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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잠제(先蠶祭)와 친잠례(親蠶禮)

Gijuzzang Dream 2009. 9. 14. 14:42

 

 

 

 

 

 

 

 선잠제(先蠶祭)와 친잠례(親蠶禮)

 

 

 

 

 

잠실(蠶室)이란 명칭은 <예기(禮記)>에서 발견되는데

중국에서는 이미 춘추전국시대 이전에 쓰여진 것으로 보인다.

<예기> ‘제의편(祭儀篇)’에

“3월 초하루에 天子의 세 부인과 제후의 여관(女官) 중에서 吉한 자를 가려 잠실에 들어간다.”는 구절,

또한 “예부터 천자와 제후는 공상(公桑)과 잠실(蠶室)을 갖고 있는데 이를 개울 가까운 곳에 만들되,

宮의 높이를 한 길과 3척 정도로 쌓고 가시 담을 둘러 밖으로 잠그게 했다.”라고 서술되어 있다.

우리나라의 잠실도 이들 문헌에서 인용해 온 것으로 추측된다.

 

선잠제(先蠶祭)는 친잠례(親蠶禮)와 함께 신하와 백성들에게 모범을 보이고,

양잠의 풍요를 기원하는 의식으로

역대 왕들의 근잠(勤蠶)정책의 상징이며 양잠 장려에 큰 역할을 담당했다.

 

이 제사는 일찍이 중국의 삼황오제(三皇五帝) 중에

황제 헌원씨(軒轅氏)의 妃인 잠신(蠶神) 서릉씨(西陵氏)를 받들어

그 해의 양잠이 풍년이 되도록 기원하는 것이었다.

서릉씨에게 제사지내는 것은 처음으로 민간에게 누에치는 법과 실켜는 법을 알리고

의복에 비단실을 사용하도록 가르쳤기 때문이라 한다.

이로 인하여 '신농씨(神農氏)'를 선농(先農)이라 하고, '서릉씨(西陵氏)'를 선잠(先蠶)이라 칭하고 있다.

 

 

<증보문헌비고>에 의하면 우리나라는 고려 때부터 선잠제를 지낸 것으로 나타난다.

또한 이 선잠의식은 중국 漢나라 제도를 따르고, 친잠의식은 宋나라 제도를 본받은 것으로 되어 있다.

즉 한나라 제도는 춘잠(春蠶)이 나면 황후가 원중(苑中)의 잠실에 친잠(親蠶)하게 되어 있고

궁중 후원에 단(壇)을 쌓는다고 하였으며,

송나라 제도에는 선잠단(先蠶壇) 곁에 잠실(蠶室)을 짓고

그 옆에 별도로 중옥전(中屋殿)을 지어 친잠하는 곳으로 삼았기 때문에 이를 본 땄다.

 

<친잠의궤(親蠶儀軌)>에 의하면 선잠제와 친잠례는 뽕잎이 나기 시작하는 3월에 거행했는데,

선잠제를 먼저 지내고 그 뒤에 친잠제를 행하는 것으로 나타나며,

조선 초 성종 때에는 함께 거행하기도 하였다.

 

고려 때의 선잠의식을 살펴보면,

매년 늦은 봄의 길한 사일(巳日)에 선잠 서릉씨의 신위(神位)를 모시고 제사를 지내는데

희생(犧牲)은 돼지 1마리를 쓰며, 폐백은 1丈8척의 검은 빛깔을 사용하며

의식은 선농제(先農祭)와 유사하였다.

 

당시 선잠단의 규모는 방(方)이 2丈이고, 높이가 5척으로서

사방으로 섬돌을 나오게 만들되 남쪽으로 나온 섬돌은 사방을 깊이 파서 물건을 둘 수 있게 하였다.

(<증보문헌비고> 권62, 정종 2년 3월 己巳조)

 

조선 초의 선잠제는 정종 2년(1400) 3월에 최초로 지냈다.(<정종실록>권3, 정종 2년 3월 己巳조)>

그 후 태종 11년(1411) 8월에는 선잠제를 지내는 폐백(幣帛)의 제도를 정하고,

2년 뒤 태종 13년 4월에는 제사의 제도를 정하면서

종묘 · 사직 · 별묘(別廟)의 제사를 대사(大祀)로,

선잠제를 선농제와 같이 중사(中祀)로 하고,

그 밖에 사한(司寒) · 마조(馬祖) 등의 제사는 소사(小祀)로 정했던 만큼

선잠제를 얼마나 중시했는지 알 수 있다.

 

이해 6월에는 선잠단 등의 축조 형식이 옛날 법식과 다르므로

다시 쌓기로 하는 외에 신묘(神廟)와 제기고(祭器庫), 제관(祭官)의 재소(齋所) 등을 신축하기로 하였으나

규격에 맞게 개축된 것은 세종 12년(1430)에 이르러서이다.

뿐만 아니라 신묘, 제기고, 재소 등의 신축도 지연되어

태종 14년 5월에 왕이 이응(李膺)이 제사가 끝난 뒤 전사사(典祀寺)의 창고에 보관한다고

대답한 것으로 보아 이들 건물이 건축되지 않은 것이 확실하다.

 

선잠단의 위치는 동소문 밖 사한이(沙閑伊)에 있다고

<세종실록>지리지 경도(京都) 한성부조(漢城府條)에 표기되어 있고,

<동국여지비고> 권1 경도 단묘조(壇廟條)에는 선잠단이 동교(東郊) 혜화문 밖에 있다고 하였으니,

이는 현재 성북구 성북동 64번지의 1호에 위치한 선잠단지(先蠶壇址, 사적 제83호)를 지칭하는 것이다.

성현의 <용재총화> 권10에는 3월에 풍악을 써서 제사를 지낸다고 적고 있다.

 

선잠단의 제의식(祭儀式)은 세종 때 제정되었는데

이 의식은 <춘관통고(春官通考)> 권41과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 권1에도 소개되어 있다.

  

우선 선잠제 의식은 서운관(書雲觀)에서 1개월 전에 날짜를 잡아 예조(禮曹)에 통보하면

예조가 왕에게 보고해서 준비시켰다.

이 제사에 참여할 집사관(執事官)은

5일 전부터 몸을 깨끗이 하고, 술을 삼가며 음식을 가려서 먹는다.

그리고 문상(問喪)이나 문병(問病)하지 않으며, 더럽고 악한 일에 참여할 수 없었다.

선잠제는 선농제와 같이 국왕이 직접 제사를 주관하지 않았으나

향축(香祝)을 전하기도 하고, 제사가 끝난 후 집사관의 노고를 위로하기 위하여 주연을 베풀었다.

 

성종 8년(1477) 3월에 “오례의에 의하면 늦은 봄의 길한 사일(巳日)에 선잠제를 지낸다고 했으나

오는 3월초 2일은 바로 길사일(吉巳日)이지만 뽕잎이 아직 싹트지 않았으니,

청컨대 3월 안의 사일(巳日)을 가려 행하게 하소서” 하니 왕이 그대로 따랐다.

 따라서 선잠제는 절기의 이르고 늦음에 따라 융통성을 두었음을 알 수 있다.

 

한편 선잠제 신위는

대한제국말 순종 2년(1908) 7월에 선농단의 신위와 함께 사직단(社稷壇)으로 옮겨 배향했고,

그 후 773평의 이 선잠단 터는 1939년 10월18일에 일제에 의해 보물 제117호로 한 때 지정되었다.

이 터는 개인에게 불하되었다가 광복 후 국유로 이속시켜

1961년 11월10일 사적으로 지정되어 오늘에 이르렀다.

 

선잠단의 모습은 일제 때 석단(石壇)과 곡장(曲墻)이 훼손되어 원래 모습은 알 수 가 없으나

정확한 규모는 아니지만 이를 상상하여 나타내 보면 다음 도면과 같다.

 

4尺

 

 

 

 

 

   

 

 

  ←   8尺  

 

16尺

 

 

16尺

 

 

 

 

 

 

 

  ←   8尺

 

 

 

12尺

 

 

40尺

 

 

 

 

 

 

 

 

 

 

 

 

 

 

 ←   8尺

 

 <선잠단 상상도>

 

 

 

선잠제 외에도 백성들에게 양잠을 장려하고 시범을 보이는 왕실의 권잠의식(勸蠶儀式)으로

'친잠례(親蠶禮)‘가 있었다.

 

이 의식은 궁내에서 왕비가 직접 양잠을 하여 장려함으로써

민부국강(民富國强)의 계기를 마련하고자 하였다.

즉 채상례(採桑禮)나 수견례(受繭禮), 수견식(受繭式)이라는 것도 모두 친잠례에 속하는 것이다.

 

“제후(諸侯)의 부인이 북교(北郊)에서 친잠(親蠶)하여 면복(冕服)을 이바지한다”라는 말이

《증보문헌비고》권62 禮考9 諸壇2 선잠조(先蠶條)에 있지만

조선초에 친잠례를 거행한 것은 태종 11년(1411)부터라고 할 수 있다.

물론 이보다 2년 앞서 태종 9년에 궁내에 뽕나무를 심었던 기록이 있으므로

이때부터 친잠례가 시작된 것으로 추정되지만 이를 확인할 수는 없다.

태종 11년에 “옛날에는 후부인(后夫人) 친잠(親蠶)의 禮가 있으니 앞으로는

이를 궁중에서 행하도록 하라”는 왕명이 있었으므로 이때 친잠례가 시작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세종 8년(1426)의 친잠 때에는

①친잠의 制例 ②뽕잎이 덜 피어났을 때 누에의 소잠(掃蠶)을 연기하는 일 ③왕비 출입시에 주악(奏樂)

④수상기(受桑器)의 착색(着色) 및 어조(御釣) 등의 개조 ⑤백관(百官)의 진열(陳列)에 관해서 제정했다.

 

그리고 세종 24년(1442) 왕비가 왕세자빈 및 내외명부를 거느리고

채상단(採桑壇)에서 친잠례를 행했는데 이를 마치면 백관들이 진하(陳賀)하였다.

 

성종은 역대왕 중에서 친잠례를 빈번하게 거행한 국왕으로 알려져 있다.

성종 7년(1476) 3월에 친잠례를 행하고 나서

이해 9월에 ‘친잠응행절목(親蠶應行節目)’을 논의하기 시작하여

그 이듬해 윤2월에 우승지 임사홍(任士洪), 예조참판 이극돈(李克墩)이 친잠의(親蠶儀)를 제정했다.

 

‘친잠응행절목’이 제정되고 나서 성종 8년 3월에 친잠례를 행하게 되자

선공감(繕工監)에서는 이에 앞서 채상단(採桑壇)을 창덕궁 후원에 쌓았다.

이에 길한 巳日을 가려 왕비가 내외명부를 거느리고 채상단에 이르러 친잠례를 행한 뒤

선정전(宣政殿)에 나아가 내외명부의 하례를 받았으며,

백관들은 영영문(迎英門) 밖에서 전(箋)을 올려 진하했다.

이어서 성종은 하교하기를,

 

백성의 의식(衣食)의 근원은 농상(農桑)에 있는데

역대왕들이 농사일을 권장하는 것이 겨우 문서만 갖추었을 뿐 실제로 행하지 않았다. (중략)

그래서 예관(禮官)에게 명하여 옛 법도(法度)를 상고하여 의식을 만들고

왕비는 이번에 내외명부를 거느리고 다시 친잠의 예를 행했다. (중략)

백성이 보고 느낀 바가 있어서 공역(功役)에 나가기를 즐겨하여 농상(農桑)에 진력할 수 있고,

따라서 국가에는 재물이 넉넉할 것이니,

그리되면 어느 집이나 의식이 풍족하여 태평의 교화를 이룰 것이다. (중략)

누에를 많이 길러서 점차 옷과 솜이 넉넉하게 되고 항산(恒産)이 풍족하게 되면,

예악(禮樂)을 일으킬 수 있어 백성이 인수(仁壽)하는 지경에 오를 것이고

국가는 지치(至治)의 높은 수준에 이를 것이다.

고 하였다.

 

한편 친잠례 때에는 왕비는 국의(菊衣)를 입고 수식(首飾)을 가(加)하게 하였으며

내외명부들은 푸른색 옷보다는 아청(鴉靑)을 쓰도록 했다.

친잠례를 마친 당일에 성종은 의정부, 육조당상, 선공감제조 등의 신하들을 대궐 뜰에 모이게 해서

주악을 내리고 그 이튿날 왕비는 선정전에 나아가 내외명부를 모아서 물건을 차등있게 하사했다.

그 뒤 성종 24년(1493) 3월에도 왕세자빈과 내외명부를 거느리고 친잠례를 행하였는데

역시 국왕은 참여하지 않았다.

이어서 왕세자와 백관들이 진하하고 친잠할 때 뽕을 딴 채상녀(採桑女)와 잠모(蠶母)에게

면포를 각각 1필씩 하사했다.

 

성종 때의 친잠의식을 보면,

 

집사의 채상(採桑)은 1, 2, 3품의 내외명부에서 1-2명이 선출되었고,

종채상(從採桑)에는 외명부로서 1-3품까지로 옹주 및 諸宗宰와 각 승지의 부인이었으며,

상의(尙儀)ㆍ상궁(尙宮)ㆍ상기(尙記)ㆍ상전(尙傳)ㆍ상공(尙功)ㆍ전제(典製)가 각 1인씩이고

전빈(典賓) 4인은 내외명부와 제잠실(諸蠶室)ㆍ집구광(執鉤筐)을 각각 인도하였다.

외명부의 채상(採桑)은 시녀를 시켜 갈고리(鉤)와 바구니(筐)를 교자에 싣고 친잠소에 나아가

상전에게 주어 갈고리와 바구니를 잡은 자에게 준다.

왕비가 수레를 타고 나오면 내명부가 수행한다.

왕비가 수레에서 내려 연(輦)을 타면 집사자가 갈고리와 바구니를 연에 싣고 행유(行帷)로 가서

내명부는 교자를 타고 따른다. 이어서 채상(採桑)에 응하는 시녀가 갈리며 내명부는 교자에 싣는다.

친잠소의 단(壇) 동문 밖에 이르러 왕비가 연에서 내려 채상위(採桑位)에 나아가 동향(東向)하여 서면,

상공(尙功)은 갈고리를 받들어 올리고 왕비는 갈고리를 받아 채상하고,

전제(典製)는 바구니를 받들어 뽕잎을 받는다.

왕비가 채상한 다음에 내외명부도 차례로 채상한다.

내외명부가 잠실로 가고 상공(尙功)은 뽕잎을 잠모에게 주면

잠모는 뽕잎을 받아 썰어서 내명부에게 주어 누에를 먹이고,

잠박(蠶萡)에 모두 뿌린 뒤 왕비는 환궁한다.

 

그 뒤 연산군 10년 3월에 왕비가 내외명부를 거느리고 친잠례를 행한 것으로 나타나는데

대체로 친잠례는 성종, 중종, 선조 재위 중에 빈번하게 행하였다.

 

중종 8년(1513) 3월과 24년(1529) 2월에 친잠례를 거행하였다.

중종 8년 3월의 친잠례를 행할 때 중종은,

 

예로부터 왕은 친경(親耕)하였고, 왕후는 친잠을 하였다.

이는 백성들의 의식이 되는 근본을 중히 여겨 모든 사람들의 솔선수범이 되려는 까닭이다. (중략)

즉위한 지 8년이 지났으나 백성이 점점 게을러져 본업을 버리고 다른 일을 하며 (중략)

바라건대 백성이 분발하여 본업에 종사하도록 하겠다.

각 고을의 수령은 널리 마을사람들을 깨우쳐 논밭을 갈지 않으며

방에서는 베를 짜지 않는 여자가 없도록 하여,

곡식과 옷감이 나날이 늘어나면 이거야말로 자랑스럽지 않은가.

라고 친잠의식을 강조하였다.

 

중종 8년 4월에 친잠에서 생산한 고치를 의정부와 승정원에 나누어 주면서,

중종은 “古書에 보니 궁중에서 양잠하여 모든 귀신(貴臣)에게 송사(頌賜)하는데

이는 근본을 힘쓰는 뜻이다.

근자에 내전에서 양잠한 고치 약간을 정부(政府, 의정부)와 정원(政院, 승정원)에 내려줌은

내가 근본을 힘쓰는 뜻과 궁중에서 양잠한 功을 보인 것이다”라고 하였으니

양잠에 주력한 중종의 일면을 알 수 있다.

중종 24년 2월에는 친잠례 의식을 행하기 전에 친잠단의 터를 정하도록 명하자

예조에서 고단(古壇)을 보고 조금 이전하여 신축하였다.

 

그런데 선조 5년(1572) 3월에 친잠례를 행한 이후에는 이 의식은 200여 년간 중단된 것으로 보인다.

즉 영조 43년(1767) 1월에 친잠례와 선잠제를 부활하기로 한 뒤

춘추관에 명하여 강화도에 소장되어 있는 실록에서 이 제도의 옛 일을 고찰하게 하였다.

이리하여 ‘친잠의궤(親蠶儀軌)’가 제정되었다.

이 의궤는 이해 3월에 친잠례를 정성왕후(貞聖王后)가 지냈던 제반 절차와 소용되는 집기 등에 관해

예조에서 기록한 것으로 현재 규장각에 소장되어 있다.

그리고 영조 46년(1770) 친히 경복궁 친잠단에 ‘정해친잠(丁亥親蠶)’이라고 쓴 비석을 세웠다.

 

현 창덕궁 후원 주합루 서쪽에는 친잠실이 남아있는데

1925년 일제 때 순종왕후 윤비가 전례에 따라 친잠례를 행한 적도 있다.

 

 

친잠례는 조선시대에 국가적인 행사였다.

성종 8년(1477) 윤2월에 예조에서,

 

왕비께서 친잠(親蠶)하시는 것은 근래에 없었던 전례이고,

일국의 성사이니 친잠하시는 날 백관이 왕과 왕비에게 전(箋)을 올려 진하하고

외방에서도 왕에게 또한 전(箋)을 올려 진하하는 것이 어떻습니까.

 

라고 계(啓)하자 성종이 그대로 따른 데에서도 친잠례가 국가적인 행사임을 알 수 있다.

 

 

(1) 잠서(蠶書)의 간행 

 

《농상집요(農桑輯要)》

: 元의 세조(재위 1264-1294)가 사농사(司農司)란 관서에 명하여 편찬된 것으로

이 책이 고려말에 元에 갔던 행촌 이암(杏村 李嵓)이 얻어왔던 것으로 추정된다.

 

조선초《농상집요(農桑輯要)》중에서 잠업(蠶業) 내용만을 뽑아

이를 발간하거나 이두 및 한글로 번역한 것이 주종을 이룬다.

 

태종 14년(1414) 112월 한상덕의 상계(上啓)로 이행, 곽존중에게

《농상집요(農桑輯要)》를 번역하도록 명했는데

모두 번역하지 않고 양잠부분의 일부를 간추려 6개월 후에《양잠방(養蠶方)》을 펴냈다.

당시 승지 한상덕은 미흡하다고 여겨 태종 15년 5월에《양잠경험촬요(養蠶經驗撮要)》를 간행했다.

‘촬요(撮要)’는 ‘빼내고 요약한 것’으로

《농상집요(農桑輯要)》의 내용을 일부 발췌하여 이두로 번역한 것이다.

 

《양잠경험촬요》는 경주부윤 윤곤 등의 추진으로 경주에서 출간되어

오랫동안 경주관아에 수장되었다가 오늘날까지 전래되어 오고 있다.

이두로 번역되어 지방의 유력자인 유향품관(留鄕品官)이나 잠실의 책임자인 감고(監考) 등을 대상으로

간행한 것이다.

 

 

(2) 양잠(養蠶)의 보급

 

《농상집요(農桑輯要)》에 수록된 양잠기술을 보면

①재상(栽桑) ②양잠(養蠶) ③제사(製絲)의 3분야로 나눌 수 있다.

 

재상(栽桑)기술은

오디씨를 채취하고 심는 방법[種椹], 이식방법[移栽], 휘묻이[壓條], 가지치기[栽條] 등이 있으며,

 

양잠기술에는

고치 고르는 것부터 시작해서 누에치는 일반적인 기술이 비교적 과학적으로 서술되어 있다.

 

또 제사(製絲)기술에는

실켜는 방법[繰絲], 고치 삶는 법[蒸餾繭法] 등이 소개되어 있어서

전일의 양잠기술에 비하면 획기적인 것이었다.

 

고려말에 성리학을 도입하여 조선 건국에 주동역할을 담당했던 신흥사대부들은

자신들의 기반 안정을 위해서도 유교적 민본(民本)을 내세우게 되었으며,

이로 인해 농업과 잠업증산에 많은 관심을 갖고 권잠(勸蠶)정책에 적극적이었다.

 

중종 10년(1551) 이후로 사림계가 정치적 우위를 획득하면서 여씨향약의 보급운동에 힘썼다.

이는 15세기의 경제변동에 대응하여 사회적으로 향촌사회의 재구성을 모색하는 것으로

이를 추진하려는 사림계는 대부분 지방출신의 지식인으로서

자신들의 중소지주적 기반의 안정을 위해 지방 소농민들의 경제적, 사회적 안정을 필요로 했다.

그리하여 중종 12년(1517)과 13년에 <농상교서(農桑敎書)>가 반포되었으며

양잠을 통해 농민의 경제력을 향상시키려고 했다.

이 당시 향약보급운동을 주도했던 사림세력인 김안국(金安國)은 <언해잠서(諺解蠶書)>를 발간하여

농민에게 보급함으로써 적극적인 권잠정책을 취하게 된다.

 

한편 16세기의 사회현상으로 사치풍조가 만연되었는데 특히 의복의 사치가 두드러졌다.

15세기 후반의 성종 때부터 심화되기 시작한 이 현상은 연산군 대에 오면 절정에 오르게 되어

관직에 있는 자는 접자손(菨子孫)을 제외하고 모두 사라능단을 입도록 하는 조치가 취해져서

조선 초의 검소한 사회기풍은 크게 변모하게 되었다.

당시의 상류층은 중국의 명주를 애용했고, 서민들은 견직기술의 미숙으로 굵은 명주로 옷을 해 입었다.

이러한 사회 분위기는 중국 비단의 사무역으로 인하여 중국 명주가 많이 나돌게 됨으로써 야기된 것이고,

그 결과 사치풍조가 조장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이같은 조치로 비단의 수요가 급증하자

세조대와 성종대처럼 연산군은 부경사신(赴京使臣)에게 능라장(綾羅匠)을 함께 보내서

비단의 국내생산을 위해 염색, 직조기술을 도입하고

중앙에는 통직(通織)이란 기구를 두어 직조(織造)를 전담하게 하는 동시에

중앙의 능라장을 이용하여 전국의 직조기술을 보급시켰다.

 

특히 16세기 연산군 대에 이르러

관장제(官匠制)수공업이 무너지고 사장제(私匠制)수공업으로 바뀌게 되었는데

그 원인은 역제(役制)의 포납제(布納制)로의 변화와 국가의 재정적인 부족도 있었지만

무엇보다도 일반인들의 수공업 제품수요가 증가된 것을 빼놓을 수 없을 것이다.

즉 견직물의 수요 증대는 국가통제의 경공장(京工匠)에 소속된 2백명의 능라장 · 방직장(紡織匠) 등이

관장(官匠)을 기피하고 대부분 사장(私匠)으로서 활동하게 된 것이다.

당시 능라장과 방직장은 모두 경공장으로 등록되어

상의원(尙衣院)과 제용감(濟用監)에 소속되어 있으면서 특수계층을 위한 비단 등을 짜고 있었다.

 

이와 같은 사회 · 경제의 변동은 견직물의 수요를 증대시켜

전국적인 유통망이 형성되고 견직물의 상품화가 촉진되면서

농민에게 양잠은 더 이상 국가에 대한 공물(貢物)로만 인식되지 않았기에 양잠열이 고조되었던 것이다.

 

 

(3) 견직(絹織)기술

 

<후한서> 동이전 예조(濊條)에 “삼을 심고 누에를 길러 옷감을 짰다”라는 기록이 있고,

<삼국지>위지 동이전 마한조에도 이와 유사한 기록이 있는 것으로 미루어

적어도 삼국 초기인 2-3세기 이전에 우리 민족은 베나 비단을 짜 입었음을 알 수 있다.

 

삼국시대에는 사회적 계층의 분화에 따라 서민들은 베옷을 주로 입었으며

상류층에서는 명주옷을 애용하게 되었다.

통일신라 이후에는 사치성향이 높아짐에 따라 명주를 짜는 기술도 발전하여

비단도 수(繡) · 금(錦) · 라(羅) · 능(綾)의 4종류로 나누어지고

여기에 무늬를 입히게 되어 대화어금(大花魚錦) · 조하금(朝霞錦) · 소화어금(小花魚錦) 등

문양의 이름이 생겨났으며, 비단은 唐에 보내는 주요 공물(貢物)로 되었다.

당시 신라에서는 비단의 생산, 염색, 가공 등을 담당하는 조하방(朝霞房) · 금전(錦典) · 마전(麻典) ·

기전(綺典) · 모전(毛典) · 염관(染官) · 소방전(蘇芳典) · 찬염전(攢染典) 등이 별도로 설치되었다.

 

고려시대에는 견직기술이 더욱 계승 발전되어

인종 대에는 비단을 생산하는 잡직서(雜織署)와 염색을 담당하는 도염부(都染部)를 두었다가

뒤에 직염국(織染局)으로 통합하고 각 지방에는 잡직갑방(雜織甲坊)이라는 직조공장을 두었다.

또한 모시 짜는 기술도 발달해서

중국에서 ‘고려직문저포(高麗織紋苧布)’라는 칭호를 얻었을 정도로 유명했다.

 

그런데 조선시대에 들어와서 견직기술이 전시대에 비해서 침체되었던 것은

여러 가지 원인이 있겠지만 특히 제사공정(製絲工程)의 졸렬을 들 수 있다.

이는 조사(繰絲)에 있어서 조악한 방법을 개선하지 않고 답습해 왔으며,

누에고치의 선별을 제대로 못한데다가 제사기구(製絲器具)조차 개량되지 않은 관계로

견직이 조악하였을 뿐만 아니라 염색기술도 개선되지 못했다.

 

중종 11년의 기록에 의하면

“사상(私商)들이 사무역(私貿易)을 통하여 무역하는 물품은 사라능단과 같은 채단(彩段) 뿐만 아니라,

백사(白絲)도 다량 무매(貿買)하여 염색하고 있으며 사대부가에서도 능단을 짠다”고 하였다.

이는 국내의 견직물 수요가 공급을 능가하여

중국으로부터 사무역을 통해 사라능단과 같은 채단을 들여오게 되었다고도 볼 수 있고,

다른 한편으로는 국내의 채단 질이 뒤떨어져 중국의 능단류의 선호도가 높았다는 것을 반증할 수도 있다.

그러나 지방에 따라서는 우수한 견직물이 생산되었으니

평안도의 영변, 성천과 호남의 나주에서 생산된 유문주(有文紬)와 합사주(合絲紬)가 유명하였다.

 

 

(4) 뽕나무 재식(栽植)과 잠실(蠶室)

 

잠업이 성하기 위해서는 국가의 강력한 권잠정책이 있어야 하며

양잠기술의 개발과 뽕나무 재식(栽植)이 뒤따라야 하고,

타 산업에 비해 소득이 높아야 농민들이 적극적으로 종사하게 된다.

 

조선왕조 개창 후 역대 왕들은 침체한 잠업을 국가적인 산업으로 육성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우선 태조는 <종상지법(種桑之法)>을 제정하여 민호(民戶)를 인정(人丁)의 다과(多寡)에 따라

대호(大戶) · 중호(中戶) · 소호(小戶)로 구분하여 뽕나무 재식을 의무화했고,

정종은 조선개국 이후 최초로 선잠제(先蠶祭)를 지냈다.

태종은 양잠기술 보급의 일환으로

국립양잠소격인 잠실도회(蠶室都會)를 5개도에 1개소씩 설치, 운영하였고

중국의 농서인 《농상집요(農桑輯要)》를 일반인들이 읽을 수 있도록 이두로 번역, 보급시켰으며

‘공상잠실법(公桑蠶室法)’을 제정하기도 했다.

 

세종은 잠실을 8도로 확장, 설치하고 8년에는 서울지역에도 잠실을 설치했다.

그 뒤 문종은 각 司로 하여금 잠실용으로 채소밭에 뽕나무 100주씩 심게 하고,

밤섬(栗島)을 뽕나무 재배단지로 지정했다.

 

단종은 각 잠실의 잠종(蠶種)을 각 읍에 배포하게 하고

뽕나무를 빈터나 도로 양편을 이용하여 심도록 명했다.

 

세조는 태조 때와 달리 민호를 5등급으로 나누어 뽕나무를 각각 의무적으로 심게 하는 한편

뽕나무 묘목을 각 관사(官司)에 나누어주어 재식(栽植)하게 하는 외에

‘양잠조건’을 제정함으로써 양잠정책에 강한 의지를 나타냈다.

그리고 경기, 함경도를 제외한 각 도의 읍마다 잠실 설치를 의무화하고

한글로 쓴 《언해잠서(諺解蠶書)》등 양잠서적을 편찬했다.

 

성종은 잠실에서 생산한 고치의 과다를 가려 상벌을 내리고 한강 남쪽에 신잠실(新蠶室)을 설치했다.

또한 뽕나무 재식(栽植)의 시범을 보이기 위해 매년 56개 중앙관사를 두 편으로 나누어

밤섬에서 뽕나무 재식경진대회를 개최하였다.

그 외에도 성종은 뽕나무 재식에 주력하기 위해 ‘상목배양절목(桑木培養節目)’을 제정했는데

이 내용은《경국대전》에 그대로 수록되었다.

성종의 재위 중에는 민가의 양잠열이 왕성한 반면 잠실의 폐해가 드러나기 시작하여,

성종 18년에 이를 정파(停罷)하였다.

그렇지만 성종은 왕비가 양잠의 모범을 보이는 친잠례(親蠶禮)를 시작하여

국가적인 행사로 자리 잡게 했다.

 

중종은 연산군 때의 폐단을 개혁하기 위하여 서울의 동서잠실을 다시 설치하고,

지방의 잠실도 일부 복설하는 한편 친잠례를 행하였다.

또한 농업에 힘쓰면서 잠업을 발달시켜 농민의 경제력을 향상시키기 위해

중종 12년과 13년에 ‘농상교서(農桑敎書)’를 발표했다.

 

‘수령칠사(守令七事)’ 중에도 농상성(農桑盛)이 포함되어 있지만

조선 초부터 역대 왕들은 위민정책의 일환으로 양잠에 불가결한 뽕나무 재식에 주력하였다.

 

태조는 첫 봄에 뽕나무를 심고, 5월에는 뽕나무 열매를 심도록 하는 등

‘종상지법(種桑之法)’을 마련하였으며,

태종은 각 호마다 뽕나무 10주가 미달하면 저화(楮貨) 1장(張)씩을 벌금으로 부과하는

‘공상잠실법(公桑蠶室法)’을 제정하였다.

 

조선시대에는 뽕나무가 부족하여 산뽕나무(山桑)를 비롯하여 들에 자라는 뽕나무도 모두 이용하였다.

이리하여 태종 때는 각 도에 山桑을 심어서 무성해진 뒤에 잠실을 설치하도록 명하기도 하였다.

 

뽕나무 재식에 주력하는 정책은 계속 이어져

세종은 경복궁, 창덕궁에 많은 뽕나무를 심은 뒤 누에를 기르게 했고,

문종은 각사(各司)는 의무적으로 잠실용 뽕나무로 채전(菜田)에 100주씩 심게 했다.

세조 이후부터는 종래까지 잠실용 뽕나무 재식정책에서

일반 농가의 수요를 위한 뽕나무 재식정책으로 바뀌게 되었다.

 

이처럼 조선왕조는 개국 이후 역대 왕들이 양잠을 권장하기 위해

뽕나무 재식정책을 강력하게 추진함으로써

서울의 밤섬과 東西잠실, 新잠실 부근 및 각 지방의 잠실 부근 등 곳곳에 뽕나무숲이 조성되었지만

양잠농가의 확산으로 뽕잎의 부족현상을 나타냈다.

 

잠실 설치의 목적은 일반 백성들에게 새로운 양잠법을 습득시켜 잠업을 보급하는 데에 있었고,

차츰 일반농가에 잠종(蠶種)이나 뽕나무 묘목을 길러 나누어주는 역할로 바뀌고,

민폐를 끼치는 사례가 빈번해졌다.

 

잠실의 운영은 초기에 ‘사인(使人)’ ‘채방사(採訪使)’ ‘차사(差使)’ 등의 명칭으로

중앙에서 감독관이 파견되었는데 세종 때는 일시 한량(閑良)에게 맡기기도 하였다.

잠실의 운영은 초기에 양민 40여 명을 동원하였으나

각사와 혁파사사노비(革罷寺私奴婢)들로 바꾸고

이들을 중앙에 와서 일하는 선상(選上)과 그 밖의 공역(貢役)을 면제시켰다.

 

서울 지역의 잠실에는 조관(朝官)과 환관(宦官)을 배치하여 관리하게 했다.

즉 내잠실(內蠶室)과 아차산 잠실에는 2명의 환관이 배치되고 서잠실에는 별좌(別坐) 2명이 소속되었다. 또한 잠실의 능률을 높이기 위해 잠실마다 고치의 생산량을 규정하고,

이 생산량이 초과되면 감고(監考)의 경우에는 현직으로 채용하였으며

생산량이 미달되면 그 책임을 추궁하는 신상필벌제(信賞必罰制)를 적용했다.

 

한편 잠실로 인해서 민폐가 발생한 주요 원인은

잠실 주변의 공상(公桑)이 부족하여 할당된 고치생산량을 채우기 위해

민상(民桑)을 채취해 오는 일이 잦았던 것에서 찾을 수 있다.

이밖에도 잠실에 동원되는 역(役) 부담으로 인하여 민폐가 두드러지자

단종 때 잠실이 일시 폐지되기도 하고,

성종 즉위 초에는 각 도에 잠실을 1-2개소만 두도록 축소하였으며,

성종 13년과 16년에는 1년간 잠실을 정파(停罷)했다가 복설(復設)하였다.

성종 때 잠실의 조정과 축소 및 일시적인 정파(停罷)는

흉년에 대한 대비와 민폐를 없애기 위한 조치로 볼 수 있지만

민간의 양잠이 널리 보급되었던 까닭에 이와 같은 단안을 내릴 수 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한편 태종 때 설치한 잠실은 연산군 때 정파되었던 것을

중종이 복설하였다가 임진왜란 이후에는 폐지된 것으로 보인다.

 

고려시대에 이어 조선 초에는 권잠정책의 하나로 선잠제(先蠶祭)를 국가의 중요행사로 꼽았다.

즉 그 해의 양잠의 풍요를 기원하기 위해

중국 삼황오제(三皇五帝) 중의 황제비(黃帝妃)인 서릉씨(西陵氏)를 잠신(蠶神)으로 모시고

제사를 지냈던 선잠제는 조선 초 정종 2년에 최초로 거행한 후

태종 · 세종 · 성종 · 명종 대에도 이 행사를 중요시했다.

그와 함께 왕비의 주관으로 친잠례를 지냈다.

 

친잠례(親蠶禮)는 권잠의식으로 조선 초인 태종 때부터 거행하였는데

성종 8년에 친잠의(親蠶儀)가 제정됨으로써 의식절차가 완비되었다.

 

여말선초에 중국에서 들어온 여러 농서(農書) 중에

잠업을 크게 발전시키고 영향을 끼친 서적은《농상집요(農桑輯要)》를 손꼽을 수 있다.

이 책 중에 잠업부분은 태종 때부터 중종 때까지 여러 사람들에 의해 이두나 한글로 번역, 보급됨으로써

15, 16세기의 양잠발달에 크게 영향을 미쳤다.

그 예로 태종 때 이행(李行)은《농상집요》의 양잠방법으로 누에를 쳤더니

전일에 비해 고치 생산량이 두 배나 되었다는 기록이 있다.

 

15, 16세기에 이르면

종래까지 특권층에게만 착용이 허락되었던 면주(綿紬)가 일반서민들에게까지 허용됨으로써

면주의 수요가 증가되었다.

또한 이 당시 관장제 수공업의 붕괴로 능라장, 방직장 등이 사장(私匠)으로 활동함으로써

견직물의 상품화가 촉진되었다.

그밖에도 중종대의 사림계는 자기 기반의 안정을 위하여

농촌경제의 안정책으로서 양잠을 정책적으로 장려하였다.

 

결국 16세기에 이르러 이러한 여러 요인으로 말미암아

양잠이 농가의 부업으로 진전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 <한성부연구>, 박경룡, 국학자료원, 2000, 222-24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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