좌우 가리지 말고 똑같은 잣대 들이대야
여운형의 ‘친일’과 조선중앙일보 폐간 속사정
2009년 11월 민족문제연구소가 펴낸 ‘친일인명사전’에 장지연의 이름이 올랐다. 이어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작성한 친일 반민족 행위 결정 내용을 담은 보고서 명단에서는 장지연의 이름이 빠졌다. 장지연의 친일 여부가 아직까지 논란의 대상임을 보여준다. 반면 곳곳에서 친일 행적이 확인되고 있는 여운형은 검토 대상조차 아니었다. 어떤 시각으로 어디까지 보느냐에 따라 판단이 다를 수 있다. 친일과 항일의 무게를 제대로 따지지 않으면 억울한 피해자를 낳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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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성일보사가 1944년 2월에 발행한 ‘반도학도 출진보(半島學徒出陣譜)’에는 ‘반도 2500만 동포에 호소함’이라는 여운형(呂運亨)의 글이 실려 있다.
‘반도’는 조선을 의미한다. 글의 머리는 “소화 11년(1936년) 10월 조선중앙일보 사장의 자리를 떠난 이래 꼭 7년간 침묵을 지켜온 여운형씨가 조선 동포에게 영광의 인생을 주려고 다시 일어났다. 그래서 ‘학도병에 지원하느냐 안 하느냐가 문제가 아니다. 지금 일어나지 않으면 조선 동포의 영광은 영원히 찾아오지 않는다’라고 조선 2500만 동포에게 전한 것이 아래와 같은 수기(手記)인 것이다”라는 편집자의 말로 시작된다.
일제는 중일전쟁과 태평양전쟁으로 이어지는 확전(擴戰)에 필요한 병력의 수요를 채우기 위해 ‘육군특별지원병 시행규칙’(1943년 10월20일)을 공포한 후 11월20일까지 한 달 동안 각 학교 교장을 위시하여 각계 지도급 인사들에게 집중적으로 학병 입대를 권유하도록 강요했다.
이때 여운형, 안재홍, 문인보국회, 경성유지 등이 경성일보에 실었던 글을 엮은 책이 ‘반도학도 출진보’다. 여운형의 글은 1943년 11월11일자 경성일보에 실렸던 것으로 여운형의 친필 서명을 동판으로 떠서 신빙성을 높였다.
나는 오랫동안 언론사(史)에 등장하는 여러 주요 인물을 연구해왔지만, 2005년 초까지는 여운형의 ‘친일’에 관심을 가져본 적이 없었다. 나의 저서 ‘역사와 언론인’(커뮤니케이션북스, 2001)에는 여운형이 1933년 2월17일 조선중앙일보 사장에 취임해 어려운 여건 아래서 신문사를 경영하다 손기정 선수의 베를린올림픽 우승 때 일장기를 말소한 사건으로 신문 발행을 중단하지 않을 수 없었던 내용을 다루기도 했다. 독립운동가이면서 일제 치하 언론인으로 활동한 여운형의 공적을 긍정적으로 바라보았던 것이다.
장지연의 친일 증거
여운형의 친일을 엄중하게 따져보아야 한다고 생각한 건 2005년 3월5일자 경향신문이 장지연의 친일의혹을 대서특필로 보도해 논란이 일어난 뒤였다. 그해 3·1절에 정부는 여운형에게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追敍)했다. 이 훈장은 1등급인 대한민국장 다음에 해당하는 2등급 상훈이다.
경향신문은 여운형의 훈격을 높여야 한다는 주장을 싣기도 했다.(2월21일 ‘기자메모’와 25일 ‘시론’). 그런 직후인 3월5일자에 경향신문은 ‘시일야방성대곡 장지연 경남일보 주필 때/ 일왕 찬양 漢詩(한시) 게재’라는 제목의 기사를 제1면 머리에 대서특필했다. 3면에는 ‘장지연, 총독부 기관지에 내놓고 日(일) 찬양’이란 제목의 기사를 실었다. 장지연이 경남일보 주필 시절 장기간에 걸쳐 친일행위를 한 사실이 드러났다는 것이다. 근거는 일제강점 이듬해인 1911년 11월2일자 경남일보 2면에 실린 ‘한시’였다.
일본왕 메이지(明治)의 생일인 천장절을 축하하여 일장기와 함께 작자의 이름을 밝히지 않은 한시가 실렸는데 그것이 장지연의 작품일 것이며, 따라서 장지연이 친일을 했다는 것이다.
추론은 이에서 그치지 않는다. 1909년 11월5일자 경남일보에 실린 이토 히로부미의 죽음을 애도하는 한시 역시 장지연이 썼을 것으로 추정하여 그가 “앞장서서 일제를 찬양하는 기사를 썼다”고 주장했다. 신문의 날이었던 4월7일 밤 KBS ‘시사 투나잇’도 장지연의 친일행적이 문제가 되고 있다면서 국사교과서나 초등학생들이 읽는 위인전도 재검토해야 한다고 말했다. 독립기념관에서 시일야방성대곡 논설비를 세우는 계획을 추진했으나 장지연의 친일 논란이 불거져 무산됐다는 관련자 말도 소개했다. 하지만 경향신문이 증거로 제시한 그 한시를 장지연이 썼다는 근거는 아무 곳에도 없다. 이때부터 장지연의 친일 여부가 뜨거운 관심사가 되어 친일 척결을 내세운 매체들이 새로운 ‘증거’ 발굴에 열을 올리기 시작했다.
우국적인 항일논객의 상징이던 장지연을 심판대에 올려놓고 작은 흠결이라도 없는지 낱낱이 찾아내어 추상같이 단죄하려고 하면서 여운형에 대해서는 눈을 감는 정도가 아니라 대한민국 최고의 훈장을 주어야 한다고 치켜세운다면 역사적 인물에 대한 평가가 형평에 어긋날 수 있다고 우려됐다.
다시 논의돼야 할 功過
여운형도 친일 문제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인물이다. 일제 패망 직후 한국에 진주한 미군이 작성한 첫 비밀 문건은 여운형을 ‘친일파(pro-Japanese collaborator)’로 규정하고 있었다. 미군 보고서에 무게를 두지 않고 장지연에게 들이댔던 것과 같은 잣대로 봐도 여운형이 친일을 했을 것으로 의심되는 증거는 많다.
노무현 정부는 좌파 진영의 요구를 받아들여 결국 여운형에게 훈장의 격을 최고등급으로 높여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다시 추서하는 이례적인 조치를 취했다. 한편 2009년 11월에 민족문제연구소가 펴낸 ‘친일인명사전’에 들어 있는 4389명 가운데 장지연의 이름이 올랐다. 대통령 직속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작성한 1005명의 친일 반민족 행위 결정 내용을 담은 보고서 명단에서는 장지연이 겨우 빠졌다.
나는 여운형을 친일파로 단정하고 싶지는 않다. 친일적인 글이 남아 있더라도 당시 시대상황을 감안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그런 글을 쓰지 않을 수 없는 처지였을 수도 있고, 다른 사람이 써서 여운형의 이름으로 발표했으나 막을 도리가 없었다는 주장도 경청할 필요가 있다. 일생에 ‘친일’과 ‘항일’이라는 상반되는 행위가 있었을 경우 어느 쪽이 더 무거운지를 비교해서 평가해야 한다.
그러나 장지연을 비롯하여 ‘친일 인물’로 규정한 기준대로라면 여운형도 논의의 대상에서 제외될 수 없다. 1936년에 있었던 조선중앙일보의 일장기 말소사건과 그 이듬해 폐간에 따른 여운형의 공과(功過)도 다시 논의되어야 한다.
조선중앙일보의 폐간을 교묘하게 미화하면서 같은 때에 동아일보가 겪은 고통과 피해 사실은 폄훼하는 역사 왜곡은 바로잡아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민족문제연구소와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이미 결정을 내렸음에도 일제 말기 여운형의 행적을 추적해 보고자 한다.
조선중앙일보의 폐간은 이미 알려진 일이지만, 일제를 향한 마지막 저항의 방법으로 스스로 폐간을 택했다는 일각의 주장은 사실이 아니다. 한마디로 신문사 자체의 소유권을 둘러싼 복잡한 경영 문제를 해결하지 못해서 생긴 결과였다.
앞에서 언급한 여운형의 글은 이렇게 시작된다. “사랑하는 조선의 젊은 학도가 오늘도 미영(米英) 격멸의 횃불을 들고일어나 전열(戰列)에로 노도의 출격을 계속하고 있다”면서 해운대의 한 방에 병들어 누워있는 자신의 가슴에도 눈부시게 변천해 가는 조선의 역사를 새기는 소리가 다가왔다고 썼다.
일본군 입대 미화와 권유
“나는 대동아전쟁에 대해서부터 극히 엄숙한 생각을 해보았다. 그리하여 이 전쟁에서 조선의 가야 할 길을 내선(內鮮-일본과 조선) 관계에서 결론을 이끌어냈다. 눈물겨운 혈서, 단호한 출진 결의의 웅비, 이것에 호응하여 우리 아들을 격려하는 부형과 은사…. 온통 조선의 산하는 임시특별지원병제의 영광에 용솟음 치고, 2500만 동포의 가슴은 놀랄 만큼 진동하고 있다. 대동아전쟁 발발 이래 대동아전쟁은 소극적으로는 구미 침략에 대한 대동아의 방위이며, 적극적으로는 그들을 몰아내는 데 있다. 상대는 말할 필요도 없이 미국과 영국이며 그것에 협력하는 세력이다.
이제 세계 신질서의 역사를 창건하는 성업을 하고 있는 추축국(樞軸國)의 유대를 강화하며, 대동아(大東亞)는 우리 일본을 중심으로서 착착 건설되고 있다. 제국의 존망을 걸고 피로써 싸우는 이 일전(一戰)을 어떤 어려움과 쓰라림이 있더라도 승리하지 않으면 안 된다. 물론 완승할 것을 확신한다. 이 승리는 16억의 생사를 좌우하기 때문이다. 일본은 자국을 수호하는 것보다는 유구한 3000년의 역사와 그 영예를 가진 아시아 전체를 해방하기 위한 것이다. 실로 이 일대 결전은 동아시아 10억의 생존권 획득전이다. 그래서 청년은 바다와 육지가 이어지는 세계를 향해 총을 들고 나가지 않으면 안 된다.”
여운형의 글은 계속된다. “세계 인류의 피가 들끓고 있는 가운데, 조선은 도대체 어떻게 하고 있는가. 지금이야말로 자기를 알고 조국을 연구하고, 세계관에 대한 반성을 하지 않으면 안 되는 때가 오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지금 조선의 전 신경과 살과 피를 찌르는 ‘임시특별지원병제’다. 이는 세기의 시금석(試金石)이다. 나는 이 지상(至上) 국명(國命)의 완수 여하가 조선 2500만의 운명에 달려 있다는 것을 뼛속에 사무치게 느끼고 있다.”
동아일보는 총독부가 요구하는 대로 순응하여 해당기자를 쫓아내고 일제의 언론기관으로서 사명을 다하겠다는 사과문을 실은 뒤 복간할 수 있었던 반면, 조선중앙일보가 총독부의 요구를 거절하여 폐간을 선택했다는 이 같은 주장은 사실이 아니다. 조선중앙일보의 폐간 경위는 앞에서 소개한 ‘역사와 언론인’에서 상세히 고찰했다. (305~311쪽 참고) 여기서 길게 설명할 필요가 없다. 당시 발행된 월간 ‘삼천리’의 기사를 인용하는 것이 가장 정확할 것이다.
소화 11년(1936년) 9월5일, 동업 동아일보가 같은 사건으로 경무국으로부터 발행정지의 처분을 받자, 중앙일보는 자진휴간의 거조(擧措)에 출(出)하야 1개년간이나 경무 당국의 속간 내락을 얻기에 진력을 하였으나 사태 불순하야 한갓 헛되이 일자를 끌어오다가, 만 1년을 지나 또 제 9조에 의한 2개월간의 기한까지 지나자 11월5일에 저절로 낙명(落命)하게 된 것이다. 같은 사건으로 처분을 받았던 동아일보는 그래도 그 제명(題名)을 살려 다시 속간함에 이르렀는데, 어찌하야 당국의 정간 처분도 아니오 자진 휴간한 말하자면 경미한 중앙일보만 낙명하게 되었느냐 함에는 여기에 여러 가지 복잡한 사정이 잠재하여 있었던 것이다. (중략) 휴간 중에 현 사장(呂運亨) 지지파와 신 사장(成元慶) 지립파(持立派)의 알력이 있어 호상 대립이 되어 중역회에서나, 주주총회에서나 분쟁이 늘 끊이지 않아(不絶)왔으며 거기다가 8만원 공(空) 불입 같은 것이 튀어나와 주식회사 결성 중에 큰 의혹을 남긴 오점까지 끼쳐놓았음이 후계 간부가 사무국을 이해시킬만 한 공작을 1년 내내 끌어오면서도 이루지 못하는 등 여러 가지의 실수가 원인이 되어 파란 많은 역사를 남기고 끝내 무성무취(無聲無臭)하게 마지막 운명을 짓고 말았다. -‘삼천리’ 1938년 1월, ‘오호, 중앙일보 수 폐간, 20여년의 언론 활약사를 남기고’
이처럼 조선중앙은 속간을 위해 자체적으로 많은 노력을 기울였지만 내분과 경영난을 극복하지 못한 채 법에 규정된 휴간 기일을 넘기는 바람에 발행허가를 취소당한 것이다. ‘삼천리’의 기사대로 조선중앙은 “당국의 정간 처분도 아니오 자진 휴간”한 것이었고, 동아일보에 비해 경미한 처분을 받은 상태였다. 총독부가 사장 여운형의 경질을 요구하여 여운형이 물러났던 것은 사실이고, 실무 관련자를 처벌하라는 요구는 아예 없었다.
형평에 맞는 친일 기준
여운형이 사장직에서 물러난 후에 조선중앙일보의 청산위원회가 여운형이 살던 신문사 소유의 집을 여운형의 부인 명의로 등기한 것이 또 논란이 됐다. 신문의 폐간으로 사원들의 생계가 어려운 때에 전직 사장에게 과한 혜택을 줬다는 비판이 일었다. 조선중앙의 폐간에 이상한 해석을 붙이는 것도 여운형의 ‘항일’을 미화하려는 의도에 지나지 않는다.
민족문제연구소가 발간한 ‘친일인명사전’과 대통령 직속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의 일본 강점 시기 친일 반민족 행위 결정 내용을 담은 ‘보고서’의 명단에 포함된 인물 가운데는 친일의 과오에 비해 독립운동, 항일언론 문화 활동 등의 공적이 현저히 큰 사람들도 있다. 그러나 친일의 흔적이 뚜렷한 여운형은 처음부터 검토 대상에조차 포함되지 않았다. 어떤 사람에 대해선 추상같은 검찰관의 자세로 애매한 혐의까지 과도하고 엄격한 잣대를 들이대 단죄하는 한편, 좌파에 대해서는 변호사 입장으로 명백한 증거에도 불구하고 혐의를 눈감아준다는 의혹을 살 수 있다.
여운형은 친일파인가? 기준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나는 친일파가 아니라는 쪽에 편을 들고자 한다.
친일의 여러 정황이 있기는 하지만, 그의 일생을 놓고 볼 때 항일 독립운동의 공적이 더 크다고 보기 때문이다. 진심으로 친일을 했을 리 없으며 그런 글을 자발적으로 쓰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장지연을 친일 인명사전에 올릴 정도라면 여운형은 그보다 더 무겁게 단죄되어야 한다. 젊은 학도들을 전쟁에 나가도록 선동한 행위는 많은 사람을 현혹하고 직접적인 해를 입혔기 때문이다.
아까운 청춘, 독립국가의 인재가 될 젊은이를 전쟁터로 몰아넣은 이적 행위는 변명의 여지가 없다. 평화로운 시대에 친일로 보일 만한 글을 썼다는 혐의를 가진 장지연과는 비교조차 할 수 없을 정도의 실증적인 증거들이 남아있다. 비단 장지연에 국한되는 사안이 아니다.
친일인명사전에 오른 사람 가운데 여운형에 비해 훨씬 가벼운 친일 경력을 가진 이가 많을 것이다. 여운형에게는 자신의 혐의를 깨끗이 씻을 수 있는 좋은 기회가 주어졌다. 여운형이 친일을 하지 않았다면 그와 같거나 훨씬 가벼운 다른 사람의 혐의도 모두 벗겨줄 수 있다. 일제강점기를 살면서 어쩔 수 없이, 또는 시대상황을 잘못 읽은 과오로 불가피하게 남긴 흔적으로 인해 친일파로 몰린 사람들의 억울함을 풀어줄 계기를 마련했기 때문이다. 자신과 함께 다른 사람도 구제할 수 있는 기회인 것이다. 여운형의 행적을 기준으로 친일과 그렇지 않은 경우를 판단한다면 변명의 기회조차 갖지 못한 채 ‘친일’의 족쇄를 차게 된 많은 사람이 혐의를 벗을 수 있지 않을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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鄭晉錫 영국 런던대 정치경제대학 박사(언론학) 한국외국어대 사회과학대학장 겸 정책과학대학 원장 |
- 2010.01.01 통권 604호(p610~621) 신동아, [정진석의 언론과 현대사 산책]
- 정진석, 한국외국어대학교 언론정보학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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