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립중앙박물관 미술관 테마전
“금당사 괘불”
ㅇ 기 간 : 2010년 5월 18일(화) ~ 8월 1일(일) (보물 1266호, 높이 8.29m x 폭 4.55m) |
[금당사괘불]1692년, 삼베에 채색, 829x455cm, 보물 1266호, 전북 진안 금당사
국립중앙박물관(관장 최광식)은 5월 18일(화)부터 8월 1일(일)까지
미술관 2층 불교회화실에서 “보물 1266호 금당사 괘불” 테마전을 개최한다.
부처님 오신 날을 기념하여
평상시에는 보기 어려운 사찰 소장 문화재를 일반인에게 보여주기 위해 기획된 것으로,
금당사(金塘寺, 전북 진안군 소재)측의 협조를 얻어 특별히 공개하게 되었다.
이 괘불은 1692년에 그려진 것으로
조선시대 괘불의 대표적 형식 중 하나인 ‘보살형 부처’를 표현한 것이 특징이며,
높이 8.3m에 달하는 거대한 작품이다.
괘불은 그 거대한 규모로 인해 일반적인 방법으로는 전시가 불가능하기 때문에,
국립중앙박물관은 미술관 불교회화실에 높이 약 15m, 폭 8m의 괘불 전시공간을 특별히 마련하여
테마전를 개최하고 있다.
이번 전시는 2006년 “법당 밖으로 나온 큰 불화, 청곡사 괘불” 이후
매년 부처님 오신 날에 맞추어 진행된 여섯 번째 전시이다.
예로부터 부처의 힘으로 질병이나 기아, 전쟁, 천재지변 등과 같은
현실의 고난을 극복하기 위한 불교의식에는 괘불(掛佛)이 쓰였다.
조선시대에는 여러 불교의식 가운데 죽은 이의 영혼이 극락에서 다시 태어날 수 있도록 기원하는
천도의식 - 49재, 예수재, 수륙재, 영산재 등이 왕성하게 이루어졌다.
이러한 의식을 행할 때에는 멀리서도 많은 사람들이 볼 수 있도록 대형 괘불을 걸었다.
괘불(掛佛)은 큰 재(齋)나 초파일 같이 대중이 많이 모이는 날 법당 앞 당간지주에 거는 의식용 불화이다.
불교의식(佛敎儀式)은 부처의 힘으로
질병이나 기아, 전쟁, 천재지변 등과 같은 현실의 고난을 극복하기 위해 행해졌다.
조선시대에는 여러 불교의식 가운데 죽은 이의 영혼이 극락에서 다시 태어날 수 있도록 기원하는
천도의식이 왕성하게 이루어 졌다.
대표적인 천도의식으로는 49재(四十九齋), 예수재(豫修齋), 수륙재(水陸齋), 영산재(靈山齋) 등이 있다.
이러한 의식을 행할 때에 는 멀리서도 많은 사람이 볼 수 있도록 대형의 괘불을 걸었다.
금당사 괘불은 삼베 13폭을 이어 붙인 대형의 화면에
보관을 쓴 보살의 모습으로 꽃을 들고 있는 부처를 단독으로 등장시키고 있다.
이처럼 특이한 모습의 부처는 석가모니불이 꽃을 들어 진리를 나타냈다는 염화시중(拈華示衆
: 불교의대표적인 화두 가운데 하나)을 근거로 석가모니부처로 알려져 왔다.
부처는 머리에 보관을 쓰고 있는데 보관에는 화불이 표현되어 있지 않고
중앙의 아래 · 위 2단으로 7구씩 총 14구의 화신(化神: 석가가 중생을 구제하기 위해서 여러 모습으로
이 세상에 나타난 일) 보살을 표현하였으며, 그 좌우에 2마리씩 총 4마리의 봉황(鳳凰)을 장식하였다.
보관에 화신 보살과 봉황을 표현한 작품은 미륵불을 주불로 그린 부여 무량사 괘불(1627년)이 유일하다.
보관의 화신 보살은 『미륵경전(彌勒經典)』에 기술된 내용과 일치하고 있어
금당사 괘불의 본존이 석가모니불이 아닌 미륵불일 가능성도 엿보이고 있다.
얼굴은 네모에 가깝고 좌우로 치켜 올라간 눈 꼬리에 음영법(陰影法)을 적용한 눈동자,
굳게 다문 작은 입 등에서 부처의 위엄을 보여준다.
신체는 얼굴에 비해 왜소하나 하반신을 가늘고 길게 표현하여 장대한 느낌을 준다.
의습은 붉은색 내의 위에 영락장식과 문양들을 장식한 녹색의 대의를 걸치고 있으며,
내의를 묶은 흰색 끈은
가슴에서부터 흘러내려 아랫배와 무릎 부분에서 고리를 만들고 연화족좌 아래까지 이어졌다.
몸 광배에는 여러 가지 색깔의 연꽃을 배치하였는데,
이 연꽃의 자방 부분에 28자의 범자문(梵字文: 불, 보살을 상징하는 문자)을 써 넣었다.
이 시기에 그려진 괘불 가운데 부처를 둘러싸고 있는 몸 광배에 범자문을 장식한 예는 찾아 볼 수 없어
금당사 괘불에만 나타나는 하나의 특징이라 할 수 있다.
이 괘불은 당당하면서도 중후한 모습으로 신체 비례가 균형을 이뤄
17~18세기 괘불의 특징을 잘 보여주는 걸작으로 손꼽힌다.
하단의 화기(畵記)에 따르면,
이 불화를 처음 조성할 당시의 사찰 이름은 ‘용출산 금당사(聳出山 金堂寺)’였으나,
이후 어느 시기에 ‘마이산 금당사(馬耳山 金塘寺)’로 바뀐 것으로 보인다.
괘불을 그린 화원(畵員)은 ‘명원(明遠), 처헌(處軒), 위청(偉淸), 치헌(致軒)’ 등 모두 네 명이다.
‘금당사(金塘寺)’의 연혁
‘금당사’는 전라북도 진안군 마령면 동촌리 마이산 남쪽에 자리한 사찰로, 금산사의 말사이다.
사찰의 창건에 관해서는 두 가지 설이 있다.
하나는 814년(헌덕왕 6) 또는 876년(헌강왕 2) 중국인 혜감(慧鑑)스님이 창건했다고 하나
확인할 만한 문헌은 없다.
다른 하나는 610년(의자왕 10) 고구려에서 백제로 건너온 열반종의 개조인 보덕(普德)스님의
11제자 가운데 무상(無上)스님이 그의 제자인 금취(金趣) 등과 함께 세웠다고 전한다.
무상화상은 ‘금동사(金洞寺)’를 창건하였다고 하는데 현재 금당사(金塘寺)의 옛터로 전해진다.
고려시대의 <동국이상국집> 권9에
이규보(李奎報, 1168-1241)가 32세 때인 1199년 전주목에 부임하였는데
그 시절 마령속현에 공무상 왔다가 금동사(金洞寺) 주지를 찾아가는 정황을 읊은 시가 있다.
마령속현은 현재 금당사가 속한 지역으로 진안군 마령면 ․ 백운면 ․ 성수면 지역이다.
이규보가 마령현에 있는 금동사를 찾아가는 것으로 보아 금동사가 마령현에 있었던 것은 확실한데
현재 마령현 지역에서는 금동사로 비정할만한 사찰은 금당사의 옛터를 제외하고는 없다.
금동사의 원래 위치는 금당사에서 서북방향으로 약 0.9㎞ 떨어진 곳으로
현재는 그곳을 고금당(古金堂)이라 부르고 있다.
지금은 ‘고금당’이라고 부르는 법당이 금당대 위쪽에 자리잡고 있으나
20세기 초에 편찬된 <진안지>에는 고금당은 나옹암의 아래에 있으며
<구진안지>에 이미 폐사되었다고 기록하고 있어 지금의 법당과는 위치가 달랐음을 알 수 있다.
고금당의 아래에는 금당대라는 넓은 바위가 자리 잡고 있고
금당대의 아래에는 넓이가 약 10평가량의 석굴이 있는데 ‘나옹암’으로 불린다.
나옹 혜근(懶翁 惠勤, 1320-1376)이 이곳에서 오도(悟道)하였다고 전해지고 있다.
임란 이후에 지금의 위치에 절터를 잡고 ‘금당사(金堂寺)’를 중건하였으며
1675년 법당을 짓고 사찰의 면모를 갖추게 되었다.
사찰의 이름도 1692년에 그려진 괘불 화기(畵記)에는 ‘금당사(金堂寺)’라고 쓰여 있고,
1765년의 <여지도서(輿地圖書)>나 신경준이 편찬한 <가람고(伽藍考))>에는
‘금당사(金塘寺)’라고 되어 있다.
정조 때 편찬된 <범우고(梵宇攷)>와,
영조 때 편찬된 <비변사지도> <해동지도>에는 ‘금당사(金堂寺)’로,
1872년의 <군현지도>와 일제시기에 편찬된 <진안지>에는 ‘금당사(金塘寺)’라고 기록하고 있다.
이처럼 금당사의 다른 한문 표기(金堂寺/ 金塘寺)가 선후관계 없이 사용되고 있는 것으로 보아
한자로는 두 가지로 섞어 표기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언제부터인가 절 안에 연못을 설치하고 그 의미에 맞는 연못(塘)자를 사용하여
현재까지 ‘금당사(金塘寺)’로 기록하게 된 것으로 보인다.
일제강점기에는 금당사에서 수행 정진하던 김대완(金大完)이 당시 면암 최익현을 맹주로
호남의 선비들이 의병을 모으자 승려의 신분으로 참여하여 각종 지원을 하였다고 한다.
금당사 괘불의 형식과 양식적 특징
1692년에 제작된 금당사 괘불은 마(麻)에 채색을 하였는데 1997년 보물 1266호로 지정되었다.
호화롭게 장식된 의습을 걸친 장엄한 본존을 화면에 가득 차게 묘사하였고,
커다란 광배와 사방으로 펼쳐진 오색구름의 표현, 주홍과 초록을 주조색으로 하고
분홍 ․ 하늘 ․노라 ․ 흰색 등 중간색을 많이 사용하여 가볍고 밝은 색감처리로
화면은 활기가 넘치는 품격 높은 불화이다.
이 괘불은 한국전쟁 중(1951년) 한 번 보수되었지만
상당부분이 손상되어 2003년 12월-2004년 5월까지 보수, 복원처리를 하였다.
보수하기 전의 괘불은 상단의 지주대인 천간(天干)과 하단의 지주대인 지간(地干)이 없어지고,
천간을 대신하여 새끼줄을 끼워두었으며 지간부분은 뒤로 접어서 후면에 부착시켜 놓았다.
화면은 삼베의 연결부위 솔기가 여러 곳이 터지고
괘불을 말고 펴는 과정에서 생긴 꺾임으로 화면의 채색부분 여러 곳이 금이 갔으며,
녹색으로 채색된 광배나 가사의 초록색 부분은 심각한 산화가 진행되어
색채가 상당부분까지 유실되어 있었다. 특히 상단부분은 후광과 좌측 화불 일부까지 유실되어 있었다.
보수작업으로 유실된 부분을 보강하고 녹색이 탈락한 광배 등을 색을 맞추어 보수하였는데,
이때 사용한 초록색이 원래 괘불의 녹색보다는 연하여
괘불의 전체적인 색감은 밝아졌으나 진중한 무게감은 적어진 것으로 보인다.
부처의 독존입상을 화면 가득히 그린 이 괘불은 연꽃을 받쳐 들고 보관을 머리에 쓰고
호화로운 광배와 화불에 둘러싸여 공중에 떠있는 모습을 표현하였다.
얼굴은 둥근 방형으로 가는 눈썹에 끝이 올라간 눈을 내리뜨고 작은 입을 꼭 다물어
위엄 있는 표정으로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다.
검은 머리카락은 양 어깨를 타고 내려와 엉덩이까지 이르고 머리에는 화려한 보관을 쓰고 있으며
보관은 분홍색 연꽃 3개와 구슬장식이 있는 꽃모양으로 띠를 만들고,
그 위에 화염과 봉황장식이 된 영락을 여러 단으로 달아 호화롭다.
보관의 중앙에는 2단으로 14분의 화불이 묘사되어 있다.
손은 왼손을 가슴 앞으로 올려 연꽃가지를 받치고
오른손은 어깨 앞으로 들어 올려 연꽃가지를 잡고 있다.
두광의 중간까지 뻗어 올라간 연꽃가지에는 3송이의 꽃이 피어있는데
제일 위쪽에는 노란색 꽃봉오리가, 중앙에는 활짝 피어 연밥이 드러난 붉은색 연꽃이,
그 아래에는 분홍색의 작은 봉오리가 달려 있다.
의습(衣襲)은 내의 위에 천의를 걸치고 있는데,
꽃무늬장식이 있는 초록색 단을 댄 붉은색 내의를 입고 있다.
내의를 묶은 흰색 끈은 가슴 앞에서 나비매듭을 만들고 흘러내리다가
아랫배 부분과 두 다리 사이에서 둥근 고리를 만들고는 화면 하단까지 굽이치며 이어지고 있다.
홍색의 내의에는 연한 노란색 꽃무늬가 잔잔하게 그려져 있고
다리부분에는 화려한 영락장식이 표현되고 있다.
두발은 八字 모양으로 초록과 검정색의 꽃잎이 노란 이중윤곽선으로 둘러진 연화족좌 위에 놓여있다.
초록색 천의는 어깨에서 내려와 양팔 위를 교차하여 배 앞에서 반원형을 이루고는
다시 반대편 팔위로 걸쳐 다리 바깥쪽으로 흘러내리는데 안자락은 분홍색으로 표현되어 있다.
천의자락과 함께 목에서 시작된 붉은색 내의 장식 끈도 화면 하단까지 늘어뜨려져
여러 겹의 옷자락들과 어우러지며 화려함을 드러내고 있다.
광배(光背)는 두광(頭光)이 원형이고
신광(身光)은 상단의 모를 죽인 커다란 직사각형의 거신광(擧身光)이다.
두광은 빨강 ․ 파랑 ․ 노랑색으로 둘러진 테두리 안에 초록색을 칠하고,
신광은 은은한 화염무늬가 그려진 붉은색의 테두리 안에 연주문대를 두르고 있다.
그 안쪽에 여러 가지 색깔과 모양의 크고 작은 연꽃이 수많은 잎과 어우러진 연당초문을 그려놓았다.
각 연꽃의 중앙에는 범자(梵字)의 모양이 도안처럼 변형되어 있어서
각각의 글자를 확인하기는 어려운 실정이다.
광배에서는 파상형의 무지개무늬가 사방으로 펼쳐나가고
연화대좌 위에 앉은 시방제불(十方諸佛)이 좌우에 각각 10구씩 표현되어 있다.
시방제불은 하나의 본으로 그린 듯 모두 크기와 수인, 자세가 흡사하다.
화면의 상단, 하단에는 구름이 표현되어 있는데,
상단에는 밝고 가벼운 구름이 몇 줄기 표현된 반면
하단에는 광배의 앞쪽까지 갈색과 초록색의 진한 구름이 춤추듯이 흘러내린 천의자락과 어우러져
부처가 구름 위로 솟아오르듯 묘사되어 있다.
금당사 괘불과 형식적으로 가장 유사한 작품은 1627년에 제작된 무량사 괘불이다.
무량사 괘불이 더 크기는 하지만 독존의 보관노사나불을 입상으로 표현하고 있고,
광배와 광배 밖으로 벋어나가는 오색구름, 그 위에 표현된 시방제불,
광배의 하단이 옷자락과 구름에 가려지면서 역동적으로 표현된 점,
신광 내부를 연당초문으로 화려하게 처리한 것 등은 두 괘불에 모두 나타나는 특징이다.
무량사 괘불은 임란 이후 우리나라 불화양식에 나타나는 큰 변화를 잘 보여주는 작품이다.
조선 전기의 불화들은 부처를 중심으로 많은 권속이 빙 둘러서 복잡한 구성을 지니고 있으면서도
배경의 표현이 극도로 제한되거나 어두워 고요하고 안정적인 느낌을 준다.
17세기에 들어오면 조선 전기의 전통적인 양식을 따라 작품을 제작하는 경우도 있고,
새로운 양식으로 변화를 드러내는 불화가 제작되기도 한다.
전통적인 방식을 따른 작품으로는 율곡사, 적천사의 괘불을 들 수 있다.
새로운 양식으로 제작된 괘불로는 무량사 괘불과 충남지역에서 제작된 여러 괘불을 들 수 있는데,
거대한 독존입상을 화면에 가득 배치하고 장식적인 보살의 의습으로 표현하고 있다.
색상도 주홍과 초록 외에 분홍 ․ 하늘색 ․노란색 ․ 흰색 등 가볍고 밝은 색을 사용하여
화면이 밝고 활기가 넘친다.
이러한 색상의 사용과 화면의 배치는 17세기 경기도, 충남지역에서 널리 유행하여
1628년의 칠장사 괘불이나 수덕사 ․ 신원사 ․ 마곡사 ․ 장곡사 괘불 등이 유사한 양식적 특성을 보이고 있다.
금당사 괘불도 17세기 충남지역의 밝고 가벼운 색감과 화려한 보살의 의습을 지닌 양식을 따르고 있다.
조선후기 우리나라 대형 괘불은
영산대회에 사용되어 영축산(영취산, 靈鷲山)에서 설법을 하는 석가여래와 그 권속들이 그려진
영산회상도(靈山會上圖)를 가장 많이 제작하였다.
이외에 삼신불도, 보관노사나불도, 삼불회도, 오불회도 등 다양한 도상이 출현하고 있는데
이러한 다양한 도상의 괘불이 출현된 연유는
각 사찰이 전통적인 사찰의 특성을 유지하려고 하였던 데서 연유한 것으로 보인다.
화면의 하단에는 두 개의 화기(畵記)가 기록되어 있는데
붉은색 바탕 위에 검정색으로 쓰인 아래쪽의 화기가 이 괘불이 제작될 당시의 것이고,
그 위에 흰색바탕에 검정색으로 쓰인 화기가 1951년 보수 때의 것이다.
괘불 제작 당시에 쓰인 화기에는 강희 31년(1692, 숙종 18)에
명원(明遠) ․ 처헌(處軒) ․ 위청(偉淸) ․ 치헌(致軒) 등의 화원(畵員)이 그렸음을 밝히고 있다.
그러나 이들이 그린 다른 그림을 찾을 수 없어
화원들의 사승관계나 회화적 특징, 계보를 파악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작품의 양식적 특징으로 보아 충남지역의 화사들과 관련이 깊은 것으로 보인다.
康熙三十一年壬申六月日聳出山金塘寺掛佛幀
波湯 施主金尙立兩主 施主李時達單身 施主文德生兩主 施主金好珎單身
施主金靈傑單身 施主朴乭善單身 施主金吾壯單身 施主金己文兩主
腹藏施主金時山兩主
供養施主兼末醬施主辛京立兩主 供養施主幼學金起仁兩主 施主崔淡伊兩主
施主儀元比丘 朱紅施主善沃比丘
荷葉施主金王亂兩主 圓鏡施主李末生兩主 施主金尙亂兩主 施主姜萬億兩主
皮膠施主白吉元兩主 五色絲施主月善兩主 布施施主鄭貴男兩主 喉靈通施主金命端單身
波湯保体曹海得兩主
波湯保体崔明吉兩主
供養保体 明信比丘
草紙施主 印希比丘
後背地施主 宋白微兩主
施主後鑑比丘
末醬施主孫氏花春兩主
末醬施主白日○單身
圓環施主邊業兩主
畵員 明遠比丘
處軒比丘
偉淸比丘
致軒比丘
證明 信密比丘
供養主白惠比丘
弘印比丘
化士國淸比丘
別座善沃比丘
한편 조성 당시 화기에서 증명(證明)을 맡은 신밀(信密)은 1673년 장곡사 괘불의 제작에 참여하였다.
장곡사 괘불은 도상의 형식으로는
당시 충청도지방에서 널리 쓰인 모든 화신불로 응화하는 보관노사나불을 그리고
그 부처가 미륵으로 응화하기를 바라는 표현이 아닌가 짐작한다.
금당사 괘불이 17세기 충청지역 괘불과 양식적으로 밀접한 관련을 보여주고 있는 것은
이러한 장곡사 괘불의 제작에 참여한 신밀비구의 영향이 작용하였을 것으로 보인다.
두 번째 화기는 불기 2978년(1951) 7월 15일에 제2회 보결불사를 하고 기록한 것으로,
이때의 금어비구(金魚比丘)는 정진(正眞) ․ 연복(連福)이었으며 도감(都監)은 진명(振明)이다.
한국전쟁으로 온 나라가 소용돌이치고 있었을 시기에 이런 불사를 했다는 것은
어려운 시기에 민중에게 위안을 주었던 한국불교의 모습을 반영하고 있음을 짐작할 수 있다.
佛紀二九七八年 七月十五日
第二會補缺佛事錄
證明比丘 石虎
會主比丘 在峰
金魚比丘 正眞
比丘 連福
都監比丘 振明
化主
淸信女 庚寅生 韓大智行
張城南
鄭白蓮化
申白蓮行
金淸信行
金萬德華
姜化子
- 이영숙(전남문화재전문위원) <진안 금당사 괘불의 고찰> 중에서 발췌
- 진안 금당사 괘불탱(통도사성보박물관 괘불탱특별전, 2007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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