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아가는(문화)

금석문(金石文)이 전해 준 백제인의 사랑과 인생

Gijuzzang Dream 2010. 8. 27. 21:05

 

 

 

 

 

 

 금석문(金石文)이 전해 준 백제인의 사랑과 인생

 

 

 

 

한국 고대의 역사를 연구하는데 기본이 되는 역사서는 단연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이다.

이 두 책은 고려시대에 씌여진 것으로,

그 이전부터 전해지던 다른 책들을 참고하여 삼국의 역사를 썼다는 공통점이 있지만,

서술방식이나 기록된 내용에 큰 차이가 있다.

두 책의 저자가 귀족관료인 유학자 김부식과 승려인 일연이라는 점과 무관치 않다는 점은

너무도 잘 알려진 것이다.

 

누가, 무엇을, 어떤 관점으로 기록하는가에 따라 사실과 사건에 대한 해석은 달라질 수 밖에 없다.  

‘(과거의) 사실에 대한 연구를 시작하기 전에 역사가를 연구하라’ 라는 E.H.카의 말이 상기되는 대목이다.

 

고대사 연구의 또다른 축은 고고학이 담당하고 있다.

과거의 사람들이 남긴 사회적 유산을 연구하는 점은 공통적이지만,

문헌사학이 문자로 기록된 자료를 1차적 연구대상으로 삼는데 비해

고고학은 유적과 유물 등 물질자료를 연구 대상으로 삼기 때문에

문자 기록 여부에 관계없이 선사시대와 역사시대를 아우른다.

이 중 역사고고학은 문헌 사료에 그 실체가 기록되어 있는 역사시대를 연구대상으로 삼기 때문에,

고고학과 문헌 사학은 역사학의 두 수레바퀴로서 상호 보완적인 관계에 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런데, 고고학자와 역사학자 모두를 흥분시키는 자료가 있으니,

바로 땅속에서 출토된 문자자료, 이른바 금석문(金石文)이다.

 

금석문이란 금속, 돌, 토기, 기와 등에 새겨진 문자자료를 이르는 것으로,

나무나 대나무를 깎아 글자를 쓴 목간도 이 범주에 속한다.

발굴현장에서 출토된 금석문은 유적과 유물에 대한 구체적인 정보를 담고 있는 경우가 많아

고고학자들에게는 여간 고마운 유물이 아니다.

연호(年號)나 간지(干支)와 같이 연대를 밝혀주는 기년(紀年)까지 있다면 더할 나위 없다.

때론 우리에게 익히 알려진 역사책의 기록과 상반된 내용을 전해 주어 연구자들을 당황케 하기도 하지만,

후대인에 의해 편집되지 않은 생생한 자료의 등장은 사료에 목말라 하는 역사학자들의 연구욕을 자극한다.

 

삼국 중 가장 먼저 종말을 고한 백제의 역사를 복원하는 매우 중요한 고리 역시 금석문에서 얻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공주 무령왕릉의 묘지석은 무덤의 주인공이 백제 사마왕 즉 무령왕 부부라는 것을 확인시켜 줌으로써

웅진에 수도를 두고 있던 백제의 모습을 구체화 시켜준 백제 금석문의 대표적인 사례이다.

 

무령왕릉은 1971년 발굴조사 되었는데 벽돌로 쌓은 무덤방으로 들어가는 통로에는

한 꾸러미의 동전 밑에 두 장의 돌판이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무덤에 묻힌 주인공의 이력을 적은 묘지석이었다.

묘지석에는 왕과 왕비의 죽음과 무덤에 안장된 날짜가 정확히 기록되어 있었는데,

왕은 계묘년(523) 5월 7일 사망하여 을사년(525) 8월 12일 무덤에 묻혔고,

왕비는 병오년(526) 12월에 수명이 끝나 기유년(529) 2월 12일 무덤에 묻힌 것으로 되어 있다.

이를 통해 무령왕 부부의 사후에 삼년상이 치러졌다는 사실이 확인되었다.

 

왕비의 묘지에는 상을 치른 곳이 酉地(서남쪽)에 있다고 했는데,

그로부터 25년 후 발굴 조사된 공주 정지산유적이 그 장소로 해석되면서

백제의 상장 의례에 대한 인식의 지평을 넓혀 주었다.

 



 

 

부여 능산리사지와 왕흥사지에서 발굴된 사리장치에 새겨진 명문은

백제 위덕왕 때에 두 절이 세워진 배경을 밝혀 주었다.

백제 왕릉원인 능산리 고분군 옆에 위치한 능산리사지 목탑지에서 발굴된 사리감의 명문과

『삼국사기』 및 『일본서기』의 기록에 비추어 보아,

이 사찰은 신라와 벌인 전투에서 전사한 아버지 성왕을 추모하기 위하여

위덕왕(창왕) 남매가 발원한 것으로 해석되고 있다.

 

부여 왕흥사지 목탑지에서 발굴된 사리함은

창왕이 577년(정유년), 세상을 떠난 왕자를 위하여 사찰을 세웠다는 새로운 정보를 주고 있지만,

왕흥사의 창건과 낙성 연대는 『삼국사기』의 기록과 차이를 보인다.  

[자세한 내용은 이송란, 「백제위덕왕과 왕흥사」 (본지 2008년 04월 28일자 칼럼)을 참조 바람]

 

 

 

미륵사지 석탑 심주석 내 사리장치 익산 미륵사지는

발굴조사 결과 3개의 금당과 탑을 갖춘 대형 사찰로 확인되었는데,

이는  전각과 탑과 행랑을 세 곳에 따로 지었다는 『삼국유사』기록과 일치한다.

서동(薯童)이 홀어머니 슬하에서 마를 캐어 팔아 생계를 잇다가 꾀를 내어 신라의 선화공주를 아내로 맞고

인심을 얻어 훗날 백제 30대 왕인 즉 무왕이 되었다는 설화는

무왕이 법왕의 아들이라고 되어 있는 『삼국사기』의 기록보다 훨씬 친숙하게 다가온다.

 

최근 미륵사지에 남아 있는 유일한 건축물인 서원 석탑을 보수·정비하기 위하여 해체하게 되었는데,

탑의 중심 기둥인 심주석의 사리공에서 사리기를 중심으로 많은 공양품과 함께 금판이 한장 발견되었다.

앞뒷면에 탑을 건립하게 된 배경이 빽빽이 새겨져 있는데,

여기에는 미륵사가 629년 사택적덕이라는 백제 귀족의 딸인 왕후의 발원으로 건립되었다고 적혀 있어

적잖은 충격을 주고 있다.

이제까지, 미륵사 창건을 발원한 무왕의 왕비가 신라 진평왕의 딸인 선화공주라는 것을 뒤흔든 것이다.

 

이처럼 금석문은 역사책의 기록을 재확인시켜 주거나 공백을 메워주기도 하지만,

전혀 다른 내용을 전해주기도 한다.

모두에서 지적한 바와 같이 역사 기록은 역사가의 사관에 맞게 기존의 사료를 취사선택하고

내용을 가감하여 편찬한 것이기 때문이다.

 

금석문의 이러한 면모는 학계에 혼란을 준다기 보다는 활력을 불어 넣어 준다고 해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역사학이란 책으로 남은 몇 줄의 기록을 되풀이 하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과거의 사실에 접근해 가는 과정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를 규명하는 것은 연구자들의 몫이다.
 

하지만, 금석문은 냉철한 논리를 수반하는 역사가들의 연구 대상물만은 아니다.

앞서 말한 바와 같이 금석문은 그것이 새겨진 배경을 생생히 간직하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여기서 당시 사람들의 정서를 좀더 가까이 체험할 수 있다. 다시 금석문으로 돌아가 보자.

백제 재건의 기틀을 마련한 군주였던 무령왕은 최고의 예우를 갖춘 상장례를 거쳐

중국 남조의 선진 기술로 축조된 무덤에 묻혔지만,

1500년의 시간동안 그와 함께 누울 수 있는 사람은 그의 부인 뿐이었다.

이는 권력이나 명예와는 상관없는 인간의 모습, 오늘날 우리의 모습과 다를 것이 없다.

 

위덕왕은 왕이었기에 아버지와 아들을 위하여 거대한 사찰인 능사와 왕흥사를 지을 수 있었지만,

만류를 무릅쓰고 추진한 전투에서 아버지를 희생시키고 20여 년 후엔 아들의 비명횡사를 겪어야 했던

비운의 사내였다. 부왕의 사후 왕의 직무를 벗어 버리고 출가하고자 했으나 그럴 자유도 없었다.

왕이기 이전에 그는 하나의 인간이고, 한 아버지의 아들이요, 한 아들의 아버지였다.

능사와 왕흥사 목탑이 설 자리에 사리를 모시는 그 순간 만큼은 그는 우리와 똑같은 사람이었다.

 

미륵사 탑에 사리가 봉안된 기해년(639)은 무왕이 왕위에 오른 지 40년이 되는 해로,

그의 인생 말년에 해당한다. 2년 후인 641년 무왕은 생을 마감하게 된 것이다.

무왕의 왕후는 자기 재산을 희사하여 절을 지음으로써 이 덕으로 왕의 수명과 치세가 지속되어

“위로 正法을 넓히고 아래로 蒼生을 교화”하기를 기원하고 있다.

남편을 위한 아내의 기도는 무조건 오래 살아 통치권을 유지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나라 안에 좋은 가치가 널리 펴고 백성을 편안하게 하는 왕의 임무를 잘 수행하기를 비는데까지

이르고 있다. 무왕의 왕후가 선화공주이건 사택 적덕의 딸이건,

미륵사 창건에 담긴 뜻은 이러하였던 것이다. 오늘날 우리가 바라는 세상도 그런 것이 아니던가?

 

물론 이와 같이 금석문을 새기고 그 배경이 되는 무덤이나 사찰의 건립한 배경에

정치적인 의도가 전혀 없다고 볼 수는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금석문은 오늘날 우리와 같이 희로애락을 겪었던 백제인,

<삼국사기>와 <삼국유사>가 다 말하지 못한 백제인과의 만남을 주선하고 있다.

차가운 금속과 돌에 새겨진 글자에서 만나는 백제 사람들의 따뜻한 인간미, 그것이 금석문의 매력이다.

 

 

*사진 출처

 사진1~3: 국립공주박물관, 2001, 『백제 사마왕 -무령왕릉 발굴, 그후 30년의 발자취』.

 사진 4: 전북문화재연구원, 2003, 『전북지역 백제문화유산』.

 사진 5: 국립부여박물관, 2009, 『백제 가람에 담긴 불교문화』.

 

- 정치영, 문화재청 한국전통문화학교 정치영 전문위원

- 2010-07-19  문화재청, 문화재칼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