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주짱의 하늘꿈 역사방

알아가며(자료)

서재에서 만나는 선비들의 내면 풍경

Gijuzzang Dream 2009. 10. 31. 23:37

 

 

 

 

 




옥처럼 맑은 물을 닮은 서재 - 유성룡의 옥연서당

 

강물이 흐르다가 이곳에 다다르면 깊은 못이 되었다.

그런데 그 물빛이 깨끗하고 맑아서 마치 옥과 같았기 때문에 ‘옥연서당’이라고 한 것이다.

옥의 깨끗함과 못의 맑음은 모두 사대부가 귀하게 여겨야 할 도리이다.

 

 

내가 일찍이 옛사람의 말을 살펴보았는데,

“사람의 삶이란 자신의 뜻에 맞는 것이 귀할 뿐 부귀가 어찌 귀하겠는가.”라고 했다.

나는 비루하고 옹졸해 평소 세상에 나아가 출세하기를 바라지 않았다.

비유하자면 “미록, 고라니와 사슴의 성품은 산과 들에 알맞을 뿐

사람이 번잡한 성시(城市) 가운데 있지 않다.”라는 말과 같다고 하겠다.

 

중년에 망령되게 벼슬길에 나아가 명예와 이익을 다투는 곳에서 20여 년을 골몰했다.

당시에는 발을 들고 손을 놀려 움직일 때마다 놀라고 더럽힐 뿐이어서 너무나 답답하고 무료했다.

일찍이 울적할 적마다 이곳 옥연서당의 무성한 숲과 우거진 덤불 속에서 누렸던 즐거움이

떠오르지 않을 때가 없었다.  

그나마 다행스럽게도 임금의 은혜를 입고 벼슬길에서 물러나 고향으로 돌아왔다.

벼슬살이의 부귀영화는 귓전을 스치는 새소리가 되었을 뿐이고,

이곳의 아름다운 언덕과 골짜기에서 만끽하는 즐거움은 깊어만 간다.

장차 문을 닫아걸고 모두 물리쳐 깨끗이 한 다음 깊숙이 방 안에 틀어박혀 지낸다.

그리고 산의 골짜기 사이를 이리저리 거닐어도 보고,

그림과 서책은 찾아서 보고 읽는 즐거움으로 만족한다.

 

날씨가 좋은 때 정겨운 벗들이 아름다운 풍경을 찾아 우연히 모여들면 함께 골짜기를 굽이굽이 거슬러

찾기도 하고, 암석 위에 앉아 푸른 하늘을 바라보며 새하얀 구름을 읊기도 한다.

그렇게 호탕하게 즐기다 보면 물고기와 새들까지도 모두 제 흥에 겨워 세상 시름을 잊는다.

아아! 이 또한 사람의 삶이 자신의 뜻에 들어맞는 일이니, 세상 바깥의 무엇을 달리 그리워하겠는가!

이와 같은 나의 뜻이 흔들리지나 않을까 두려워 문득 벽에 써서 붙여 놓고 내 자신을 경계한다.  

- 유성룡, 『서애집』‘옥연서당기(玉淵書堂記)’ 중에서 - 


 

유성룡은 원지정사(遠志精舍)를 짓고 나서도 마을과 너무 가까운 곳에 위치하고 있어서

한가롭게 독서하고 여유를 즐길 만하지 못함을 안타까워했다.

유성룡은 원지정사를 35세 되는 1576년 1월에 완성하자마자, 곧바로 그 해 이 옥연서당을 짓기 시작했다.

그러나 경제력이 부족해 제대로 진행하지 못하다가,

때마침 탄홍(誕弘)이라는 스님이 곡식과 비단을 내놓으면서

시작한지 10년이 지나서야 옥연서당이 완성되었다.

유성룡이 서재를 ‘옥연서당’이라고 이름을 붙인 까닭은 옥의 깨끗함과 못의 맑음을 취하기 위해서였다.

감록헌(瞰綠軒), 세심재(洗心齋), 완적재(玩寂齋), 원락재(遠樂齋), 애오헌(愛吾軒) 이 모두를 합친 곳이

옥연서당이다. 이것은 문간채, 바깥채, 안채, 별당 등 건물들을 합친 말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선비가 품은 뜻과 기상을 다양하게 표현하고, 서재의 기능과 정취를 아우르는 말이기도 하다.

 

감록’은 왕희지의 “우러러 푸르른 하늘가를 바라보며, 아래로 푸르른 물굽이를 내려다보네(仰眺碧天際

俯瞰綠水)”라는 말에서 취했는데, 자연을 담고 또 자연을 닮고 싶은 곳이 서재임을 알 수 있다.

세심’은 『주역』 계사에 나오는 말을 취했는데, 서재가 마음을 닦는 곳임을 나타낸다.

완적’은 불교의 학설에서 취했는데, 당대 최고 지식인의 풍요롭고 유연한 철학사상의 품을 느끼게 한다.

원락’은 『논어』의 첫 구절에 나오는 “먼 곳으로부터 찾아오니 즐겁지 아니한가(自遠樂乎)”에서

취했는데, 서재에서 반가운 벗을 기다리는 선비의 모습을 보여준다.

애오’는 도연명의 시 “나 또한 내 집을 사랑하네(吾亦愛吾廬)”에서 취했는데, 서재라는 공간을 아끼고 사랑하는 옛사람의 마음을 읽을 수 있다.  

 

서애선생은 옥연서당에 거처하면서 주변을 물리치고,

자신이 경험한 참혹한 전란 곧 임진왜란의 원인과 과정 그리고 결과를 낱낱이 기록한 『징비록(懲毖錄)』을 구상하고 저술했다.

옥과 같이 깨끗하고 못과 같이 맑은 마음을 지닌 채 살겠다는 포부를 지녔던 유성룡에게는, 왜적의 침략을 제대로 막아내지 못해 나라를 멸망 직전으로 내몰고 백성을 도탄에 빠뜨린 사실이 씻을 수 없는 부끄러움이었으리라.


자식교육에 대한 열정이 담긴 서재 - 정약용의 삼사재

 

학문을 닦을 때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용모를 움직이는 것 동용모(動容貌)’, ‘말을 하는 것 출사기(出辭氣)’,

‘안색을 올바르게 하는 것 정안색(正顔色)’이라고 할 수 있다.

 진실로 이 세 가지에 힘을 쏟지 않는다면 제아무리 하늘의 이치를 꿰뚫어보는 재주와

남보다 탁월한 식견을 갖추고 있다 해도 마침내 자기 한 몸 지탱하기도 힘들 것이다.

그러한 폐단으로 말미암아 함부로 말하고 제멋대로 행동해 세상을 훔치는 도적이 되고,

큰 惡을 저지르며, 이단(異端)과 잡술(雜術)을 일삼게 된다.

 

그래서 나는 서재에 이름을 ‘삼사(三斯)’로 붙이려고 한다.

삼사라는 말은 ‘난폭하고 태만함을 멀리하는 것(斯遠暴漫)’, ‘비루하고 천박함을 멀리하는 것(斯遠鄙倍)’,

‘진실을 가깝게 하는 것(斯近信)’을 가리킨다.

나는 지금 너희들이 德에 나아갈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이 ‘삼사(三斯)’를 준다.

너희들은 이 ‘삼사’로써 서재에 이름을 짓고 기문을 써서, 차후 오가는 사람 편에 부치도록 해라.

나 역시 너희들을 위해 글을 쓰도록 하마.

또한 너희들은 이 편지의 내용을 근거삼아 잠(箴, 경계하거나 훈계하는 뜻을 적은 글) 세 편을 짓고

‘삼사잠(三斯箴)’이라고 이름을 붙여라.

그렇게 한다면 남송의 유학자인 정이가 지은 사물잠(四勿箴)인

시잠(視箴), 청잠(聽箴), 언잠(言箴), 동잠(動箴)의 아름다움을 이어받을 수 있을 것이다.

어떠한 복이 이보다 더 크겠느냐. 나는 너희들이 그렇게 하기를 깊이 바라고 또 깊이 바란다.

- 정약용, 『다산시문집』‘두 아들에게 부침(寄兩兒)’ 중에서 -

 

 

이 편지는 정약용이 강진에서 유배생활을 시작한지 막 1년을 넘겼을 때(1803년) 두 아들에게 보낸 것이다.

이때만 해도 그는 자신의 유배생활이 18년간이나 지속되리라 생각하지는 않았던 듯하다.

몇 년 이내에 유배가 풀려 집안을 일으킬 경우를 가정하면서,

자식들에게 글공부에 더욱 매진할 것을 당부한다. 다시 서울로 돌아가 재기할 꿈이 컸던 만큼,

학연과 학유 두 아들의교육에 대한 안타까움 또한 컸을 때이다.

정약용은 두 아들이 공부하는 기본적인 자세부터 다시 바로 잡아주어야겠다고 마음먹는다.

 

몸가짐이 단정하지 못하고 행동을 신중하게 하지 않는다면,

학문하는 마음가짐이 제대로 설 수 없다고 여겼다.

이에 정약용은 공부를 시작할 때 가장 먼저 해야 할 일로

용모를 움직이는 것, 말을 하는 것, 안색을 올바르게 하는 것을 꼽아 두 아들을 가르쳤다.

그런 다음 독서하는 공간인 서재에 ‘삼사(三斯)’라고 이름 붙이고,

그 뜻을 좇아 글공부에 힘쓰라고 당부했다.

삼사라는 말은 ‘폭만(暴漫)’과 ‘비배(鄙倍)’를 멀리하고, ‘信’을 가까이 하는 것을 가리킨다.

이 삼사를 기준삼아 독서에 힘쓴다면, 몰락한 사대부 집안의 자손이라고 할지라도

반드시 덕성(德性)을 길러 세상에 이름을 알리게 될 것이라는 것이

유배지에서 정약용이 자식들에게 준 가르침이었다.

 

삼사재(三斯齋)는 이렇듯 정약용의 자식교육에 대한 열정이 담긴 서재였다.

삼사재에서 자식에 대한 아버지의 사랑을 엿볼 수 있다.

다산 정약용은 자신의 집안에 대한 긍지와 자부심이 대단했다.

 



실제 그의 집안은 9대째 홍문관(弘文館)에서 벼슬에 올라, ‘9대 옥당(玉堂)’이라는 칭호를 얻을 정도였다.

그런데 정약용의 유배생활로 집안이 몰락하고,

이에 아들들이 절망하여 공부를 멀리하는 것 같아 두려운 마음에 지은 서재 이름이 삼사재이다.

이는 서재 본연의 기능이 공부하는 곳임을 상기시키고,

선비가 치열하고 열정적으로 평생을 한결같이 공부하는 존재임을 알려준다.

 

위의 옥연서당과 삼사재 외에 다른 서재를 조금 더 소개 하면 다음과 같다.

 

이첨(李詹)의 서재 '고협재(鼓협齋)'는 학생들이 공부를 시작할 때 북을 울려 알리고,

공손하고 단정한 마음가짐으로 공부하기 위해 책 상자를 연다는 뜻이다.

이서구(李書九)의 서재 '소완정(素玩亭)'은 마음을 비우고 바깥의 사물을 받아들이고,

사사로운 욕심이나 욕망으로부터 벗어나 담담하게 책을 완상한다는 뜻이다.

중려(仲慮)의 서재 '매헌(梅軒)' 은 찬바람을 뚫고 꽃을 피워 세상에 맑은 향기를 가득 퍼뜨리는

매화의 모습이 군자의 풍모를 닮았다 하여 붙인 이름이다.

허친(許親)의 서재 '통곡헌(慟哭軒)'은 위선과 허식 그리고 독선과 편견에 휩싸여 있는

양반사회의 윤리나 도덕을 맹목적으로 추종하지 않겠다는 강렬한 비판의식을 담았다.

이덕무(李德懋)의 서재 '구서재(九書齋)'는 책에 대한 모든 것을 체득하겠다는 뜻과 의지를 담아

지은 이름이다.

김득신(金得臣)의 서재 '억만재(億萬齋)'는 글을 읽을 때 1만 번 넘지 않으면 멈추지 않았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옛사람은 서재에 이름을 붙이면서, 자연을 담고 뜻을 담고 삶을 담고자 하였다.

따라서 서재는 주변의 자연 풍광을 닮고, 주인의 뜻을 닮고, 선비의 내면 풍경을 닮아 갔다.

서재는 단순히 책이나 쌓아두고 숨어 지내는 곳이 아니라,

학문을 향한 순수한 열정과 삶에 대한 지혜를 경험하고 체화하는 구도의 공간이었다.      


- 엄윤숙, 고전연구회 사암 / 사진 · 포럼 출판사   

- 문화재청, 월간문화재사랑, 2009-10-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