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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녕 사액 관산서원 - 대원군 서원철폐령의 실체 최초 확인

Gijuzzang Dream 2009. 11. 17. 21:52

 

 

 

 

 

 

 대원군 서원철폐령의 실체 최초 확인

 

 

- 창녕 사액 관산서원(冠山書院) 사당터 조사현장 공개 -

 

 

 

문화재청 국립가야문화재연구소(소장 강순형)는 경남 창녕군(군수 김충식)에서 의뢰한 창녕 유일의 사액서원(賜額書院)인 관산서원(冠山書院, 현 관산서당,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335호)의 사당터에 대한 긴급 학술조사를 통하여 대원군 서원 철폐령의 실체를 최초로 확인하였으며, 그 현장을 7월 21일(화) 오전 11시에 공개한다.

 

고종실록에 따르면, 대원군은 서원철폐령(1868ㆍ1871년)을 내려 전국의 미사액ㆍ사액서원(약 1700여곳)을 47개소(사액서원)만 남기고 모두 ‘철원매주(撤院埋主) 하라[’서원을 철폐하고 사당에 모신 위패(位牌)인 신주(神主)를 묻어라(撤院埋主之節……大院君分付擧行事)‘] 명했다. 이번 사액(1711년, 숙종37) 관산서원 사당터 조사에서 온전히 확인된 매납시설을 통해 서원을 철폐하고 신주를 묻은 역사적 사실이 처음으로 확인된 것이다.

 

더구나 관산서원은 창녕에서 유일한 사액서원이자 영남5현(嶺南五賢, 김굉필ㆍ 정여창ㆍ이언적ㆍ이황ㆍ정구)의 한 분으로 숭앙(崇仰)된 영의정(추증) 문목공 (文穆公) 정구(鄭逑, 1543~1620년)를 기려 그가 사망하자 세운(1620년, 광해군12) 서원으로, 정구가 임지로 첫 부임한 창녕현감(1580~1581년)시절 관산재(冠山齋)를 비롯한 8개의 서당인 8서재(八書齋)를 세우는 등의 선정으로 생사당(生祠堂)이 서고, 사망 당해에 바로 관산재 아래에 세워진 서원이어서 더욱 그 의의가 높은 곳이다.

이러한 서원에서 국내 처음으로 발견된 매주(埋主)시설은, 철폐시킨 사당터 자리 한가운데를 파고 옹관처럼 옹기를 맞붙여 세워 그 속에 신주, 곧 정구의 위패를 봉안하고는 그 둘레에 사당에 얹은 기와로 3겹이나 감싸고 단단하게 흙으로 덮은 특이한 형식이다.

 

겹겹이 둘러싼 기와 사이에는 습기제거나 벽사용으로 보이는 숯덩이가 포함되어 있다. 그리고, 옹기 속에는 옻칠이 된 목제 위패 1점이 모셔져 있음이 비디오 내시경(Video-scope) 조사를 통해 확인되었다.

 

지금까지 서원철폐와 관련된 실증적인 유물자료는 알려지지 않았다. 때문에, 이번 창녕 관산서원 터에서 발견된 매주시설과 형식은 대원군의 서원철폐령 당시 모습을 생생하게 보여주는 첫 사례로서 그 역사적인 의미가 매우 높다고 평가된다.

 

 

 

 

 

관산서원에서 발견된 매주시설

위패가 안치된 옹기 모습

비디오 내시경을 통해 본 옹기 속 위패 모습

관산서원 매주시설 모식도

 

 

o 1870년(고종 7) : 고종실록(권7, 9월 10일)

 

전교하기를, “지난 날 사액서원의 원장은 본 고을의 수령이 주관하도록 하교한 일이 있었다.

대체로 유현에게 제사를 지내는 것은 조정에서 높여주고 표장하는 것이며

사림들이 받들어 높이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훌륭한 현판을 하사한 것이다.

그런데 요즘 듣자니 서원의 사무를 본손이 주관하며 각각 붕당을 주도하여

그 폐해가 백성들에게까지 크게 미친다고 한다.

이것을 만일 선대임금들이 이미 현판을 내려준 서원이라고 해서 논죄하지 않는다면

나라의 기강이 해이해질 뿐만 아니라 또한 화기를 해치는 단서가 되기에 충분하다.

만일 이러한 서원이 있으면 사액서원이라고 하더라도 그냥 놓아둘 수가 없다.

서원을 헐어버리고 신주를 묻어버리는 일모두 대원군의 분부대로 거행하도록

해조에서 팔도와 사도에 행회하도록 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