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와의 이별
홍화문(보물 제384호)은 비밀의 문과도 같다.
온갖 소리를 내며 달리는 차들이 가득한 도로가 바짝 붙어 있지만 그 문을 통과하면 거짓말처럼 고요한 세상을 만난다.
그녀는 홍화문에 들어서면서 잠시 도시와의 이별을 고했다.
문밖의 도시의 바람과는 다른 코끝과 귓가에서 살랑거리는
고궁의 바람을 느끼며 그저 잠시 멈추어 있음을 즐겼다.
“우리의 궁이 이렇게 아름다운데, 이것을 모르는 사람들이 너무 많아요.
우리의 궁, 문화재들은 보존되기에 앞서 사람들과 함께 대화해야 해요.”
창밖의 풍경으로만 존재했던 창경궁의 홍화문에 발을 내딛는 순간 그녀는 우리의 궁과 대화를 시작했다.
궁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고, 오늘을 사는 그녀의 이야기를 궁에게 전해주고 싶었다.
그 옛날 영조는 이곳에서 백성들과 대화를 나누었다.
진정 백성들의 삶에 드리워진 생활고 문제의 해결을 위해 ‘균역법’을 시행하기에 앞서
이곳에서 백성들에게 의견을 물었다.
제왕적인 성격을 지닌 조선시대 왕들의 새로운 면을 볼 수 있는 점이다.
오늘날에는 주인이 없는 궁이 되어 버렸지만,
궁들이 외롭지 않게 우리네들이 말을 걸어 주어야만 할 것 같다.
사실 젊은 시절 그녀가 기억하는 창경궁의 모습은 안타깝게도 ‘창경원’의 모습이었다.
하지만 이제 이렇게 우리의 자랑스러운 궁으로 돌아와 있는 모습이 참으로 기쁘다.
하지만 궁과 우리의 삶이 좀 더 밀접해지는 것이 그녀의 바람이다.
역사와의 만남
홍화문에 들어서자마자 나오는 옥천교(보물 제386호).
백성의 세상에서 임금의 세상으로 건너가는 다리인 이곳을 그녀는 깨끗한 몸가짐을 하고 천천히 서두를 것 없이 건넌다.
넓게 펼쳐진 어의를 지나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법전인 명정전(국보 제226호)에서 들려주는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명정전의 문살은 단청도 되어 있지 않은 투박한 나무색이지만
그녀는 어째 그 문살에 손길이 간다.
햇빛이 들어오면 그 연꽃 문양의 그림자는 어의를 받들어 왕은
마치 연꽃위에 앉아있는 모습이 된다니, 참으로 신기한 일이다.
다른 궁에 비해 규모가 작은 창경궁이지만
이곳에는 다양한 역사 이야기들이 숨어 있다.
인조반정 후 인조가 하례를 받은 명정전, 사도세자가 태어나고,
비참한 죽음을 맞이했던 집복헌과 문정전 앞뜰,
의아한 죽음을 맞이했던 소현세자가 승하한 환경전,
장희빈이 인현왕후를 저주하며 흉물을 묻었던 통명전.
연극 같은 이야기들이 곳곳에 숨어 있는 곳이 창경궁이었다.
“오래된 것들의 가치는 오랜 시간을 견뎠다는 여유에 있어요.
돌계단이 풍상에 마모가 되었지만 여전히 아름다운 것은 그 여유가 담겨 있기 때문이죠.
현대적인 건축에도 오래된 느낌의 물건들이 함께한다면 우리에게 편안함을 가져다 줘요.
우리의 삶을 돌아보게 하는 것이 오래된 것들이 갖는 장점이죠.”
오래된 이야기들 속에는 모두 우리의 삶의 모습이 담겨있다.
누군가를 미워하고 사랑하는 것은 세월을 초월해서 모든 인간사에 있는 일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녀는 사람이 태어나서 성장하고 젊은 날을 소유하다가 늙어지는 모습까지도
모두 어우러지고 조화를 이루는 세상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덤으로 얻는 여유
“그때는 홍화문에 들어서면 왼쪽에 벚꽃 나무가 엄청났어요.
매우 아름다웠죠. 벚꽃이 피면 밤마다 벚꽃축제가 열렸어요.
당시 갈 곳이 많지 않았던 터라 창경궁의 벚꽃은
모든 사람들에게 인기였죠.
일제가 창경궁을 창경원으로 만들었을 때는
그저 유원지 같은 곳이었어요.
하지만 언젠가 반드시 궁으로 복원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이제 창경궁을 볼 수 있다는 것은 참 다행이죠.”
이제 창경궁에서 벚꽃을 찾아볼 수는 없지만
여러 내전들을 지나고 나면
시원한 바람과 함께 여름의 색깔을 내는 녹음들을 만날 수 있다.
우리 궁이 갖는 장점 중에 하나는 자연과 함께 자연스럽게 있다는 것이다.
굳이 깎아내지 않고 없애지 않고 있는 그대로의 모습들과 함께 어우러져 있는 것. 특히 창경궁은 그랬다.
“이 희귀한 백송은 마치 하나의 작품 같아요. 어쩌면 사는 것 자체가 꿈같았다가 생시 같기도 하죠.
또 어쩌면 오늘 이곳에 있는 이 장면들은 꿈속에서 본 것 같기도 하고요.”
미로처럼 펼쳐져 있는 창경궁의 아담한 길을 걷다보면 생소한 나무들을 만나기도 한다.
오랜 세월을 겪어온 자신 보다 더 깊은 세월을 보낸 나무 앞에서 겸허한 마음을 지닌다.
또한 이 녹음들 사이에서 자신과 맺어온 인연들,
또한 연극 작품 속에서 느꼈던 ‘인연’들에 대한 생각에 빠지며
창경궁이 주는 ‘여유’라는 선물을 받아들이고 있었다.
“다음에 또 오고 싶다는 생각이 계속 드네요. 친구들과 함께도 좋고, 손자들과 함께 와도 좋겠어요.
다음에 또 오고 싶다는 생각이 드는 곳, 이런 곳이 정말 좋은 곳이죠.”
오랜만에 찾았던 창경궁의 바람소리를 안고 그녀는 여유로운 미소를 지으며
비밀의 문을 나오는 것을 못내 아쉬워했다.
박정자
- 연극배우 박정자는 오랜만에 창경궁을 찾았지만 곳곳에 깃든 옛 추억들은 새록새록 되살아났다.
그녀는 1942년 인천에서 출생해 해방과 한국전쟁, 근대사의 여러 장면들을 겪어 왔다.
현대를 살면서 창경궁의 역사도 지켜 봐 왔으니 애틋함도 서려있다.
1961년 진명여고를 졸업하고, 이화여대 신문학과에 입학했던 그녀는
극단 ‘자유’의 동인이고 1962년부터 현재까지 연극을 하고 있다.
한국영상자료원의 이사이며, 국립중앙박물관 문화재단 이사이기도 한 그녀는
무수히 많은 연극에 출연하였으며,
현재도 “어디서 무엇이 되어 만나랴’라는 연극에서 온달의 노모로 열연 중이다.
그녀의 롤모델이 된 “19 그리고 80”이라는 연극 속의 모드 할머니 같은
지혜롭고 사랑스러운 할머니들이 이 세상에 많아지길 바라고 있다.
작품을 위해 자신을 위해 80세까지 연극을 하겠다는
행복하고도, 멋진 꿈을 가지고 있는 그녀야말로 진정한 모드일 것이다.
몇 년 전 창경궁 안에서 음악과 극이 어우러진 공연이 펼쳐지기도 했었다.
그녀는 관객으로 그 공연을 보았었지만,
궁에서 펼쳐지는 공연은 참으로 운치 있었기에 기억 속에 오래도록 남았다.
문화재를 보호하고, 자연을 보호할 수 있는 상태에서 조명등과 같은 무대 시설을 구비할 수 있다면,
그녀 또한 궁에서 공연을 하는 꿈도 꾸어본다.
- 글 · 김진희 / 사진 · 최재만
- 문화재청, 월간문화재사랑, 2009-08-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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