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켜(연재자료)
무령왕릉 출토 돌판 유물의 정체 - '지석(誌石)'
부여 능산리에 있는 정체 불명의 백제 무덤들 가운데
사신도(四神圖)가 그려진 벽화무덤이 유명한 제6호 무덤이다.
그런데 이 벽화무덤인 제6호무덤은
여름철만 되면 무덤의 내부공기와 바깥공기의 차이로 인해 나타나는 결로(結露) 현상으로
벽면에 물이 줄줄 흘러내려 벽화보존에 지장을 초래했다.
그래서 문화재관리국(현 문화재청)에서 벽화 피해를 조금이라도 줄이려고
무덤 뒤에 횡으로 배수시설을 하기 위한 공사를 하게 되었다.
이 공사 도중 우연히 발견된 무덤이 바로 백제 왕릉 중 최초로 발견된 무령왕릉(武寧王陵)이다.
1971년 7월 8일.
이 날은 백제 제25대 무령왕이 실로 1,500여년의 깊은 잠에서 깨어나 세상에 모습을 드러낸 날이다.
우리나라 고고학 발굴사상 처음으로 고대 왕릉을 발굴하게 됨으로써
발굴요원들뿐 아니라 국민들까지 흥분의 도가니로 몰아넣었다.
왕릉에 묻혀 있는 유물이 어떤 것인지, 금은보화가 얼마나 묻혀 있는지 등
관심과 호기심의 갈래는 끝이 없었다.
발굴조사 과정에 한국일보가 특종을 하자
낙종한 다른 신문의 기자가 발굴지원 책임자를 발굴현장에서 폭행한 사건,
유물을 서울중앙박물관으로 옮기기 전의 공주 주민들의 데모 등 많은 일화를 간직하고 있다.
고대 왕릉의 발굴은 그 자체만으로도 사람을 흥분하게 만드는 묘한 무언가가 있는 모양이었다.
우여곡절은 있었으나 하룻밤 사이에 발굴은 완료되었다.
발굴 결과 무령왕과 왕비와 함께 묻힌 유물은 108종 2,900여점이 넘었다.
출토유물 가운데 왕과 왕비의 머리에 쓴 관을 장식하는 순금제 관 장식을 비롯하여
많은 중요 유물들이 발굴되어 백제의 역사를 다시 고쳐 쓰게 하는 발굴로 기록되었다.
무령왕릉 출토 글자 새긴 돌판 탁본.
그러나 출토된 수많은 유물 가운데 가장 관심을 모은 유물은 돌에 글자를 새긴 유물이었다.
왜냐하면 이 유물을 통해 무덤의 주인공이 무령왕과 왕비라는 사실을 알게 됐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돌에 새긴 글자들은 무덤 주인공의 내력과 생전의 공덕을 기록하는데,
우리는 이것을 '지석(誌石)'이라고 한다.
그런데 무령왕릉에서 발견된 돌 유물엔 그런 내용과 함께
왕과 왕비가 묻힐 지하공간을 위해 지하의 땅을 토지신(土地神)에게 매입한다는 내용이
함께 기록되어 있었다.
물론 이런 사실은 당시 백제 사상의 한 면을 알 수 있는 것이지만
무엇보다도 유물의 명칭을 어떻게 불러야 할지 고민을 안겨 주었다.
무령왕과 왕비의 유택을 마련하기 위해 토지신에게 필요한 돈을 지불하고 구입했다는 것은
이 유물이 땅을 산 매매계약서이기 때문에
오히려 '매지권(買地券)'으로 보아야 한다는 것이 설득력을 얻게 되었다.
하지만 토지신에게 매입한 내용보다는
무령왕의 이름, 타계한 날 등 새겨진 내력을 통해 많은 역사적 사실이 새로 밝혀진 점을 감안할 때
'지석'으로 불러도 크게 무리는 없을 것이다.
- 2009/11/18 ⓒ한국일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