찾아 떠나고(답사)

배재학당

Gijuzzang Dream 2010. 11. 12. 18:10

 

 

 

 

 

 120년 전 모든 강의를 영어로 진행 -  배재학당 동관

 

 

 

 

 

 

선교사 아펜젤러가 세운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식 근대 교육기관

 

 

1980년대 이전 광화문 일대의 학교를 다녀본 남학생들에게 배재고등학교는 선망과 시기의 대상이었다.

이웃 이화여자고등학교와 담장을 마주하고 있어서인데

한창 감수성이 예민할 때 어여쁜 여고생들과 담을 사이에 두고 같이 있다는 사실만 가지고도

선망과 질투를 한 몸에 받았던 것이다.

 

배재중고등학교와 배재대학교의 전신인 배재학당(培材學堂)은

우리나라 신교육 도입의 상징적 기념물로서 현재 덕수궁 맞은편 정동제일교회 앞 갈림길에서

남쪽으로 얕은 언덕길을 오르는 곳에 자리 잡고 있다.

배재고등학교가 1984년 강동구 명일동으로 이전하면서

교사로 사용되었던 배재학당 옛 건물 중 동관(東館)은 배재학당 역사박물관으로 사용하고 있고,

그 앞은 배재공원으로 꾸며져 있다.

서울시 중구 정동 34번지 5호에 있으며, 서울시 기념물 제16호로 지정되어 있다.

 

배재학당은 1885년 미국인 북감리교 선교사 아펜젤러(H.G.Appenzeller, 1858~1902)가 세운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식 근대 교육기관으로, 그 시초는

1885년 8월 의료선교사 스크랜턴(W.B.Scranton)의 집을 사서 두 명의 학생에게 영어를 가르친 것이다.

 

이듬해 6월 아펜젤러는 정식으로 학교를 개설하여 6명의 학생으로 첫 학기를 시작하였다.

‘배재학당’이라는 교명은 학교 설립 소식을 들은 고종이 1887년 2월 내린 것이다.

일제는 1915년에 사립학교에 대한 규제를 발표하여 배재학당을 배재고등보통학교로 바꾸도록 하고

학교 건물의 확장도 허가하였다.

 

현재 남아있는 동관은 1914년 5월에 착공하고 1916년 3월에 완공하였다.

1916년 당시 건물로는 덕수궁을 제외하고 이 일대에서 유일하게 원형 그대로 남아 있다.

붉은 벽돌로 쌓은 지상 2층, 반 지하 1층으로서, 연건평 428평이고,

총 공사비는 당시 화폐로 3만 6,000원이 들었으며, 교실마다 스팀장치가 된 현대식 건물이었다.

 

2008년에 개관한 배재학당 역사박물관은

옛 배재고등학교 터에 신축한 배재정동빌딩과 중정을 가운데 두고 마주하고 있다.

배재학당이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적 사립학교라는 상징성에 걸맞게

이곳은 우리나라 교육사와 정동에 관련된 근대사 자료를 수집하고 연구할 수 있는 공간이자

동시대와 호흡하는 역사의 현장이며 시민들이 편안하게 찾아와 쉴 수 있는 문화쉼터이다.

 

특히 배재학당 역사박물관은 배재학교 교사로 활동한 윌리엄 아서 노블 가족과

배재학당 설립자인 아펜젤러를 기념하여 영문 명칭도 Appenzeller/Noble Memorial Museum이다.

1930년대 배재학당의 교실을 재현한 체험교실과

우리 근현대사에 큰 발자취를 남긴 이승만, 주시경, 나도향, 김소월 등 배재학당 출신 동문들을

만날 수 있고, 배재중고등학교로 120년을 넘게 이어지는 현 배재의 모습도 확인할 수 있다.

 

 

 

 

 

학당 기숙사에서 학생단 주도의 제2차 독립만세시위운동 전개하기로 결정

 

배재학당은 이미 120년 전에 모든 강의가 영어로 진행되었고

생물, 물리, 세계사, 체육, 무용, 음악 등의 과목을 통해 전인교육을 실시하였다.

이후 차츰 한국어 수업의 필요성을 느끼자

배재학당 출신의 주시경 등 한글 교사들을 초빙해 수업을 진행하였다.

이를 토대로 서재필은 학당 내에서 학생들과 함께 최초의 한글 신문인 독립신문을 발간하였다.

독립신문은 당시 학당 지하에 있던 삼문출판사에서 인쇄되었다.

삼문출판사는 한글, 한문, 영어 등 세 나라 활자를 구비했다고 해서 ‘삼문(三文)’이다.

 

이 출판사는 학생들의 아르바이트 장소로도 이용되었다.

1919년 3․1독립만세운동이 일어난 지 3일 만인 3월 4일

시내 전문학교 학생대표와 중등학교 학생대표가 배재학당 기숙사에 모여 3월 5일 오전 9시를 기해

남대문역전 광장에서 학생단 주도의 제2차 독립만세시위운동을 전개할 것을 결정하였다.

이 회합은 일제 경찰에게 사전에 발각되었으며, 이후 배재학당은 일제의 감시 대상이었다.

 

1920년 삼일독립운동 1주기를 기념해 2월 배재학당에서 일어난 만세운동에 대한 일제의 대처는 가혹했다.

운동에 참여하였던 학생들이 경찰서에 끌려가 갖은 고문을 당하였고,

심지어는 당시 교장이었던 헨리 아펜젤러의 교장 자격을 박탈하기까지 하였다.

이는 전술한 일제의 감시 대상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현재 서울시립미술관 주차장 입구 맞은편에 위치하고 있는 배재학당 동관은

주위의 현대식 빌딩 사이에 살포시 들어서 있는 아담하고 고풍스러운 건물이다.

종종 사진에서 볼 수 있는 서양의 주택을 연상하게 하는데

역사박물관에 들어가려면 길가 앞이 아니라 뒤로 돌아 들어가야 한다.

건물 앞에 향나무 한 그루가 서있다. 안내판을 보니 보호수로 수령이 525년이라고 한다.

지정년도가 1972년이니 이 나무는 조선 세종 때 심은 것이다.

향나무는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그 옛날 배재학당과 학생들과 그들의 추억 이야기를...

 

이번 주말 배재학당 역사박물관을 방문하여 그들의 숨결을 느껴보는 것은 어떨까 싶다.

- 사종민(서울역사박물관 교육홍보과장)

- 2010.10.28 하이서울뉴스

 

 

 

 

 

 

 배재학당

 

신(新)문화의 요람지

 

 

 

우리나라 신교육 도입의 상징적 기념물이라 할 수 있는 배재학당(培材學堂)은

정동제일교회 남쪽 언덕에 자리하고 있었다. 1984년 3월 학교가 강동구 명일동으로 이전하면서

동문회관 등으로 사용하던 교사 대부분은 현재 배재주상복합빌딩 신축공사로 헐려 없어지고,

그 앞 운동장터 배재공원에는 러시아대사관과

IMF 사태로 유명해진 미국계 투자회사 JP 모건 체이스사가 어깨를 맞대고 있다.

 

배재학당은 미 북감리회 선교사 아펜젤러(Henry Gerhart Appenzeller, 1858-1902)가 설립한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식 근대교육기관이다.

 

아펜젤러가 스크랜튼의 한옥을 구입하여 1885년 8월 자신의 집에서

두 명의 학생(이겸라, 고영필)에게 영어를 가르치면서 걸음마를 뗀 신식 사립학교였다.

아펜젤러는 1886년 4월 1일 초대 학당장으로, 1886년 6월 8일 정식으로 학교를 개설하여

6명의 학생으로 첫 학기를 시작하였다.

고종은 '유용한 안재를 기르고 배우는 집'이라는 뜻으로  ‘배재학당(培材學堂)’이란 교명을 하사하였다.

 

이후 배재학당은 미 북감리회 선교사 아펜젤러가  배재학당에는 영어를 배워

통역관이나 전신국 교환수로 취직하려는 목적에서 많은 학생들이 모여 들었다.

1886년 11월 현재 재적학생수가 32명에 이를 정도로 학생수가 늘어나자, 심의석의 설계로

아펜젤러는 1887년 초 새 교사의 신축에 들어가 9월 준공식을 거행하고, 11월 1일 입주를 하였다.

새 교사는 지상 1층, 반지하 1층의 구조를 가진 아담한 르네상스식 벽돌교사였다.

 

1층에는 강당(예배당) · 도서실 · 학당장실과 4개의 교실이 들어섰고,

반지하는 고학생들이 학비를 마련할 수 있도록 산업부에 배정하여

학생들에게 노동의 신성함을 일깨워주는 자조(自助) 훈련과 실업교육의 장으로 활용하였다.

그러나 아쉽게도 지금 그 자리에서 문화재적 가치를 가진 우리나라 최초의 르네상스식 건축물의 자취를

찾을 수는 없다. 1932년 9월 희년기념 대강당 신축공사가 시작되면서 헐려버린 때문이다.

한편, 현재 배재학당 역사박물관으로 지정된 <배재학당 동관>은 1916년 설립되었다.

 

 

배재학당은 교사 신축과 더불어 교사진용도 대폭 보강하여,

1888년 올링거(F. Ohlinger) 목사와 존스(G.H. Jones, 趙元時) 목사가 합류하고,

1889년에는 한학자 최병헌이 한문 선생으로 부임하였다.

남관(南館) 자리에 40명 가량을 수용할 수 있는 100평 규모의 한옥 기숙사를 마련한 것도

이 무렵이었다. 이처럼 학당이 근대 교육기관으로서의 면모를 갖추어 가자,

마태복음 20장 27~28절을 한역한 ‘欲爲大者 當爲人役(크고자 하거든 남을 섬기라)’을 학당훈으로 삼아

근대 시민을 양성하는 교양교육에 힘을 기울였다.

교과과정도 예비과정부 2학기와 교양과정부 3학년으로 정비하여,

영어 · 한문 · 언문을 기본 교과목으로 하고,

과정과 학년에 따라 수학 · 과학 · 역사 · 음악 · 미술 · 의학 등을 가르쳤다.

 

그런데 이 시기에 배재학당을 다닌 학생들 가운데 양반층 자제들은 거의 찾아볼 수가 없었다.

양반층 자제들이 배재학당을 찾기 시작한 것은

1894년 갑오개혁을 통해 신분제와 과거제가 폐지되면서부터였다.

새로운 관료임용제도의 실시와 신식 학제의 도입으로

신교육에 대한 수요가 양반층 자제들에게까지 넓게 확산된 때문이었다.

그런 가운데 1895년 2월 조선정부와 배재학당 사이에,

정부에서 보내는 200명 한도의 학생에 대해 영어 · 역사 · 지리 · 정치경제 · 수학 · 과학 등을 가르치되

그 학자금은 물론 교사 월급의 일부까지 국고에서 보조한다는 위탁교육계약이 체결되었다.

 

이후 배재학당의 등록 학생수는 이전의 배가 넘는 169명으로 늘어났다.

당시 배재학당의 학제는 학년별이 아닌 학과별 학제를 채택하여

영문 · 국한문 · 신학과의 3개 학과로 이루어져 있었는데, 정부위탁생들은 대부분 영문과에 입학하였다.

 

1925년 <배재학당>이란 교명은 조선총독부에 의해 폐지되기에 이르렀다.

배재학당 출신으로

서재필, 윤치호, 김진호, 이승만, 주시경, 오긍선(최초 서양의학 의사), 이중화, 강매, 지청천, 신봉조,

김소월, 나도향, 김기진, 박팔양, 그리고 최근에는 한류로 유명한 배용준을 꼽을 수 있다.

 

 

배재학당 내에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적 학생단체라 할 수 있는 협성회(協成會)가 조직되었다.

협성회는 서재필의 지도 아래 1896년 11월 30일 배재학당 학생과 교사들을 중심으로 조직된 단체로,

토론회를 개최하고 기관지『협성회회보』를 발행하는 등의 활동을 전개하였다.

회원은 찬성원(준회원)까지 합쳐 1898년 2월 현재 약 300명에 달했는데,

양홍묵 · 노병선 · 이승만 · 주시경 · 민찬호 · 신흥우 같은 쟁쟁한 인물들이 회원으로 참여하였고,

안창호도 찬성원으로 여기를 거쳐갔다.

 

협성회의 토론회는 이후 독립협회의 토론회로 확산되어,

충군애국(忠君愛國)의 여론을 조성하고 민중을 계몽하면서

이승만 · 안창호같은 개화 개혁운동의 소장 지도력들을 발굴하였다.

그리고 1898년 독립협회가 만민공동회 등을 통해 정치개혁운동을 본격화하는 과정에

그 일선 행동대로 활약하면서 청년학생운동의 새로운 장을 열어나갔다.

우리나라 근대 학생운동 제1세대의 산실이었다고나 할까.

 


 

 

 

 

 

 

  

 

'찾아 떠나고(답사)' 카테고리의 다른 글

서대문형무소  (0) 2010.11.12
한국은행 본점(옛 조선은행 본점)  (0) 2010.11.12
서울성곽길~북한산 둘레길  (0) 2010.11.05
진천 농다리(鎭川籠橋)  (0) 2010.11.02
서울문묘(文廟) 은행나무  (0) 2010.10.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