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경새재 가는 길
가을의 발걸음은 빠르다. 한없이 곁에 있을 것 같더니, 어느새 떠날 채비를 하며 회색빛 옷으로 갈아입기 시작했다. 잠시 머물다 떠나는 오색 단풍과 가을의 기운. 짧아서일까, 붙잡지 못해서일까. 아쉬움이 마음속을 가득 채운다.
이럴 때 가장 좋은 처방은 혼자 걷는 것이다. 화려한 단풍숲이 아니라도 상관없다. 어디에서든 혼자 유유히 걸어보자. 한 곳을 골라달라고 한다면 문경새재 옛길을 꼽고 싶다.
제1관문 주흘관에서 시작해 제2관문 조곡관을 거쳐 제3관문 조령관까지 이어지는 새재길. 부드러운 흙으로 길이 이어져 걷기도 편하다.
폭이 넓어 사람들과 걸어도 부대낄 일이 없는 마음 넓은 길이다. 자, 지금이다. 삶의 전쟁터에서 홀로 빠져나온 여유를 즐겨보자. 그리고 가슴속에 고여 있던 응어리들을 문경새재 길에 녹여보자.
봇짐 가득 이야기 싣고 넘는 문경새재
문경새재는 예로부터 교통의 요지였다. 중앙과 영남을 잇는 영남대로의 가장 중요한 길목이었다. 조선 초기에 개통된 이 길의 기원은 신라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영남대로의 중요한 관문이었던 만큼 당시 보부상들은 문경새재를 오르락내리락하며 봇짐장사를 하러 다녔다. 그러다 보니 수많은 이야기가 길에 담겼다.
이런 배경을 가지고 탄생한 대표적인 작품이 대하소설 <객주>다. 작가 김주영은 문경새재를 작품 도입부에 넣으면서 조선시대 보부상의 파란만장한 삶을 그려냈다.
제1관문을 지나면 오른편으로는 주흘산이 자리하고 왼편의 KBS 촬영장 뒤로는 조령산이 펼쳐진다. 백두대간인 소백산맥의 줄기를 타고 영남대로의 관문을 넘기 시작하는 순간이다. 이곳을 찾은 사람들이 빠뜨리지 않고 들르는 곳이 있다. 드라마 촬영장이다. ‘태조 왕건’을 촬영하기 위해 세운 이곳은 경복궁과 조선시대 종로거리 등으로 탈바꿈했는데 다양한 사극 드라마의 촬영지로 활용된다. 촬영장을 나와서 조금 더 가면 예전 마을이 있던 자리가 나타나고 선정비들을 볼 수 있는데, 이곳이 한때 번성하던 곳임을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옛사람들을 만나는 한가로운 산책길
붉은색과 노란색의 나무터널을 지나면 조령원터가 나온다. 새재길에는 많은 역과 원이 있었는데 조령원터는 그중 하나다. 역은 관리들의 여행길에 편의를 제공하고 도로를 관리하던 곳, 원은 역의 보조시설로 숙식을 제공하던 곳이다. 영남대로에선 이런 역이 30여 개, 원이 165개소나 운영됐다. 특히 문경시 점촌의 유곡역은 전국에서 가장 큰 규모를 자랑했다.
커다란 돌로 지붕을 댄 입구를 지나면 황량하기 그지없는 넓은 터가 나오고, 그 안에 촬영 세트장이 있다. 예전에는 쌀을 가져다 놓으면 이곳을 지나던 길손들이 음식을 해먹고 돈을 두고 갈 만큼 인심이 후한 곳이었다고 한다. 객주의 보부상들도 이곳에 머물며 그들의 아름다운 인심을 누렸으리라.
조령원터를 지나 이어진 길을 계속 걸으면 주막이 나온다. 과거 주막의 모습을 상상하면서 만들어놓은 곳으로, 93년 전 장사를 끝으로 사라진 주막의 오마주 같은 곳이다. 지금은 아무리 주모를 불러봐도 나오는 이 없지만, 먼 길을 떠난 사람들뿐 아니라 과거길에 오른 양반과 상인들이 함께 탁주와 국밥을 먹는 장면을 금방 떠올릴 수 있다. 아마도 많은 사람이 이곳에 머물며 다양한 정보를 교환했을 것이다. 즉석에서 물물교환도 하고 고달픈 여정에 지친 몸을 뉘었을 것이며, 오랜만의 만남에 회포도 풀었을 것이다.
- 채지형 여행작가 - 주간동아, 2009.11.10 710호(p94~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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