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주짱의 하늘꿈 역사방

찾아 떠나고(답사)

정동제일교회

Gijuzzang Dream 2011. 1. 13. 00:10

 

 

 

 

 

 

 정동제일교회

 

1885년 아펜젤러가 세운 신문화 운동 요람

 

 

 

 

교회창립 123주년을 맞은 정동제일교회는 건립한 지 30년이 넘는 본당을 중심으로

리노베이션 등 중장기 마스터플랜을 마련하고 있다.

 

 

한국교회의 역사는 세계 기독교 역사상 유례를 찾아보기 어려울 만큼 독특하다.

전래된 과정도 그렇고 교회의 성장과 시련 등이 모두 경이적이다.

한국교회는 독립운동의 견인차였고 사회를 깨끗하게 하는 소금이었다.

하지만 언제부터인지 성장 위주로 치달으면서 부작용도 낳고 있다.

교권 다툼이나 진보와 보수, 계파간 주도권 대립도 극복해야 할 과제다.

 

선교 2세기에 들어선 한국교회에 소모적인 논쟁과 다툼을 극복하고 거듭나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교회 창립 100여년이 넘은 교회를 탐방, 어제와 오늘의 흔적을 살펴봄으로써

한국교회의 바람직한 선교 좌표를 모색해본다.

1885년 4월5일 부활절 아침. 동방의 고요한 아침의 나라에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씨앗이 뿌려졌다.

한국 최초의 감리교 선교사로 미북장로교 소속 언더우드와

인천 제물포에 첫발을 내디딘 헨리 아펜젤러(1858∼1902) 부부는 배에서 내리자마자 간절하게 기도했다.

 

"우리는 부활절 날 이곳에 도착했습니다.

오늘 죽음의 철창을 산산이 깨뜨리시고 부활하신 주께서 이 나라 백성들을 얽어맨 결박을 끊으시고,

그들에게 하나님의 자녀가 누리는 자유와 빛을 허락해 주옵소서."


아펜젤러 목사(1858-1902)

우리나라 최초의 감리교 목사이자, 이 땅에 감리교 역사를 뿌리내린 아펜젤러 목사는 

미국 감리교 선교부로부터 한국 선교사로 1895년 4월 5일 부활주일날

감리교의 스크랜튼 목사와 함께 조선에 도착하였다.

아펜젤러 목사는 고종황제의 허락으로 이 곳에서 선교사업, 교육사업, 봉사활동 등 많은 일을 하였는데, 

첫째가 한국 최초의 개신교 교회인 정동제일교회를 세우고 기독교문화를 꽃피운 일이다.

아펜젤러 목사는 최초의 감리교 모교회건물인 문화재예배당을 짓고

정동교회의 초대 목사가 되어 조선인의 민족 복음화에 한평생 힘썼으며,

한글 신약성서 번역작업을 통해 우리 나라 성서보급에도 큰 일을 하였다.

그리고 교육사업을 통해 배재학당을 건립하고 민족의 지식사업에 열정을 다 하였다.

아펜젤러 목사가 목포에서 해난 충돌사고로 순직하기 전까지 전 생애를 바쳐 

배재학당과 정동제일감리교회, 그리고 한글 신약성서를 남겼던 위대한 선교사요, 교육자요, 선각자였다.   


◇개신교 유일한 문화재 예배당

=개신교 유일한 문화재 예배당인 정동제일교회 벧엘예배당(문화재 사적 256호)이 있다.

123년전 7월 말 이곳에 도착한 아펜젤러는 8월3일부터 한국 학생들에게 영어를 가르쳤다.

10월11일에는 한국 개신교 최초의 성찬식을 집례했다. 정동제일교회는 이날을 창립기념일로 삼고 있다.

 

1886년 6월8일 정식으로 학교 문을 열었다.

1887년 2월 고종 황제는 배재학당(培材學堂)이라는 교명을 내렸으며

매리 스크랜턴이 운영하는 여학교 이름은 이화학당(梨花學堂)으로 불렀다.

남녀 학생들은 자연스럽게 벧엘예배당에 모였다.

예배당 건물은 문화재로서의 가치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상징하는 한국 최초의 빅토리아식 고딕 적벽돌 서양 건축물이다.

설립 당시에는 장안의 명물로 구경하는 사람들이 장사진을 이루기도 했다.

강단의 강대상은 한국 개신교 최초의 것으로

이후 한국 개신교의 모든 교회가 같은 형태로 제작해 사용하고 있다.

 

또한 한국 최초의 파이프 오르간, 세상을 깨운다는 '경세종(警世鍾)' 등도 자랑거리.

이 파이프 오르간을 중심으로 현대식 성가대가 구성돼

김애식 김인식 김자경 김영의 이흥렬 현제명 등 많은 음악인이 배출됐다.

파이프 오르간은 6·25전쟁으로 소실됐었는데

2003년 9월12일 고 이종덕 권사 유족의 헌금으로 복원해 봉헌했다.

◇복음의 씨앗이 민족의 등불로

=정동교회 교인의 대부분은 배재학당과 이화학당 학생들로 구성됐다.

두 학교 학생들은 주일성수를 지켰으며 엡윗(존 웨슬리의 고향 이름)청년회 운동에 적극적이었다.

서재필과 윤치호 등 독립협회 중심 인물들이 이들을 지도했다.

1887년엔 배재학당 안에 인쇄 시설이 마련됐다.

 

개신교 역사상 최초의 인쇄소는

한글, 영어, 한문 등 세 종류의 활자를 구비했다는 의미에서 '삼문출판사'로 불렸다.

독립신문, 죠션그리스도인회보 등의 신문과 초기 찬송가도 여기에서 출판됐다.

 

 

우리나라 최초의 출판인쇄소, 정동 삼문인쇄소


정동제일교회와 배재학당, 이화학당이 자리잡고있는 정동 34번지 일원은

기독교 문화 유적지로 한국 신문화와 신교육의 발상지이기도 하다.

 

기독교 문화지로 지정된 정동제일교회의 일원은

초대 선교사인 아펜젤러 목사 부부가 1885년 이곳에 와서

처음 머물렀던 보구여관과 시병원 건물이 있었던 곳이며,

이 두 건물이 헐린 후 이곳에는 배재식당의 기숙사와 한국 최초의 민간도서관인 종람관이 있어서

한국 최초의 일간신문인 독립신문과 매일신문이 이곳에서 발간되었을 뿐 아니라

이광수의 무정, 심훈의 상록수 등이 이 인쇄소에서 발간되었고

이곳 종람관(도서실)독서회에서는 이광수, 김동인, 남궁억, 주요한, 전영택, 심훈 등이 밤낮으로 모여

책을 읽고 토론함으로 한국 최초의 문예지 <백조>가 이 곳에서 발간되었을 뿐만 아니라

이광수의 무정, 심훈의 상록수 등이 쓰여진 곳이기도 하다.

특히 이 곳에 있었던 배재학당 기숙사는

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 아관파천 반대, 을사조약 반대에 이어 삼일 독립운동에 이르기까지

우국 충군 애국지사들의 모임장소이며 대피소이기도 한 한국 독립운동의 발원지였다.  

 

현대식 예식인 '예배당 결혼'이 최초로 거행됐다.

1887년 11월 여성 전용 병원도 생겼다.

1910년 11월11일에는 한국 기독교 최초의 여선교회인 '보호여회(保護女會)'가 창립됐다.

제5대 담임목사로 취임한 현순 목사는 1919년 상하이 임시정부 수립에 참여했다.

제6대 담임목사로 취임한 손정도 목사는 교회를 부흥시킨 민족 운동가였으며

제7대 담임을 역임한 이필주 목사는 3·1운동 때 민족대표 33인의 한 사람으로 참여,

2년8개월간의 옥고를 치르는 고난을 겪었다.

 

유관순 열사는 이화학당에 입학한 때부터 일요일이면 정동제일교회 예배에 참석하며

겨레와 함께 불꽃 같은 삶을 살았다.

우남 이승만과 정동제일교회의 인연은 그가 1894년 배재학당에 입학하면서 시작됐다.

재학시절 서재필의 지도 아래 협성회, 독립협회 등의 간부로 활동하다가 투옥된다.

이승만은 옥중에서 기독교로 개종한 뒤 40여명을 개종시켰다.

해방이 되자 단독 정부 수립을 추진했고 1948년 8월15일 마침내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에 취임했다.

◇한반도 짊어질 NEW 정동의 꿈

=정동제일교회는 선교 2세기를 맞으면서 복음에 빚진 교회로서 베풀고 나누는 교회로 거듭나고 있다.

알마티정동교회, 세네갈정동교회를 비롯해 해외 선교와 국내의 미자립교회 30곳을 지원하고 있다.

2004년에는 직장인 예배를 활성화시켰다.

매주 수요일 낮 12시10분 주변 직장인을 대상으로 예배를 드리고 애찬을 나눈다.

직장인들이 잠시 일상에서 벗어나 평화를 맛보는 기회로 삼는다.

정동젊은이교회는 젊은이를 통해 민족의 새로운 미래를 개척했던

아펜젤러의 선교 정신을 계승하기 위해 세운 젊은이 신앙공동체다.

21세기 한국 사회와 세계 속에 그리스도의 사랑과 평화를 심는 크리스천 리더들을 양육하고 있다.

지난해 6월 송기성 담임목사가 취임하면서 교회는 역동적으로 변했다.

새벽기도회와 금요기도회가 활발해졌으며 예배시간도 활력이 넘친다.

미래의 정동을 설계하기 위한 '발전위원회'도 가동 중이다.

발전위원회는 교회 본당 리노베이션 등 청사진을 마련하고 있다.

송 목사는 "교회의 마스 플랜을 세우기 위해 선교와 교육, 재무, 목회 등에 대한 자료를 분석하고 있다"면서

"이를 토대로 정동교회의 SWOT(장점 약점 기회 위협)를 정확히 도출해

새로운 100년의 비전을 세워나갈 계획"이라고 말했다.

-2008년 11월3일 국민일보

 

 

 

정동제일교회

 

서울특별시 중구 정동(貞洞)에 있는 한국 최초의 프로테스탄트 교회 건축물이다.

1977년 11월 22일 사적 제256호로 지정되었다.

1895년 9월에 착공, 이듬해 헌당식(獻堂式)을 거행하고

1897년 10월 무렵에 준공된 고딕풍의 붉은 벽돌 건축물이다.

 

교회 내부는 평천장(平天障)에 별다른 장식 없이 간결하고 소박하며

기단(基壇)은 석조(石造)이고 남쪽 모퉁이에 종탑을 세웠다.

건물은 벽돌쌓기로 큰 벽체를 구성하고 아치 모양의 창문을 낸 고딕 양식의 교회당이다.

 

1926년 양쪽 모퉁이를 넓혀 삼랑식(三廊式) 평면형으로 교회 건물을 증축하였으며

1953년에는 6·25전쟁으로 반파(半破)된 교회를 수리하여 복원하였다.

 

정동교회의 역사는 1885년 10월 11일, 미국 북감리교 선교부 목사 아펜젤러가

정동에 마련한 '벧엘예배당'이라는 그의 집에서,

감리교회로서는 처음으로 한국인을 위한 공중예배를 가짐으로써 시작되었는데,

이 날 여자 한 사람을 포함한 4명의 신자가 예배를 드리고 세례를 받았다.

 

아펜젤러는 이보다 앞서 1885년 6월에 입국하였으나,

당시 조선 정부로부터 그리스도교의 전도사업이 공식적으로 승인되지 않아

배재학당(培材學堂)을 세워 신학문 교육부터 시작하였다.

 

정동교회는 1889년 한국 최초의 월간잡지 《교회》를 발간하여 자유주의 사상을 불어넣기 위해 힘썼고,

1897년에는 미국의 엡�청년회 운동을 도입하여 청년사업을 전개하였는데,

1922년에는 한국 최초로 여름성경학교를 개설하는 등 선구적인 선교활동을 전개한

한국 감리교회의 대표적인 교회이다. (네이버 백과사전)

 

 

- 감리교회 조선선교 50주년 기념비

1884년 6월 24일 선교사 매클레이 박사가 인천에 도착,

이날을 기점으로 1934년은 조선 감리교회의 50주년에 해당하는 해가 되므로 

조선 감리교회는 1935년 4월 부활절을 기해 50주년 행사를 갖게 된다.

 

기념비에 사용된 돌은 이끼가 끼지 않을뿐더러 견고하고 화려하기로 이름난 보령 염포오석이다.

비석 전면에는 "감리교회 조선선교 오십주년기념비. 기독교조선감리회교우일동건립"이라고,

후면에는 "부활주일에 조선과 만주에 있는 감리교회에서 기념 헌금한 것과 유지들의 기부로

1936년 4월 12일 부활주일에 이를 건립하였다"고 쓰여있다

 

 

정동제일교회 건축물은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식 예배당으로

감리교 창시자 요한 웨슬리의 신앙정신이 담겨있는 영국 빅토리아풍 고딕식 붉은벽돌 건물로

이 땅에 예수그리스도의 몸된 성전을 최초로 형상화 한 것이다.

 

한국감리교회의 창시자이며 정동제일교회의 설립자인 아펜젤러 목사는

1895년 연회에서 500명 정도를 수용할 수 있는 서울제일감리교회당을 정동에 건축하도록 허럭받은 후

4년동안 정동교회당 건축을 위해 모든 노력을 다했다.

이 예배당은 길이 77척 너비 40척 높이 25척으로 회당안에 좌우로 좁은 방 하나씩,

그 길이는 28척, 너비는 14척 11평으로 설계되어 1895년 8월 7일에 착공되었다.

그해에 기초공사를 끝냈고, 1896년에는 지붕을 얹었다.

1897년 6월에는 거의 완공되어 배재학당의 졸업식을 이 첫 예배당에서 하였으며

정동교인들이 입당한 것은 10월 3일 주일이었으나

1897년 12월 26일 성탄주일을 기해 하나님과 이 민족앞에 봉헌하였다.

 

이 예배당은 500명을 수용할 수 있는 당시 최대의 건물이었으나

1914년 대부흥운동으로 교인수가 2천명 이상으로 늘어나자

1926년 모퉁이 주춧돌을 종각 남쪽 모퉁이 서편으로 옮겨놓고

동으로 10자, 남으로 14자, 합 60평형을 증축하여 175평 건물로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이와 같이 정동(문화재)예배당은

1887년 건축, 봉헌될 때부터 한국 감리교회와 민족의 흐름 속에서 그 중심축 역할을 감내했다.

봉건적 신분 차별과 여성 차별에서 아직 벗어나지 못했을 때

정동(문화재)예배당은 새로운 빛을 던져 준 것이다.

정동 예배당에서 남녀를 가르는 휘장이 벗겨졌을 때 낡은 봉건적 사고는 이미 깨지기 시작한 것.

일제의 억압도, 공산주의의 도정도 정동교회는 극복할 수 있었다.

또한 수 많은 기독교 정신을 갖춘 인재를 배출할 수 있었다.

 

 

한편,

고종황제로부터 한국에서 의료사업과 교육사업을 할 수 있도록 허락을 받는데 성공한

미국 감리교 선교부는 곧 한국에서 일할 선교사를 물색한다.

이에 응하여 나선 사람이 바로 의료선교사 스크랜튼과 여성선교사 스크랜튼 대부인,

그리고 아펜젤러이다.

1885년 1월 14일 드류신학교의 교수들과 학생들은 한국을 향해 떠나는 아펜젤러를 위하여

성대한 환송예배를 올린다.

 

그들의 환송을 받으며 뉴욕을 떠난 아펜젤러 부부는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하였다.

2월 2일 파울러 감독으로부터 목사안수를 받고 한국행의 명령을 받은 것이다.

그곳에는 이미 스크랜튼 부부와 스크랜튼 대부인이 와 있었으며,

이들 일행 5인은 1885년 2월 3일에 기선 편으로 샌프란시스코를 출발한다.

한국 선교단 일행은 2월 27일에 일본에 도착하여, 기다리고 있던 일본 주재 선교사 메클레이를 만난다.

그리하여 이들 6인은 3월 5일 도쿄에 있는 메클레이 박사 댁에서 첫 한국선교사회의를 연다.

 

그런데 한국은 그 전해말 갑신정변의 후유증으로 정국이 불안한 상태에 있었다.

따라서 한국 선교사 일행은 정국이 진행될 때까지 기다려야만 했다.

그러다 한국 정세가 다소 호전됨에 따라 이들은 서울을 향해 출발하되 분산하여 가기로 한다.

 

선발대로 나선 아펜젤러 부부는 3월 23일에 한국을 향해 요코하마를 떠난다.

나카사키를 거쳐 제물포로 가는 배에는 장로교 선교사 언더우드 목사가 함께 타고 있었다.

이들이 탄 배는 우선 부산에 닿았다가 다시 제물포로 향한다.

목적지 제물포에 도착한 것은 1885년 4월 5일. 곧 부활절이었다

 

 

시병원

 

의료사업과 교육활동의 허락을 받고 들어 온 세 선교사들은 각기 자기분야에서 일을 시작한다.

스크랜튼은 도착하자마자 우선 장로교의 의사 알렌을 도와 광혜원에서 일했고

9월부터는 자기 집에서 진료활동을 시작한다.

1886년 봄에는 정동에 별도의 건물을 구입하여 병원으로 개조하고 그해 6월 15일에 정식으로 문을 연다.

그는 개원 8개월만에 522명의 환자를 치료하는 놀라운 역사를 이루었고

이에 감동한 고종황제는 다음해 진료소 이름을 "시(施)병원" 이라 이름지어준다.

인술을 베푼다는 뜻과 함께 스크랜튼의 한국인 이름인 시란돈의 '시'자를 딴 것으로 이해된다.

 

보구여관

 

1887년 스크랜튼 대부인에 의해 정동 이화학당 구내에 설립된

최초의 부인 병원인 보구여관 (保球女館)은 하워드 여의사에 이어

1890년 10월 셔우드, 홀 의사 부부가 맡아 운영하면서 크게 발전,

1892년 대중이 많이 모이는 동대문시약소 (보구여관 동대문 분원)를 개설하고,

1899년 가을 보구여관이 옮겨오면서 1912년 한국 최대의 규모의 부인병원 건물을 완공하게 된다.

이 병원은 동대문 교회와 함께 오늘날 이화여대 부속병원으로 발전하였다. 

 

벧엘에서의 첫 세례식, 성만찬식

 

1888년도 연례보고서에서 아펜젤러는 이 역사적인 사건에 대해 되풀이하여 보고함으로써

그 역사적 의미를 부각시키고 있다.

곧 벧엘 예배당에서의 첫 예배와 첫 세례식, 그리고 첫 성만찬식이 그것이다.

 

"10월 16일. 일요일에 28세의 젊은 부인인 최씨의 아내에게 세례를 주었다.

그는 물음에 정확하게 대답했다.

아마 그는 이 땅에서 개신교 선교사에게서 첫 세례를 받은 최초의 여성일 것이다.

우리 감리교가 안방에까지 진출하게 되어 기쁘다.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여성들이 또 있다. 이 첫 열매를 축복하소서."

 

정동제일교회 벧엘예배당

 

정동제일교회를 상징하는 것은 ‘벧엘예배당’이다.

1887년 9월 14일 조선을 방문중이던 워른 감독의 승인하에

아펜젤러 목사는 정동에 사방 8×16 피트의 한옥 한 채를 구입하고 이곳을 ‘벧엘예배당’ 이라고 명명했다.

이 벧엘예배당에서 정동제일교회 최초의 예배가 1887년 10월 9일에 봉헌되었다.

이 벧엘예배당이 한국감리교회의 요람이며, 정동제일교회의 초석이 된 것이다.

또한 이 예배당은 정동제일교회의 뿌리일 뿐 아니라

한국감리교회, 나아가 한국기독교와 근대 이후 우리 민족의 좌표가 되었다.

 

1913년 아펜젤러 목사 사후 일어난 기념사업 중

기념비는 뜻을 이루지 못했으나 아펜젤러 기념현판과 기념종은 결실을 맺었다.

1907년 모금을 시작한 기념종은 1913년 결실을 맺었다.

최병헌은 아펜젤러 기념종의 명칭을 ‘세상을 깨운다’ 혹은 ‘세상을 깨우친다’는 뜻으로

‘경세종(警世鍾)’ 혹은 ‘각세종(覺世鍾)’이라 하였다.

이 종은 지금도 정동제일교회 문화재예배당 종탑에 걸려 있다.

 

 

 

 

 

 

 

 

 

 



추억의 길에서 만나다

새벽에 내린 서울의 첫 눈에 대한 아쉬움을 더하듯, 노랗게 익은 나뭇잎들이 눈송이처럼 흩날린다.

늦가을과 초겨울의 기막힌 만남이 아름다운 한낮이었다.

덕수궁의 돌담을 따라 어느새 작은 골목에 들어섰고, 세월을 거스르는 여행에 그녀도 첫 발을 내딛었다.

눈부신 그녀의 미소에는 작은 설렘과 여유들이 가득했다.


정동MBC의 마지막 세대였던 배우 오미희. 그때 당시 정동을 거닐던 사람들은 모두 정동을 닮아있었다. 아날로그적 감성이 풍부했던 그 시대, 어쩌면 같은 장소는

다양한 사람들을 닮게 만드는 재주가 있는 것 같다.

“이곳에 오니 20대의 추억들이 되살아나는 것 같아요.

그 때 꿈꿨던 30년 후의 모습들도 돌아보게 됩니다.”

골목을 따라 얼마 걷지 않아, 드디어 붉은 벽돌의 정동교회와 마주했다. 그녀에게 정동교회는 낯선 곳이 아니다.

1980년대 ‘홍난파’라는 드라마 촬영 차 방문했던 기억이 아련한, 추억이 담긴 곳이다. 근대음악가들의 산실이기도 했던 정동교회, 홍난파의 부인 역을 맡아 이곳을 방문했던 그녀에게 그저 ‘드라마’의 장소로 기억되었던 곳이다. 하지만 ‘정동교회’가 어떤 곳인지를 알게 되면서 오늘에 와서 그 추억은 더 깊어지고, 애틋한 감정이 새롭게 살아났다.

“정동교회가 이 땅에 뿌리를 박고, 든든히 견뎌줬다는 사실에 감사해요. 내가 미처 관심을 갖지 못하고 있었을 때에도,

많은 사람들로 인해 잘 견뎌주었잖아요.

오랜 역사와 더불어 이 시대를 함께 느끼며 살아가고 있다고 생각하니 더 감사하네요.” 
  

지금 이 순간의 역사를 품다          

1897년 ‘벧엘 예배당’이라는 이름 아래 한국 기독교상 첫 예배가 이루어졌던 곳이 바로 ‘정동교회’다.

오랜 세월과 모진 풍파 끝에 붉은 벽돌로 지어진 ‘정동교회 예배당’은 사적 제256호로 지정되면서

‘문화재 예배당’이라는 별칭도 갖게 되었다.

이 예배당은 단순히 한국 기독교의 시작을 알리는 것에서 그치는 장소가 아니었다.

당시 불우했던 사람들을 돌보는 곳이기도 했고

대한민국의 독립을 간구했던 지도자들의 고민까지 담겨있는 독립운동의 산실이기도 했던 것이다.

더불어 국내에 최초로 파이프오르간을 들여놓은 것을 시작으로

개화기에 많은 음악가들을 배출했던 곳이기도 하다.


“문화재가 의미 있는 것은 사람들의 흔적이 고스란히 담겨있다는 것 때문이죠.

이 예배당의 벽돌을 하나하나 쌓았던 사람들의 손길과

실질적인 구제와 더불어 영적인 구제를 꿈꿨던 아펜젤러 선교사와 동역자들의 꿈이 담겨 있다고

생각하면, 그 장소가 주는 감동은 더욱 클 수밖에 없어요.”

‘안녕’ 조차 귀했던 조용한 아침의 나라에서 아펜젤러 선교사가 꾸었던 꿈은

어쩌면 당시에는 무모해 보였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벧엘 예배당’은 굳건히 그 자리를 지키고 있으며, 이 땅의 개신교는 앞선 선교사들의 본을 받아 생각 이상으로 멋진 날개를 활짝 폈다.  


“숭례문이 불타기 전에 사람들 사이에서 그저 ‘이정표’의 역할을 했던 적이 있었어요.

‘남대문’이 이야기 해주는 역사와 여러 이야기들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었죠.

하나의 초처럼 불태워지고 나서 우리는 그제야 그의 소리를 들으려고 했지만, 들을 수 없게 되었어요. 문화재가 들려주는 이야기에 우리는 귀를 기울일 필요가 있어요.”


오늘에 고마움을 느끼다  

자그마하지만 역사가 숨 쉬고 있는 정동교회의 마당을 지나, ‘문화재예배당’에 들어서니 고요한 성스러움이 그녀를 감싼다.

역사를 간직한 교회에서 풍겨지는 엄숙함조차 그녀에게 친숙하게 느껴진다. 오래된 강대상의 나뭇결과 거대한 파이프 오르간, 그저 놓여 있는 작은 성경책까지 누군가의 손길 위에 자신의 손길을 덧대어 본다.

 

“시간이 지날수록, 나이가 들수록 오래된 것들에 대한 애정이 생겨요. 심지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이 아름답게 보일 정도에요. 정동에서 30년 후를 꿈꿨던 20대의 제 모습이 생각나네요.

이제 난 오늘을 고마워하며 살아야겠다는 꿈을 꾸어요. 오늘을 잘살아야 내일 좋은 열매를 맺겠죠.

제겐 하루하루가 소중하고 애틋합니다.”

 

고요한 ‘문화재예배당’이 갑자기 분주해진다.

이곳에서 토요일 모임을 계획한 청년들이 무언가를 준비하는데 여념이 없다.

성탄이 다가오는 12월의 길목이기 때문에 초록빛, 빨간빛 나는 소품들도 한아름 들고 있다.

“이곳이 여전히 사람들의 손길, 발길로 채워지는 문화재라는 사실이 감격스럽네요.

앞으로도 정동교회는 이런 사람들의 ‘기도’로 인해 지켜져 가야겠죠.

정동교회와의 만남이 오랫동안 가슴에 남을 것 같아요.”   

 

글 · 김진희/ 사진 · 김병구

- 문화재청, 월간문화재사랑, 201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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