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 위의 삶, 부보상
국립중앙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 단원 김홍도의 풍속화(보물 제527호)에 등장하는 인물들을 유심히 살펴보시죠.
25가지 생활풍속화를 엮은 화첩 중 하나로,
낡은 벙거지를 쓰고 지게를 멘 사내와 아이를 업고 머리에는 광주리를 받쳐 인 아낙네가 행상을 떠나는 모습입니다.
봇짐장수와 등짐장수를 통틀어 이르는 부보상(負褓商) 또는 보부상의 모델이라고나 할까요.
짐을 진 부상(負商)은 삼국시대 이전에, 짐보따리를 인 보상(褓商)은 신라 때부터 있었지만 19세기 조선시대에 가장 왕성한 활동을 전개했다고 합니다.
이들은 각종 물품을 지거나 이고 5일장을 돌아다녀 장돌뱅이라고 하층민 취급을 받았지만 상호간에 규율과 예절, 부조 정신이 매우 강했으며 성추행 등 범죄를 저지를 경우 자체 형벌이 엄격했다죠.
부보상 생활 30년이면 얼마나 걸을까요.
4월 26일까지 ‘부보상, 다시 길을 나서다-2010 충남민속문화의 해 특별전’을 여는 국립민속박물관의
추산에 따르면 지구 3.6바퀴를 돈다는군요.
모시 생산으로 유명했던 충남 부여 서천 한산 등 저산팔구 지역의 부보상이
1800년대에 각 마을의 5일장을 돌아다녔던 거리를 계산해보니
한 달에 396.66㎞, 1년이면 4759.92㎞라는 겁니다.
등짐장수는 생선 소금 목기 죽세공품을 지고다닐 지게가 반드시 필요했지요.
봇짐장수는 포 면 인삼 문방사우 금은동 화장품 장신구 등 비교적 가벼운 잡화를 취급했는데
커다란 보따리가 필수품이었답니다.
각종 생활용품을 보따리에 담아 유랑하는 삶의 모습을 영상으로 그린 세계적인 작가 김수자의 작품도
부보상에서 모티프를 얻은 것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부보상이 몇 명이나 됐는지 기록이 없어 파악하기는 어렵지만 충남 지역에서 가장 많이 활동했다고 합니다.
충남은 국토의 중심부에 위치해 육상과 해상을 통한 교통과 물류의 요지이기 때문입니다.
충청도에는 예덕상무사, 원홍주육군상무사 등 부보상 조직이 아직까지 명맥을 잇고 있다는군요.
이곳의 유물은 대부분 중요민속자료로 지정돼 있습니다.
이들은 나라가 위급할 때마다 식량을 조달하는 역할도 했답니다.
거상(巨商)이 이들의 조직을 이끌었는데 KBS 드라마로 방송했던 ‘거상 김만덕’이 대표적인 사례입니다.
그런가 하면 세력의 유불리에 따라 관군이 되기도 하고 반란군이 되기도 했다는 겁니다.
민초들에게 정치나 이데올로기는 그쪽 사람들의 얘기일 뿐
돈 많이 벌게 해주고 배부르게 해주면 그만이지 않겠습니까.
“새우젓 사려 조개젓 사려 초봄에 담은 쌀새우는 세하젓이요
이월 오사리는 오젓이요 오뉴월에 담은 젓은 육젓이요
갈에 담은 젓은 추젓이요 겨울 산새우는 동백젓이요.”
보따리 하나에 생활의 짐을 꾸려 이 장터 저 장터로 옮겨다닌 부보상의 ‘새우젓 타령’입니다.
대형 마트가 유통을 장악하고 있고 컴퓨터 앞에서 원하는 물건을 구입할 수 있는 요즘 시대에
이들이 더욱 그리운 것은 물건과 함께 건넨 정 때문이 아닐까요.
- 이광형 문화부 선임기자
- 2010. 03.28 국민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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