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cms.korea.kr/goNewsRes/attaches/editor/20090806/11-01.jpg)
정조와 규장각
정조(1752~1800)는 세손시절 본인의 지위와 생명을 위태롭게 했던 외척과 환관세력을
물리치고, 사대부를 가까이 하며 학문육성과 인재양성 정책을 추진하기 위해
즉위 첫해에 규장각을 설치하였다.
규장각은 정조의 정책의지를 반영하고 이끌어가는 핵심기관으로
역할하였으며, 그 관원들은 다른 관료에 비해 많은 권한이 부여되었을 뿐만 아니라
정조로부터 가인(家人)이나 다름없는 대우를 받았다.
정조는 규장각 관원과 함께 1788년(정조 12)부터 내원(內苑, 현 창덕궁 후원)에서
꽃구경하고 낚시하는 모임을 정기적으로 가졌다.
왕이 관원들과 함께 궁궐의 후원에서 모임을 여는 것도
“예로부터 내원(內苑)의 놀이는 척리(戚里, 외척과 인척)가 아니고서는 들어와 참여할 수가 없었으니 외신(外臣)을 내연(內宴)에 참여시킨 것은 특별한 은전이라 하겠다.”고 한
정조의 언급에서 알 수 있듯이 매우 예외적인 경우였는데, 정기적으로 모임을 가졌으니
정조의 규장각 관원에 대한 각별함과 우대의 정도를 엿볼 수 있다.
정조와 규장각 신하들의 화답시
<내원상화임자갱재축>은 1792년 3월 21일에 창덕궁 후원에서
정조와 규장각 관원들이 꽃구경과 낚시를 즐기면서 짓고 쓴 친필 시축이다.
내각상 조회는 규장각 관원들이 주관하고 규장각 관원만이 참여하였으나
이 해부터 그 아들과 아우로 참석자의 범위가 점차 확대되었다.
규장각 관원의 자제까지 참석범위를 확대한 데는
1786년 첫아들인 문효세자를 잃은 큰 슬픔을 겪은 후
1790년에 훗날 순조임금이 되는 둘째아들이 태어난 것이 배경이 되었다.
<내원상화임자갱재축>의 첫 부분에
“원자(元子)와 어울려 여기에서 즐거이 노닐어 대대로 수많은 자손들까지 서로 변함이 없는
것이 장차 지금부터 시작될 것이므로 여기에 기록하여 둔다.”라고 쓴 정조의 글에서
규장각 관원들과 자손대대로 변치 않는 관계를 맺고자 한 염원을 읽을 수 있다.
1792년의 모임에는 정조와 규장각제학 오재순(吳載純, 1727~1792)을 비롯한
규장각 관원 및 그 자제 27명이 참여하였다.
이들은 창덕궁 옥류천 지역에 위치한 '농산정(籠山亭)'에서 꽃구경을 하고
'수택재(水澤齋, 현 부용정]'에서 낚시를 하였으며 '춘당대(春塘臺)'에서 활을 쏘았다.
이후, 정조는 주찬(酒饌)을 내리고 운자(韻字)를 나누어 연구시(聯句詩)를 지어
즐거움을 기록하였다. 이날 모임에서 만든 연구시축이 바로 <내원상화임자갱재축>으로
정조가 첫 구와 마지막 구를 짓고 27명의 신하들이 각각 한구씩 지어 합하여 만든 것이다.
당대 학술과 사상을 이끈 최고의 학자들인 규장각 관원들이었지만
임금과 함께 한편의 시를 지어 완성하는 것은 무척이나 떨리고 긴장되었던 모양이다.
홍화(紅花)로 물들인 붉은 종이 위에 시와 함께 서문까지 길게 지은 정조의 글씨는
거침없는데 비해, 신하들은 나눠받은 각양각색의 종이 위에 한 글자 한 글자 정성들여 쓰다가
혹여나 수정하고 싶은 내용은 종이를 얇게 벗겨내고 그 위에 다시 적고 있다.
1793년 3월 20일에 이루어진 정조와 규장각 관원의 모임은 그 해가 계축년(癸丑年)인 것을
기념하여 난정수계(蘭亭修契) · 고사(故事)를 본떠 진행되었다.
난정고사는 353년(계축) 3월에 서성(書聖)으로 유명한 왕희지(王羲之) 등 중국 동진(東晋)의
명사 42명이 난정에서 액운을 떨쳐 버리기 위한 계제사를 지낸 후
곡수(曲水)에 술잔을 띄워 돌리며 시를 짓는 곡수유상(曲水流觴)을 베풀었던 모임이다.
난정고사에 부합하기 위해 정민시(鄭民始, 1745~1800) 등 규장각 전 · 현직 관원과 그 자제 및 일찍이 승지나 사관을 지낸 사람까지 특별히 불러들여 참석자가 41명에 이르렀다.
이날의 모임은 창덕궁 후원의 옥류천(玉流川) 지역에서 이루어졌다.
옥류천은 창덕궁 후원 북쪽 깊숙한 곳에 흐르는 개울을 가리킨다.
인조대에 이곳의 소요암(逍遙巖)을 깎아 곡수유상연(曲水流觴宴)을 위한 둥근 홈을 만들고
맑은 물이 바위를 돌아 폭포처럼 떨어지게 하였다.
정조는 이곳에서 난정수계 고사를 모방하여 규장각 관원들과 함께
소요암의 곡수구(曲水溝)에 술잔을 띄워 술을 마시고 시를 읊었다.
정조가 먼저 2편의 시를 짓고 모인 신하들에게 각자의 장기대로 시를 짓도록 하였는데,
이 때 정조와 신하들이 짓고 쓴 친필시 42수가 <내원상화계축갱재축>에
고스란히 실려 전하며 그 길이가 무려 25m에 이른다.
<내원상화임자갱재축>과 <내원상화계축갱재축>은
왕이 지은 시에 신하들이 화답(和答)한 친필 갱재축으로 처음 알려진 사례들이다.
이 두 점의 갱재축은
정조의 어필과 정민시 · 오재순 · 김조순 · 홍양호 · 남공철 · 윤행임 · 이서구 등
당대 규장각 관원들의 친필을 한꺼번에 살필 수 있다는 점에서 서예사적 중요성을 지닌다.
또한, 색지(色紙) 및 금가루 · 운모가루 · 이끼 등으로 장식한 종이는
조선후기 왕실에서 사용한 최상급 종이의 모습을 잘 보여준다.
- 손명희, 문화재청 국립고궁박물관 학예연구사
- 문화재청, 월간문화재사랑, 2009-08-0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