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경궁 통명전의 우물, 열천(冽泉)
궁궐에 가면 우리는 웅장한 건물과 화려한 장식들을 먼저 보게 되고
안내해설과 재현행사 등을 통해서 궁궐의 옛 모습을 상상하게 된다.
궁궐에서 눈에는 잘 띄지 않지만 궁궐사람들의 생활과 밀접한 또 다른 문화를 만나게 된다.
그 중에 하나가 궁궐의 우물[井]이다.
물은 생활의 필수요소로서 우물을 통해 궁궐사람들의 생활을 엿볼 수 있는 중요한 문화유산임에 틀림없다.
궁궐 우물을 지금 우리가 직접 마실 수 있다면 어떨까?
이러한 바램을 실현하기 위한 활동이 현재 이루어지고 있다.
문화재청에서는 궁궐 우물의 역사적 복원과 함께 관람객들이 마실 수 있도록
수질개선 사업을 진행 중이며 ‘한문화재 한지킴이’ 협약을 통해
문화재청과 웅진코웨이, 문화유산국민신탁이 함께 궁궐 우물 복원사업을 추진 중이다.
현재 조사된 바로는 문헌상에는 4대궁과 종묘, 칠궁에 75개의 우물이 있으며 현재 확인된 우물은 32개이다.
그림 1) 창경궁 현존 우물의 위치
궁궐의 우물은 대개 식수, 생활용수, 방화용수, 제례용수 등으로 사용되었는데,
우물의 기능성 이외에 조선시대의 역사성을 품고 있는 우물도 있다.
대표적인 우물로 창경궁 통명전의 우물 즉 열천(冽泉)을 들 수 있다.
창경궁 통명전(通明殿)은 내전(內殿)의 법전(法殿)으로 불리며 왕비와 대비의 생활공간으로 사용되거나
왕실가족이 돌아가신 후 빈소를 설치한 빈전(殯殿)으로도 이용되었다.
건축물의 외형만을 봐도 월대와 드므가 설치되었고
용마루가 없는 무량각 지붕으로 법전의 기풍을 보이고 있다.
통명전 서쪽에 인공연못이 있으며 그 뒤쪽에 ‘열천’이라고 돌에 새겨진 우물이 있다.
1820년대에 그려진 <동궐도>에는 통명전 건물은 없고 대신 건물의 터만 남아있는데,
통명전터 서북쪽에 우물이 그려져 있고 그 이름을 알리는 ‘열천(冽泉)’이라는 글자가 적혀져 있다.
그림 2) <동궐도>에 보이는 열천(冽泉) 그림 3) 현재 창경궁 통명전의 모습
열천에 대해서 혹자는 영조가 우물의 이름을 지었고 글자의 뜻풀이로서
‘(이가 시릴 정도로) 차가운 샘물’로 설명하고 있다.
지금 열천의 우물맛을 볼 수 없어서 정말로 이가 시릴 정도로 차가운지는 정확히 알 길이 없다.
다만, 우스개 소리로 설명하는 ‘영조임금이 열천을 마시고 차가움에 감탄하여 이름을 지었다’는 속설은
글자풀이에 불과한 설명으로 넘길 수 있지만
우물과 관련된 상상만으로도 열천이 지닌 역사적 흥미를 충분히 느끼게 한다.
이러한 호기심에서 차가운 열천의 맛을 보기 위해 몇 가지 자료로 확인해 보았다.
과연 열천의 물맛은 어떤 것일까?
우선, 영조와 관련된 열천의 우물 관련자료를 보면,
“통명전(通明殿) 곁에 샘이 있는데, 이름을 열천(冽泉)이라고 부르도록 하라” 하고,
소지(小識)를 불러주어 쓰게 하고, 통명전에 걸게 하였다.(《영조실록》, 영조 33년 5월 29일 기미)
라고 하여 영조가 우물의 이름을 열천이라고 지은 기록을 확인할 수 있다.
하지만 창경궁 의 일반적인 설명처럼 열천을 마셨다거나
영조임금이 ‘이가 시릴 정도로 찬 우물이다’라고 하는 흥미로운 내용은 확인할 수 없었다.
그런데, 《조선왕조실록》·《승정원일기》 등에서 보이는 열천 관련기록은
창경궁 통명전 우물보다는 대보단(大報壇)의 중문(中門)인 열천문(冽泉門)과
《열천자서합록(冽泉自敍合錄)》·《열천지(冽泉志》등 관련 자료에서 더 많은 기록을 찾아볼 수 있었다.
이러한 자료는 열천의 이름이 단순히 물의 차가운 성질만을 표현한 글자풀이라기보다는
또 다른 의미를 담고 있다고 추측할 수 있다.
그럼, 대보단 열천문의 열천이라는 용어는 어떠한 의미에서 사용되었을까?
우선 열천의 글자와 상관성이 있는 ‘대보단’에 대해서 살펴보도록 하겠다.
'대보단'은 '황단(皇壇)'이라고도 불리며 지금은 그 위치를 정확히 확인할 수 없지만
<동궐도>에서 보면 창덕궁 서북쪽 후원 옛 별대영(別隊營) 자리에 있다고 한다.
대보단은 명나라가 1644년에 망한 후 환갑이 되는 숙종 30년(1704)에 세워진 제단(祭壇)이다.
대보단에는 임진왜란 때 원병을 보내어 국가를 재건하는데 공로가 있던 명나라 신종(神宗)과
마지막 황제인 의종(毅宗)에게 제사지내는 목적을 가지고 있었다.
영조대에는 명나라 태조(太祖)의 신위까지 더하여
매년 3월 상순에 정기적으로 황단망배례(皇壇望拜禮)를 행하고 각 황제의 기일과 탄생일에 제향을 지냈다.
명나라가 멸망한 후에 명나라의 은혜에 보답하는 제단을 짓는다는 것은
당시 명을 멸망시키고 병자호란의 패배로 조선에게 정신적인 피해를 준 청에 대한 반감이기도 했다.
이것은 청에게 힘으로 굴복하였지만 정신적으로는 주체성을 보여주는 표현이기도 했다.
또한 단순히 명나라를 숭상하는 뜻만을 지닌 것이 아니라
조선이 명나라를 대신하여 세계에서 유일하게 도덕적인 문화전통을 이어가는 문화국가[중화 中華]라는
자부심의 표현이기도 하였다.
전통적인 동아시아의 국제관계는 농업사회를 기반으로 문화국가의 중심에 서 있는 중화(中華)와
힘의 논리나 약탈경제에 의존하는 오랑캐[이적 夷狄]로 구분하는 세계관으로 이해되고 있었다.
조선시대에는 전기부터 소중화(小中華)라는 의식을 가지고 도덕적인 문화국가를 지향하고 있었다.
그 중심에 있던 명나라가 청에게 패하면서 동아시아의 국제질서가 무너지게 되자
당시 조선의 지식인들은 명나라를 대신하여 중화문화 즉 문화국가를 지키고 이어가야 할
책임과 역할을 갖게 되었다.
그래서 이제는 조선이 도덕적 문화국가의 중심이 되는 조선중화주의 의식이 생기게 된 것이다.
이러한 시대적인 배경에서 중화문화의 정통성을 이어받아 국제적인 의리를 지키고
도덕적 문화국가를 계승하였다는 정당성을 보여주는 상징물로서 대보단이 세워지게 된 것이었다.
대보단이 설치된 이후에는 명나라 황제뿐만 아니라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에서 공을 세운 사람들을 열사와 충신으로 높이고 대보단에 배향하였다.
그리고 후손에게는 관직을 주거나 특별시험을 보게 하는 등 여러 추모사업과 지원사업이 계속되었다.
조선중화주의를 표방하면서 국제관계의 의리를 지키는 의지의 표현으로
‘풍천(風泉)’, ‘풍교(風敎)’라는 용어를 사용하였다.
‘풍천’은《시경(詩經)》에 쓰여진 <비풍(匪風)> · <하천(下泉)> 두 편의 이름을 합한 용어이다.
<비풍(匪風)>의 내용은 주나라가 쇠퇴할 때 상심한 마음을 적은 시이며
<하천(下泉)>은 차가운 샘물이 풀을 잠기게 한 것 같이
주나라가 망하여 주변의 소국이 피해를 입게 되었다는 내용이다.
시 구절에 나오는 주나라는 당시에는 명나라를 표현한 것이며
중화문화의 계승자로서 명나라의 쇠망을 상심하고 그 감흥과 정신을 표현하는 것으로
<비풍(匪風)> · <하천(下泉)> 두 편의 시가 자주 인용되고 있었다.
그림 4) 대보단 남쪽에 위치한 ‘열천문(冽泉門)’ (<동궐도>, 고려대 소장. 부분 발췌)
《시경》<하천(下泉)>에서 ‘열파하천(冽彼下泉)’이라는 구절이 있으며
이 구절의 줄임말로 ‘열천(冽泉)’이라는 용어를 사용하기도 하였다.
결국, 대보단 열천문의 이름은 대보단이 담고 있는 국제관계의 의리와 조선중화주의 인식과 연결되어
《시경》<하천(下泉)>의 의미를 담고 있는 ‘열천’이라는 명칭이 사용된 것으로 보인다.
차가운 저 하천(下泉)이여 우북히 자라는 잡초를 잠기게 하도다 (冽彼下泉 浸彼苞랑)
개연(愾然)히 내 잠깨어 탄식하여 저 주(周)나라 서울을 생각하노라(愾我寤嘆 念彼周京)
차가운 저 하천(下泉)이여 우북히 자라는 쑥을 잠기게 하도다 (冽彼下泉 浸彼苞蕭)
개연(愾然)히 내 잠깨어 탄식하여 저 주(周)나라 서울을 생각하노라 (愾我寤嘆 念彼京周)
[참조-《시경》<하천>편]
그렇다면,
‘열파하천(冽彼下泉)’의 ‘열천’과 창경궁 통명전 우물인 ‘열천’과의 관계는 어떠할까?
영조 33년(1757) 5월의 기록을 보면,
통명전(通明殿) 곁에 있는 샘의 이름을 열천(冽泉)이라 짓고
그 내용을 적은 소지(小識)를 지어 통명전에 걸게 하였다고 한다.
영조 33년은 1637년 병자호란의 패배 이후 2주갑 즉 120년이 되는 기념적인 해였다.
이 해에 임진·병자 양란의 충신과 열사 등을 대보단에 배향하고 그 자손들을 제사에 참여시키는 등
관련 기념행사와 추모사업이 대보단을 중심으로 이루어지고 있었다.
한편, 열천의 이름을 지으면서 그 내용을 통명전에 걸었다는〈열천소지〉에는
‘영조의 부친인 숙종이 지은 기문(記文)에 통명전 북쪽 계단 아래에 못이 있었는데,
조그마한 구멍에 불과하였지만 현종비인 명성왕후(明聖王后)가 파서 넓히도록 명령을 내렸다’고 한다.
《궁궐지》〈열천소지〉의 내용 중 일부를 보면,
‘그 물은 맑고 차며 사철 마르지 않는다.
물 북쪽에 반듯한 돌 하나가 있는데 희기가 구슬 같아서 일이 있을 때 마다 감흥이 일어난다.
또 찬란한 풍경의 감회를 들어서 열천(冽泉)이라 명명하고 돌 위에다 새겼다. 못 가에 또 돌을 더해 쌓았다.
아아! 진실로 효도는 천박한데, 전당의 호칭은 길이 사모하니 이어 쓰지 않을 수 없도다.
못 이름이 열천이니, 효도요 충성이라. 이 시절을 우러러 바라보니 이 감회를 억누르기 어렵도다.
이에 그 대강을 써서 성모(聖母;명성왕후)가 주실(周室)을 높인 뜻에 대해 사모함을 표현하노라.
해는 숭정 기원후 세 번째 정축(丁丑; 1757) 중하(仲夏) 기미(己未)에 눈물을 흘리며 쓰노라’
(《궁궐지》, <창경궁지> )
라고 하여 영조의 할머니인 현종비 명성왕후가 만든 우물에 이름을 붙여 효도하는 마음을 담고
명성왕후가 평소 주나라 즉 중화문화의 뜻을 높이는 충성의 마음을 담아
‘열천(冽泉)’ 이라고 지은 내용을 적고 있다.
그림 5) 현재 창경궁 통명전의 열천 모습
정리를 하면, 통명전의 열천(冽泉)은 숙종대 현종의 왕비였던 명성왕후가
작은 구멍에 불과하던 곳을 파내어 우물을 조성하였다. 이후에 영조는 이 우물을 열천이라고 지었다.
영조가 우물의 이름을 열천이라고 한 배경을 보면,
당시에는 조선이 명나라를 대신하여 문화선진국으로서 중화문화의 정통성을 이어받아
국가적 위기 상황에서 군사적 지원을 해준 명나라에 대해 국제적인 의리를 지키고
도덕적인 문화국가를 계승하겠다는 시대적인 흐름과 자부심이 있었다.
그러한 상징물로서 대보단이 지어지고 조선의 충신·열사들의 후손들에게도 특별한 지원과 배려가 있었다.
영조가 열천의 이름을 지은 영조 33년(1757)은 병자호란에 패한 후 2주갑이 되는 120주년이었고
대보단을 중심으로 모든 국가사업이 정비되고 있었다.
당시의 국가사업을 표현하는 대표적인 용어로 '열천'이 사용되었고
열천의 의미는 당대의 시대분위기였던 '조선중화주의'라는 시대이념을 대변하는 커다란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대표적인 상징물인 대보단의 문 이름에 '열천문'이라고 지어졌고
그 이름은 통명전 우물에도 붙여져
‘조선중화주의’와 함께 할머니의 뜻을 기리기 위한 효도의 마음까지도 담겨져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창경궁 통명전의 우물, 열천(冽泉)은
차디찬 우물맛과 함께 그 안에 담긴 역사의 깊이를 맛볼 수 있는 특별한 곳이다.
앞으로 궁궐 우물을 마실 수 있게 된다면
산에서 흘러내리는 자연의 시원함과 함께 역사문화를 음미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점점 더 무더워지는 여름이다. 새로운 목마름을 채워 줄 궁궐의 우물을 마실 수 있기를 기대해 본다.
- 장영기, 문화재청 활용정책과 민간협력전문위원
- 2010-06-18 문화재청, 문화재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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