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묘호란의 영웅’ 忠壯公 南以興 장군
2代가 나라 지키다 殉國한 난세의 영웅
⊙ 이괄의 반란군 서울 무악재에서 격파하여 일등공신 반열에 올라
⊙ 정묘호란 당시 안주성에서 3만여 후금군(後金軍)과 격전 끝에 화약고 터뜨려 자폭(自爆)
⊙ 아버지 남유(南瑜) 장군은 노량해전에서 이순신 장군과 함께 참전했다 전사(戰死)
충남 당진에선 천지개벽이 진행 중이었다. 현대제철의 고로(용광로) 일관제철소가 들어서면서 당진은 온통 ‘공장의 바다’로 변하고 있었다. 밀물 썰물이 반복되던 개펄은 산업단지로 옷을 갈아입었고, ‘당나라와 연결되던 항구’라는 상징성은 역사의 뒤안길에 묻히고 이제 당진은 한국 제3의 철강도시로 자리매김했다.
당진군 남서쪽에 위치한 대호지면 도이리로 가는 국도 곳곳에선 지나가는 차들을 향해 구제역 예방 소독약을 뿌려댔다. 국도를 따라 달리다 퇴락해 가는 농로(農路)로 옮겨 타고 200여m를 전진하자 우람한 한옥 건물과 전시관이 나타났다. 이곳이 조선시대 무장(武將) 남이흥(南以興 · 1576~1627) 장군과 그의 부친 남유(南瑜 · 1552~1598) 장군을 기리는 충장사(忠壯祠)라는 사당이다. 사당 앞쪽에는 그 후손들이 대대로 살아온 종가(宗家) 고택과 모충관이란 전시관이 있었다.
모충관에 들어서자 이괄의 난을 평정한 공으로 인조 임금이 하사한 남이흥 장군의 영정이 걸려 있었고, 남이흥 · 남유 장군과 관련된 각종 기록과 두 장군이 사용했던 활과 화살, 갑옷 내피를 비롯하여 유품 500여 점, 교지(敎旨 · 조선시대 왕이 신하에게 관직이나 자격, 토지, 노비 등을 내려주는 명령서) 60여 점이 전시되어 있었다. 남이흥 장군의 직계후손이자 당진문화원 향토사 연구위원인 남기은(南基殷)씨는 “유품 중 일부는 1970년 문화관광부 중요민속문화재로 지정됐으며, 남이흥 장군의 영정과 인조 임금이 남이흥 장군의 장례식 때 관을 덮어 주었던 곤룡포, 임금이 하사한 사패절목 문서 등 4점이 추가로 보물 지정을 앞두고 있다”고 설명했다.
충장사는 충장공 남이흥 장군과 그의 부친 남유 장군을 기리기 위해 1667년(조선 현종 8) 왕명으로 건립된 불천지위(不遷之位) 사당이다. 불천지위를 받으면 장자에게 그 지위가 세습되며, 그 후손들은 신위를 옮기지 않고 영구적으로 제사를 지낼 수 있다. 조선시대에 충장공이란 시호(諡號 · 죽은 인물에게 국가에서 내려주는 특별한 이름)를 받은 인물은 임진왜란 당시 활약했던 권율(權慄) 장군, 의병장 김덕령(金德齡) 장군 등 13명에 이른다. 현장을 안내한 남이흥 장군의 직계후손 남균우(南均祐 · 왕인문학회 회장) 박사는 “조선시대에 충장공 시호를 받은 분이 열세 분 계시지만 조정에서 토지와 노비 등을 주어 대대손손 제사를 지내도록 하는 불천지위를 내린 사례는 극히 드물다”고 말했다.
父子가 차례로 국가 지키다 순국(殉國) 남이흥 장군은 1624년(인조 2) 이괄이 쿠데타를 일으켜 수도 한양을 점령했을 때 안산(오늘날의 서울 무악재 부근)에서 관군을 지휘하여 반란군을 격파한 공으로 진무 1등공신에 책봉됐다. 3년 후 정묘호란(1627)이 발발하자 그는 평안남도 안주성에서 3000여 군민(軍民)으로 후금(後金)의 3만여 대군과 맞서 싸웠다. 중과부적으로 성이 함락될 위기에 처하자 성 안에 있던 화약고에 점화하여 수천 명의 후금군을 폭사시키고 자신도 최후를 마친 조선시대의 명장(名將)이다.
남균우 박사의 설명에 의하면 남유 장군은 노량해전에 이순신 장군과 함께 참전하여 불과 12척의 전선(戰船)으로 일본의 대함대와 맞서 싸웠다고 한다. 남유 장군은 이순신 장군이 적탄에 맞아 전사(戰死)한 후 함대를 지휘하여 일본군과 격전을 벌이다 자신도 이순신 장군이 전사한 지 사흘 후인 1598년 11월 22일 적탄에 맞아 전사했다. 조선시대를 통틀어 부자(父子)가 무장으로서 나라를 지키다 장렬하게 순국한 것은 그 예가 드물다.
조선왕조실록과 남이흥 장군 후손들의 기록, 그 밖의 사료를 통해 남이흥 장군의 일대기를 추적해 본다. 남이흥 장군은 1576년 7월 27일생으로 명문가 출신이다. 그의 8대조인 남재(南在)는 조선 개국의 1등공신으로 태종 시절 대사헌과 영의정을 지냈다. 정성희 한국학중앙연구원 전임연구원이 쓴 ‘정묘호란기 안주성 전투와 남이흥 장군’이란 자료에 의하면 남재는 개국 초기 국가의 기틀을 잡는 브레인 역할을 했다고 한다.
남이흥 장군의 6대조 남지(南智)는 문종 시절 좌의정, 증조부 남세건(南世健)은 예조 · 병조 · 공조참판과 경연춘추관사를 지냈다. 조부 남응룡(南應龍)은 이퇴계와 함께 호당(湖堂 · 조선시대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길에 나선 젊은 문신들을 위한 수양·연구시설)에 뽑힌 대석학으로 공조참의를 지냈다. 그의 모친인 전주 유(柳)씨 부인은 대사간 유헌의 증손녀이자 형조판서 유훈의 딸이었으니 남이흥은 공훈, 충신 집안의 혈통을 이어받은 셈이다.
사르흐 전투를 전환점으로 하여 후금은 만주 전 지역을 차지하고 공세로 나간 반면 기세가 꺾인 명나라는 국가 멸망의 길로 나가게 된다. 남이흥이 관직생활을 했던 시기는 임진왜란으로 전 국토가 유린되어 국가방위 시설이 모두 파손된 때였다. 또 북방에서는 여진족이 호시탐탐 침략의 기회를 엿보고 있어 국가안보가 지극히 불안하던 내우외환의 시기였다. 남이흥의 일생에서 일대 전환기는 그의 나이 49세 때인 1624년 1월 24일 터진 이괄의 반란이다. 이괄은 인조반정 당시 큰 공을 세웠으나 제대로 대접받지 못해 불만에 차 있던 중 자신의 아들이 역모에 연루된 사건을 조사하기 위해 파견된 관리들을 살해하고 쿠데타를 일으켰다. 이괄이 지휘하는 반란군 주력은 조선의 최정예부대였던 서북 변경 방어군 1만2000여 명과 임진왜란 당시 조선에 항복한 항왜병(왜군 조총수 및 검사) 130여 명이었다. 누르하치군의 움직임에 대응하기 위해 전국에서 차출된 최정예 병력이었던 서북 변경 방어군은 사령관 이괄의 선동에 의해 반란군으로 돌변, 질풍처럼 한양을 향해 진격했다. 쿠데타군은 오합지졸이나 다름없던 관군을 차례로 격파하고 개천과 황주 평산을 거쳐 파죽지세로 임진강을 건넜고, 인조는 황급히 공주로 파천했다. 이괄은 반란을 일으킨 지 불과 17일 만인 2월 9일 한양에 입성했다. 운명의 2월 11일 새벽, 무악재 주변 안산에서 벌어진 전투는 오전 11시까지 일진일퇴의 공방전을 거듭했다. 초기엔 항왜 조총수와 검사들이 선봉에 선 반란군이 우세했으나 갑자기 풍향이 바뀌어 반군이 바람을 안고 싸워야 하는 상황이 됐다.
남균우 박사가 조선왕조실록을 토대로 정리한 <비장한 남이흥의 순국>이라는 자료는 당시의 전투상황을 이렇게 기술하고 있다.
<고개 안쪽에 배치된 관군은 남이흥, 변흡 두 장수의 질타 섞인 독전을 받아가며 필사적으로 진지를 고수하려 했으나 공격군의 수가 워낙 많은 데다가 맞바람까지 안게 되어 차츰 밀리기 시작했다. 두 장수는 환도를 뽑아 휘두르면서 독려했지만 방어선은 수십 보 뒤로 물러났다 … (중략)… 싸움이 한창 무르익어 갈 무렵, 갑작스럽게 바람의 방향이 서북풍으로 바뀌더니 풍세는 여전히 세차게 모래 먼지를 휘말아 올려 눈코 뜰 새 없이 반란군의 얼굴에 뒤집어씌웠다. 이때 남이흥은 기다렸다는 듯이 기회를 포착했다. 이때를 위해 준비했던 고춧가루를 뿌린 것이다. 뒤바뀐 풍향을 따라 매운 고춧가루가 강풍에 섞여 적의 방향으로 휘몰아치고 있었다. 거꾸로 맞바람을 안게 된 반란군의 공격대는 일순 그 기세가 주춤해졌다. 풍세가 바뀌자 관군의 사기가 배가 되었다. 적병 400여 급을 베고 300여 인을 사로잡았다.> 그날 밤 10시경 이괄은 50~60명의 친위 기병의 호위 아래 은밀히 수구문을 빠져나가 2월 12일 삼전도 나루에서 한강을 건너 광주 방면으로 도주했다. 그런데 그를 호위하던 심복 이수백, 기익현, 이선철 등 3인이 이괄의 목을 베어 투항함으로써 이괄의 난은 막을 내렸다. 불과 4000여 병력으로 1만2000여 명에 달하는 이괄의 반군을 안산에서 결정적으로 패퇴시킨 남이흥 장군은 그 공을 인정받아 갈성분위 출기효력 진무 일등공신(특출하게 용맹을 떨쳤다는 뜻)에 올랐다. 반란군을 피해 창졸간에 공주로 피란을 떠났던 인조 임금 입장에서 볼 때 남이흥은 구세주나 다름없었을 것이다. 그 후로 인조는 남이흥을 총애하여 그를 숭록대부(종1품)로 특진시키고 의춘군으로 봉하여 넓은 땅과 노비 등 푸짐한 상을 하사했다. 충장사 입구의 모충관에 전시되어 있는 남이흥 장군 영정은 당시 인조에게 하사받은 것이라고 한다. 인조는 광해군을 몰아내는 반정(反正)에 성공한 후 지략과 용맹이 뛰어나 일세를 풍미하던 당대 최고의 무장(武將) 이괄을 논공행상 과정에서 소외시켜 이괄의 난을 초래하는 구실을 제공했다. 결국 만주에서 웅비하던 후금의 군사행동에 대비하기 위해 배치했던 1만2000여 서북 변경 방어군이 이괄의 난으로 와해됨으로써 국경지역이 텅 비는 결과로 이어진 것이다. 광해군은 명나라와 후금 사이에서 절묘한 중립외교로 평화를 유지했다. 그러나 인조반정으로 정권을 잡은 서인 세력들은 향명배금(向明排金)이라는 시대착오적인 정책으로 돌아서 요동지역을 수복하려는 모문룡(毛文龍) 휘하의 명나라 군대를 평북 철산의 가도(島)에 주둔시키고 이를 은밀히 원조했다. 명나라를 쓰러뜨리고 중원 장악을 꿈꾸던 후금은 공공연하게 명나라를 후원하는 조선을 어떤 식으로든 손을 봐야 했다. 바로 이 무렵 반란에 실패한 이괄의 참모였던 한명련의 아들 한윤, 이난영, 정매 등이 후금에 투항하여 “이괄의 난으로 조선의 변경 방비가 매우 허술하다. 의주 안주는 쉽게 함락시킬 수 있으니 속히 조선을 쳐야 한다”고 선동했다. 1627년(인조 5) l월 13일 아민(阿敏)이 이끄는 3만6000여 명의 조선침략군이 사르흐 전투에서 투항한 강홍립과 한윤을 향도로 삼아 얼어붙은 압록강을 건넜다. 당시 조선의 최일선이었던 의주성 방어 책임자인 의주부윤 이완은 이순신의 조카로서 임진왜란 때 많은 공을 세운 장수였다. 그러나 기록을 보면 의주성을 지키고 있던 수비병들이 잠든 사이 적들이 수구문으로 침입, 수문장을 죽이고 성 안으로 들이닥치는 바람에 싸움다운 싸움을 해 보지도 못하고 성이 함락당했다. 창성에서는 후금군의 기세에 놀란 조선군 병사와 백성들이 밧줄을 타고 성 밖으로 도망치는 바람에 3000명의 방어병력에도 불구하고 불과 200여 기의 후금 기병에게 성을 빼앗겼다고 한다. 후금군은 용골산성, 능한산성 등을 유린한 후 압록강을 건넌 지 불과 8일 만에 청천강을 도하하여 평안병사 남이흥이 지키고 있던 안주성을 포위했다. 청천강 남안에 위치한 안주성은 서북지방의 요충지로 고구려군이 수나라의 30만 대군을 궤멸시킨 살수대첩이 벌어졌던 유서 깊은 곳이다. 당시 안주성에 배치된 조선군 병력은 남이흥이 이끌고 온 1500명과 평안도 지역에서 모은 병력, 민간인과 노약자까지 합쳐 3000여 명에 불과했다. 이 소수의 병력이 질풍처럼 내달려 온 당시 세계 최강의 만주8기군 3만여 병력과 격돌한 것이 안주성 전투다. “공(公)께서 허락만 하신다면 공에게 후한 영광이 있을 것이요 성 안 군사와 백성들까지도 그 처자를 보전토록 할 것이라 합니다. 그러나 만약 그러지 않을 것 같으면 공의 몸에도 불리할 뿐만 아니라 성 안 군민들까지도 모두 어육이 될 것이니 공께서는 아무쪼록 깊이 생각해 주시기 바랍니다.”
1월 21일 새벽, 안주성을 포위한 후금군이 일제히 나팔을 불고 북을 울리며 공격을 개시했다. 1만여 기병의 엄호하에 도보로 성에 접근한 보병들이 성벽을 기어오르기 시작했다. 성을 사이에 두고 탄환과 화살이 빗발쳤다. 조선군은 활과 대포로 맞섰고, 성벽을 기어오르는 자들에게는 돌과 뜨거운 물을 퍼부어 파상 공격을 막아냈다. 수비군은 방어망이 무너지면서 안주성 중심부 관아로 집결해 전열을 정비했다. 성 내부를 포위한 아민은 또다시 항복을 종용했으나 남이흥은 이를 거부하고 혈서(血書)로 장계를 써서 조정에 보냈다. 혈서의 내용은 이렇다. “지금 외로운 이 성이 적에게 포위당하여 함몰되려 하고 있습니다. 이제는 더 이상 지탱하기 어려운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만일 주장이 군사를 독려하여 달려와서 우리를 구원해 준다면 신 등은 함몰되는 것을 면할 수 있을 것이온데, 감사 윤훤은 군사를 거느리고 하루면 달려올 수 있는 거리에 있는 데도 앉아서 보고만 있으니 신 등에게는 오직 죽음이 있을 뿐입니다.”
이때 남이흥의 나이 52세였다.
실록은 남이흥의 최후를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안주가 함락되자 남이흥은 약간 명의 제장(諸將)을 거느리고 중영에 모여서 화약으로 스스로 분신하여 죽었다 합니다.”(인조 5년 1월 25일) 승정원일기의 기록에 의하면 평안감사 김기종은 ‘안주성 내외에서 널려 있는 시체를 수습하여 묻은 자가 3041인, 불타 죽은 자의 수가 1000여 인에 해당한다’는 장계를 올렸다.
조선왕조실록에 의하면 아비규환의 한양 모습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임금의 수레가 자취를 감출 때쯤 한양을 호위하는 책임을 진 장수들까지 덩달아 몸을 숨겼다. 백성들은 엎어지고 자빠지면서 한양을 벗어났고 피란을 하지 못한 사람들은 양반집 개와 닭을 닥치는 대로 잡아먹고 빈집을 털었다. 포졸이 막으려고 하면 칼을 들고 대항하는 험악한 분위기였다.”(인조 5년 1월 27일) 정묘호란 당시 조선군이 전투다운 전투를 치른 것은 안주성 싸움이 유일하다.
조정에서는 화전(和戰) 양론이 격돌하는 가운데 화의를 하기로 의견을 모았다. 3월 3일 명나라의 연호 ‘천계(天啓)’를 쓰지 말 것, 조선은 후금을 형님으로 모실 것 등을 서약한 정묘조약을 체결한 후 후금군은 압록강을 건너 철군했다. 이것이 정묘호란이다. ‘평양: 포로로 잡혀간 남녀가 2190인, 피살자 158인, 도망쳐 돌아온 자가 344인, 뼈를 묻은 남녀가 1169인.
실록 기록을 근거로 살펴보면 평양, 강동, 삼등, 순안, 함종, 숙천 등 여섯 고을에서만 포로가 4986인, 피살자 290인, 만주로 잡혀갔다가 도망쳐 돌아온 자가 623인이다. 이토록 처참한 패전을 당하고도 조정은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속임수로 향명배금 정책을 이어가다 9년 후 또다시 후금의 침략을 당했으니 이것이 병자호란이다.
안주성 함락 후 얼굴이 누군지 알 수 없는 그을린 시신 하나가 발견됐는데 의복으로 보아 남이흥의 시신으로 추정돼 관에 넣어 가매장했다.
후금군이 철수한 후인 4월 6일, 그의 관을 한양으로 호송하여 남이흥의 자손들이 확인한 결과 남이흥의 시신이 분명해 인조의 명에 따라 국장(國葬)으로 장례가 치러졌다. 장례식에 친히 참석한 인조는 눈물을 흘리며 자신이 입고 있던 곤룡포를 벗어 관을 덮어 주면서 그의 충절을 애도했다고 한다. 그 곤룡포가 오늘날 충장사 모충관에 전시되어 있다. 남이흥 장군의 모친 유씨 부인은 정묘호란 당시 나이가 80이었다.
인조의 곤룡포. 남이흥 장군의 장례식 때 인조가 입고 있던 곤룡포를 벗어 남이흥 장군의 관에 덮어주었던 것이다.
아들의 전사 소식을 접한 유씨 부인은 이런 말을 하며 눈물을 흘렸다고 전한다. “아버지는 임진왜란에 나라를 위해 싸우다 죽었고, 아들 또한 나라를 위해 정묘호란에 싸우다 죽으니 30년 사이에 부자가 모두 다 나라를 위해 죽었구나. 두 사람의 죽음은 영광된 것이니 옛사람들에 견주어도 부끄럽지 않다.” 조정에서는 전사한 남이흥 장군을 대광보국숭록대부 좌의정에 증직하고 의춘부원군에 봉했으며, 1663년(현종 4) 남이흥에게 ‘충장’이란 시호와 불천지위를 내려 대대손손 제사를 지내도록 명했다. 또 당진군 대호지면 전부와 정미면 일부, 황해도 연안 등지에 4000여만 평의 넓은 토지를 내려주었다. 1681년(숙종 7)에는 조정에서 남이흥 등 정묘호란 당시 순절한 16명의 사당을 안주에 짓고 충민사(忠愍祠)라 사액(賜額)했다. 대원군 집권시 서원 철폐령이 내려져 600여 개의 서원이 폐쇄됐으나 충민사는 보전토록 명해 현재 북한 땅에 온존하게 남아 있다. |
- 월간조선 2010년 7월호
- 김용삼 월간조선 기획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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