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미술 - 균형과 조화로움의 아름다움
역사가 오래된 만큼 우리나라 미술에 대해 한마디로 정의 내리기는 결코 쉽지 않다.
많은 선학들이 우리미술에 대해 정의하고자 노력하였고, 나름의 정의와 그에 따른 해석들을 내려놓았다.
다른 나라 미술과 달리 우리나라 미술 전반을 관통하며 흐르고 있는 그 뼈대와 정신은 과연 무엇일까.
오랜 시간에 걸쳐 형성되고 전승되어 온 우리나라 미술의 특징 중 핵심적인 인자 하나를 추려내자면
무위와 인위의 균형과 조화를 중시한 아름다움이 아닐까 한다.
시공을 초월해서 나타나는 우리나라 미술의 아름다움은 자연을 배격한 인위적인 아름다움이 아니라
인위의 힘을 최대한 뺀 ‘無爲의 魂’이 담겨있다.
우리나라 미술에는 이러한 혼을 담고 있기에 영원히 싫증나지 않는 감동이 있다.
<도 1> 국보 제285호 울산 대곡리 반구대 암각화 탁본 <도 1-1> 세부사진
우선 선사시대 미술의 정수인 울산 대곡리 반구대 암각화[도 1, 1-1] 1)에서 그 기원을 찾을 수 있다.
천전리에서 사연리로 흐르는 대곡천변의 깎아지는 듯한 절벽에 새겨져 있는 이 암각화는
자연 상태의 바위표면을 그대로 살려 그곳에 선사인들의 신념과 미의식을
사실적이면서도 역동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이곳에서 주목되는 것은 해상동물과 육상동물을 공간 속에서 분리하고자 한 흔적을 분명하게 느낄 수 있다.
즉 해상 동물들은 화면의 우측에, 육상 동물들은 화면에 좌측에 배치하였다.
암각화 속에서 서로 다른 동물들의 생활공간을 명확하진 않지만 어느 정도 분리하려는 의도가 엿보인다.
이와 함께 떼 지어 유영하는 습성을 가진 고래들은 고밀도의 공간감을,
산과 들에서 야생하는 육상 동물들은 광활한 공간감으로 대비시키되 인공조미료같이 얕고 자극적인 맛이 아니다. 결국 자연이 선사한 오선지 위에 고래, 거북이, 사슴, 호랑이 등을 율동감 넘치게 배열하여
감동적인 음율을 만들어 내고 있다.
<도 2> 국보 제199호 단석산 신선사 마애불상군
<도 3> 국보 제307호 태안마애삼존불
반구대 암각화에 곁들여진 무위자연(無爲自然)의 아름다움은 우리 미술의 큰 줄기가 되어 지속된다.
백제의 태안마애삼존불이나 서산마애삼존불, 그리고 신라의 단석산 신선사 마애불상군[도 2],
경주남산의 수많은 마애불 등 어느 하나 이러한 것이 표현되지 않은 것이 없을 정도이다.
태안마애삼존불이나 서산마애삼존불은 파격적인 삼존불 구성이 돋보일 뿐만 아니라,
표면을 필요한 만큼만 다듬어 바위자체의 질감을 최대한 존중하였다.
즉 최소한의 인위적인 기교만을 허락하여 자연과 인간과의 이상적인 조화를 통해
살아 숨 쉬는 아름다움을 만들어내었다.
특히 태안마애삼존불상[도 3]의 경우 좌우에는 서있는 불상을,
가운데는 한 걸음 물려 표현한 보살상을 두어 현세와 미래세의 무한한 시간차를 의도하였으나
작위적인 느낌은 들지 않는다.
그것은 불교유입 이전 고대인들이 신앙했던 바위의 정령(精靈)을 부처님의 모습으로
자연스럽게 화현시켰기에 가능했다. 이러한 변화 화현을 통해
고대인들은 巫에서 佛로, 無爲에서 有爲로 다시 유위에서 무위로 순환시켜 나갔다.
<도 4> 사적 제150호 익산미륵사지
최근 석탑의 해체과정에서 세상을 깜짝 놀라게 한 사리장엄구가 발견된 익산 미륵사지[도 4]에도
이러한 공간미는 그대로 적용된다. 미륵사지는 앞서 살펴본 바위 조각과 성격과 달리 넓은 인위적인 공간에
입체적인 건물들을 배치하였기 때문에 의아해 하겠지만,
큰 안목으로 내면을 들여다 보면 곧 2차원적인 공간미를 3차원적으로 매우 잘 변환·구현했다고 할 수 있다.
바위조각에 비해서 엄격한 배치의 묘미와 건축미는 당대의 최고의 기술과 건축공법으로 시공되었지만,
전체적인 구성에서 보면 주변의 자연 속에 안겨있는 物我一致의 공간에 지나지 않는다.
미륵사의 공간 구성은 건물과 건물 사이가 좁지도 느슨하지도 않은
시원하면서도 절묘한 공간미를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공간미는 신라의 황룡사에서도,
세계 최고의 종교적 · 예술적 아름다움을 간직한 석굴암에서도
넘쳐나지 않은 절제된 공간의 아름다움이 있다.
<도 5>日本 知恩院所藏 彌勒下生經變相圖, 고려 14세기
익산 미륵사에 구현된 공간감은 같은 사상이 반영된 고려불화〈彌勒下生經變相圖>[도 5]에도
그 맥이 잇닿고 있다.
미륵산 자락이 좌청룡 우백호를 이루는 아늑한 공간에 구현된 3차원적인 공간이 미륵사라면,
<미륵하생경변상도>는 비단화면에 펼쳐진 2차원적인 공간이라는 것만 다를 뿐
내면에 담긴 구성의 맥락은 동일하다.
<미륵하생경변상도>는 미륵경전의 내용을 쉽고 극적으로 보여주기 위해,
이야기의 순서를 화면의 아래쪽에서부터 위쪽으로 전개시키며
등장인물의 밀도와 긴장감을 서서히 높여 나갔다. 이와 함께 불필요한 내용들은 과감히 배제시켰고,
하나의 인물에 여러 개의 상징성을 담아
자칫 산만하고 느슨해 질 수 있는 경변상도의 극적 긴장감을 높였다.
고려 <미륵하생경변상도>의 짜임새 있는 구성력과 엄격한 좌우대칭에서 오는 조화로운 균형감,
여기에 유려한 선묘와 은은한 색채감을 더해
많은 인물과 상징들이 등장시켰음에도 맑고 시원한 공기가 흐른다.
이렇듯 우리나라 미술에서 보이는 무위의 공간미는
자연을 버리지 않고 미술을 자연의 일부로 이해함으로써 가능했다.
그것은 자연과 인간과의 균형 있는 조화를 우선적으로 고려했기 때문에 가능했다.
그러한 전통이 오늘날까지 우리나라 미술의 바탕 깊숙이 자리잡고 있다.
끝으로 고려시대 이색(李穡)이 지은 「인각사 무무당기(麟角寺 無無堂記)」에
”……내가 洛西의 여러 절에서 놀다가 우연히 南長에 이르니,
窓公이 한번보고 혼연히 그가 주지하는 인각사 무무당의 기를 지어 주기를 청하며 그 내력을 말하였는데,
대개 이 절은 佛殿이 높은 자리에 있고 뜰 중간에는 탑이 있으며,
왼편에는 ?, 오른편에는 膳堂으로 되었는데 왼편은 가깝고 오른편은 멀어서 배치가 맞지 아니한다.
따라서 이 때문에 無無堂을 선당의 왼편에 세우니, 이에 좌우의 相距가 고르게 되었다……“라고 있다.
이 글을 통해 우리 선조들의 균형과 조화에 대한 깊은 고민을 어느 정도 엿볼 수 있는데,
이는 곧 인위의 달콤함을 뺀 자연과 조화를 이루는 담백한 균형의 맛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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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울산 대곡리 반구대 암각화 탁본사진은
黃壽永·文明大 著,『盤龜臺-蔚州岩壁彫刻』(東國大學校, 1984)의 사진을 전재하였고,
칼라도판은 국립문화재연구소 보존과학연구실 신은정연구원의 도움을 받았다.
- 손영문, 문화재청 유형문화재과 전문위원
- 2010-05-31 문화재청, 문화재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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