 모의, 비밀리에 알려 모여든 학생들이

1천여 명이나 되었다. 정재용이 독립선언서를 낭독하자

학생들과 군중들은 미리 준비해온 태극기를 흔들며 힘차게 ‘대한독립 만세’를 외치기 시작했다.

 

이들이 만세를 부르며 종로거리로 나서자

거리에 있던 사람들도 합세하여 수만 명의 군중들이 만세시위에 동참했다.

기미년 3.1 독립만세운동은 이렇게 시작되어 요원의 불길처럼 경향 각지로 퍼져 나갔다.

 

민족대표 33인이 독립선언서를 낭독한 태화관은

본래 조선 중종반정 때의 정국공신 구수영이 살던 곳이었다.

조선 후기에는 철종임금 때 영의정을 지낸 김흥근의 소유였다가

제24대 헌종(재위 1834∼1849)의 후궁인 경빈 김씨의 사당이던 순화궁(順和宮)이 되었다.

일제 강점기엔 매국노 이완용의 손으로 넘어갔다.

 

헌종은 효헌왕후가 16세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나자 후궁을 간택했는데,

그때 사계 김장생의 8대손인 김재청의 딸 광산 김씨를 후궁으로 맞아들였다. 그가 바로 경빈 김씨다.

헌종은 경빈 김씨를 총애해 자신과 경빈이 함께 사용할 건물을 지었는데

그 건물이 다름 아닌 창덕궁의 낙선재였다.

그리고 경빈의 처소로 특별히 지은 건물이 낙선재 안의 석복헌이다.

 

1907년 고종황제가 일제의 강압으로 퇴위되자 분노한 군중들은

중구 악현(지금의 중림동)에 있는 이완용을 집을 불태웠다.

그래서 이완용이 순화궁으로 거처를 옮긴 것이다.

이완용이 이곳 순화궁 터에서 거주하던 어느 날, 마당에 있는 거목에 벼락이 떨어졌다.

크게 놀란 이완용은 옥인동에 대저택을 지어 이사했다.

 

매국노 이완용이 살다가 떠난 순화궁 터에는 태화관이라는 여관건물이 들어섰는데

1917년 당시 유명한 요정이었던 명월관의 별관이 되었다.

왕실의 사당건물에서 요정으로 전락한 순화궁은

1919년 3월1일 독립선언서가 낭독된 역사의 현장이 된 것이다.

 

요정 태화관은 다음해인 1920년 기독교 남감리회에 매각되었고,

감리교에서는 1937년 기존 건물을 철거하고 ‘태화여자관’을 신축했다.

그 후 1980년 도심 재개발 사업으로 옛 건물이 다시 철거되고

12층짜리 태화빌딩이 들어서 현재에 이르고 있다.

 

나라를 잃은 민족지도자 33인이 서명한 3.1 독립선언서가 낭독된 태화관 옛터를 찾은 날도

매서운 강추위가 몰아치고 있었다. 종각역 3번 출구를 나서 종로타위빌딩 옆 골목으로 200여 m쯤 걸어

인사동으로 들어가자 오른편에 12층 건물이 나타난다.

 

계단 위 건물 앞에는 ‘태화빌딩’이라는 표지석과 건물입구를 사이에 두고

‘삼일독립선언유적지’라는 표지석이 안내문과 함께 세워져 있다.

조금 더 올라가자 인사동 사거리로 구부러지는 길가에 ‘순화궁 터’라는 표지석이 있다.

이곳이 옛 조선왕실의 사당이 있던 곳으로 매국노가 거주하기도 하고,

요정이 되었지만 쓰러진 나라를 일으켜 세우려고 구국의 횃불을 올린 ‘역사의 현장’이 되었던 곳임을

어렴풋이 짐작하게 해주고 있었다.

- 2011.02.01 Hi 서울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