찾아 떠나고(답사)

경희궁과 경희궁 터

Gijuzzang Dream 2011. 1. 7. 18:48

 

 

 

 

 

 

 

 

경희궁(慶熙宮)과 경희궁 터

260년간 법궁 역할 대신한 조선 후기 대표 궁궐

 

서울에 살고 있으면서도 서울의 역사나 유적에 대해서는 주의를 덜 기울이는 경우가 흔하다. 서울에 대해 잘 알고 있다는 선입견과, 언제든 찾아가기만 하면 반갑게 맞이해줄 것이라는 안도감이 그러한 태도를 만들지는 않았을까? 조선의 도읍지로서, 더 거슬러 올라가 선사시대부터 삶의 터전이 되었던 서울의 역사를 하나씩 드러냄으로써 독자들이 서울에 대한 자긍심을 갖게 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서울역사기행' 코너를 기획했다. 매주 금요일 독자들을 찾아간다.

 

 

1,500칸 건물 들어선 경희궁, 광해군 15년(1623) 완공

서울역사박물관은 종로구 새문길 50번지(신문로 2가 2-1) 옛 경희궁터에 있다.

경희궁은 조선시대 5대 궁궐의 하나이며,

창덕궁과 창경궁을 동궐(東闕)로 부를 때 경희궁은 서쪽에 있다 하여 서궐(西闕)이라 칭하였다.

 

서울 종로에서 태어나 줄곧 서울에서 살아온 필자의 경우 어려서 경희궁에 대해 들어본 적이 없다.

경희궁보다는 그저 옛 서울고등학교 자리였고, 지금도 택시를 타고 갈 때 경희궁 가자고 하는 것보다

광화문 구세군회관이나 옛 서울고등학교 자리로 가자는 것이 더 익숙하다.

서울에서 태어나 살면서 어찌 경희궁이라는 이름을 못 들었을까.

경복궁, 창경궁, 창덕궁, 덕수궁 등에 소풍이다, 야유회다, 사생대회다 해서 자주 가본 기억은 생생한데

경희궁에 관해서는 학교는 물론 사회에서도 들어본 적이 없다. 이유는 명확하다.

경희궁을 제외한 궁궐은 건물이 남아 있었으나(물론 상당히 많이 훼손되거나 멸실되었지만),

경희궁은 건물 한 점 남아 있지 않은 완전 폐허 상태였기 때문이다.

경복궁 등 4개의 궁궐은 궁으로 있지만 유독 경희궁은 궁터로 존재하고 있는 이유이다.

 

경희궁에 대한 연혁을 알아보기로 한다.

임진왜란으로 궁궐과 조정의 주요 기관이 소실되었는데

광해군(光海君) 대에 들어서서 궁궐 중건사업이 활발히 추진되었다.

광해군은 즉위하면서 바로 종묘와 창덕궁의 주요 전각을 완공하였고,

한편으로 지금의 종로구 효자동 일대에 인경궁(仁慶宮)을 짓고자 대규모 건설 사업을 벌이기에 이르렀다.

 

마침 왕 측근의 술사(術士)가 이르기를

새문동(지금의 종로구 신문로)에 왕기(王氣)가 서려 있으니 권좌를 위해 궁궐을 지어야 한다는 말에

인경궁 공사를 접고 경희궁 공사를 실시하게 되었던 것이다.

 

광해군 9년(1617)에 시작된 공사는

인조반정(仁祖反正)으로 광해군이 권좌에서 물러나게 되는 광해군 15년(1623)에 완공하게 된다.

『궁궐지(宮闕志)』에 의하면

창건 때 정전(正殿), 동궁(東宮), 침전(寢殿), 별당(別堂) 등 1,500칸에 이르는 건물이었다고 기록되어 있으며,

당시의 면적은 7만여 평으로

지금의 새문안길, 서울시 교육청과 옛 기상대 건물이 있는 홍파동, 사직동 일부가 이에 해당된다.

 

 

1910년 이후 경성중학교로 사용되면서 축소되기 시작, 1920년대 흔적 없이 사라져

궁은 이궁(離宮)이면서 인조 이후 철종(哲宗)에 이르기까지 10대, 260년간에 걸쳐 임금이 머물면서

경복궁과 창덕궁이 갖고 있던 법궁(法宮)의 역할을 대신한 조선시대 후기의 대표적인 궁궐이었다.

철종 12년(1861) 창덕궁으로 옮기면서 경희궁 시대가 막을 내리게 되고,

그 이후 빈 궁궐로 남아 있으면서 서서히 훼손되기 시작했다.

 

1908년에 간행된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에

당시 경희궁에는 100여 채의 전각이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경희궁은 1910년 이후 일제에 의해 경성중학교로 사용되면서 그 면적도 절반 정도로 축소되었으며,

1920년대에 궁궐이 흔적도 없이 사라지게 되었고, 더욱이 이 자리에 해방 이후에는

서울중고등학교가 세워지면서 경희궁은 세인의 뇌리에서 자취를 감추게 되었던 것이다.

 

1978년 서울고등학교가 강남으로 이전하면서 비어있던 터를 민간기업인 현대건설이 매입하였는데,

현대건설은 이 자리에 사옥(社屋)을 지으려고 계획하고 있었다.

뒤늦게 서울시가 경희궁 공원으로 조성하기 위해 1984년 다시 매입하고 나서부터 터를 찾게 되었고,

사적 271호로 지정되었다.

최근 들어 서울시가 경희궁 터에 대한 발굴을 거쳐

경희궁의 정전(正殿)인 숭정전(崇政殿)과 그 일부를 복원하였고

2002년부터 시민들에게 공개하기 시작하였다.

 

경희궁 옛터 안에 서울역사박물관이 2002년 5월 21일 자리를 잡게 되었다.

경희궁 터는 공원지구로 조성되어 현재 경희궁 공원으로 남게 되었고,

그런 연고로 시민들의 산보와 휴식장소로 변모하고 있다.

이제 서울역사박물관을 가기 위해서는 경희궁 공원으로 가면 되듯이

더 이상 옛 서울고등학교 터로 인식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사종민(서울역사박물관 교육홍보과장)

2010.05.06  하이서울뉴스.  [서울역사기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