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회마을의 산 증인 하회탈
하회마을은 역사가 깊은 전통마을로 인정되어 민속마을로 지정되었을 뿐만 아니라 최근 유네스코(UNESCO)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하회마을은 낙동강 물줄기가 부용대의 높은 절벽과 한없이 넓은 백사장을 끼면서 마을의 동북, 남을 돌아 흐르는 산태극수태극(山太極水太極)의 절경 속에 물에 뜬 연꽃(연화부수형, 蓮花浮水形)처럼 자리한 ‘길 끝에 고립된’ 마을이다.
길 끝의 마을이자 풍수지리학적으로 좋은 터였기에 많은 인물들이 배출되었고 큰 변란 없이 전통적인 문화를 잘 보존해올 수 있었다. 그래서 도학자로서 선비의 길을 걸은 겸암 류운용(謙菴 柳雲龍, 1539~1601)과 임란 때의 영의정 서애 류성룡(西厓 柳成龍, 1542~1607) 같은 인물들을 배출하면서 17세기 경에는 동성마을로 자리 잡았다.
이러한 하회마을의 역사와 하회탈은 함께 해왔다.
고려시대로 추정되는 하회탈의 탄생은 하회마을의 역사와 거의 같이 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
따라서 하회탈은 하회마을이 영위해온 역사적 궤적을 그 내용으로 담아내었다.
즉 하회탈 자체는 변하지 않았지만 그 하회탈을 통해 담아내고 풀어낸 내용은 끊임없이 재생산되면서
하회마을의 역사와 심상을 반영하고 있는 것이다.
고대로부터 이어져온 무속문화, 고려시대의 불교문화, 조선시대의 유교문화와 민중의식,
국보 및 무형문화재 지정과 공연예술화 등 하회탈 원본을 토대로 한 다양한 콘텐츠가
별신굿탈놀이를 중심으로 재생산되고 소비되었다.
신성한 마을신의 현현(顯現), 하회탈
“하회에 거 건물(동사)이 탈 때, 나두 어릴 땐데. 뭔지 모르구 봤는데. 밤중에 불이 나서, 그 집이 막 불길에 싸였는데, 그 옛날에 건물, 목조건물이, 개와(기와)가 달아서(뜨거워져서) 막 나는 판인데. 개와 같은 거 아주 불이 세게 나믄 그게 열이 받아가주구 막 그기 튀겨요. 그런 형편인데, 어떤 사람이, 아이구 저기 탈이 있는데 탈 나는데.... 탈이 화를 입으믄 마을이 화를 입는다는 신앙적인 그게 있기 때문에, 누구도 죽어서 못 들어가는 형편인데 한 사람이 쫓아 들어가서 자기 죽을 지도 모르는데, 거 들어가서 금방 꺼내왔어.”
[전 안동문화원장 류한상의 제보]
이렇듯 하회탈이 불 탈 위기에 처했을 때 한 주민이 보여준 용기는 지금까지도 여러 사람들에게 회자되고 있다. 하회마을 사람들은 자신의 목숨을 담보로 해서라도 하회탈을 지키고자 하는 열망을 포기하지 않았던 것이다.
결국 진정한 문화재의 보호는 마을 주민들의 살아있는 신앙적 믿음과 열망으로 이루어진다고 볼 수 있다.
하회마을 사람들에게 하회탈은 마을을 지켜주는 신성한 보물이라 할 만하다.
하회별신굿과 탈놀이의 신명
하회마을의 서낭신은 무진생여서낭(戊辰生女城隍)님으로 일컬어진다.
서낭제의 평상제는 동제(洞祭)라고 부르나,
3년 또는 5년, 10년마다 조건이 갖추어지고 신탁(神託)이 내리면 지내게 되는 ‘별신굿’이 있다.
예부터 하회마을 일대에는 “별신굿을 보지 못하면 죽어서 좋은 데를 가지 못 한다”는 말이 있어서,
무진년(1928) 별신굿 때에는 마을의 남녀노소뿐만 아니라,
멀리 인근에서 많은 사람들이 연고를 찾아 하회로 몰려 왔으며,
부녀자들은 천의를 쓰고 숨어서 관람하기도 했다.
별신굿 때는 하회마을 일대가 인산인해를 이루었다고 한다.
하회별신굿탈놀이에서 나타나는 특징은 탈에 대한 신성시에서도 확인할 수 있듯이
도시형 탈춤에 비해 주술성이 강하며 고형을 많이 간직하고 있다는 점이다.
유감 주술적 행위를 통해 풍요를 기원하려는 혼례마당과 신방마당이 있고,
제차 마지막에 무당이 주관하는 헛천거리굿이 남아있는 사실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
또한 예술적 기량의 발달보다는 주민들의 신앙이 근간이 되어 연행이 이루어졌다.
즉 대사에 있어서도 거의 묵극이나 풍물의 잡색놀이와 유사한 형태가 주류를 이루었으며,
춤에 있어서도 영남지역의 허튼춤인 ‘덧뵈기’가 주류를 이루고 있었다는 점으로 미루어보아
이 일대의 탈놀이는 도시탈춤과는 뚜렷이 구분되는 특성을 지니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렇게 진행되었던 하회별신굿은
현재 하회마을 내에서 마을사람들에 의해 연행되지는 않고
마을 외부의 하회별신굿탈놀이보존회를 통해서 탈놀이만이 전승되고 있다.
1958년 제1회 전국민속예술경연대회에서 대통령상을 수상하면서 공연화의 길을 걷기 시작했으며,
별신굿 전체 속에서 한 부분을 차지했던 탈놀이가
이제는 유일한 하회별신굿의 유물이 되어 버리고 만 것이다.
하회탈의 가치와 조형미
하회탈은 제의용 탈이자 예술용 탈이기도 하다.
고려 중후기로 소급될 정도로 그 역사가 오래되었을 뿐만 아니라 나무탈로 제작되어 그 조형미가 출중하기에 1964년 국보 제121호로 지정되었다.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하회탈은 양반, 선비, 중, 백정, 초랭이, 할미, 이매, 부네, 각시, 총각, 떡다리, 별채탈 등 12개와 상상의 존재로서 주지 2개(암수 주지)가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총각’, ‘떡다리’, ‘별채’ 탈은 분실되어 전해지지 않는다.
하회탈은 사실적 조형과 해학적 조형이 조화를 이루어 각 신분의 특성을 표현하였으며, 해당 인물의 성격까지 형상화하고 있다.
얼굴의 형상은 좌우가 비대칭적으로 조형되어 움직임에 따라 다양한 표정이 표현되도록 하였다.
특히 양반, 선비, 중, 백정탈은 턱을 분리시켜 인체의 턱 구조와 같은 기능을 갖게 한 점이 독창적이다.
이 탈들을 쓰는 광대들은 분리된 턱에 실을 꿰어 자신의 치아와 연결시켜 더욱 생동감 있는 동작을 보여준다.
탈을 쓴 광대가 고개를 뒤로 젖히면 자연스럽게 입이 크게 벌어지며 웃는 모습이 되고,
광대가 고개를 숙이면 윗입술과 아래턱 입술이 자연스레 붙게 되어 화난 표정이 연출되기도 한다.
마을주민들 사이에서, “탈이 신령스러워 탈 쓴 광대가 웃으면 탈도 따라 웃고,
광대가 화를 내면 탈도 따라 화를 낸다.”는 향언이 전승되고 있을 정도이다.
하회탈의 문화적 가치를 살펴보면,
탈만 오롯이 남아 있는 것이 아니라 탈놀이를 전승하던 하회마을이 지금 고스란히 살아 있고,
또 하회별신굿이라는 중요한 전통문화와 더불어 남아 있기 때문에 문화적 의의가 더욱 크다.
국보 가운데 이처럼 살아 생동하는 문화재는 하회탈이 유일하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하회탈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하회탈의 조형적 가치이자, 예술작품으로서 의의이다.
하회탈은 다른 조각품과 달리 표정이 역동적으로 변화하는 조형적 특성을 지니고 있다.
다시 말하면 살아 있는 사람의 얼굴처럼 표정이 바뀐다는 것이다.
보는 시각에 따라서 표정도 역동적으로 바뀐다.
여러 탈의 좌우 모습이 서로 대비될 만큼 어긋나게 만들어져 있기 때문에
왼쪽에서 보는 것과 오른쪽에서 보는 표정이 서로 다르게 보인다.
극중에서 등장인물들끼리 인식하는 표정과, 구경꾼의 자리에서 보게 되는 표정이 일치하지 않는다.
한 인물이지만 처한 상황에 따라 서로 다른 두 가지 표정을 지을 수밖에 없는 사회적 상황을
절묘하게 하나의 얼굴로 형상화하고 있다는 사실이 피카소의 작품에 견줄 정도로 예사롭지 않다.
사회적 제약에 따라 주어진 얼굴과, 인간해방을 추구하는 본성적인 얼굴을
더불어 가진 것이 진정한 인간의 얼굴이라는 것을 나타내기 위해서 부조화의 조화, 불일치의 일치,
미완성의 완성이라는 변증법적 미학을 새롭게 개척한 세계적 조형예술이라 할 수 있다.
하회탈은
한국을 떠올리고 접속하게 만드는 그림 기호(icon)이자,
한국인의 모습을 상징하는 독특한 인물상(character)이며,
국가의 문화 이미지를 창출하는 등록상표(logo) 노릇까지 톡톡히 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 하회탈은 공존(symbiotic)의 표상이자, 축제적 인간(homo festivus)의 상징이면서,
동시에 제의적 반란(communitas)의 매개체(mediator)라 할 수 있다.
공존, 축제, 코뮤니타스는 하회별신굿을 통해 잘 드러난다.
그러므로 하회탈은 한국인의 표정으로 한국을 알리는 문화 사절인 동시에,
우리 전통문화의 우수성을 세계 속에 드러내는 한국 최고의 문화유산이라고 할 수 있다.
한국의 국기가 태극기이고 한국의 맛이 김치로 표현되듯이,
또한 아리랑이 한국의 소리이듯이 하회탈은 한국의 얼굴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런 까닭에 국보로 지정된 문화재는 숱하지만
하회탈처럼 한국문화의 대표적인 상징 구실을 폭넓게 하는 문화재는 없다.
외국 사람들도 하회탈을 보면 한국과 한국인, 한국문화를 떠올릴 정도로
하회탈은 이미 세계 속에서 한국문화의 정체성을 드러내는 신분증
곧 한국인의 ‘아이디카드’ 구실을 하고 있다.
=============================================================
*** 참고문헌
임재해 외, 『하회탈, 그 한국인의 얼굴』(민속원, 2005).
조정현, 「하회탈춤 전통의 재창조와 안동문화의 이미지 변화」, 『비교민속학』 29(비교민속학회, 2004).
- 조정현 안동대학교 민속학과 연구교수
- 2010-10-14 문화재청, 월간문화재사랑
'나아가는(문화)' 카테고리의 다른 글
옹기 - 숨 쉬는 그릇 (0) | 2010.11.10 |
---|---|
북청사자놀음(중요무형문화재 제15호) 보유자 - 이근화선 (0) | 2010.11.10 |
다방의 역사 - 100년 전 커피 한 잔의 추억 (0) | 2010.11.10 |
왕이 공식적으로 술 마시는 날, 궁중 연향 (0) | 2010.11.10 |
강릉 굴산사지 시굴조사 (0) | 2010.10.0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