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세기 운흥사(雲興寺)의 각수승(刻手僧), 연희(演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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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화는 밑그림을 그리고 이것을 목판에 붙여 새긴 후,
여기에 물감을 뭍혀 인쇄하는 과정을 거쳐 완성된다.
전적으로 화가의 솜씨에 의해 그림의 양식 등이 결정되는 일반 그림과는 다르다.
그러므로 화가가 그린 밑그림도 중요하지만, 그것을 새겨내는 각수(刻手)의 기량도 중요하다.
더욱이 경전의 변상도들은 밑그림을 새로 그리기도 하지만
기존의 판화를 판목에 붙여 다시 판각하는 번각(飜刻, 혹은 覆刻)이 빈번하게 이루어져 왔다.
이 경우 같은 판본을 번각하였다 해도
각수(刻手)의 기량과 판각 특성에 따라 판화의 양식이 달라지므로
판화에서 각수는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한다고 할수 있다.
하나의 경전을 판각할 때 한 사람의 각수가 판각하기도 하지만
내용이 많을 경우 다수의 각수가 함께 판각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러나 변상도는 이들 중 한명이 새기거나 혹은 기량이 뛰어난 각수가 별도로 판각하기도 한다.
이 변상도 각수는 화면의 내부나 난외(欄外), 혹은 판심(版心) 등에
자신의 이름을 별도로 표기하는 경우가 있어 확인이 가능하기도 하다.
대체로 변상도 각수는 기량이 뛰어난 각수가 맡는 것 같다.
자신의 이름을 변상도 내외에 별도로 새긴 점이나,
각수질 중 가장 앞에 표기된 각수가 변상도를 새긴 경우가 많은 점 등이 그러한 추정을 가능케 한다.
여기 소개할 연희(演熙) 역시 자신이 판각한 변상도에 ‘演熙刀’, ‘熙刀’ 등으로
자신의 이름을반드시 표기하였다.
연희는 1668년부터 1690년까지 20여 년간 경상도 울산 운흥사에서 활발히 판각활동을 한 승려였다.
이 시기 운흥사에서 간행한 서적 중 15건의 경전류와 변상도에서 그의 이름이 발견되며,
7점의 변상도 중 5점을 연희가 판각하였다. 이는 조선시대 판화사에서 매우 희귀한 예에 속한다.
또한 17세기의 불서는 대부분 이전 시기 불서들의 번각본(飜刻本)이 대부분이어서
각선의 유연성과 섬세한 면이 줄어든 것이 대부분인데
연희가 판각한 변상도들은 같은 시기 의 판본들에 비해 섬세하고 우수한 기량을 보여 주목된다.
조선후기에는 승직에 있었거나, 뛰어난 저술을 지었거나
혹은 선풍을 드날린 시대를 대표할만한 스님 이외에는 행장이나 기록이 희귀하다.
각수 연희 역시 정확한 생몰년을 알 수 없다.
그에 대해 알 수 있는 것은 운흥사에서 간행한 경전의 발문(跋文)에 기록된 단편적인 내용과
우담 정시한(愚潭 丁時翰, 1625~1707)이 명산대찰과 경승지를 여행하며 기록한 《山中日記》에서
연희를 만나고 쓴 아래와 같은 간략한 언급 정도이다.
“자리를 옮겨 초성스님이 아침을 차려주어 여럿이 함께 먹었다.
각수승(刻手僧) 연희(演熙)스님이 아래 암자에서 나를 만나러 올라왔다.
됨됨이가 믿을 만하고 착실했다. 홀로 불경 새길 것을 발원하여 11년째 수천매를 새기고 있는데
하루도 조금이나마 게으름을 부리지 않았다고 한다.
말하기를 묘시에 일을 시작하여 유시에 마치는데 처음에는 뼈가 녹고 정신도 혼미하고 했으나
열흘이 지나면서 조금씩 나아지다가 3개월이 지나자 약간씩 기운을 회복하였고,
3년이 지나자 평소처럼 되었다고 한다.
새벽부터 저녁까지 일하므로 보는 사람도 힘이 드니까 혼자서 공양하고 참선도 한다고 말한다.
경신이가 나무판자에 시주자 명단을 적었기에 그것을 종이에 써서 주었다.
판자 2매에 수백 글자씩 썼다. 점심때가 되어 연희 스님이 점심을 차려주어 여럿이 함께 먹었다.…”
경전에 그의 이름이 처음 등장한 것은
1668년 운흥사에서 간행한 ≪佛說大報父母恩重經≫과 ≪妙法蓮華經≫이다.
그런데 이때 연희는 본격적으로 판각을 시작하지는 않았다.
은중경 간행시에는 나무를 구해 연판하고 장식하는 일을 맡았고,
묘법연화경 간행때는 학훈(學勳)과 함께 化主가 되어 경전 간행을 발원하고 갖은 업무를 도맡아했다.
이때 좋은 나무를 구하기 위해 그는 직접 덕유산에 들어가 나무를 구해왔다고 하였다.
信묵이 쓴<수능엄경>의 발문에 의하면
연희는 鶴城(울산 학성) 사람으로 늦은 나이에 고향에 있는 운흥사로 출가해 佛家에 입문하였는데
그가 경전간행에 뜻을 둔 것은 어머니에 대한 효심에서 비롯된 것으로
사람들은 그를 ‘목련존자(目連尊者) 후신’으로 칭했다고 한다.1)
연희가 관여한 최초의 경전이 부모은중경이라는 점은 이러한 그의 효심을 상징하는 것이다.
법화경에도 언급되어 있듯이 경전을 필사하고 제작하는 것은 큰 공덕을 짓는 일로 알려져 있어
공덕을 지어 부모에게 효도하고자 하는 그의 의지가 반영된 것으로 생각된다.
다음해 그는 또 덕유산에 들어가 판목을 배 2척으로 운반하여
학훈과 함께 사람들 몰래 원적산으로 들어가 3년간 판각한 끝에 1672년 수능엄경 10질을 완성하였다.
원래는 5년 계획을 세웠는데 3년만에 완성하였다고 한다.
<수능엄경>은 10권으로 구성된 방대한 분량으로
현재 연희가 판각한 155매의 목판이 현재 본사인 통도사 박물관에 완존되어 있다.
판의 전후면 모두 판각되어 있으므로 실제 판각한 면은 310매인 셈이다.
간기에도 ‘발원자비판자개간장두겸연희(發願自備板子開刊粧頭兼演熙) /
발원화주별상래왕공양주학훈(發願化主別上來往供養主學勳)’이라 기록되어 있듯이
연희가 스스로 판목을 구하고 간행하고 장식하는 판각의 모든 공정을 도맡아했고,
학훈이 화주와 공양을 맡았음을 알수 있다.
<그림 2> 《수능엄경》(1672년, 운흥사)의 간기
1679년 세 번째로 덕유산에 들어가 판목을 구해 금강경과 대승기신론을 판각하였다.
이 역시 판각 뿐만아니라 연판과 장두 등 판각의 전 과정을 혼자 담당하였다.
실로 그의 깊은 신앙심과 굳은 의지 그리고 성실한 성품을 알려주는 사례들이라고 할 수 있다.
《山中일기》의 내용처럼 하루도 거르지 않고 묵묵히 그리고 홀로 오로지 종일 판각만 했다는 것이다.
뼈가 녹아내리고 정신이 혼미하도록……
또한 흥미로운 점은 우직하도록 성실한 그의 곁에는 학훈(學勳)이라는 승려가 있어
공양은 물론 경전 간행의 여러 업무를 도맡아 주었던 점이다.
연희가 판각한 경전들의 공양과 화주는 대부분 학훈이 담당하였다고 기록되어 있어,
학훈은 연희의 든든한 후원자이며 도반임을 확인할수 있다.
신묵은 위의 발문에서 연희와 학훈은 ‘同心同志人’이라 했고,
경일(敬一)은 《금강경》의 발문에서
이들을 중국 唐代의 선종승려인 한산(寒山)과 습득(拾得)에 비유하기도 하였다.
이렇게 연희는 경전판각이야말로 弘法이자 무상의 공덕을 쌓는 일이라 생각하고,
그로인해 부모의 명복을 기원하는 것이 가장 큰 孝行을 실천하는 길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http://cms.korea.kr/goNewsRes/attaches/editor/20091109/4.jpg)
<그림 4> 그림 3의 각수 표기 부분
이제 실제로 그가 새긴 변상도는 어떠한 특징을 보이는지 살펴보자.
그가 원적산에 들어가 3년간 홀로 판각했다는 수능엄경의 변상도는 1672년에 판각되었다.
이보다 앞서 판각된 성수사본(1559년)이나 송광사본(1609년) 보다도 각선이 유연하여
초간본(1433년 화암간)에 더 유사한 것을 알수있다.
금강경변상도에서도 이러한 점을 확인할수 있을 것이다.
연희가 판각한 금경경변상도는 가장 빈번히 번각된 도상이어서 각수의 판각 특성을 쉽게 비교할수 있다.
운흥사본 보다 훨씬 먼저 판각된 전라도 금산 신안사본(1537년)과 비교해보면
142년이나 차이가 나는데도 양식적인 변모를 거의 느낄수 없으며,
50년 이른 함경도 석왕사 금강경(1634년)과 비교해 보아도
오히려 운흥사본이 유연함에서 앞서는 것으로 보인다.
<그림 6>과 <그림 7>을 비교해보면 섬세하고 유연한 연희의 판각 특징이 확연히 드러남을 알수 있다.
이러한 점은 전적으로 각수의 기량에 따른 것으로 해석할수 있으며
판하본을 꼼꼼하게 판각하는 그의 성실한 판각 자세와 뛰어난 기량을 확인하게 된다.
(좌)
(우) <그림 7> 석왕사간 《금강경변상도》 (1634년)의 부분
이러한 경전에 삽입되는 변상도 외에
《권수정업왕생첩경도》(1678년 운흥사)나 《관음보살도》와 같은 단독의 판화도 판각하였으며,
기존의 판본을 번각하지 않고 그가 밑그림도 직접 그려 판각하기도 하여
예술적인 소양을 지니고 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17세기후반의 경전들은 대부분 번각본이고
앞 시기에 비해 판각이 거칠고 각선은 대체로 유연함이 줄어들어 굵고 직선적이 된다.
그러나 이 시기 울산 운흥사에서 간행한 판화를 통해 볼 때
각수 연희가 새긴 이 판화들에서는 존상들의 단아한 표정과 각선의 유연함이 돋보이다.
당시 이 지역에서는 연희의 성실함과 각수로서의 뛰어난 기량,
그리고 그의 효심과 신앙심이 널리 알려졌었음은
위의 신묵과 경일의 발문에서도 충분히 확인할수 있을 것이다.
잘 알려져 있듯이 당시의 승려들은 천시되었고, 생활은 무척 곤궁했음에도
경전간행이 弘法과 孝行을 실천하는 길임을 성실하게 걸어간 각승, 연희의 모습을 아련히 상상해본다.
<그림 6>에서 볼수 있는 단정한 모습, 온화한 표정의 소유자였을까?
1) 효심이 깊은 목련존자는 어머님이 돌아가시고 삼년상을 치른후 출가하였다.
신통력을 얻은 후 살펴보니 어머니가 아비지옥에 빠진 것을 알게되어,
어머니를 구하기 위해 성반을 차려 재를 지내고, 등을 켜는 등
여러 차례의 과정을 거쳐 어머니를 지옥에서 아귀도, 축생도, 인간을 거쳐 천상으로 구제한다는 설화가
《불설대목련경》의 주요 내용이다.
- 박도화, 문화재청 인천항 국제여객터미널 문화재감정관실 감정위원
- 2009-11-10 문화재청, 문화재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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