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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청사자놀음(중요무형문화재 제15호) 보유자 - 이근화선

Gijuzzang Dream 2010. 11. 10. 19:31

 

 

 



 

 

사자놀이의 고장, 함경남도 북청

 

북청물장수로도 유명한 북청.

1950년대까지만 해도 북청지방에서는 음력 정월 열 나흗날 밤,

달이 뜨면서 시작된 사자놀이가 며칠이고 계속되었다.

북청 사람들은 그렇게 마을의 온갖 잡귀를 쫓아내고 풍년을 기원했다.

 



“오색실로 사자 몸체를 만들고 탈을 만들어서, 장정 둘이 그 안에 들어가. 사자가 아주 우스워.

엎드리고 긴다. 입도 맞추고, 꼬리도 흔들어. 고개를 좌우로 돌려서 이도 잡고 온갖 애교를 다 부려.

지금에야 언제고 놀지만 본래 마을마다 정월에 놀던 놀이야.”

 

북청군 수십 개의 마을에서 동시에 벌이는 사자놀이였으니

마을마다 사자탈의 모습이나 제작법이 달랐고 놀이의 내용도 저마다 차이를 보였다고 한다.

사자는 우리나라에 없는 동물이지만

사자춤은 신라시대 이후 꾸준히 전승되어 온 것으로 문헌에 소개되어 있다.

 

사자는 백수(百獸)의 왕이기에 악귀(惡鬼)를 몰아내는 벽사의 힘이 있다고 믿어 탈춤에 등장하는 것이다.

현존하는 탈놀이 가운데 사자춤은 북청사자놀음을 비롯하여

봉산탈춤 · 강령탈춤 · 은율탈춤 · 수영야류 · 통영오광대 · 하회별신굿탈놀이 등

중요무형문화재로 지정된 탈춤을 통해 만날 수 있다.  

 


북녘에서 못다 한 놀이

 

북청 출신의 고향 사람들을 저 세상으로 떠나보내고 이제는 홀로 남은 이근화선 보유자.

80여 년 세월이건만 북청사자놀이에 대한 그녀의 기억은 다섯 살 무동(舞童) 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마을(북청)에 살 때 다섯 살에 처음으로 무동을 탔어.

어깨 타고 올라서면 무서울 만도 한데, 노느라고 무섭지도 않았어.”

 

한국전쟁 무렵 월남한 북청 사람들은 그곳에서 놀던 사자놀이가 그리웠다.

고향을 등지고 서울과 경기도 인근으로 저마다 흩어져 삶의 뿌리를 내리게 된 그들은

사자놀이를 통해 고향을 느끼곤 했다.

“다들 어떻게 잊겠어. 퉁소가락 울리면 온 마을 사람들이 다 모여들어.

마을이 흥청흥청하고 난리도 아니었어. 겨울 밤새도록 신명나서 춤추고 놀아.

모닥불 피워 놓고 음식을 장만하고, 사자놀이 하고. 아직도 눈에 선한데... ”

난리통에 가족을 잃고 혈혈단신(孑孑單身)이 된 그녀에게 서울 평화시장은 생계의 터전이 되어 주었다.

시장 사람이 된 지 몇 해 지나지 않아 어린 시절부터 사자놀음에 참여했던 그녀에게 손님이 찾아 들었다. 고향 사람들이었다.

15명 남짓한 북청 사람들은 고향에 대한 그리움을 함께 나누고, 위로하면서 북청사자놀이 전승을 위한 모임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었다. 그들은 이근화선 보유자의 손길을 필요로 했다.

 

“고향서부터, 어릴 적부터 우리 오빠들도 양반 역할도 하고 내가 열두 살까지 무동을 타고 또 열다섯부터 사당춤하고 거사춤을 추고했으니까 나를 찾아 온 거야.”

 

북청사자놀음 전승을 위한 힘들고 외로운 여정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고향에 대한 그리움과 민속놀이에 대한 그들의 애틋함은 1960년 ‘북청사자놀이보존회’ 발족으로 이어졌다.

 

그들에게 북청사자놀음은 향수였다. 그래서 놀이에 더욱 전념했다.

“북청 사자놀이 춘다고 고향 사람들이 잠깐만 봐 달라고 해서 시작한 게 아주 계속하게 된 거야.

그때 시장일이 잘 되서 천 짜는 공장도 여러 개 가지고 있었는데,

만날 사자놀이 가르친다고 푹 빠져 있으니깐 공장이고 가게고 모두 부도가 나서 망했어.

그 정도로 푹 빠졌어”

 

중국이나 일본에는 ‘사자무’라는 이름의 전통연희가 많으나 우리의 경우 흔하지 않기 때문에

이 무렵 북청사자놀음에 대한 학계의 관심은 적지 않았다.

‘북청사자놀이보존회’가 다져 온 그간의 노력으로 사자놀이는

‘북청사자놀음’이라는 이름으로 중요무형문화재 제15호로 지정(1967)되기에 이른다.

한편 운영하던 도매업이 파산했음에도 불구하고,

1970년 북청사자놀음 중요무형문화재 보유자 인정은 그녀의 삶에 커다란 희망을 안겨 주었다.

 


북청(北靑), 마지막 예인(藝人)의 소망

 

앞채 사람이 뒷채 사람의 어깨에 올라타 입사자(立獅子)가 되는 등 탄력적이고 역동적인 율동의 사자춤은 단연 관중들의 인기를 독차지 한다.

사자춤 외에 1인 또는 2인이 추는 사당춤과 애원성, 넋두리춤은 마을 여인들에 의해 전승되어 오던 질박한 춤들이다.

 

명절이나 잔칫날 추던 북청 여인들의 춤은 오늘날 이근화선 보유자를 통해 제자들에게 전수되고 있다.

 

“동네 아낙네들이 이 춤들을 다 췄어.

넋두리 춤은 처녀고 아낙네고 다 췄어.

넋두리에서 애원성도 나오고, 사당춤도 나오고,

소고춤도 추고. 소고춤이 거사춤이 된거여.

그 중에 넋두리춤은 명절날이나 잔칫날 많이 췄어.”

25세에 월남하였으니 60 여 년 전의 일이 되었건만 고향에 대한 기억은 여전히 선명하기만 하다.  

 

북청 출신 월남민들에 의해 전승의 기틀을 다지게 된 이들 춤은

이제 현장을 떠나 연희되기 때문에 예전과 다소 다른 모습으로 전승되는 부분도 있다.

 

“사자 한 마리가 집집마다 돌아다닐 때, 사자 머리에 큰 방울을 달고 있는데,

소리가 커서 얼라들이(어린아이들) 놀라고 그랬어. 방울소리 나면 잡귀 쫓는다고 그렇게 했지.

사자가 마당을 빙빙 돌아. 돌다가 방 안으로 들어가서 입을 열었다 닫았다 하면서

‘딱, 딱’ 소리를 내. 귀신 잡아먹는 시늉을 하는 거야.

지금은 두 마리가 추지만 예전에는 한 마리가 그리했어.”  

 

이근화선 보유자에게 소망이 무엇인지 물어본다.

“내가 나이가 많아. 다른 거 없어 배우겠다는 사람 많이 들어오고. 지금도 끊이지 않고 계속 들어오니까 보람이 그거고. 열심히 하는 거 보면 좋고. 앞으로도 이 놀이를 잘해서 끊어지지 않게 하는 거 그거야.”

 

1960년대 이후 북녘 땅 북청에서는 사자놀이가 이미 단절되었기에 그녀의 소망이 더욱 간절하게 다가온다.

연로하신 까닭에 조금만 춤을 추어도 이내 숨이 가쁘지만 50여 명의 제자들에게 춤사위와 말로써 전수되는 가르침이 있기에, 우리는 함경도 북청마을에서 뛰놀던 사자놀이와 춤사위를 서울 한가운데서도 만나 볼 수 있다.   


-·황경순 국립문화재연구소 무형문화재연구실 학예연구사  
- 사진, 최재만

- 2010-10-14 문화재청, 월간문화재사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