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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안반도의 허리를 가른 비법

Gijuzzang Dream 2009. 11. 12. 01:24

 

 

 

 

 

 

 태안반도의 허리를 가른 비법

 

 

 

 

 

 

 

 

 

태안반도의 제1경으로 불리는 백화산에 오르면

태안읍 시가지와 서해 바다가 넓게 내려다보이는 풍광이 일품이다.

서해안 하면 낙조를 빼놓을 수 없는데, 이곳 백화산의 중턱에도 ‘낙조봉’이란 곳이 있다.

특히 겨울철의 낙조봉에서는 약간 왼쪽으로 치우친 낙조와 겨울바다를 감상할 수 있다.

그런데 낙조봉의 관광안내판에는 조선 초기 문신이었던 신숙주의 시가 적혀 있다. 

신숙주가 시를 읊을 만큼 이곳의 경치가 절경이었던 모양이다.

하지만 그 시의 내용을 자세히 읽어 보면 단지 이곳의 절경에 대한 음유가 아님을 곧 깨닫게 된다.

그 뜻을 해석해 보면 다음과 같다.

“고개 위에 외로운 성 낙조(落照) 가에 서 있는데,

올라서 바라보니 다만 저 바다 하늘에 떠오르는 듯 보인다.

바람 불어 돌아가니 도서가 놀란 물결에 희미하고, 땅이 궁벽하니 민가에선 묽은 연기 오르네.

포(浦)를 판 지 몇 해에 공을 이루지 못했던고, 산에서 온 한 줄기 끊겼다가 다시 연했구나.

뉘 능히 나에게 조운(漕運) 통하는 계책을 말해 주려나.

다만 술통 앞에서 취하여 망연(惘然)히 잊고만 싶다.”

태안 1경인 백화산 정상에 오르면 남쪽으로는 천수만, 북쪽으로는 가로림만을 볼 수 있다 

조선 세조 때 우의정 · 좌의정 · 영의정의 삼정승 요직을 모두 역임했으며, 네 차례나 공신의 반열에 올랐던 신숙주가 도대체 무엇 때문에 이곳까지 와서 술통을 앞에 놓고 취해서 망연히 잊고 싶은 일을 겪었던 걸까.

그것은 시에서도 이미 언급했듯이 포(浦)를 파는 공사가 제대로 진행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신숙주가 이곳에서 공사를 진행한 흔적은 지금도 곳곳에 남아 있다.

충남 태안군 태안읍 인평리에는 마을을 둘로 나누는 ‘판개골’이라는 이상하게 패인 골이 있다.

판개골이란 땅을 파서 만든 개울이란 뜻으로, 그 옆의 논들은 ‘판개논’이라 부르기도 한다.

판개골은 구부러져 흐르는 다른 개울과는 달리 직선으로 반듯하게 뻗어 있다.

그것은 자연 하천이 아니라 사람이 파낸 인공 하천이라는 증거이다.

또 인평리의 바로 건너편에 위치한 서산시 팔봉면 진장리에는 ‘신털이봉’이라 불리는

희한한 이름의 야산이 있다. 인평리의 판개골을 파던 인부들이 휴식을 취하거나 일을 끝내고 돌아갈 때

짚신에 묻은 흙은 털어서 생긴 산이라는 의미에서 이런 이름이 붙었다.
대체 얼마나 오래 공사를 했기에 인부들의 신발에 묻은 흙이 야산을 이룰 정도가 되었을까.

그렇다. 신숙주가 이곳에서 담당했던 공사는 사실 고려 인종 때부터 시작해 조선 현종에 이르기까지

무려 530여 년간에 걸쳐 이루어졌을 만큼 오랜 기간 진행되었다.

그 공사의 정체는 바로 우리나라 최초의 운하를 건설하는 대역사였다.


태안 운하에 집착한 이성계

공사가 처음 시작된 것은 1134년(고려 인종 12년)이었다.

당시 고려 조정은 내시 정습명을 보내 수천 명을 동원하여 이곳에 수로를 만들기 시작했다.

하지만 끝내 완공하지는 못했다.
그 후 오랫동안 중단되었던 공사를 다시 시행한 이는 고려 말의 이성계였다.

1391년(고려 공양왕 3년) 당시 실권자였던 이성계는 왕강이라는 자를 보내 공사를 진행시켰으나

역시 도중에 중단되고 말았다.

서산시 팔봉면 진장리에는 신털이봉이라는 야산이 있다. 

그러나 이성계는 포기하지 않았다.

조선을 세운 후인 1395년(태조 4년) 6월 6일 지중추원사 최유경을 태안에 보내 운하를 팔 곳이 있는지 조사하게 했다.

하지만 최유경은 돌아와서 “땅이 높고 굳은 돌이 있어서 갑자기 팔 수 없습니다”라는 보고를 올렸다.

이성계는 왜 그처럼 태안의 운하에 집착했던 것일까.

그 이유는 최유경을 태안에 보내기 20일 전의 <태조실록>에 기록되어 있다.

“경상도 조운선 16척이 안흥량에 이르러 바람을 만나 침몰하였다.” (태조실록 1395년 5월 17일자)

조운선은 국가에 수납하는 조세미를 지방의 창고에서 서울로 운반하는 선박이다.

농업이 중심이었던 중세 국가에서 세금으로 거둬들이는 곡식과 지방 특산물은

왕조를 지탱하는 주춧돌과 같은 역할을 했다.

조운을 통해 들어오는 곡식으로 관리에게 녹봉을 주고 궁궐 행사 비용을 충당했던 것.

그리고 그 곡식의 대부분은 당시 곡창지대였던 영남과 호남 지방에서 올라왔다.

그런데 이처럼 중요한 조운선이 침몰하는 사고가 아주 잦았다.

조선 초만 해도 1395년 5월 16척이 침몰한 것 외에 1403년(태종 3년) 5월 경상도 조운선 34척이 침몰하고,

동년 6월에는 경상도 조운선 30척이 침몰해 익사 1천여 명, 미곡 1만 석이 바다에 가라앉았다.

또 1414년(태종 14년) 8월에는 전라도 조운선 66척이 침몰해 익사 200여 명, 미곡 5천800석이 수장되었고,

1455년(세조 1년)에도 조운선 55척이 침몰했다는 기록이 있다.

이 사고들의 공통점은 모두 태안반도의 서쪽 끝인 안흥량에서 일어난 사고라는 것이다.

현재 충남 태안군 근흥면 마도 부근의 해역인 안흥량은

물 속에 촘촘히 숨어 있는 암초들이 많고 풍랑이 심한 곳으로서,

진도의 울돌목, 강화도의 손돌목, 심청이 몸을 던진 인당수가 있는 황해도의 장산곶과 더불어

4대 조난처로 손꼽히던 지역이다.


오죽했으면 원래 지명이 지나다니기 어렵다는 뜻의 ‘난행량(難行梁)’이었을까.

그러다 보니 뱃사람들이 그곳을 더욱 두려워하기에,

안전 운항을 기원하는 의미에서 ‘안흥량(安興梁)’으로 지명을 고친 것이다.


4대 조난처, 태안의 안흥량

그럼 이 곳을 피해서 항해할 수는 없었을까.

당시의 선박은 돛단배라서 먼 바다로 나가면 바람을 통제하기 힘들어 더욱 위험했다.

따라서 대부분의 뱃길은 연안에 아주 근접한 곳으로 이어져 있었다.

더구나 조운선의 경우 육지에서도 배가 항해하는 것을 충분히 감시 감독할 수 있도록

해안에서 10리 이상 벗어나지 않는 연안 근접항로를 취해야 했다.

그러자니 안흥량을 지나치지 않을 수 없고, 안흥량은 통과하자니 조난사고가 두려운 형편이었다.

그래서 고려 때 나온 계책이 바로 태안반도의 허리를 가로지르는 운하를 건설해

안흥량을 지나지 않고 곧바로 통하는 뱃길을 여는 것이었다.

태안반도의 서쪽 끝인 안흥량은 예로부터 조난사고가 잦았던 곳이다 

지금의 지도상으로는 태안반도의 남쪽 바다인 천수만과

북쪽 바다인 가로림만을 잇는 가장 짧은 지점이라고 해도

약 10㎞ 이상의 구간이다.

하지만 이는 일제강점기의 간척공사와 1980년대 초에 진행된 대규모 간척사업으로 말미암아 바다가 줄어든 탓이지 조선시대만 해도 7㎞ 정도, 즉 20리가 채 되지 않았다. 더구나 이 운하가 건설되면 수로를 400여 리쯤 단축할 수 있어서 조운의 수송일자도 대폭 줄어들게 된다.

하지만 고려 인종 때부터 시도된 공사는 조선을 개국한 이성계에 의해서도 완공되지 못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첫째,

천수만과 가로림만을 잇는 운하 공사는 그 작업 구간의 절반 정도가 개펄이었다.

몸을 제대로 거동하기조차 힘든 개펄에서는 썰물 때만 작업이 가능했고,

파낸 개흙을 처리할 곳도 마땅히 없다. 애써 구덩이를 파도 밀물이 몰려들면 다시 메워지기 일쑤였다.

시멘트를 넣어 개흙을 단단하게 한다거나 물막이 등 현대적인 시공을 할 수 없었던 당시의 기술로는

개펄이 많은 태안에서의 운하 공사가 매우 어려웠을 것으로 짐작된다.

또 하나 결정적인 이유는 태조 때 태안을 조사한 지중추원사 최유경에 보고에 숨겨져 있다.

최유경은 땅이 높고 굳은 돌이 있어서 파기 어렵다고 했는데,

실제로 그 지역은 땅 밑으로 5m만 파고들면 그 아래가 단단한 화강암의 거대한 암반층으로 되어 있다.

갯골을 따라 어렵게 공사를 진행했다 해도 해발 고도가 28m나 되고

주변이 모두 암반층으로 된 골짜기에서 난관에 부딪칠 수밖에 없었다.

고작 정이나 가래 등의 장비로서는 그 단단한 암반을 뚫기에 역부족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조선 태종 때 아주 획기적인 공사법으로 태안의 운하가 완공되었다.

그 기막힌 공사법을 내놓은 이는

왕자의 난을 도와 이방원을 태종으로 등극시킨 그의 오른팔이자 조선의 개국공신 하륜이었다.

 

 

태종실록에 태안의 운하 공사가 처음 언급된 것은 1412년(태종 12년) 11월 8일이었다.

“(태종이) 의정부에 명을 내려 충청도 안흥량 수로에 배가 통행할 방법을 의논하게 하였다”고

그날 실록은 기록하고 있다.

그로부터 8일 후 태종은 참찬의정부사 김승주를 화공과 함께 내려 보내 태안의 지세를 살피고

지도를 그려오게 했다. 그날의 실록 기록에 의하면 이 같은 제안은 하륜이 처음 했음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

더불어 하륜이 제시한 획기적인 새 운하 건설방법도 거기에 함께 적혀 있다.

“(고려 때의) 왕강이 뚫던 곳에 지형이 높고 낮음을 따라 제방을 쌓고,

물을 가두어 제방마다 작은 배를 두며 둑 아래를 파서 조운선이 포구에 닿으면 그 작은 배에다 옮겨 싣고,

둑 아래에 이르러 다시 둑 안에 있는 작은 배에 옮겨 싣게 합니다.

이러한 차례로 운반하면 큰 힘을 들이지 아니하고도 거의 배가 전복하는 근심을 면할 것입니다.”

(태종실록 1412년 11월 16일자)

1914년에 완공된 파나마운하는 갑문식으로 건설되었다.

즉, 하륜이 새로이 내놓은 아이디어는 바로 파나마운하의 건설에 사용되었던 현대의 갑문식 운하와 같은 방식이었던 것이다.

태평양과 대서양의 뱃길을 잇는 파나마운하의 공사가 처음 시작된 것은 1881년이었다. 하지만 공사를 맡은 프랑스의 레셉스는 9년 만에 파산하고 말았다. 수에즈운하를 건설한 뒤 영웅 대접을 받던 레셉스는 파나마운하를 수에즈와 같은 수평식으로 고집해 공사를 추진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저지대의 모래땅에 건설된 수에즈운하와 달리 파나마운하는 고지대의 바위투성이 지역이었다. 결국 그는 재산을 다 잃고 난 다음에 공사에서 손을 떼야 했다.

그 후 1904년 공사를 다시 맡게 된 미국의 스티븐스는 파나마의 지형을 고려해 수평식이 아닌 갑문식으로 공사를 추진해 10년 만인 1914년 드디어 파나마운하를 완공하는 데 성공했다.

스티븐스는 산 정상의 호수 양쪽으로 각각 3개의 갑문을 건설해 배가 운하 입구에 도착하면 갑문으로 들어가서 뒤쪽의 문을 닫아 위쪽 수로의 물높이와 같도록 물을 채우는 방식으로 배가 1갑문부터 3갑문까지 통과하게 했다.
그리하여 산정의 호수에 배가 도착하면 다시 맞은편 갑문으로 가서

거슬러 올라갈 때의 역순으로 3개 갑문을 지나 반대로 내려가게 만든 것이다.


파나마운하, 고지대에 바위투성이 지역

고려 인종 때부터 조선 태조 때까지 시도된 태안 운하의 공사가 수에즈운하처럼

곧바로 수로를 뚫는 수평식이었다면, 하륜이 새로 제시한 방법은 파나마운하와 똑같았다.

즉, 운하를 연결하는 제일 높은 지점을 기준으로 양쪽에 6개의 둑을 쌓아

남쪽에 3개, 북쪽에 2개의 저수지를 만든 것이다.

그리하여 세곡을 실은 조운선이 남쪽의 첫 번째 저수지 입구까지 오면

거기서 저수지 안의 작은 배로 짐을 옮겨 싣는다.

같은 방식으로 가장 높은 지대인 세 번째 저수지까지 짐을 옮겨 실은 다음 다시 북측의 2개 저수지를 내려가

반대편 바다에 대기하고 있는 조운선으로 옮겨 실어 가로림만으로 나아가는 방식이었다.

물론 파나마운하처럼 갑문을 닫고 수위를 조절해 큰 배가 그대로 통과하는 현대적인 방식은 아니지만,

높이가 다른 저수지를 만들어 난공사 지역을 통과한 운하 건설 방식은

당시로서는 매우 획기적인 아이디어였음이 틀림없다.

다음해인 1413년(태종 13년) 2월 10일 드디어 태안의 운하가 완성되었다는 보고가 태종에게 전해졌다.

그러나 완공한 운하의 둑과 저수지 규모에 대해 자세히 언급된 그날의 실록 기록 끝에는

다음과 같은 말이 덧붙여져 있다.

하륜의 방식대로 건설된 태안의 운하는 제 역할을 하지 못했다.

사진은 태안반도의 위성 사진 

“헛되이 민력(民力)만을 썼지 반드시 이용되지 못하여 조운은 결국 불통할 것이다.”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일까. 사실 하륜이 제시한 방식은 애초부터 실패가 예고되어 있었다.

가장 큰 문제는 인공적으로 건설한 저수지에 채울 물이 없었다는 점이다. 하륜이 제시한 운하 건설법대로라면 저수지가 만들어진 곳은 당연히 땅 밑에 화강암층이 묻혀 있는, 운하 구간 중 가장 높은 지대였을 것이다.

따라서 자동펌프로 바닷물을 퍼 올리거나 아니면 백두산의 천지처럼 그보다 더 높은 곳에 위치한 호수의 물을 끌어다 채우지 않는 한 그 넓은 저수지에 배를 띄울 정도의 물을 채울 방법이 없었다.

물을 채울 수 없는 저수지는 그저 넓은 구덩이일 뿐이다.

더구나 그 곳은 조수간만의 차가 큰 지역이므로

맨 아래의 저수지 입구까지 조운선처럼 큰 배가 상시로 들어오기조차 쉽지 않았다.
이런 이유로 하륜의 방식대로 만들어진 태안의 운하는 제 역할을 하지 못했다.

하지만 그 후에도 하륜은 운하 공사를 계속해서 배가 통할 수 있도록 완공시키자는 주장을 계속했다.

그때마다 태종은 사람을 시켜서 태안 일대를 살펴 자세한 정황을 알아오게 했다.

심지어는 태종 자신이 두 차례나 친히 태안까지 가서 사정을 살펴보기까지 했다.



하륜의 방식이 실패한 까닭

애당초 어렵다는 것을 알면서도 태종과 조정의 대신들은 왜 그처럼 하륜의 운하 방식을 버리지 못하고

이처럼 갈팡질팡 했던 것일까. 운하 공사 진행 여부로 한창 시끄럽던 때인

1413년 8월 14일자의 태종실록을 보면 그 이유로 짐작되는 해답이 나와 있다.

“하륜이 힘써 순성의 제방을 개착하자는 의논을 주장하니 아부하는 자가 많이 있었다.”
당시 정권에서 차지하는 하륜의 위상을 감안할 때

그의 주장에 정면으로 반대하고 나설 만한 이는 별로 없었을 것이다.

또한 태종 역시 자신의 정권 창출에 큰 역할을 한 원로대신 하륜의 주장을 무시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그러나 운하에 대한 하륜의 집착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이번에는 태안이 아니라 조선의 새 도읍지 한양과 한강을 연결하자고 주장했다.

1413년 7월 20일자의 태종실록에 그 내용이 자세히 나와 있다.

하륜은 군인 1만1천 명을 징발하여 숭례문 밖에 운하를 파서

용산강(용산 앞에 위치한 한강의 일부 구간)과 연결해 배를 통하게 하자고 태종에게 청했다.

그렇게 되면 전국 각처에서 오는 조운선을 비롯해 다른 나라의 상선까지 용산을 거쳐

도성 입구인 숭례문까지 곧바로 들어올 수 있게 된다.

태종은 다음날 경회루에 신하들을 모아놓고 이 주장에 대한 의견을 물었다.

그러자 의정부 찬성사인 유양 혼자 ‘용산강은 도성에서 가까운데 굳이 백성을 괴롭힐 필요가 없다’는

이유를 들어 반대할 뿐 다른 신하들은 모두 찬성하는 분위기였다.
그런데 이 일은 정작 태종이 반대함으로써 결국 무산되었다. 태종이 반대 이유로 내세운 것은

백성들이 힘들다는 점이었지만, 아마 태안에서의 실패가 태종에게 그 같은 결정을 재촉하지 않았을까 보인다.


태종의 반대로 무산돼

한동안 잠잠하던 태안의 운하 공사가 다시 거론된 것은 1461년(세조 7년) 8월이었다.

기사 서두에서 언급한 바처럼 공사 책임자로 내정된 신숙주가 운하 공사를 청함에 따라 공사가 시작되었다.

5천명의 인원을 동원해 3년간 공사를 계속했으나 신숙주 역시 결국 성공하지는 못한다.

하륜은 숭례문 앞부터 운하를 파서 한강까지 연결하자고 주장했다.

그 후 제11대 중종 때에도 다시 태안 운하 공사의 타당성이 검토되었다. 이때 의정부에서 운하 공사를 제안한 것은 아무 일도 하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 승려들의 노동력을 이용하자는 속셈이었으나, 결국 시행되지는 않았다.

그러다 제18대 현종 때에 이르러 대신들의 건의로 다시 태안의 운하 건설 공사가 시작되었다. 그런데 현종 역시 운하를 파자고 주장하는 신하들과 이에 반대하는 신하들 사이에서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갈팡질팡하다가 결국 공사를 중지시켰다. 대신에 조난사고가 빈번한 안흥량 남쪽에 창고를 지어 곡식을 안전하게 운반하기로 했다.

그럼 왜 강력한 군주인 태종과 세조조차 이루지 못했던 일이 현종 대에 와서 다시 진행된 것일까.

1668년(현종 9년) 9월 2일자의 현종실록을 보면 그 이유가 잘 설명되어 있다.

“삼가 살피건대, 이 포구를 파서 조운(漕運)하는 길이 순조로워질 수 있었다면

조종조(현 임금의 선대 왕조)에서 우선적으로 했지 무엇 때문에 오늘날까지 기다렸겠는가.

그러나 이 곳은 조수(潮水)가 드나드는 곳이라서 파기가 매우 어렵고,

파내면 금방 메꾸어져서 공력만 낭비되었기 때문에, 예로부터 이런 의논이 있었는데도 파지 못했던 것이었다.

근래에 이 의논이 송시열에게서 시작되었는데, 이경억과 민정중 등이 힘껏 동조하였다.

때문에 조정의 신료들이 모두 그 일이 결코 이루어질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송시열 무리의 기세를 두려워하여 감히 그 잘못을 바로잡는 사람이 없으니, 통분스러움을 금할 수 있겠는가.”

 

- 이성규 기자, ⓒ ScienceTimes

- 이야기 과학 실록 (66) 2009년 11월 12일 / 11월 19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