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룡사 목탑 출토, 사리외함
국보 제30호 모전석탑(模塼石塔)이 있는 경주 분황사에 가면
남쪽으로 넓게 전개되고 있는 옛 신라 황룡사터가 눈앞에 펼쳐진다.
황룡사터에는 1970년대 이전만 해도 조선시대부터 들어선 민가들이 구황동이란 마을을 이루고 있었다.
그 가운데서도 황룡사의 중심인 9층탑이 있었던 터에도 민가가 들어서 있었다.
그러나 집 주인은 그러한 사실을 까맣게 모르고 살고 있었다.
특히 탑의 중심기둥이 놓이는 심초석(心礎石) 표면에는
사리를 봉안하기 위해 마련한 사리공(舍利孔)이 있는데
이를 보호하기 위해 10톤 이상 되는 거대한 돌이 놓여 있었지만
이러한 사실을 모르는 집 주인은 이 돌을 담장으로 이용해 두르고 살고 있었다.
문화재관리국은 1964년에 목탑 터에 있는 민가를 구입해 철거하고 담장도 철거하면서 주변을 정비해
심초석 위의 보호석만 남게 되었다.
그런데 이처럼 주변이 정리가 되자 어처구니없게도 사리장치를 노리는 도둑들의 표적이 됐다.
1964년 12월17일 늦은 밤, 이날은 황룡사 목탑의 사리장엄구가 도둑들의 손에 의해 약탈된 날이다.
범인들은 한밤중에 잭으로 심초석 상면에 놓인 바위를 약간 들어 올리고
사리공 속에 1.300여 년 동안 고이 간직되어 온 사리장치를 몽땅 들어내 가지고 사라졌다.
정부에서 민가를 구입해서 정비하지 않고 두었다면 담장을 헐어내지 않는 한 도굴은 불가능 했을 것인데
친절하게도 담장까지 철거하여 오히려 도굴을 방조한 꼴이 되었다.
황룡사 목탑 출토 사리외함
어찌됐든 도난 당한 사리장엄 유물은 범인이 잡히지 않아 오리무중으로 세월만 흘렀다.
그런데 2년 후 1966년 9월 5일
경주 불국사의 석가탑 안에 있는 사리장엄구를 도굴하려던 범인들이 체포됐다.
여죄를 추궁하자 이들이 황룡사 목탑의 사리장엄 유물을 도굴했음이 드러나게 되었다.
결국 유물을 찾게 되면서 국립박물관에 보관하게 되었던 것이다.
도굴 유물이 회수되긴 했지만 타 지역의 석탑 사리 관련 도굴 유물도 섞여 있어
무엇이 황룡사 사리 관련 유물인지를 알기에 어려움이 따랐다.
그런데 유물 가운데 무엇보다도 결정적인 근거 자료가 된 것이
바로 사리장엄구를 넣어 보관했던 외함(外函)이었다.
이유는 탑의 모든 내력을 외함의 표면과 내면에 새겨 두었기 때문이다.
그 내용을 보면
신라 선덕여왕대인 645년에 당나라에 유학하고 온 자장이 건의하여 최초로 세우게 되었는데
9층 탑의 높이가 65m, 철반 즉 피뢰침처럼 탑 위에 올려져 있는 상륜부의 높이가 15m로
전체 80여m에 이르는 삼국 최대의 탑이었다는 사실과
아울러 그 후 오랜 세월 동안 지진과 벼락으로 탑이 기울어져 있어
48대 경문왕대인 871년에 들어와 크게 수리하면서 사리 관련 유물 목록을 기록해 두었음을 알게 되었다.
사리를 도굴한 범인의 우두머리는 국립경주박물관에서 방호원으로 근무한 경력의 소유자였다.
가히 고양이에게 생선가게를 맡긴 꼴이었던 셈이다.
- 2009/12/02 ⓒ한국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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