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전쟁 시기 남북한의 신문
북한의 작가, 시인, 문화인의 전쟁 동원
남침을 준비하던 북한은 서울에서의 신문 발행계획까지 세워놓고 있었다.
서울 점령 4일 후부터 해방일보와 조선인민보가 발행됐다.
광복 직후 미군정 치하에서 발행되던 신문들이었다.
두 신문은 북한의 전쟁 수행을 지원하는 동시에 적대세력을 타도하는 무기로 쓰였다.
반면 전쟁 전에 서울에서 발행되던 신문은 1950년 6월28일 이후 3개월 동안 완전히 폐쇄되었다.
북한의 문화인들은 전쟁을 앞두고 북한이 펼친 위장평화공세에 철저히 동원됐다.
6·25전쟁 기간에는 남북한의 신문도 싸웠다.
북한은 남침 준비 단계부터 신문을 전쟁 수행의 도구로 활용하였다. 서울을 점령한 후에는 ‘로동신문’을 비롯한 평양의 신문과 서울에서 발행한 ‘조선인민보’ ‘해방일보’를 통해서 전쟁의 승리를 선전하고 인민의 전폭적인 협조를 요구했다.
반면에 전쟁 전에 서울에서 발행되던 신문은 1950년 6월28일 이후 3개월 동안 완전히 폐쇄되었다. 암흑의 나날이었다.
시민들은 북한의 선전매체였던 신문과 방송이 내보내는 일방적인 정보만 접하게 되어 정확한 정세를 파악할 길이 없었다.
북한의 매체는 생사의 기로에 선 사람들에게 올바른 정보를 제공하지 않았다. 정확한 소식과 공정한 논평을 게재하는 매체가 없었기 때문에 많은 사람이 잘못된 길로 들어서는 운명을 맞았고, 이로 인한 비극은 영원히 이어졌다.
서울 점령 4일 후부터 북한 신문 발행
‘경향신문’ ‘동아일보’ ‘서울신문’ ‘조선일보’는
북한군이 서울을 점령하기 전날인 6월27일까지 급박한 전황을 보도하고 호외로도 알렸지만,
28일부터는 모든 신문이 발행을 중단하였다.
북한은 서울을 점령한 4일 뒤인 7월2일부터 조선인민보와 해방일보를 발행하기 시작했다.
이 두 신문과 평양의 ‘로동신문’(조선노동당 기관지), ‘민주조선’(북한 내각 기관지)은
획일적인 공산주의 선전선동 매체에 지나지 않았다.
시민들은 사실을 보도하는 신문의 소중함을 절실히 느꼈다.
시민들의 염원을 해소하는 신문은
북한군이 서울에서 패퇴한 1950년 9·28 수복 직후 10월1일부터 서울신문을 시작으로 하나씩 복간되었다.
그러나 이듬해 1·4 후퇴 이후에는 또다시 서울에서 북한의 신문이 발행되었다.
이 때는 우리 신문도 발행을 중단하지는 않았다.
부산, 대구, 수원으로 피난 보따리를 끌고 다니면서 신문을 발행했고,
두 번째로 수복된 서울로 와서 전쟁 상황과 국내외의 정세를 알리려 노력했다.
일선에서 피 흘리며 싸우는 전쟁기간에 남북한의 언론도 전쟁을 벌였던 것이다.
남한과 북한의 신문이 어떤 형태로 발행되었는지,
북한군 점령 후의 신문에는 어떤 인물이 글을 쓰고 제작에 종사했는지 살펴본다.
서울 함락 직전까지 발행된 신문
예상치 못했던 전쟁이 일어난 직후부터 적이 서울에 접근한 6월27일까지 신문은 발행되었다.
당시에는 석간신문을 다음 날짜로 발행하는 것이 관행이었기 때문에
마지막 날 신문인 6월28일자는 27일 오후에 발행된 것이다.
현재 남아 있는 28일자 신문은 조선일보가 유일하다. 다른 신문도 27일까지 발행되었지만 남아 있지 않다.
당시 발행되던 4대 신문이 전쟁 후 발행을 중단하였다가 속간되는 시기의 지면을 정리하면 <표1>과 같다.
보존지면 | 지령 | 결 호 | 속간과 결호 | 보존지면(지령) | |
경향신문 | 6월25일 | 1201 | 26~28일(1202~1204)없음 | 10월1일(3호 없음) | 10월4일(1208) |
동아일보 | 6월27일 | 8308 | 28일 지면(8309) 없음 | 10월4일 | 10월4일(8310) |
서울신문 | 6월27일 | 15715 | 28일 지면(15716) 없음 | 10월1일 | 10월1일(15177) |
조선일보 | 6월28일 | 8375 | 28일까지 지면 있음 | 10월20일(3호 없음) | 10월23일(8379) |
네 신문 가운데 동아일보와 서울신문은 마지막 날인 28일자가 보존되지 않았고,
경향신문은 26일부터 28일까지 사흘치 지면이 없다.
서울이 함락되자 언론인들은 황급히 지하에 숨거나 피난길을 떠났다.
당시 상황을 각 신문의 ‘사사(社史)’와 남아있는 지면을 토대로 다시 구성해본다.
경향신문은 6월25일 편집국 차장 이시호(李始鎬)가 일본 마이니치신문(每日新聞)의 전화를 단서로
긴급히 군과 요로에 확인한 후 우선 소공동에 있던 신문사 앞과 명동 입구에 속보를 써붙였다.
오전 9시30분이었고, 북한의 남침을 알리는 신문사 최초의 속보였다고 경향신문 사사는 기록하고 있다.
이날 이혜복(李蕙馥)을 동두천으로 특파했고, 호외도 발행했다.
현재 남은 지면은 6월25일자(지령 1201호)가 마지막인데 28일자 지령은 1204호였을 것이다.
동아일보는 27일 오후 4시경 외근기자들이 모여 이미 텅 빈 공장으로 내려가 호외를 준비했다.
마침 정인영(鄭仁永) 기자가 일본 유학시절 아르바이트로 문선을 한 경험이 있어 간신히 문선을 끝냈으나
조판할 공무국 직원이 없었다.
할 수 없이 공무국장 이언진(李彦鎭)이 손수 판을 짜서 300장가량의 호외를 수동기로 찍어냈다.
‘적, 서울 근교에 접근, 우리 국군 고전 혈투 중’이라는 호외를 마지막으로 발행하고
무교동에 있는 ‘실비옥’에서 이별의 술잔을 나누었다. 남은 지면은 6월27일자(지령 8308호)가 마지막이다.
28일자는 보존된 것이 없는데 지령은 8309호였을 것이다. 동아일보의 많은 사원이 납북되었다.
서울신문은 26일 오후 2시까지 본지 발행을 비롯하여 무려 6차례나 호외를 발행했다.
27일자 지면은 호외 내용을 재수록한 것이다.
27일 오후 4시까지 다시 5차례의 호외를 더해서 호외를 11차례까지 찍어냈다.
간부들은 27일 밤 9시까지 버티다가 막 신문사를 나서려는데 국방부 정훈국장 이선근(李瑄根)이
헐레벌떡 달려와서 “28일 미명을 기해 유엔군 비행기가 전투에 참가하게 되었다”는 호외 10만장을
인쇄해달라고 요청해서 3시간이나 걸려서 12번째 호외를 찍었다. 이때가 밤 11시 반이었다.
신문사를 떠났던 사장 박종화(朴鍾和)와 주필 오종식(吳宗植)은 적 치하 3개월을 간신히 살아남았다.
사장 비서 이승로(李昇魯)는 적탄을 맞아 순직했다.
서울에 침입한 북한군은 당시 가장 완벽한 인쇄시설을 갖추었던 서울신문을 접수하여
조선인민보를 발행하기 시작한다.
조선일보는 6월27일에 발행한 마지막(지령 8375호) 지면까지 보존되어 있다.
그러나 북한군이 피난을 떠나지 않았던 사장 방응모를 납북하여
신문사 가운데 가장 심각한 타격을 입었다. 언론인의 납북에 관해서는 다음에 살펴보겠다.
평화공세에 동원된 작가와 문화인들
김일성은 남침 준비를 완료한 시점에 평화공세를 펴면서 대남 선전을 강화하는 술책을 썼다.
6월7일 ‘조국통일민주주의전선 중앙위원회’는 평화적 조국통일을 추진하자고 제의했다.
전쟁을 앞둔 위장 평화공세였다.
북한에 억류 중이던 조만식과 남한에서 체포된 남로당 간부 김삼룡 · 이주하를 교환하자고 제안하여
남한의 경계심을 풀어놓으려는 전술도 병행했다.
북한 내부적으로는 8·15 해방 5주년 기념을 명분으로 ‘증산투쟁’을 독려하여 전쟁물자를 비축하고
생산성을 높이고 있었다.
‘조국통일민주주의전선의 평화적 조국통일방책 추진 제의’라는 구호 아래 저명한 문화인을 동원하여
집중적인 평화공세의 선전을 최대한으로 펼쳤다.
6월부터 로동신문에 게재된 문화인들의 글은 <표 2>와 같다.
(괄호 안은 로동신문에 직책이 명기된 경우이다.
작가, 또는 전문분야를 기재하지 않은 기사는 아래 명단에도 밝히지 않았다).
6·5 | 한설야(북조선문학예술총동맹 위원장) |
우리의 손에는 평화통일의 정당한 방법이 쥐여져 있다. 그 실천을 위한 길로 힘차게 매진하자! |
6·5 |
리극로 (조선건민회 위원장) |
민족적 량심 있는 인사들이라면 모두 다 평화적 조국통일의 편에 가담하여 일어서라! |
6·6 | 리기영 | 평화적 조국통일을 촉진시키는 한 길로 다같이 나가자! |
6·6 | 김남천(남조선문련) | 평화적 조국통일 실현을 위한 투쟁력량을 일층 확대강화하자 |
6·7 | 리태준 |
민족적 량심 있는 인사들은 모두 다 평화적 조국통일을 위하여 나서라! |
6·11 | 허헌 | 조국통일민주주의전선은 평화적 통일을 위하여 투쟁한다 |
6·11 | 김사량(작가) | 평화적 조국통일에 나의 모든 힘을 다하겠다 |
6·14 | 리극로 |
6월19일에 소집되는 남조선 국회에서 조국전선의 평화적 통일 추진제의가 상정되어야 한다 |
6·18 | 리기영(작가) |
남조선 국회의 소위 무소속 중간파 의원은 평화적 조국통일을 지지하여 투쟁하라! |
6·19 | 한설야(북조선문학예술총동맹) |
남조선 국회 내에서도 량심 있는 자라면 애국적 행동을 인민 앞에 표시하여야만 한다 |
6·21 | 리태준 | 평화적 조국통일을 방해하는 민족반역자들의 죄상, 미제를 구세주로 모시고 반인민 반민족의 죄악을 쌓은 친일역도 김성수 |
한설야(2회) 이기영(2회) 이태준(2회) 김사량(1회) 김남천(1회)은 남북한에서 널리 알려진 소설가들이다.
한설야는 초기 북한 문단을 주도하면서
인민위원회 교육국장, 북로당 중앙위원회 위원 및 문화부장을 맡아 북한 정권에 참여하고 있었다.
이극로는 조선어학회 회장을 지낸 한글학자로
1948년 9월 제1차 내각의 무임소상(無任所相)에 임명되었던 인물이다.
허헌은 1921년 9월부터 동아일보 감사역과 취체역을 거쳐
1924년 4월부터 5월까지 짧은 기간 사장 직무대리를 맡았던 적이 있었다.
광복 후 건국준비위원회 부위원장(1945년), 남조선노동당 초대 위원장(1946년)으로 활약했다.
1948년에 월북하여 최고인민회의 제 1기 대의원에 선출되었고 이어 최고인민회의장에 올랐으며
김일성종합대학 총장직도 맡았으나 1951년 8월에 사망했다.
남침이 임박한 때에 문화인들을 평화공세의 선전에 동원한 것은
전쟁을 준비하는 낌새를 드러내지 않는 동시에 장차 전쟁의 책임을 남한에 전가하려는 의도였다.
이처럼 평화를 갈망했음에도 불구하고 남한이 먼저 침략했다는 인상을 심어주려는 것이었다.
전쟁 직전에 북한 정권에서 문인들이 차지했던 서열은
홍남표(洪南杓)의 장례위원 명단을 참고로 할 수 있다.
홍남표는 일제강점기 시대일보 지방부장을 지냈던 공산주의자로
광복 후에는 극좌논조를 폈던 남로당 기관지 ‘노력인민’(1947. 6.19 창간)의 발행인을 맡았던 인물이다.
1946년 11월 남로당 중앙위원에 피선되었고 월북하여
1948년 8월 남조선인민대표자회의 대의원에 선출되었다.
6월5일자 로동신문에 실린 장의위원 26명의 서열은 다음과 같다.
김일성 김두봉 허헌 박헌영 김책 홍명희 최용건 김달현 허가이 박일우
리승엽 홍기주 리영 류영준 허성택 김원봉 박정애 강진건 최경덕 김창준
강량욱 리구훈 리기석 리기영 한설야 김남천
방송국과 통신사 장악
북한군은 서울에 진주한 후 제일 먼저 방송국을 장악했다.
국방부 정훈국 보도과장 김현수(金賢洙) 대령은
6월27일 밤 12시 방송국 주요 시설을 영등포전신국에
옮겨놓은 후28일 새벽 2시 반에 지프를 몰고 정동에 있던 방송국으로 다시 돌아갔다.
북한군의 탱크부대가 이미 방송국을 점령한 뒤인 오전 5시경 방송국으로 들어가려다 현관에서 총격을 받아 순직했다.
방송국 가입과 직원 이중근(李重根)은 그 직후 현관에 떨어진 권총을 줍는 순간 총격을 받아 피살되었다.
이중근은 7월5일 피살된 것으로 알려지기도 했으나, 국방부 정훈국이 11월9일 발표한 자료를 보도한 당시 신문기사에 의하면 김현수 대령이 피살된 직후인 6월28일이 확실하다.
같은 때에 국방부 군속 이승현(李升鉉 · 23)도 방송국 문 앞에서 피살되었다. 그는 방송국 경비임무를 수행 중이었을 것이다.
북한군은 김현수의 시체를 발로 차서 방송국에서 17~18m 아래 덕수초등학교 운동장에 떨어뜨렸다.
약 1주일 뒤인 7월3일까지 시체는 그대로 방치되었는데
덕수초등학교 교장 전경준이 교비로 시체를 처리했다.
이때 소식을 듣고 이중근의 부인과 아들이 달려와서 시체를 싣고 화장터로 가는 차를 따라가
남편의 유골을 받아 가지고 돌아갔다(김현수 대령의 피살은 당시 신문이 국방부 발표를 기사화하였다).
방송국은 완전히 북한군의 손에 들어갔고,
남하하지 못한 방송인들은 북한군에 협조하거나 납북되는 비운에 처했다.
기술과장서리 민병설(閔丙卨)이 그런 경우였다.
그는 8월25일 오전 8시경 연희방송소 사택에 정체불명의 청년 2명이 와서 동행한 후 소식이 끊어졌다.
그 후 서울중앙방송국에 근무하는 어떤 사람이 평양방송국 출근부에 민병설의 이름이 기재되어 있었고,
날인한 것을 보았다고 가족들에게 알려주었다. 기술요원으로 납북하여 평양방송국에서 활용한 것이다.
북한군이 방송국을 장악한 후 서울중앙방송은 아침저녁 평양방송을 중계하는 지방방송으로 격하되었다.
‘인민군 총사령부의 보도’를 내보내고 ‘자수’한 명사들의 전향 성명을 방송하도록 강요했다.
지하에 숨어 있거나 협조하지 않는 사람들을 심리적으로 위협하는 선무공작(宣撫工作)의 일환이었다.
김규식(金奎植)은 민족자주연맹 주석 자격으로 북한군을 환영한다는 서한을 보내왔다고
조선인민보(7월3일, 제2호)가 보도했다.
저명인사가 과거를 뉘우친다거나 인민군을 환영한다는 방송을 했다고 쓴 조선인민보와 해방일보의 기사는 <표 3>과 같다.
김효석(金孝錫 · 제2대 내무부장관) |
인민보 7월7일, 해방일보 7월8일 제7호 |
오세창(吳世昌 · 독립촉성국민회의 위원장-서울신문 초대 사장) | 인민보 7월13일 |
안재홍(安在鴻 · 국회의원-한성일보 사장) | 인민보 7월16일 |
김규식(金奎植 · 민족자주연맹 주석) | 해방일보 7월18일 |
조소앙(趙素昻 · 국회의원) | 인민보와 해방일보 7월29일 |
김용무(金用茂 · 미군정 대법원장-2대 국회의원) | 해방일보 8월2일 |
저명 정치인들이 신문에 보도된 내용 그대로 방송을 했는지,
실제로 본인이 양심에 따라 쓴 것인지는 알 수 없다.
인민보와 해방일보는 그들이 방송했다는 기사와 함께
국회의원들은 7월20일까지 자수하라는 기사를 실었다.
국회 프락치사건에 연루되어 복역 중 전쟁 후 출옥한 제헌국회 국회부의장 김약수(金若水)는
국회의원들에게 과거를 청산하고 자수하라는 성명을 발표했다고 해방일보는 전했다.
그해 5월30일 실시된 총선거에 당선되어 전쟁이 터지기 1주일 전인 6월19일에 개원한
제2대 국회의원 210명 가운데 27명이 납북 또는 피살되었다.
1948년에 선출되어 임기가 끝난 제헌의원 200명 가운데는 50명이 납북되었다.
4명 가운데 한 사람이 끌려간 것이다.
판사 검사 변호사 등 법조인과 교수, 의사, 과학자, 문인 등 수많은 전문직 종사자가 살해되거나
북으로 끌려갔거나 행방불명되었다.
방송을 직접 들었던 서울대학교 교수이자 역사학자 김성칠(金聖七)은
당시 일기(‘역사 앞에서’, 창작과 비평)에서 이렇게 평했다.
“모두들 원고를 마음대로 쓸 수 있는 건 아니겠지만,
그래도 전에 대한민국 내무장관을 지냈다는 김효석의 그 지나치게 비굴하고 치사스러운 주책덩어리의
내용에 비기어 안재홍, 조소앙씨 등 소위 중립파들의 방송이 오히려 김효석보다는 대한민국을 덜 욕하고
인민공화국에 덜 아첨하여서 듣기 좋았다.… 김규식 박사의 방송은 그 어조조차 침통하였고,
… 폐부에서 우러나오는 불만의 폭발인 것 같아서 듣는 이로 하여금 감개무량하게 하였다.”
조선중앙통신 발행
통신사는 조선중앙통신 서울지사의 대표라는 박덕수(朴德洙)가 나타나 을지로 입구 합동통신 사옥에
조선중앙통신 서울지사를 설치하여 통신을 발행했다.
기존의 합동통신 · 조선통신 · 공립통신 가운데 공립통신은 폐지하고 합동통신과 조선통신을 통합하여
‘조선중앙통신 서울지사’를 조직한 것이다.
합동통신 편집국 차장이었던 설국환(薛國煥)은 외신담당 부국장을 맡았고
총무담당 부국장에는 최명소(崔命韶 · 조선통신), 편집담당 부국장에는 최원혁(공립통신)이 임명되었다.
통신은 하루에 2편 100여 부를 발행하여 신문사, 인민위원회, 각 내무서 및 주요 기관에 배포했다.
이와는 별도로 당과 정책입안자들에게만 배포하는 ‘정책통신’도 발행했는데,
내외신을 사실 그대로 수신 취재하여 ‘정책자료’로 활용하도록 한 것이다.
설국환은 좌경 기자 유 아무개에게 끌려 6월29일에 합동통신에 나와서
박덕수의 지시로 조선중앙통신(서울판) 발행에 참여했다. 그러나 같이 근무하던 기자를 제명하는
숙청이 진행되는 것을 보고 7월15일 이후부터 출근하지 않았다고 한다.
로동신문은 8월2일자에 설국환이 ‘어떠한 허위날조선전도 진실을 은폐할 수는 없다’는 방송을 했다고
크게 실었다. 세계 언론인들에게 조선의 사태를 정확하게 보도할 것을 호소하는 내용이었다는 것이다.
설국환은 서울이 수복된 후 ‘조선중앙통신 주필’로 지목되어 곤욕을 치렀지만 혐의가 벗겨져
합동통신 취체역 총무국장, 세계일보 전무취체역(1957년), 한국일보 초대 주미특파원(1960년),
논설위원 겸 주미총국장을 역임했다.
전쟁 전 3개 통신에 근무하다 6월29일에 불려나온 사원은 150여 명이었는데
7월 중순경에는 50여 명으로 줄었다. 신변에 위협을 느낀 사원들이 몸을 숨기기 시작한 것이다.
합동통신 정치부 기자 노석찬(盧錫瓚)과 사회부 기자 장명덕(張明德)도 7월 중순부터 이탈하여
수복 후 언론계에 복귀할 수 있었다. 서울 함락 후 불가피하게 소극적으로 협력했다가 이탈한 경우였다.
조선중앙통신 서울판 발행을 지휘했던 박덕수는
동아일보 목단강지국 고문(1939년 11월~1940년 8월 동아 폐간까지)을 지낸 경력이 있었다.
그의 후임은 남한 출신 유성찬(劉星燦)이었다고 하는데 어떤 경력의 인물이었는지 알 수 없다.
전쟁 전후의 해방일보와 조선인민보
서울 점령 4일 후부터 신문을 발행할 정도로 북한은 남침을 준비하면서 신문 발행 계획까지 세우고
있었다. 해방일보와 조선인민보는 광복 직후 미군정 치하에서 발행되던 신문이었다.
해방공간에 발행된 '조선인민보'는 1945년 9월8일에 창간되었다.
광복 직후 인쇄시설을 확보하기 어려웠고 용지난이 극심했던 때에 나타난 여러 신문 가운데
비교적 세련된 편집으로 주목을 끌었다. 첫 발행인은 김정도(金正道)였는데
11월에는 좌익언론의 거물 홍증식(洪?植)이 사장을 맡으면서 선명한 좌익 색채를 드러내기 시작했다.
좌우익의 대립이 격화되던 1945년 말부터는 테러단이 신문사를 습격하는 일도 있었고,
사장 홍증식이 구속되는 필화사건이 일어나기도 하다가 1946년 9월6일 폐간되었다.
‘해방일보’는 조선공산당 중앙위원회 기관지였다.
조선인민보보다 열흘쯤 늦은 1945년 9월19일에 창간되었다.
남로당의 핵심 인물 권오직(權五稷)이 사장이었다.
이 신문은 처음부터 공산당 기관지라는 성격을 뚜렷이 드러내면서
선동적인 구호와 정치성 강한 기사로 지면을 채웠다.
해방일보는 1946년 5월18일 조선공산당의 정판사 위폐사건이 적발되면서
8개월 만에 지령 150호를 끝으로 폐간되었다.
남로당은 뒤를 이어 5월 중순에 ‘청년해방일보’를 발행하여 1947년 9월21일자 지령 63호까지 끌고 갔으나
더 이상의 발행은 불가능했다.
조선인민보와 해방일보는 1950년 7월2일 동시에 창간하였다.
두 신문은 해방공간에 발행되던 제호를 사용하면서도 지령은 이어받지 않고
1호부터 시작하여 새롭게 출발하는 형식을 취했다.
조선인민보는 “인민정부 기관의 모든 정책과 노선을 올바르게 반영시킴으로써
각급 인민위원회의 정당한 운영에 이바지하고자한다”고 창간사에서 밝혀
북한의 정책 수행에 기여하겠다는 뜻을 분명히 했다.
북한은 두 신문을 점령지의 통치를 효율적으로 수행할 수 있는 수단으로 활용하였다.
전쟁 수행을 지원하면서 적대세력을 타도하는 무기가 된 것이다.
두 신문은 미군이 노획하여 미국으로 보냈던 것을 한림대 아시아문제연구소에서 영인하여
1996년 ‘빨치산자료집’6, ‘신문편’1로 발행하였다.
조선인민보는 9월21일자까지, 해방일보는 9월23일자까지 지면이 남아 있다.
9월28일 국군이 서울을 수복할 때까지 몇 호 더 발행되었을 것이다.
조선인민보 7월2일 창간 9월21일(1~82호)
해방일보 7월2일 창간 9월23일(1~84호, 9월15일 이후 7호 결) 로동신문과 민주조선은
평양에서 조판한 지형(紙型)을 서울로 보내 서울에서 인쇄 배포하였다고 북한의 언론사는 기록하고 있다.
로동신문과 해방일보는 한글전용이었으나 조선인민보는 국한문 혼용이었다.
조선인민보와 해방일보는 평양의 로동신문에 비해서 편집체제가 훨씬 세련되어 있다.
전쟁 전 서울에서 신문을 편집하던 인력이 편집에 참여했기 때문일 것이다.
로동신문은 문인들을 동원하여 전쟁의 승리를 독려하고 이승만과 미국을 매도하는 글을 실었다.
<표 4>는 전쟁 후 로동신문에 실린 문인들의 이름이다.
이태준은 서울을 거쳐 김천까지 종군하면서 종군기를 보냈다.
마지막 종군기는 8월5일에 쓴 것으로 말미에 적혀 있는데
40일이 지난 뒤 유엔군의 인천상륙작전이 결행되던 9월15일자 신문에 실려 있다.
전세가 기우는 상황을 감추려는 의도가 아닌가 짐작된다.
<표 4> 이승만과 미국을 매도하는 글을 쓴 문인들 8 · 18 ~23 9 · 12 ~13 9 · 19 ~20 ‘증오하자! 구축하자! 원쑤를 미워할 줄 알아야 나라를 사랑할 줄 안다’ (조선인민보) 7 · 30 ~8 · 1 평화옹호전국민족위원회 위원장 ‘미공군의 범죄적 행동을 평화옹호자들의 이름으로 규탄한다’ (조선인민보) ‘안보를 악용하여 세계평화와 안전을 위협하는 미군의 범죄적 행위를 용납할 수 없다’ (조선인민보, 문화인)
6 · 27
리태준
인민해방전쟁의 승리를 위하여 전국 문화인들은 총궐기하자! (작가)
7 · 8
리기영
트루맨은 조선인민의 도살자이다.
7 · 10
리태준
인민군대와 함께 정의의 전쟁에서 ―울진 해방지구에서
7 · 11
리태준
미국식 자비심과 리승만식 애족사상 ―울진 해방지구에서
7 · 14
한설야
히틀러 후계자 미제 강도들은 우리 농촌과 도시들을 무차별적으로 폭격하고 있다.
7 · 20
리기영
피는 피로써 갚자!
7 · 8
한설야
트루그베·리-는 우리 조국에 대한 미제의 무장침범의 공모자이다
7 · 25
김사량
종군일기 서울서 수원으로(7월4일, 5일, 6일)
7 · 27
리태준
서울에서(7월18일)
김사량
우리는 이렇게 이겼다―대전공략전 금강 라인에서(6회)
8 · 19
림 화
원쑤와의 싸움에 더욱 용감하라! (시)
8 · 19
리기영
침략자는 누구냐!
9 · 5
리태준
전선으로
9 · 6
림 화
전진이다! 진격이다! (시)
9 · 6~7
리태준
전선은 대구를 향하여(상, 하)
9 · 11
백남운
조선인민은 전쟁의 승리를 위하여 더욱 힘차게 전진하고 있다
김사량
락동강반 전호 속에서 (상, 하)
9 · 5
리태준
전선으로-김천에서(8월5일 김천에서)
한설야
미국 식인종의 말로
7 · 8
림 화
‘전선에로! 전선에로! 인민의용군은 나아간다’ (해방일보)
7 · 20
리용악
‘원쑤의 가슴팍에 땅크를 굴리자’ (조선인민보)
7 · 21
리태준
‘해방서울에서’ (해방일보)
7 · 24
림 화
‘서울’ (해방일보)
7 · 24
리태준
남궁만
‘도하작전―대전전선에서’ (조선인민보, 상 하)
8 · 2
리태준
‘진격의 밤’ (해방일보)
8 · 5~10
박팔양
‘종군기’ 4회 연재 (조선인민보, 종군작가)
9 · 3~4
박웅걸
‘루포루타쥬, 락동강 적전 도하기’ (해방일보, 종군기자)
9 · 5~13
김남천
‘종군수첩에서’라는 제목 아래 부제를 달리하여 6회 연재 (해방일보)
9 · 13
한설야
9 · 15
리기영
김사량은 전쟁이 일어나자 “김일성의 6월26일 방송연설을 심장으로 받아 안고 그날 즉시로 종군하였던”
것으로 북한은 기록하고 있다.
그는 낙동강까지 내려갔고, 9월17일 마산 진중에서 ‘바다가 보인다’를 썼다.
북한군의 퇴각으로 후퇴의 길에 올라 강원도 원주를 20여 리 앞둔 남한강 나루에 도달한 것은
11월이었는데 고질이던 심장병이 도져 더 걸을 수 없게 되었다. 여기서 그는 생을 마쳤다.
김사량은 5월29일과 30일자 로동신문에 ‘지리산 유격지대를 지나며’를 실었다는데
전쟁이 일어나기 한 달 전 지리산까지 왔다는 것인지 알 수 없다.
‘바다가 보인다’는 1951년 5월호 북한의 ‘문학예술’에 게재되었다.
해방일보와 조선인민보에는 임화, 이용악, 이태준, 김남천, 한설야, 이기영, 박팔양, 남궁만의 글이 실렸다.
남궁만(南宮滿)은 북조선문학예술총동맹 선전부장, 북조선연극인동맹 서기장 등을 역임한
북한의 극작가로 전쟁에 종군한 인물이다.
조선중앙통신 부사장으로 재직하다 1967년 3월22일 판문점에서 극적으로 귀순한 이수근(李穗根)은
7월28일 로동신문에 ‘수뢰정대의 위훈―주문진 해전에서’라는 기사를 보냈다.
전쟁 중에 남한의 언론인 249명이 북으로 끌려갔고 36명이 피살되었다.
세계 어느 나라의 언론 역사에서도 일찍이 없었던 비극이다.
납북된 언론인 가운데는 방응모(方應謨 · 조선일보 사장), 안재홍(安在鴻 · 한성일보 사장),
백관수(白寬洙 · 일제강점기 동아일보 사장), 언론인이자 소설가였던 이광수(李光洙),
방송인 겸 시인 김억(金億), 방송인 겸 수필가 김진섭(金晉燮), 현대일보 사장 서상천(徐相天),
한국통신의 김승식(金承植 · 전 사장), 김용채(金容采 · 당시 사장), 대한통신의 이중희(李重熙) 등
신문과 방송계의 많은 거물이 포함되어 있었다.
5개 일간지의 현직 편집국장도 납북되었다.
경향신문의 신태익(申泰翊), 동아일보의 장인갑(張仁甲)을 비롯하여
전쟁 후에 없어진 한성일보의 양재하(梁在廈), 자유신문의 마태영(馬泰榮), 태양신문의 남국희(南國熙)가
중앙지의 납북된 현직 편집국장이었다.
해방일보-조선인민보 발행 전후의 사정
서울을 점령한 북한군은 신문 방송 통신사를 접수하여
언론인에 대한 세뇌사업과 ‘미제구축 총궐기대회’를 열었다.
전평(조선노동조합전국평의회 · 1945년 11월5일 결성한 조선공산당 산하의 노동운동단체) 선전부가
1950년 7월6일 작성한 ‘미제 완전구축 련합 총궐기대회’ 동원 인원은 다음과 같다.
·방송국(KBS) 197(97) · 서울신문 25(1) · 조선일보 15 · 서울공인사(후에 대한공론사) 30(3)
· 자유신문 18(4) · 문성출판 6(1)
7월6일 현재 해방일보 종업원은 166명이었는데, 열성자대회 참가자는 70명이었다.
창간 4일 뒤였던 당시 참가인원 가운데는 편집계통, 업무계통과 공무국 종업원들도 포함되었을 것이다.
해방일보와 조선인민보의 편집과 제작에 참여한 사람들은 누구였을까.
책임자는 북한에서 파견된 공산주의자들이었지만 서울의 기존 언론사에 종사하던 언론인들도 있었다.
“해방지구의 신문사 설비들을 정비하고 현직일군들을 인입하여 새로운 민주주의적 신문보도기관들을
창설하였다”고 북한의 언론사는 기록하고 있다.
북한군이 서울을 점령한 후에도 이전에 다니던 직장에 나가지 않을 수 없었던 사람이 많았다.
자신의 신상문제가 어떻게 될 것인지 궁금했고, 전쟁의 경과와 사회의 변화 추이 등을 판단할 수 있는
정보를 얻기 위해서는 직장에 나가보는 것이 가장 빠른 방법이었기 때문이다.
절박한 문제는 통행증의 확보였다. 북한 당국이 발급하는 신분증명서가 있어야 거리를 나다닐 수 있었다.
생존에 직결되는 먹을거리를 구하려면 신분을 확인해줄 통행증을 지니는 일이 급선무였다.
서울대학교 사학과 교수였던 김성칠의 일기는 당시의 정황을 기록한 가장 신빙성 있는 자료라 할 수 있다.
그는 6월30일 처음 학교에 나갔다가 이병기, 이병도, 최윤식, 김구경, 성백선 등 문리대 교수들을 만났고,
이튿날도 피난 못 간 교수들이 나왔다고 기록하였다.
집집마다 북한기를 달아야 하는 분위기였으므로 김성칠도 몹시 내키지 않았지만
인공기를 그려서 달지 않을 수 없는 처지가 되었다. 생존을 위한 방편이었다.
시인이면서 언론인으로 일제 치하에서 대중잡지 ‘삼천리’를 발행했던 김동환(金東煥)은
처음 한동안은 숨어 지냈지만 자수하면 자유로운 활동을 보장해주겠다는 말에 속아서
사실상의 아내였던 소설가 최정희(崔貞熙)와 함께 국립중앙도서관(현재 롯데백화점 자리)에 있던
정치보위부로 갔다가 북으로 끌려가고 말았다.
식량을 구하거나 바깥정세를 알아야 했기 때문에 다니던 직장에 나가고,
협조를 하는 시늉이라도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 북한군에 점령당한 후의 사정이었다.
언론인 가운데도 전쟁 전에 근무하던 언론사에서 어쩔 수 없이 북한의 선전매체 제작에 참여한 경우가
있었다. 북한은 국군이 완전히 패퇴하여 부산까지 점령할 날이 임박했다고 선전하고
여러 저명인사를 방송에 출연시켜 김일성의 침략을 옹호하는 발언을 강요했다.
이런 상황이 되자 올바른 판단능력을 상실하고 공황상태에 빠져 협조하는 사람도 있었다.
강제 동원되었던 기자들은 서울 수복 이후에 부역혐의 등으로 조사를 받았으나
대체로 관용의 대접을 받아 신문사에 복직했다. 공산 치하의 불가피했던 여러 정황을 감안한 것이다.
서울신문의 김영상(金永上)은 끌려가서 조사를 받다가 풀려 나온 후에는 몸을 숨겨 납북의 화를 면한
경우였다.
동아일보의 이동욱(李東旭)은 종로구 누하동 자택에서 납북되어 평안북도 개천까지 끌려갔다가
국군이 북진할 때 탈출해서 돌아왔다. 그는 후에 동아일보의 주필과 사장, 회장을 역임했다.
동아일보 취재 제1부장 변영권(邊永權)은 인천상륙작전이 시작될 무렵 북쪽으로 끌려가던 중
일행 200~300명 가운데 상당수는 총살당하거나 폭격에 희생되었다고 했다.
변영권은 함경도 영흥에서 홍원으로 가는 고갯길에 이르렀을 때 국군이 동해안에 상륙했다는 소식을
들었고, 산 속에 숨어있던 반공청년들이 인민군과 총격전을 벌이는 틈을 타서 도망쳐
서울까지 걸어서 돌아왔다.
책임주필 장하일과 이원조
해방일보의 편집과 제작에 참여한 인물에 관해서는
해방일보 여기자 김가인(金佳仁)의 수기 ‘패주 5천리’ 가 가장 현실감 있는 자료이다.
수기는 1951년 ‘태양신문’에 연재되었던 내용을 이듬해 2월 태양문화사에서 단행본으로 발행하였다.
전쟁이 치열하던 때에 신문에 연재하면서 해방일보 관련자들의 실명을 밝힌 수기이므로
신빙성이 있는 자료로 평가할 수 있다.
김가인의 수기를 바탕으로 해방일보에 종사했던 인물을 정리해 본다.
장하일(張河一):
해방일보 발간 초기부터 책임주필이었다.
전쟁 전에는 평양에서 ‘로동신문’ 편집국장을 지낸 경력이 있었다.
(김가인, ‘패주 5천리’, 태양문화사, 1952, 39쪽).
그의 아내는 작가 강경애(姜敬愛·1906.4.20~1943.4.26)였다.
장하일은 1931년 6월 간도로 가서 조선일보 간도지국을 경영하면서
용정의 동흥중학교(東興中學校)에서 교편을 잡고 있었다.
광복 후 장하일은 북조선로동당 창립대회(1946.8.28~30) 때 황해도 대표로 참석했고,
전쟁 이틀 뒤인 6월27일자 로동신문에 ‘조국의 통일독립을 위한 전쟁에 모든 사업을 복종시키자!’는
글을 실었다. 그 직후 서울에 와서 해방일보의 책임을 맡았던 것 같다.
그는 8월 말 중앙당에 소환되어 평양으로 돌아가서 잠시 로동신문 주필로 영전하였으나
평양에서 후퇴할 때에 사업태만이라는 이유로 ‘민주조선’ 논설위원으로 격하되었다는 설도 있다.
그런데 장하일은 1954년 4월에는 민주조선의 주필과 조선기자동맹 위원장에 취임했고,
1956년 4월에는 노동당 중앙위원회 후보위원이 되었을 정도로 북한 언론의 실세였다.
로동신문은 책임주필이 최고책임자로 그 밑에 주필, 부주필, 편집국장 등의 서열로 되어 있는데
1946년 10월의 판권에 나타나는 책임주필은 태성수(太成洙)였다.
1948년 3월부터 책임주필은 소련 출신 기석복(奇石福)이었으므로
장하일은 그 아래 편집국장이었을 것이다. 기석복은 1950년 말 책임주필에서 물러나고
후임으로 1951년 1월 박창옥(朴昌玉)이 잠시 ‘책임주필 대리’를 맡았다.
그는 북한체제 건설 초기에 소련계 제2인자로 1947년 초 노동당 중앙위원회 기관지 ‘근로자’의 주필을
맡았던 인물이다.
1951년 3월부터는 이문일(李文一)이 책임주필이 되었다.
이문일은 1956년 4월 장하일과 함께 로동당 중앙위원회 후보위원이 되었다.
1956년 무렵부터 책임주필에 다시 태성수가 취임했다.
그는 전쟁 전 로동신문 초기 책임주필이었다가 두 번째로 책임주필이 된 것이다.
김일성대학 부총장 겸 문화선전 부상(副相)을 지내게 되는 인물이다.
이원조(李源朝·1909.6.2~1955?):
처음에는 조선인민보 편집국장이었다가 장하일이 평양으로 올라간 후 주필을 맡았다.
경상북도 안동 출신으로 시인 이육사(李陸史)의 동생이다.
문학평론가로 조선일보 편집고문을 지낸 귀족 출신 이관용(李灌鎔)의 사위였다.
1930년대 초반 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가동맹(KAPF)에 참여하여 활발한 평론활동을 했다.
1935년 일본 호세이대학(法政大學)에서 불문학을 전공하고 돌아온 후 조선일보 학예부 기자로 입사하여
1939년까지 근무했다. 광복 직후에 임화, 김남천, 이태준 등과 함께 조선문학건설본부를 결성했으며,
조선문학가동맹에서 활동하다가 6·25전쟁 전에 월북했다.
북한에서는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선전선동부 부장을 지냈지만 남로당 출신이라는 이유로
대 남반부 공작의 본거지인 해주에서 ‘해주노력자’의 편집국장으로 있다가
전쟁 발발 후 서울로 와서 해방일보 편집국장을 거쳐 주필을 맡았다.
언론인이자 소설가였던 김팔봉에 대한 인민재판. 한국언론회관 건너편 서울시의회 앞에서 7월2일에 열렸다. 검은색 양복을 입고 수갑을 찬 사람이 김팔봉.
언론인이자 소설가였던 김팔봉(金八峰 · 본명 金基鎭·1903.6.29~1985.5.8)은 인민재판을 받는 도중에 군중 속에 서 있던 이원조를 보았다.
그 날은 7월2일로 해방일보가 창간된 날이었다.
해방일보는 인민재판이 열리던 바로 길 건너편 현재의 언론회관 자리에 있던 서울공인사(일제강점기 ‘경성일보’)에서 발행되었는데 이원조가 이 재판을 우연히 보게 되었는지, 취재를 위한 참관이었는지 알 수 없다.
이원조는 1953년 남로당의 대거 숙청 때에 징역 12년형을 선고받고 수감 중 1955년에 사망한 것으로 전한다. 이때 이승엽, 임화 등은 간첩 혐의로 사형이 선고되었으나 기소된 12명 가운데 징역 15년형이 선고된 윤순달과 이원조는 사형을 면했다.
해방일보 참여 인물들
서강백(徐康百):
해방일보 편집국장. 일제강점기 조선중앙일보 정경부 기자로 출발하여
1939년 무렵부터 매일신보 정치부 기자로 근무하면서 친일적인 글을 남겼다.
광복 후 서울신문 편집부장을 거쳐 편집국 차장을 지냈다.
전쟁 후 해방일보 창간 당시에는 정치면 편집 담당이었는데
편집국장 이원조가 주필로 승진하면서 편집국장이 되었다.
9·28 서울 수복 직전에 서울을 떠나 평양에서 며칠 동안 평남 도당 기관지 발행에도 참여하였으나
북으로 쫓겨 가다 평안남도 북단에 있는 개천(价川)에서 국군에 포위당했을 때에 아내와 아들 딸 가족을
모두 잃어버렸고, 자신도 고장(古場)과 풍장(豊場) 사이에서 비행기 폭격에 맞아 사망했다.
이주영(李周榮):
전쟁 전에는 평화일보 사회부장이었다. 일제강점기에는 동아일보 조치원지국장(1931.4~1932.6)을 지냈다.
1949년 8월1일부터 3일 사이에 경찰이 남로당 관련혐의로 여러 신문사 기자 22명을 검거했을 때에
구속되었다. 경찰은 관련 기자들 가운데는 남로당 중앙특수조직부 정보국원으로 기자의 신분을 이용하여
군과 경찰, 정당·사회단체·국회·정부 등의 기밀을 탐지하여 남로당과 북로당에 제공하는 스파이 행동을
해 온 자가 있다고 말했다. 이주영은 중간 책임자급으로 분류되어 9월6일 보안법 위반으로 기소되었다.
유엔군의 서울수복 직전 북으로 도주하던 중 11월2일경 희천과 강계 사이에서 기총소사에 맞아 사망했다.
김제영(金濟榮):
북한 최고인민회의 의장 김두봉(金枓奉)의 사위로 해방일보 논설위원이었다.
일제 치하에는 동아일보 서무부와 사회부에 근무했다.
광복 후 1945년에는 ‘신조선보’에 참여했다가 1946년 4월에 창간된 독립신보의 영업국 차장,
안재홍의 한성일보 사회부장을 지냈다. 해방일보에는 8월말경까지 근무하다가 사라졌는데,
중국 지린성의 매화구(梅花口)역에서 해방일보 기자 일행과 마주쳤다.
북한군복을 입고 북한군 제8군단 본부가 있는 옌지(延吉)로 가는 기차를 기다리던 중이었다.
송진근(宋珍根):
일제 치하 서울중앙방송국 아나운서였다. 개성 출신으로 보성전문 법과를 졸업했고,
1936년 무렵에 아나운서가 되었다. 1943년 단파방송 청취사건으로 구속되어 징역 1년이 언도되었다.
전쟁이 일어난 후에는 해방일보 취재부 기자로 활동했다.
해방일보 1950년 8월12일자 2면 머리에는 송진근이 고양군 숭인면에서 취재한
‘토지 찾은 농민들의 환호는 고조’ 기사가 실려 있다. 그는 ‘야간주필’로 승진했고,
서울 함락 전인 9월24일 작은 별(小星) 4개를 다는 벼락감투를 얻어 썼을 정도로 열성적이었다.
그러나 북으로 쫓기는 신세가 되어 만주까지 갔을 때에는
서울에서 가지고 온 털외투의 속을 떼어 팔기도 했다.
이근영(李根榮):
해방일보 취재부장. 보성전문 출신으로 1934년 4월부터 동아일보가 폐간되던 1940년 8월까지
사회부에 근무했다. 1935년에는 ‘금송아지’로 창작활동을 시작했던 소설가였다.
1946년 2월에 서울신문 정리부장이 되어 이 해 4월 전조선신문기자대회 준비위원회 선전부장을 맡았다.
같은 해 10월경 서울신문을 사임했다.
해방일보 사원 42명이 9월26일 북으로 도주할 때에 이근영을 중심으로 8명이 한 조를 이루고 있었다.
홍두원(洪斗元): 해방일보 편집부장. 광복 후 조선중앙일보 기자였다.
김가인의 수기에 나오는 인물로 해방일보에 종사하다가 북으로 도주한 사람들은 다음과 같다.
직책이 확인된 인물
조병찬(趙炳贊 · 논설위원), 김희갑(金喜甲 · 논설위원), 최용봉(崔龍奉 · 교정부장),
김종환(金宗煥 · 총무부)
언론인 경력자
이녹영(李祿榮 · 전 자유신문 기자), 이용진(李龍振 · 전 서울신문 기자),
김광수(金光洙 · 전 국도신문 교정부), 윤일모(尹一模 · 전 서울신문 사회부 기자)
전직이 확인되지 않은 인물
이신영(李信榮), 이연희(李蓮姬), 장후환(張厚煥), 곽재석(郭在石), 장호(張虎 · 빨치산 출신),
이호섭(李浩燮)
해방일보에는 김현제(金賢濟)와 조덕송(趙德松)도 근무하였지만 북으로 가지 않았고
수복 후 법적 절차를 밟아 언론계에 복귀하여 활동했다.
김현제는 연합신문, 한국일보, 자유신문, 서울경제신문, 서울신문, 경향신문의 편집국장을 역임했다.
조덕송의 경우는 전쟁 전에는 ‘조선통신’ 기자(1947년)로 언론계에 입문하여
국도신문 기자였던 때에 구속되어 서대문 형무소에서 재판을 기다리는 중에 전쟁이 일어났다.
북한군이 형무소 문을 열어주는 바람에 감옥에서 나온 후 해방일보에 근무하였으나
수복 후 언론계에 복귀했다. 연합통신 사회부 기자, 평화신문 사회부장, 자유신문 취재부장을 거쳐
1960년부터 조선일보 문화부장, 사회부장, 기획위원, 논설위원, 편집부국장으로 활동했다.
이밖에 전선과 지방취재로 파견된 해방일보 특파원 가운데는 김달수, 리연호, 박영호, 고석, 김전이 있다.
종군기자 박웅걸(朴雄傑)은 ‘락동강 적전 도하기(루포루타쥬)’를 2회 연재(9.3~4)했다.
그는 ‘종군작가’라는 직책으로 ‘민주조선’ 9월7일자에
‘잔학한 미 침략군들이 패주하면서 감행한 야수적 만행’을 실었는데 특정 신문에 소속된 기자가 아니라
종군작가였던 것 같다. 그는 1946년 3월에 창간된 ‘적성(赤星)’의 편집인으로 올라 있던 사람이다.
김달수는 해방일보와 로동신문 종군기자에 이름이 나온다.
조선인민보 제작진
조선인민보에 참여한 인물이 누구였는지 참고할 기록이 없다.
편집국장은 6·25 전에 ‘중앙신문’과 남로당 기관지 ‘노력인민’의 편집국장이었던 이상호(李相昊)였다.
대구 출생으로 니혼대학(日本大學)과 호세이대학(法政大學) 문과를 졸업했다.
1930년 ‘중외일보’ 기자로 입사하였고, ‘중앙일보’를 거쳐 ‘조선일보’ 사회부장을 지냈다.
광복 후 ‘중앙신문’(1945.11.1 창간) 편집국장 재직시인 1946년 9월6일 중앙신문, 조선인민보, 현대일보가
동시에 발행정지 당할 때 구속되었다가 13일 일단 석방되었으나
9월26일 재판에 회부되어 1년6개월형이 언도되었다가 하지 중장의 특명으로 집행유예로 석방되었다.
그 후 남로당이 발행한 ‘대중신보’ 편집인이었다가 이 신문이 ‘노력인민’으로 바뀌면서 편집국장을 맡았다.
1947년에 월북하여 1948년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에 선출되었고,
1951년 6월에는 로동당 중앙위원회 선전선동부 부장에 임명되었지만
1953년 8월 남로당 계열로 숙청되었다.
시인 장영창(張泳暢)은 조선인민보를 발행하던 서울신문사에 찾아갔을 때에
편집국에는 머리를 짧게 깎은 사람이 많았고 인상은 대부분 출옥한 사람들로 보였다고 했다.
조선인민보 참여 인물 가운데는 전평(全評) 산하 출판노조원이 많았다는 설도 있지만,
편집 계통에 어떤 사람이 있었는지 확실한 기록은 없다.
조선인민보 기자였던 이영찬(李永燦)이 만주의 통화(通化)까지 쫓겨 온 것을 보았고
김가인의 수기에 잠시 언급되었다. 이영찬은 전쟁 전에 조선통신 기자로 근무한 적이 있었다.
김가인의 수기에 의하면 조선인민보 편집국장은 주련(朱鍊)이었다.
주련은 친일단체 대동민우회의 이사였고, 1937년 무렵부터 매일신보 경제부 기자, 논설부를 거쳐
광복 직전까지 정경부에 근무했다. 광복 후 1946년 12월에는 중외경제신보의 편집국장을 잠시 맡았다가
남로당 기관지 노력인민(사장 홍남표)의 사회부장이 되었다.
노력인민의 사회부장이었던 경력으로 보아 조선인민보 편집국장을 맡았을 가능성도 있다.
중앙일보가 발행한 ‘민족의 증언’(권 2, 83쪽)에는
전쟁 전에 월북했던 오기영(吳基永)이 이끄는 7~8명의 기간요원이 서울에 와서
인민보와 해방일보를 발행하였다고 쓰여 있다. 하지만 오기영이 두 신문에 간여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오기영은 1928년 동아일보에 입사하여 10여 년간 기자로 활동하다가
1937년 수양동우회 사건으로 퇴사했고, 이듬해 8월 조선일보 기자가 되었다.
광복 후에는 경성전기주식회사에 근무하면서 조선일보에 ‘팔면봉’을 집필하는 한편으로
서울신문이 발행한 ‘신천지’를 비롯하여 여러 신문에 글을 썼다.
그런 글들을 모아 ‘민족의 비원’(1947) ‘자유조국을 위하여’ ‘사슬이 풀린 뒤’ ‘삼면불’(이상 세 책 · 1948)의
저서를 출간했다. 1949년 초 월북하여 6월25일부터 평양 모란봉극장 회의실에서 열린
조국통일민주주의전선 결성대회에 남조선언론협회 대표자격으로 참가하여
중앙위원 99명의 한 사람으로 선출되었다.
그는 전쟁 3일 전인 6월22일자 ‘민주조선’에 ‘매국노들의 죄악상, 인민의 피에 젖인 인간 백정 신성모’를
실었다.
김가인은 압록강 연안 만포(滿浦)에서 오기영이 애인 이은희(李恩姬 · 서울방송국 근무, 잡지사 기자)와
함께 피난하는 모습을 보았다.
그러나 김가인의 수기에는 오기영이 해방일보나 조선인민보에 관계했다는 말은 없었다.
오기영은 그 후 조국통일민주전선 중앙위원(1949, 1956년), ‘조국전선’ 주필(1958년),
과학원 연구사(1962년)를 역임했다.
월북하기 전에 출간했던 오기영의 책은 성균관대학교 출판부에서 3권으로 묶어 2002년에 다시 출간했다.
해방일보 복간에 정태식(鄭泰植)이 참여했다는 설도 있으나 확인할 근거는 없다.
(강만길-성대경 편, ‘한국사회주의운동인명사전’, 창작과 비평사)
정태식은 광복 직후에 발행되던 해방일보의 편집국장을 지낸 공산주의자였는데
1950년 4월에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검거되어 징역 20년을 선고받고 복역 중 6·25전쟁 때 석방되어
해방일보를 복간하였다는 것이다.
1953년 박헌영(朴憲永)의 남조선노동당 종파사건에 연루되어 숙청되었다.
경력이 확인되는 인물 가운데는 고흥상(高興祥)이 있다.
그는 다니던 직장인 신문사에서 부득이 신문제작에 참여했을 것이다.
그 후 연합신문 사회부장, 세계통신과 합동통신의 편집국장, 합동통신 출판국장, 상무, 전무(1960~72),
한국신문회관 사무국장(1980)을 역임했다.
월북한 김영룡(金永龍 · 1930년 조선일보 장단 지국장), 김종윤(金鍾崙 · 1947년 광명일보 기자),
인주현(印柱賢 · 1945년 서울신문 사회부, 1948년 전라신보 편집장)도 조선인민보에 이름이 나온다.
경력을 알 수 없는 인물로는
석관영, 엄재풍, 정용직, 윤내길, 최준철, 림병하, 림병철, 이영준, 김일순의 이름이 지면에 나온다.
신문지면에 기자 또는 특파원으로 나타나는 인물 가운데 김문규는
1950년 7월15일자에 ‘초토화한 평택 안성 시가지’에 관한 기사 등이 있고,
전욱은 ‘민주조선’ 특파원이었는데 해방일보 7월4일자(제3호)와 7월13일자(12호) 등에 종군기가 실렸다.
인민보에 종사한 인물 가운데 서울신문 출신이 많았던 것은
인민보를 서울신문에서 발행했던 원인도 있었을 것이다.
고흥상, 인주현, 윤일모, 출판부장을 지낸 화가 정현웅(鄭玄雄), 해방일보의 서강백이 서울신문 출신이고,
납북된 사원이 11명으로 중앙 언론사 가운데는 동아일보에 이어 두 번째로 많은 희생자가 났다.
선전매체로 활용된 좌익신문
북한의 언론은 당의 노선을 추진하는 ‘선전자, 선동자, 조직자’이며 정책을 수행하는 도구이다.
정부와 권력을 비판하는 언론자유를 추구하는 남한의 언론과는 완전히 다른 이데올로기 아래서
언론이 존재한다. 1946년 10월25일 북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기관지로 창간된 ‘근로자’는
북한 언론의 논조를 보여주는 거친 문장이었다.
“김구 이승만 등 반동파들은…조선인민의 총의와 이익을 말살하고 민주주의자 농민 지식분자 기타
애국자들을 갖은 음모와 책동으로써 폭압하고 검거, 고문, 부당재판, 투옥, 학살 등으로 야만적 흉행을
속행하고 있다. 그리하여 이 강도들은…”(‘근로자’ 창간호, 6쪽).
북한 언론 역사를 기술한 ‘조선신문 100년사’는 6·25전쟁 이후 신문의 논조를 이렇게 기술하고 있다.
“후퇴 직후 신문지면에서 특징적인 것의 하나는 적들이 일시적 강점지역에서 강행한 대중적 학살만행을
대대적으로 폭로함으로써 신문이 미제를 역사의 심판대에 고발하는 고소장으로,
인민의 적개심과 복수심을 북돋아주는 복수기록장으로 된 것이었다.
이 시기 중앙신문의 2, 3면에는 매일같이 ‘보라! 천인공노할 원쑤들의 죄악을’
‘보라! 흡혈귀들의 저주할 이 만행, 학살과 략탈, 강간과 릉욕, 파괴를’
‘야수 미제와 리승만역도에게 준엄한 복수의 검을 내리자’
‘골수에 사무친 원한을 갚자’ 등의 표제 밑에 놈들의 귀축같은 만행자료들을 지역별로, 사건별로 묶어
적나라하게 폭로하여 사람들의 치솟는 분노를 격발시켰다.”
이 같은 보도태도는 전쟁이 끝난 이후 거의 변함없이 지속되었다.
북한언론은 1974년 5월7일 김정일이 발표한 “우리 당 출판보도물은 온 사회의 김일성주의화에 이바지하는
위력한 사상적 무기이다”라는 내용대로 신문혁명, 보도혁명, 출판혁명을 위한 무기로 활용되었다.
1950년 8월15일자 로동신문, 민주조선, 해방일보, 조선인민보의 1면 머리에는
스탈린과 김일성의 커다란 사진이 나란히 실려 있다.
네 신문이 다같이 스탈린과 김일성을 머리에 올리는 획일적인 편집은 신문의 성격을 가장 잘 드러낸다. 해방일보와 조선인민보는 “위대한 쏘련군의 무력에 의하여 일본제국주의 식민지로부터 조선해방 8·15 5주년 기념”이라는 꼭 같은 배너 제목 아래에 스탈린과 김일성을 대등한 크기로 실으면서 스탈린을 먼저 배치하였다.
김일성은 종군기자들에게 최고사령관 명의의 신임장을 주고 전선 사령관과 각 연합부대장들에게 종군기자들이 최전선부대까지 자유롭게 출입하고 취재 집필할 수 있도록 편의를 제공하라고 지시했다.
종군기자에게는 장교복과 좌급(영관급) 계급까지 주는 동시에
필요한 경우에는 지프와 호위병을 달아주기도 했다.
종군기자는 장교 제복에 견장까지 달고 다니면서 취재를 했던 것이다.
조선인민보의 발행소는 서울신문사(현 언론회관)인 서울시 태평로 1가 31번지였다.
서울신문은 가장 완벽한 인쇄시설을 갖추고 있었다. 해방일보는 발행소를 단지 ‘서울시’로만 표시했는데
언론회관 자리에 있던 경성일보 시설의 서울공인사에서 인쇄한 것이다.
서울공인사는 일제강점기 경성일보였고, 대한공론사로 개편되는 인쇄시설이다.
신문을 비롯한 간행물은 시내에서 판매도 하였다.
시내 여러 곳에 정기간행출판물 판매소를 두고 판매한다는 광고가 인민보와 해방일보에 실려 있다.
구독료는 두 신문이 다 같이 1부 20원, 1개월 600원이었다. 발행은 석간이었다.
김성칠은 7월27일자 일기에서
“우리 마을 인민위원회 선거 상황이 오늘 저녁의 조선인민보에 커다랗게 났다”고 쓴 것으로 보아
석간으로 추정된다. 석간은 제작을 낮시간에 하는 것이므로 저녁에 작업하는 조간보다 유리하기 때문에
하루에 한 번 단간으로 발행하는 신문은 석간 발행이 일반적이었다.
배달은 정확한 시간에 이루어지지 않았고, 며칠자를 한꺼번에 보내는 경우도 많았다.
해방일보와 조선인민보 광고에는 구독할 수 있는 신문과 잡지의 이름을 소개한 것이 있는데
<표 5> <표 6>과 같다.(조선인민보, 7.20, 22, 8.27 해방일보, 7.21, 22.)
제 호 | 값(원) | 발행기관 | |
1 | 민주조선 | 20 | 북한 정부기관지 |
2 | 로동신문 | 20 | 로동당 기관지 |
3 | 조선인민보 | 20 | - |
4 | 해방일보 | 20 | - |
5 | 로동자신문 | 15 | 직총 기관지 |
6 | 농민신문 | 15 | 농맹 기관지 |
7 | 투사신문 | 20 | 투사신문사 |
8 | 민주청년 | 15 | 민청 기관지 |
9 | 조국전선 | 40 | 조국전선 기관지 |
10 | 공고한평화를위하여 | 25 | 수개국공산당보도국 기관지 |
11 | 쏘베트신보 | 20 | 쏘련대외문화협회 기관지 |
12 | 문화전선 | 10 | 문예총 기관지 |
제 호 | 값(원) | 발행기관 | |
1 | 인민 | 320 | 북한 정부기관지 |
2 | 태풍 | 300 | 태풍사 |
3 | 조쏘친선 | 400 | 조쏘문협 기관지 |
4 | 조선여성 | 250 | 민주여성동맹 기관지 |
5 | 내각공보 | 160 | - |
6 | 조국보위 | 320 | 조국보위후원회 기관지 |
7 | 어린동무 | 160 | 어린이 대상 잡지 |
8 | 활쌀 | 300 | 만화잡지(어린이) |
9 | 로동자 | 300 | 직총 기관지 |
10 | 농림수산 | 200 | 농업성 농맹농민수산협회 기관지 |
11 | 문학예술 | 400 | 문예총 기관지 |
12 | 과학세계 | 320 | 과학지식 보급을 위한 잡지 |
1) 2차 발행시기는 제1호부터 시작.
2) 3차 발행시기는 2차부터 시작하여 연속된 지령으로 계산.
3) 3차 발행시기 조선인민보는 시작된 날과 끝을 알 수 없음. 1호(지령 90)밖에 남아 있지 않음.
전세가 결정적으로 불리하게 돌아가고 유엔군이 인천에 상륙하여 서울에 대한 공중폭격이 심해지자
시설 소개 명목으로 서울신문의 인쇄설비를 청량리 등 여러 장소에 분산시켜놓고
북한으로 반출해 갈 계획을 세우기도 했지만 인쇄시설을 옮기는 작업은 용이하지 않았다.
시간도 부족하고 운송장비도 없었다. 신문을 만들던 사람들은 황급히 북으로 도주하는 수밖에 없었고,
어쩔 수 없이 신문발간에 협조했던 사람들은 국군의 수복을 기다리며 몸을 감추기도 했다.
해방일보 사원 42명은 9월26일 낮 12시 북으로 떠났다.
걸어서 포천에 도착한 날은 유엔군이 서울에 진주한 이튿날인 29일이었다.
그곳 초가집에서 등사판 신문을 발행하였지만 이미 신문의 체제를 갖추기도 어려웠다.
또다시 북으로 올라가는 동안에 탈주자도 생기고,
젊은 남자들 가운데는 전투부대로 편입되기도 해서 숫자는 줄었다.
서울을 떠난 지 22일 만인 10월17일 평양에 도착한 해방일보 기자 일행은
서울에서 온 조선인민보 기자들과 합동으로 로동신문사에서
3일 동안 평남도당 기관지 ‘평남로동신문’을 발간했다.
주필 이원조, 편집국장 서강백, 부국장 주련, 후방생활부장 윤일모, 교정부장 최용봉의 진용으로
기자는 송진근, 인주현, 권옥중이었다.
철원에서 전투부대에 편입되었던 장호, 이녹영, 이용진이 평양으로 와서 신문 제작에 합류했다.
타블로이드판에 실린 기사는 인민군의 무용담, 서울 방어전의 혈전기(血戰記) 같은 것이었다.
3일 후 10월20일 새벽에 평양을 떠나 압록강 연안 만포를 거쳐 국경을 넘어 중국 땅 통화까지 갔을 때에는
22명이 남아 있었다. 서울을 떠난 후에도 등사판 신문과 평양에서 3일간 신문 발행,
그리고 국경을 넘어 중국 땅을 떠도는 고난의 행군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남한의 언론인들은 납북과 피살 등으로 많은 희생자가 났다.
전쟁 중에 언론인 249명이 북으로 끌려갔고 36명이 피살되었다. 합하면 285명에 달하는 언론인이 죽거나 본인의 의사에 반해서 납치되어 돌아오지 못한 채 생을 마쳐야 했다.
세계 어느 나라의 언론 역사에서도 일찍이 없었던 비극이다.
납북된 언론인 가운데는 방응모(方應謨 · 조선일보 사장), 안재홍(安在鴻 · 한성일보 사장), 백관수(白寬洙 · 일제강점기 동아일보 사장), 언론인이자 소설가였던 이광수(李光洙), 방송인 겸 시인 김억(金億), 방송인 겸 수필가 김진섭(金晉燮) 등 신문과 방송계의 많은 거물이 포함되어 있었다.
신문사 사장급으로는 방응모, 안재홍, 백관수 외에도
현대일보 사장 서상천(徐相天), 한국통신 김승식(金承植 · 전 사장), 김용채(金容采 · 당시 사장),
대한통신 이중희(李重熙)가 납북되었다. 5개 일간지의 현직 편집국장도 납북되었다.
경향신문의 신태익(申泰翊), 동아일보의 장인갑(張仁甲)을 비롯하여
전쟁 후에 없어진 한성일보의 양재하(梁在廈), 자유신문의 마태영(馬泰榮), 태양신문의 남국희(南國熙)가
중앙지의 납북된 현직 편집국장이었다.
강원일보 편집국장 남궁태를 비롯한 지방지 사장과 편집 간부도 있다.
일제강점기부터 활동하던 많은 언론인과 언론사의 현직 주필, 국장급과 부장, 기자들이
영원히 돌아오지 못하는 길을 떠났다.
이 같은 상처를 안은 채 9월28일 서울이 수복된 후에 다시 신문을 복간할 수 있었지만
3개월 후에 1·4 후퇴로 또 한번 서울이 적의 수중에 떨어지자 공산당은 곧바로 서울에서 신문을 발행했다.
서울에서 북한의 조선인민보와 해방일보가 어느 날부터 다시 발행되었는지 정확한 날짜를 확인하기는
어렵지만 남아 있는 해방일보 가운데 1951년 2월22일(제90호)자가 제일 앞선 지령이다.
9·28 수복 이전 마지막 호는 9월23일에 발행된 제84호가 남아 있으므로 그 중간에 5호가 빠져 있다.
가장 빠른 날짜로 역산한다면 2월18일부터 해방일보는 발행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서울 수복 이틀 전인 9월26일에 사원들이 북으로 도주하기 전날 신문까지 발행했다면
마지막 지령은 86호가 될 것이고
중간에 철원에서 발행했다는 프린트판 신문까지 보태어 지령을 합산한다면
2월22일자가 속간 첫 호였을 가능성도 있다. 남아 있는 해방일보 마지막 지면은 3월6일(제114호)자이다.
9·28수복 이전의 조선인민보의 남은 마지막 지면은 9월21일(제82호)자이다.
1·4 후퇴 이후의 지면은 1951년 2월23일(제90호)자 단 한 호가 있다.
1·4 후퇴로 서울이 중공군의 수중에 들어간 후 북한군은
서울신문의 주조기 13대를 비롯하여 인쇄시설을 뜯어내어 바로 옆 건물인 동양화재보험회사 지하실에
평판 인쇄시설을 차려놓고 조선인민보를 인쇄하였다.
수복 후 시민의 제보를 받고 서울신문은 인쇄시설을 다시 찾아 복원했다.
조선인민보와 해방일보가 광복 직후부터 6·25전쟁 시기까지 발행된 경과를 정리하면 <표 7>과 같다.
<표 7> 서울에서 발행된 조선인민보-해방일보 2차(6·25전쟁 초기)
1차(해방공간)
3차(1·4후퇴 시기)
조선인민보
1945.9.8(1)~1946.9.6(324)
1950.7.2(1)~9.21(82)
1951.2.23(90) 한 호만 남음
해방일보
1945.9.19(1)~1946.5.18(150)
1950.7.2(1)~9.23(84)
1951.2.22(90)~3.6(114)
1945년 광복 직후에 창간된 두 신문이 미 군정치하에서 갖은 곡절 끝에 폐간되었는데
6·25전쟁 중에 서울에서 복간되었다가 1·4 후퇴 후 세 번째로 다시 발행되다가
국군의 서울 재수복으로 영원히 사라지게 되었다.
북한은 무력침략과 병행하여 신문을 전쟁 수행의 도구로 활용하였다.
남북한의 신문도 전쟁을 벌이고 있었던 것이다.
북한 언론을 대표하는 로동신문은 1946년 9월1일에 창간되었다.
북조선공산당과 조선신민당이 합당하여 ‘북조선공산당’을 창립하면서
1945년 11월1일부터 발간되던 북조선공산당 중앙조직위원회 기관지 ‘정로(正路)’와
조선신민당 기관지 ‘전진(前進)’을 통합하여 ‘로동신문’이라는 새 제호로 출발한 것이다.
로동신문은 북한 로동당의 핵심기구에 해당하므로
위급한 상황에 처했을 때에도 발행을 중단하지 않았던 것 같다.
국군이 평양을 수복하고 북으로 진격을 계속하여 쫓기는 처지에서도 신문을 발행하고 있었다.
북한이 가장 위기에 처했던 시기인 10월2일(275호)부터 12월1일(335호) 사이 2개월간의 신문은
국내에는 자료가 없다. 그러나 지령을 계산해보면 정확하게 60호가 빠져 있다.
이 시기는 국군이 평양 점령(10.19)에 이어 압록강까지 도달했던 기간인데도
어디에선가 신문을 발행하고 있었던 것이다.
북한군의 서울 점령 이후에 서울에서 발행되던 기존의 신문들은 모두 발행을 중단하고
많은 언론인이 납북되었다. 그런 와중에도 평화신문은 최상덕(崔象德) 등이 대전과 대구에서
임시 호외형식으로 간단한 소식을 전달했고, 비행기를 이용하여 서울에서 공중에 살포한 일도 있었다.
서울 수복 후에는 10월1일부터 서울신문을 필두로 신문들이 복간되었다.
국군이 평양을 점령하고 압록강과 두만강 유역으로 진격하던 때에 평양에도 신문이 나타났다.
경향신문은 10월30일부터 ‘평양판 경향신문’을 발행하기 시작하여 12월1일까지 계속했고,
국방부 정훈국은 11월1일에 ‘평양일보’를 창간하여 12월30일(제29호)까지 발행했다.
편집 겸 발행인은 작가 최태응(崔泰應)이었고, 이인봉(李仁鵬) 문제안(文濟安) 등이 참여했다.
합동신문(8호 발행), 평양신문(5호 발행)도 민간지로 창간되었으나
중공군의 침략으로 전세가 불리해지면서 곧 발행이 중단되었다.
서울에서 발행되던 동아일보, 경향신문, 서울신문, 조선일보는
부산, 대구, 수원 등지로 내려가서 신문발행을 계속하였다.
- 정진석, 한국외국어대 명예교수
- 신동아, 2009.10.01 통권 601호(p526~536) [정진석의 언론과 현대사 산책]
- 신동아, 2009.11.01 통권 602호(p546~559) [정진석의 언론과 현대사 산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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