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지(所志)
최근 발견된 ‘포항 중성리 신라비(浦項中城里新羅碑)’는 도로공사 중 발견된 것으로,
자연석 화강암의 한 면에 음각으로 글자를 가득 새겨넣었으니 그 수만 해도 203자 정도이다.
연구 결과에 따르면 비석이 만들어진 시기는 늦어도 지증왕2년(辛巳年, 501)으로 비정될 수 있으니
현존 최고(最古)의 신라비가 된다. 그런데 이 비의 내용이 흥미롭다. (전략)
'爭人은 喙의 評公 斯彌, 沙喙의 夷須 牟旦伐, 喙의 斯利 壹伐과 皮末智,
本波喙의 柴干支와 弗乃 壹伐, 金評 沙干支와 祭智 壹伐이고,
使人은 奈蘇毒智이며, 道使는 喙의 念牟智, 沙喙 鄒須智, 居伐의 壹斯利이다’
라고 하였다.
蘇豆古利村의 仇鄒列支 干支와 沸竹休 壹金知, 那音支村의 卜岳 干支와
走斤 壹金知 등이 世間에 명령한다.
珍伐의 壹은, 엣날에 말하기를 豆智 沙干支宮과 日夫智宮이 빼앗았던 것이라
하였는데, 이제 다시 (그것을) 牟旦伐에게 돌려주어라.
(이에) 喙의 作民 沙干支의 使人 果西牟利가 ‘
만약 後世에 다시 말썽을 일으키는 자가 있으면 重罪를 준다’라고 하였다.
典書인 與牟豆가 (이러한) 연고로 기록한다.
(후략)
-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 『포항중성리신라비』, 2009, 26쪽 -
모단벌(牟旦伐)이라는 인물을 중심으로 일어난 어떤 사건에 대한 판결을 돌에 기록하여 남긴 것은
그 내용을 모든 이에게 알려 시간이 많이 지난 후에라도 모범으로 삼아 경계하고자 한 뜻을 담은 것이다.
1989년에 경북 영일에서 발견된 영일 냉수리 신라비(迎日冷水里新羅碑)에서도
503년 무렵에 진이마촌(珍而麻村)에 사는 절거리(節居利)와 미추(末鄒), 사신지(斯申支) 등이
어떤 재물을 둘러싸고 서로 다투자, 지도로 갈문왕(至都盧葛文王)을 비롯한 7명의 왕들이
전세(前世) 2왕의 교시를 증거로 하여 진이마촌의 어떤 재물을 절거리의 소유라고 결정하고 있다.
이같이 돌〔石〕이라는 영원성을 상징하는 물질에
인간의 삶 속에 들어 있는 갈등과 그 순간을 기록한 것은
아마도 어떤 사건을 단순하게 증거하는 자료로서의 기능에서
한발 더 나아가 통치자들이 생각하는 영원한 경계(警戒)의 의미를 담았을 것이다.
그러나 사회가 복잡해지고, 기록할 수 있는 매체들이 늘어나면서 이같은 의미는 점차 축소되었다.
후대에 오면 경계의 의미는 퇴색하고 어떤 사건을 단순하게 증거하는 자료로서의 기능만이 강조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를 통하여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것은
그 시대를 살았던 이들의 삶의 흔적을 통해 얻을 수 있는 삶의 지혜이다.
그러기에 남겨진 자료들이 의미있는 것이다.
종이로서 남겨진 자료가운데 인간의 삶과 갈등을 보여주는 자료는 소지(所志)가 대표적이다.
이는 문자 그대로 [바라는 바]를 적은 옛문서로서 발괄(白活)이라고도 하는데,
등장(等狀), 단자(單子), 의송(議送) 등 소지류에 속하는 문서들이 많다.
문서의 주인공은 위로는 선비들로부터 아래로는 노비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사람들이었고,
문서의 내용은 생활하는 중에 일어난 크고 작은 일로서 관부의 결정과 도움이 필요한 것들이었다.
소지를 수령이나 관부에 올리면 관에서는 그 내용을 살펴본 뒤 판결을 내리게 되는데,
이를 뎨김[題音] 또는 제사(題辭)라고 하였다.
뎨김은 소지의 왼쪽 아래 여백에 보통 쓰이는데 여백이 모자르면 뒷면에도 쓰이곤 하였다.
이같이 뎨김을 적은 소지는 청원자에게 돌려주어 증거 자료로서 소중히 보관하도록 하였던 것이다.
그래서 고문서가운데 소지는 당시의 사회상을 반영하는 1차자료로서 중요하게 다루어진다.
소지가운데 상당량을 차지하는 것은 토지(土地)와 노비(奴婢) 그리고 산송(山訟) 관련 자료이다.
1354년(공민왕 3) 10월, 탐진(耽津, 지금 전남 강진)에 살았던 학생(學生) 윤단학(尹丹鶴)은
그의 부친인 직장동정(直長同正) 윤광전(尹光琠)에게서
비(婢) 대아지(大阿只)를 상속받고
당시 지방관인 탐진감무(耽津監務)에게 그 사실을 확인하고
인증(認證)하는 입안(立案)을 발급해 줄 것을 요청하였다.
노비 대아지는 본래 윤단학의 외조부인 박씨(朴氏)에게 속하였던
노비 오화이(吾火伊)의 소생이었다.
그녀는 윤단학의 외가로부터 상속되어 해남윤씨문중의 제사를 받들기
위하여[奉祀]를 돕기 위하여 아들에게까지 상속되었던 것이다.
이 소지는 소지(所志) 6장, 입안(立案) 2장 모두 8장으로 된 문서 가운데
하나로서 1755년(영조 20)에 다시 6장을 한 장첩(粧帖)으로 다시 꾸며
만들었다고 한다. 함께 전하는 자료에는 현노비(現奴婢)의 소유자는 물론
보증인(保證人) · 대서인(代書人)의 성명과 수결(手決) 등이 포함되어 있어
이같은 내용을 통하여 고려시대의 노비(奴婢)에 대한 여러 사실을
파악할 수 있고, 또한 당시 사회에서 제사를 받드는 일을 얼마나 중요하게 여겼는지를 알 수 있게 해준다.
그런데 노비 소지 가운데에도 간혹 특별한 사정을 보여주는 자료가 있다.
경북 경주의 강동면(江東面) 유금리(有今里)에 살았던
구명기(具命起)라는 인물은 갑자년(甲子年)에 자신을 노비로 만들려는
양반이 있으니 이를 논죄해달라는 청원을 올리고 있다.
그 내용을 보면 구명기의 부친인 앙아(仰牙)는
본래 권필태(權必泰)의 노자(奴子)였는데
지난 경인년(庚寅年)에 속신(贖身)되어 양민이 되었다고 한다.
그런데 23년이 지난 계축년(癸丑年)에 강서면(江西面) 정혜리(定惠里)에 거주하는 이가(李哥) 양반이
자신을 상전(上典)이라 하며 시비를 따졌으나 승소하였는데,
이번에는 같은 면 인좌동(仁佐同)에 사는 손가(孫哥)라는 양반이 상전이라 칭하고 있으니
손가 양반을 불러 논죄해 달라는 것이다.
이 문서는 비록 관에서 인증한 빗기[斜只]도 없는 형식의 문서이나
노비와 관련된 하나의 일그러진 사회 현실을 보여주고 있다는 점에서 주목되는 자료이다.
노비 내용과 함께 상당한 수량이 존재하는 것은 산송(山訟) 관련 자료이다.
산송은 특히 조선시대에 많이 일어났는데,
다른 가문의 선산에 몰래 부모의 묘자리를 만들거나,
남의 묘자리 주위의 나무를 함부로 베어내는 등
여러 가지 형태의 사건들이 발생하곤 했다.
1608년(선조 41)년 5월 경북 영천에 거주하는 진사(進士) 손흥경(孫興慶)은
순찰사에게 산송에 대한 청원을 하였다.
손흥경의 5대조인 호조참의 손등(孫登)의 묘소 부근에
정대연(鄭大淵)이 파굴투장(掘破偸葬)하여 일찍이 이미 상주관(尙州官)에
상소하여 이겼고, 이에 따라 정대연도 수 개월 내에 이장(移葬)하겠다고
다짐[?音]하여 소송이 일단락 지어졌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를 지키지 않고 오히려 정대연이 팔십 노모를 부추겨
원조(遠祖)의 묘소라고 우기고,
손등의 묘소를 무주고총(無主古塚)이라 하는 등 허황한 모계를 꾸미니 이를 해결해 달라는 것이다.
이같은 산송에 대한 문제는 조선시대에서 항상 중요한 문제로
인식되었다. 유교적 인식의 틀에서 상제례는 인간이 인간답게 사는
가장 기본적인 의례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때로는 소지의 뒷면에 묘소와 관련된 그림,
곧 도형(圖形)을 그려넣어 이를 자료로서 남기곤 하였다.
장서각에 전하는 최성관(崔星觀) 모친의 이장(移葬) 도형(圖形)은
독립적인 자료로 존재하는 형태로서,
이곳에는 파묘(破墓)와 이장묘(移葬墓)
그리고 주변에 위치한 분묘의 숫자와 분묘의 주인공들을
상세하게 기록하고 있어
당시 상례와 관련된 인간사의 복잡함이 심하였음을 짐작하게 한다.
그런데 이같이 중요했던 산송에는 간혹 인간적으로 불가피해서 이루어지는 경우도 종종 있었다.
충청도 남포현에서 살았던 조병덕(趙秉悳)의 편지글 가운데에는
아내가 죽은 후에 장지를 정하는 과정에 있었던 특별한 사정이 적혀 있다.
“죽은 처를 장례한 곳은 홍남원가(洪南原家) 농막 뒤 산기슭입니다.
당초에 본 고을 유곡(柳谷)에 묻으려고 거기에 맞추어 모든 준비를 하며
지석(誌石)까지 새겨놓고 다른 염려는 없으리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금장자 (禁葬者)여러 명이 집에 와사 소란을 피웠습니다.
장례일이 며칠 밖에 남지 않았으나, 하는 수 없이 유곡을 포기했습니다.
선산 아래는 착수할 만한 빈 자리가 없습니다.
화산(花山)으로 간 것은 그들이 장사를 팔려 한다는 소문을 들었기 때문이며
그 장사는 비어서 아무도 없었고, 그 산 또한 아이 무덤 하나 없었습니다.
그래서 언젠가 그 집을 사서 정리하면 된다고 생각하고 그런 계획을 하게 된 것이지,
그 땅을 탐내어 그런 것은 아닙니다. 사리로 보면 그 땅을 매매한 후 장례를 치러야 했으나,
장일이 이틀밖에 남지 않았고 또 엄동(嚴冬)이라 쫓겨서 할 수 없이 그렇게 된 것이지,
당초의 본 뜻은 아니었습니다.”
(하영휘, 『양반의 사생활』, 푸른 역사, 2008, 175쪽)
이 편지글은 유교적 ‘예(禮)’의 질서 속에서 양반가에 속한 한 가문이 처한 어려운 형편을 설명해주고 있다.
예를 갖추지 못한 이른 장례를 갈장(渴葬), 늦은 장례를 만장(慢葬)이라 하였던 당시의 현실 속에서
어쩔 수 없는 투장(偸葬)을 선택하고 그때문 산송까지 치러야했던 이 사건은
결국 조병덕 가문의 항복으로 끝을 맺었다.
우리 주변에 남겨진 고문서는 인간 사회의 여러 단면을 보여주고 있다.
그 가운데 소지류는 특히 갈등과 바람(願)의 현장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더욱 생생한 자료임에는 틀림없다.
그러나 표면적인 사실을 읽어내는 노력 못지않게 주변의 자료를 보완하여
분쟁 당사자들의 속마음과 어느 쪽이 옳았는가를 읽어내려는 모습도 못지않게 중요하다.
그러한 태도가 인간사 다툼의 시작과 끝을 전하는 소지류 고문서를 대하는 옳은 태도라 생각된다.
- 정제규, 문화재청 청주국제공항 문화재감정관실 감정위원
- 문화재청, 문화재칼럼, 2009-09-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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