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주짱의 하늘꿈 역사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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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토우(土偶)

Gijuzzang Dream 2010. 8. 16. 20:18

 

 

 

 

 

 

 

 

 신라 토우

 

 

 

 

1. ‘토우’와 ‘토용’은 어떻게 다른가?

토우는 장식토우, 상형토기, 토용으로 크게 분류하기도 한다.

대략 10㎝ 내외의 자그마한 크기로 만들어져 항아리 같은 흙그릇에 부착되던 장식 토우(土偶)

주술적인 목적에서 제작된 우상(偶像)과도 같은 것들로,

인간은 물론 동물, 집, 생활용기 등 다양한 모습들을 하고 있다.

 

이에 반해, 토용(土俑)

산 채로 생매장되던 노예를 대신해 무덤에 묻을 목적으로 만든 인물상이었기에

대부분이 인간의 모습들을 하고 있는데, 7-8세기의 통일신라시대 고분에서 주로 출토되었다.

 

 

 

2. 산 사람을 대신해 토용을 부장품으로 사용했는데, 사람들을 왜 무덤에 함께 묻은 것일까?

고대사람들은 사람이 죽고 나면 또 다른 세상에서 다시 태어날 거라고 믿었는데

그 사후세계에서도 풍요롭고 행복하게 살기를 원했다.

그래서 고대사회에서는 왕이나 왕후,귀족들처럼 지위가 높은 지배층계급의 사람들이 죽으면,

사후세계에서도 생전의 평소생활처럼 행복하고 편하게 지낼 수 있도록

그들이 사용하던 물건들과 함께 무사, 시종, 창고지기 등을

강제로 아니면 자발적으로 매장하던 ‘순장(殉葬)’제도가 당연하게 행해졌다고 한다.

 

이 순장제도는 비단 우리나라만의 풍습은 아니었고 중국, 이집트 등 전 세계의 고대문명 지역에서

고대인의 사후세계관이 반영되어 행해지던 일반적인 풍습이었다.

 

그런데 신라의 순장제도는 500년, 신라의 22대 왕으로 등극한 지증왕 때, 금지령이 내려져

없어지게 되는데, 무덤에 묻던 사람들을 대신해 토우가 그때부터 제작되기 시작한 것이다.

 

 

3. 토우에는 남자의 성기도 그렇고, 여자가슴이나 엉덩이를 과장되게 표현하거나

남녀간의 성애 장면을 노골적으로 묘사한 것들이 많다.

그렇게 성(性)에 관한 표현을 과감하게 표현해도 당시 사람들은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았을까?

신라시대의 토우들 중에는 요즘 봐도 ‘외설’로 사회적 물의를 일으키고도 남을 정도로

야하고 위험스러운 표현이 아주 많다.

신체의 전체적 균형에 비하여 지나칠 정도로 성기를 과장되게 표현한 남성 토우,

가슴과 엉덩이, 성기를 과다하게 노출하고 있는 여성 토우를 비롯하여,

남녀가 온 몸을 맞대고 누워있거나 남녀의 성교장면을 과감하면서도 해학적으로 표현한 토우들을

대표적으로 손꼽아 볼 수 있겠는데, 이는 인간의 번식과 토지의 풍요로운 생산력을 연결시켜

성기를 절대적으로 신성시했던 고대의 성기숭배사상에서 비롯된 주술적인 표현 내지는

저승에서의 부활과 자손들의 번창을 기원하는 사자(死者)의 간절한 소망을 담은

의례적 행위의 표현으로 이해하면 되겠다.

 

 

4. 토우들은 신라시대유물만 남아있는데, 고구려나 고려시대 때는 토우가 없었을까?

적은 수이긴 하지만, 신석기시대 지역의 패총에서 동물모양을 한 토우가 출토되기도 했다.

그러나 지금까지 발굴된 토우들은 신라와 가야 지역에서 발굴된 것들이 대부분이다.

신라시대 이후, 불교의 영향 때문이었는지

고려시대의 유적지에서는 토우와 같은 부장품이 거의 발굴되고 있지 않다.

조선시대의 유물 중에는 신라시대의 토우처럼 인간, 동물, 생활용구 등을 백자로 자그마하게 만들어

무덤에 묘지(墓誌)와 함께 부장하던 ‘명기(名器)’ 를 자주 찾아볼 수가 있다.

‘명기’는 중국에서 껴묻거리로서 매장한 기구로 고대부터 사후의 세계에서 사용할 생활용구를

사자(死者)와 함께 분묘에 넣어 매장하는 풍습이 있었다.

주로 흙을 구워 만들었으며 죽은 자가 생전에 사용한 기구, 인물, 동물 등을 모조한 것들이다.

- 국립중앙박물관, 웹진Muzine. 유물과의 대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