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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근대의 고미술품 수장가 열전 - 박창훈

Gijuzzang Dream 2009. 10. 26. 21:24

 

 

 

 

 

 한국 근대의 고미술품 수장가 - 박창훈

 

 

 

 

1940년 5월 1일자 『동아일보』에는

일제시기의 대표적 화상(畵商)으로 조선미술관을 경영한 오봉빈의

「서화골동의 수장가 - 박창훈씨 소장품매각을 기(機)로」라는 장문의 글이 실렸다.

 

오봉빈은 이 글에서 당시 주요한 고미술품 수장가로

'오세창 ⋅ 박영철 ⋅ 김찬영 ⋅ 함석태 ⋅ 손재형 ⋅ 박창훈'을 꼽은 후

'외과의의 태두'인 박창훈이 '혜안과 희생으로 수집하신 서화와 골동을 전부 출방(出放)'함을

안타까워하였다. 특히 박창훈의 수장품 가운데

<동한류편(東翰類編)>이 일제시기 당시 조선에서 행해진 미술품 경매회에서 최고가인 7,250원에,

<열상정화(冽上精華)>가 4,000원에 낙찰된 것을 언급하고

이 두 물건의 새 주인에게는 '조선의 국보'이니 '신중히 보관하시기를 재삼 부탁'하는 것으로 글을 마쳤다.

(도 1, 2, 3)



 


도 1) 오봉빈, 「서화골동의 수장가 - 박창훈씨 소장품매각을 기로」

『동아일보』 1940. 5. 1. 3면(부분).

이 글에서 오봉빈은 박창훈이 수장품을 경매회에 내놓아

모두 팔아버리는 행위에 대하여 아쉬움을 표했다.

 



도 2) 이이, 황희 등 1200여 인의 글씨로 구성된 <동한류편>(47책) 



도 3) 신명준 외 100여 명의 그림으로 구성된 <열상정화>(5책).

<동한류편>과 <열상정화> 등 박창훈의 주요 수장품은 현재 그 소재를 알 수 없다.

 

 

박창훈은 1940년 4월 자신의 수장품을 경매에 내놓은 후,

이듬해인 1941년 11월에 다시 경매회를 개최하여 남은 고미술품을 처리하였다.

경성미술구락부는 주요 경매회 개최시 ‘경매도록’을 발간하였는데

박창훈의 수장품을 경매한 두 번의 경매회에는 모두 도록이 발간되어

그가 수장했던 고미술품의 내역을 알 수 있게 해준다.

일제시기에 이루어진 경매회 가운데 한 수장가의 이름으로 2차례에 걸쳐 경매회가 개최된 경우는

박창훈이 유일하다는 점과 한국 근대의 수장가들 가운데 박창훈처럼 자신의 수장품을 경매라는

공개된 방식을 통하여 모두 처분한 일은 없다는 점에서

박창훈 수장품 경매는 한국 미술시장의 역사에서 중대한 '사건'으로 기록될 만하다.

박창훈은 그가 수장한 고미술품의 방대한 수효와 높은 미적 수준에서도 중요하지만

여타의 수장가들과는 완연히 다른 처리방식에서도 특별한 주목이 필요한 인물인 것이다. (도 4) 

 



도 4) 박창훈 사진.

박창훈은 일제시기 당시 스타급 의사로서 활발한 사회활동을 한 명사였다.

 

두 번의 경매회에서 모두 600여 점이 훌쩍 넘는 방대한 수량의 서화 ⋅ 도자 ⋅ 목공예품 등 고미술품을

처분한 박창훈은 일제시기 당시 활발한 사회활동을 한 명사이다.

일본 경도제국대학 의학부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박창훈은

성공한 의사이자 사회명사 그리고 손꼽히는 고미술품 수장가로서

식민지시기에 세속적 의미에서의 성공을 모두 이룬 인물의 전형이라 할 만하다.


어렵게 수집한 막대한 양의 고미술품을 경매에서 '처리'해 버린

박창훈에 대한 당시 주변의 평은 탐탁지 않았다.

오봉빈은 "박씨는 의업으로 성공한 사람 가운데 일인이니 물적 고통이 만무할 것이다.

그러면 그 - 진의가 어디 있는가. 우리 지인은 매우 궁금하였고 속으로 박씨를 책(責)하기도 하였다"

하여 당시 수장가들의 평을 전하였다.

이에 대하여 박창훈은 자신의 수장품을 모두 경매회에 내놓은 이유를

"…슬하에 칠팔남매…자녀교육비를 적립하여야 부모의 책임을 다하겠다…"

그리고 “옛날에 복불쌍전(福不雙全)이라 하였으니 자신이 선대에 못 가졌던 이와 같이

복을 다점(多占)하였으니 중요미술품까지 점유하고 있을 염치가 없으니

이것만은 여러 사람에게 분양하노라” 라 하였다.

 

그렇지만 교육비 부담과 "복을 다점하였기에 염치가 없어…분양하노라"는 그의 해명에 동의하기 어렵다.

박창훈은 성공한 의사이자 당대의 명사로서 이재에도 밝은 인물이었기 때문에

교육비로 인한 경제적 문제 운운하는 것은 이해되지 않으며 "복을 다점하였기에 염치가 없어…

분양하노라"는 겸사 역시 애장가로서는 할 수 있는 변명이 아니기 때문이다.

 

박창훈이 자신의 수장품을 2번에 걸쳐 모두 처분한 것은

그의 해명보다 당시 세계정세의 급격한 변화의 흐름을 읽은 때문이 아닐까 싶다.

아마도 박창훈은 1939년 6월에 국민당군이 중국공산당 신4군을 공격한 평강사건이 일어나고

7월에 일본이 국민징용령을 공포했으며

9월에는 독일이 폴란드로 진격하여 제2차 세계대전이 시작되는 등

세계가 점차 전쟁의 소용돌이로 빠져 들어가는 상황에서

위기를 직감하여 고미술품을 처분한 것으로 보는 것이 적절하지 않을까 싶다.

재기발랄하고 판단이 빠르며 한 번 결심하면 끝까지 밀어붙이는 굳은 의지를 가진 인간형이었던 박창훈은

급변하는 세계정세 속에서 고미술품을 계속 유지하는 것이 힘들 것이라 전망하고

고미술품을 모두 내놓은 것으로 여겨지는 것이다.

 

박창훈은 1951년 4월 5일 부산 피란 중에 향년 54세로 세상을 떠났다.


한국 근대의 고미술품 수장가를 수장 방식에 따라 구분하자면

전형필과 같이 수장하면 절대 밖으로 내보내지 않는 유형,

장택상 ⋅ 손재형과 같이 수장하였다가 어쩔 수 없는 사정으로 조금씩 유출되다가 결국 모두 흩어진 유형,

박창훈과 같이 대량 수집했다가 한꺼번에 모두 처분해 버린 유형 등으로 나눌 수 있다.

 

박창훈은 고미술품 대수장가로서 명성을 떨쳤다가 모두 판매하여 경제적 이득을 극대화하였다.

'대량 수집'과 '전량 방출'이라는 행위의 가장 큰 원인은

수장가 개인의 확고한 의지와 목적의식이 없었기 때문으로 여겨진다. (도 5)

 


 
도 5) 경성미술구락부 사옥 전경(현 서울 명동 프린스호텔 자리, 1941년 개축 이후).

경성미술구락부는 1922년에 설립된 조선 유일의 미술품 경매회사로서

박창훈의 수장품 역시 이곳에서 경매되었다.  

 

 

간송 전형필과 같이 민족문화유산을 지켜야 한다는 투철한 사명감이나 소명의식이 없다면

아무리 많은 수장품을 가지고 있었다 해도 하루아침에 흩어질 수 있음을 박창훈의 예에서

여실히 볼 수 있었다.

이러한 점에서 박창훈은 고미술품 애호취미를 승화시키지 못한 수장가 또는 수장품을 통해

이윤을 취하려 한 일종의 투자가로 평가할 수 있다.

박창훈의 방대한 고미술품 수집은

1930년대에 활성화되었던 서울 미술시장의 극명한 반영이라는 점에 일차적 의미가 있으며,

두 차례에 걸친 수장품 경매처분 과정을 통해

우리나라 근대의 고미술품 유통사에서 수장과 산일이라는 측면에서

일종의 반면교사 역할을 하였다는 점에 의의를 둘 수 있을 것이다.

 

- 김상엽, 문화재청 인천국제공항 문화재감정관실 감정위원

- 문화재청, 문화재칼럼, 2009-10-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