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주짱의 하늘꿈 역사방

나아가는(문화)

사쓰마의 도자기 핏줄 심수관家

Gijuzzang Dream 2009. 8. 30. 13:34

 

 

 

 

 

 

 

 사쓰마의 도자기 핏줄 심수관家

 

 

“그릇을 굽다가도, 꿈을 꾸다가도 불현듯 떠오르는 게 고향이더이다”

 

 

 

 

정유재란 때 일본에 끌려간 조선의 도공(陶工)들.

돌무더기보다 조금 나은 ‘인간더미’가 되어 이름도 알 수 없는 땅에 표류한 지 400년.

대를 이어 조선의 옷을 입고 조선의 말을 쓰며 조선의 풍속을 지키며 조선을 그리워하던,

나에시로가와 도공 후손들의 못다 부른 망향가.

도기 굽는 가마 앞에 선 심수관 14대.

가마 일은 선대 이래로 늘 25명이

팀을 이루어 해왔다고 한다.

가고시마의 조선 도공 핏줄인 심수관(沈壽官) 14대.

그를 알게 된 건 순전히 시바 료타로의 소설 때문이었다. ‘고향을 어찌 잊으리’라는 역사소설을 통해 사쓰마 도자기에 얽힌 드라마를 처음 알게 된 것이다.

그게 벌써 20년 전 일이다.

시바의 소설은 곳곳에 일본 옛 문헌과 고어를 인용하고 있어 일부 이해하기 어렵거나 알 수 없는 대목도 있지만, 전편에 흐르는 조선 핏줄들의 기막힌 운명과 애환의 드라마는 가슴을 울리는 데가 있었다.

 

그 심씨를 참으로 우연히 마주친 것은

2002 한일월드컵 직전 도쿄의 뉴오타니 호텔에서였다.

일본의 오부치 유코(小淵優子) 자민당 중의원 등과 함께한 식사자리였는데,

심씨와 나는 명함을 주고받으며 인사를 나눴다.

“한번 만나서 긴 이야기 듣고 싶었다”고 이야기를 건넸더니 대뜸 이렇게 말하는 게 아닌가.

“긴자(銀座)의 미쓰코시 백화점에서 도자기 개인전을 열었는데,

200점도 넘는 작품이 모두 팔렸어요!”

심씨는 유쾌한 듯 자랑했다.

불황의 늪에 빠진 일본에서 비싸기로 유명한 예술품인 심수관 도자기가 일시에 매진됐다는 것은

확실히 얘깃거리다.

그렇지만 수인사하는 자리에서 그렇게 말하는 것은 어쩐지 상업적 가치를 중시하는

‘일본적’인 느낌을 풍긴다고 생각한 기억이 난다. 이제 그를 만나러 간다니 그 느낌이 새롭다.

 

 

‘틀림없는 조선의 산하’

 

가고시마 공항에서 렌터카를 타고

가고시마현 히오키군 히가시 이치키 미야마(鹿兒島縣 日置郡 東市來町 美山)로 향했다.

그는 뉴오타니 호텔에서 만난 나를 기억하고 있을까.

2월의 아침, 날씨는 아직 쌀쌀하지만 햇살은 눈이 부시다.

어제 뿌린 비에 젖은 산하는 아침햇살에 점차 말라가면서 부드럽고 안온한 느낌으로 다가온다.

한국에서라면 2월에 이렇듯 봄을 느낄 수는 없을 것이다.

미야마는 원래 나에시로가와(苗代川)였는데, 메이지 유신 이후 일본국 제일주의 바람을 타고

마을 사람들이 단군신을 모시지 못하게 하는 조치와 함께 미야마로 이름을 바꿔버렸다고 한다.

 

미야마 입구. 시바의 소설가다운 묘사가 아름답다.

 

‘낮은 능선 위로 하늘은 활짝 트이고, 그 밑에 바다가 숨어 있는지 일대는 온통 바닷물의 반사로

눈이 부셨다. 길은 화산재 때문인지 바랜 것처럼 하얗고, 나무란 나무는 일부러 그런 것처럼

엷은 연록색을 띠고 있다. 틀림없는 조선의 산하였다.

마을 자체가 일품이구나!

전에 이곳을 찾은 어느 고명한 도예가가 그렇게 말했다고 한다.

집집마다 그렇듯 바랜 것처럼 하얀 길 양편에 사쓰마 특유의 푸른빛 감도는 돌담을 쌓아올렸고

그 위에 나무가 자라고 있다. 대부분 가는 대나무나 나한송(羅漢松)으로 이루어진 생울타리는

숨은 마을이라고 해도 좋을 촌락의 풍경에 한결 가벼운 멋을 더한다.

거기 무사의 집 모양의 대문에 문패가 보였다. 심수관.’

 

그 사이 하늘은 다시 흐려져 빗방울을 뿌린다.

쉴새없이 움직이는 와이퍼 때문인지 시바의 묘사에 나오는 정경을 실감할 수가 없다.

더욱이 초행길이라 네비게이터(위성 지리 안내시스템)에 집중하는 사이

차는 그의 집 대문 앞에 가 닿고 말았다.

 

 

일본식 가격표의 ‘정성스러움’

 

‘심수관요(窯)’는 찾기 쉬웠다. 간판이 또렷하다.

‘대한민국명예총영사관’이라는 문패도 걸려 있다.

아예 손님 주차장도 따로 있다. 승용차 30대는 족히 세울 수 있으리라.

 

‘대문을 들어섰다. 문을 지나 몇 발자국 가자 조그만 돌무더기가 눈에 띈다.

지금은 사라졌다고 들었지만 이 돌무더기는 과거 사쓰마 지역 무사가 살던 집의 특징이다.

적이 문 안으로 쳐들어왔을 때 이 돌무더기를 방패삼아 한번 더 싸운다고 했다.

뜰 오른쪽에는 아직 어린 벚나무가 꽃을 피우고 있고

그 밑 닭장에는 날개가 꽤나 고운 사쓰마 닭이 들어 있다.

왼쪽 작은 문에 들어서자 안뜰에는 매화(臥龍梅) 한 그루가 땅에 가지를 드리우고 있다.

현관은 없고 손님은 안뜰 댓돌에서 바로 마루로 올라가게 되어 있다.

14대 심수관씨가 근시안경을 낀 채 커다란 몸을 앞뒤로 흔들며 맞이해주었다.’

(소설 ‘고향을 어찌 잊으리’ 일부)

 

하지만 내가 들어설 때는 이미 빗방울이 굵어지고 있었으므로

매화고 벚꽃이고 현관이고 눈여겨볼 틈이 없었다.

 

전시장으로 들어서니 내 전화를 받았던 직원이 손님을 맞는다.

어제, 그 직원이 전화로 “심수관 14대를 만나실 건가요, 15대를 만나실 건가요?” 하고 묻기에,

잠시 머뭇거리다 14대를 만나고 싶다고 말했다. 생각 같아서는 ‘두분 다!’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그녀의 말투로 보아 부자(父子)가 한꺼번에 인터뷰에 응하는 일은 없을 성싶었다.

 

전시대를 보니 작품의 값을 매기는 것도 일본식이다.

3750엔, 5450엔… 하는 식으로 값이 매겨져 있다.

한국 같으면 3500원 아니면 4000원으로 끊어서 값을 정했을 텐데,

뒷자리 수가 ‘정성스럽게’ 따라붙는다. 도대체 50엔의 가치는 뭐고, 왜, 누가 정하는 것일까.

살 사람의 마음을 섬세하게 읽으며 다가서는 일본의 상술과

투박간명(?)한 한국식 판매술 사이에 놓여 있는 거리를 느낀다.

 

심수관씨가 나타났다. 예의 활짝 웃는 얼굴, 개량한복과 도복의 중간쯤 되는 옷차림이다.

작가 시바는 ‘큰 키’라고 묘사했으나 정작 키는 나보다 크지 않다.

생각해보니 시바는 참으로 매운 고추처럼 작은 체구를 가졌다.

 

 

대북 강경파 아베 신조가 조선 핏줄?

 

안채 접견실로 안내한다. 시바가 취재했던 그 방이라고 한다.

밖에서 한국사람들의 목소리가 크게 들려온다. 그새 관광객 일행이 들이닥친 모양이다.

“노무현 대통령이 여기서 멀지 않은 이부스키(指宿)에 다녀가신 뒤로 한국 손님들이 늘었어요.

우리집에도 다녀가셨죠.”

2004년 12월18일 가고시마에서 열린 한일정상회담 이야기였다.

그때 노 대통령이 여기까지 다녀갔다는 사실은 모르고 있었다.

“이 자리가 노 대통령 앉으신 자리이고 (당신이 앉은) 그 자리에 권양숙 여사가 앉았지요.

경호원들이 많이 왔고 경비가 상당히 삼엄했습니다.”

 

천황이나 황족이 다녀간 자리, 총리를 지낸 정치인들이 스쳐간 자리를 소중히 여기며

반드시 나무를 심고 기록에 남기는 일본 사람들의 습관을 생각한다.

‘일본에는 인격과 대칭되는 ‘물격(物格)’이 있다.’

서울대 인문학 분야 교수 한 분이 그런 말을 했다고 들었다.

물건과 장소를 중시하고 신격화하며 길이 모시고 보전하는 전통을 말한다.

이는 필시 샤머니즘이나 일본 신도(神道)와도 관계가 있을 터.

어쨌든 욘사마 붐으로 남이섬과 춘천의 준상이네 집이 일본 관광객으로 붐비는 것도

그런 ‘물격’의 연장선상이라는 이야기도 들었다.

이미 일본인 사쓰마 사람이 된 심수관씨가 ‘권 여사 자리에 당신이 앉아 있다’고 강조하자

새삼 물격을 생각하게 된다.

 

마주 앉은 심씨의 머리 너머로 액자 하나가 걸려 있다.

‘默而識之(묵이식지)’.

1970년대 일본총리를 지냈고, 노벨평화상을 탄 사토 에이사쿠(佐藤榮作)가 친히 써준 것이라 한다.

“말로 하지 않아도, 묵묵히 있어도, 알아줄 것은 다 알아주고 통한다는 의미랍니다.”

심씨는 자랑삼아 말했다.

도자기와 인간의 대화, 예술품과 보는 이의 마음의 회로가 ‘묵이식지’라는 뜻일까.

 

이어지는 심씨의 이야기는 생각지도 못한 것이었다.

“사토씨가 하는 말이 놀라웠어요.

나한테 ‘당신네는 일본에 온 지 얼마나 됐느냐’고 묻길래 400년 가까이 됐다고 했더니,

‘우리집은 그 후에 온 집안’이라는 거예요. 구체적으로 어느 고장에서 언제 왔는지는 모르지만

선조가 조선에서 건너와 야마구치(山口)에 정착했다는 얘기였지요.”

사토는 1960년대에 일본 총리를 지낸 기시 노부스케(岸信介)의 친동생이다.

그렇다면 조선 핏줄이 일본 총리를 두 사람이나 배출했다는 말이 된다.

일본의 우익인사들이 이 일을 알게 되면 어떤 반응을 보일까.

‘증거를 대라! 또 그 한반도 출신 타령인가’, 그런 식이겠지.

 

문득 생각해보니 요즘 총리 후보로 손꼽히는 아베 신조(安倍晋三)는 기시 노부스케의 외손자다.

신조의 아버지 아베 신타로는 기시 노부스케의 사위로 1980년대 후반 외무대신을 지냈다.

그 아베 신조가 요즘 ‘타도 북한!’의 선봉장이다. 북한의 일본인 납치에 가장 분개하는 강경파이며

북한에 경제제재를 가해야 한다고 자민당 선두에서 주장하고 있다.

그러한 그에게 한반도의 핏줄이 얽혀 있다는 것은 아이러한 일이다.

 

 

북한의 납치와 일본의 납치

 

북한의 납치와 피랍도공 마을에 대해 잊을 수 없는 기억이 두 가지 있다.

그 하나. ‘아사히신문’의 ‘나의 관점’이라는 칼럼에 이런 취지의 글을 쓴 적이 있다.

“북한의 납치행위가 반인도적인, 참으로 용납할 수 없는 국가범죄임은 분명하다.

하지만 일본도 400년 전 가고시마의 도공 70명을 납치한 역사적 사실이 있다.

시바 료타로도 납치라고 단정해서 기록하지 않았는가.

일본도 숱하게 납치나 강제연행 같은 일을 저질렀다.

그렇다면 북한과의 관계정상화라는 외교문제와 납치범죄 문제는 전혀 차원이 다른

별개의 것이라는 점을 알 만도 하다고 본다.

지금 일본인의 대응은 감정적이고, 외교와 범죄문제를 혼동하고 있다.”

 

사토 에이사쿠가 써준 ‘묵이식지’

휘호를 설명해주는 심수관씨.

총리를 지냈고 노벨상 수상자이기도 한

사토는 심씨에게 자기 조상이 조선 후기에 한반도서 건너온 조선 핏줄이라고 말했다.

이 글이 나가자 찬반양론의 전화와 편지 수십 통이 쏟아져 놀랐다. 특히 우익 성향의 노인들이 집요하게 편지를 보내와 일본 노인들의 사고방식을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이 됐다.

 

다른 한 가지 기억은, 지금 홋카이도 경찰총수(본부장)를 하고 있는 아시카리씨와 벌인 언쟁이다.

서울 주한대사관에도 근무한 적이 있는 그는 2003년 고이즈미 준이치로 총리가 평양을 방문할 때 경비국장으로 현지 경호 총책을 맡은 바 있다.

그와 나를 포함해 네 명이 식사하는 자리에서

그는 저널리스트인 내게 “납치된 사람들의 가족, 즉 평양에 남은 자녀들 문제가 장차 어떻게 될 것 같냐”고 물었다.

나는 ‘아사히신문’에 이런 의견을 쓴 일이 있다고 소개하면서

“고이즈미 총리와 김정일 위원장이 정상회담도 했으니 나머지 가족도 평화적으로 오갈 수 있는 것 아니겠냐”고 대답했다. 그것이 북한을 두둔하는 말로 들려 신경에 거슬렸던지 그는 대뜸

“북한을 정당화하는 것이냐”고 되물었다. 나도 약간 기분이 상해 그대로 맞받아쳤다.

“북한의 못된 짓은 당신보다 한국인인 내가 더 잘 압니다.

용납하기 어려운 범죄라는 전제하에서 말하는 겁니다.

가고시마 도공 70명을 납치한 게 일본인입니다. 지금 북한은 13명이 문제죠.

역사에서 400년 차이는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겁니다.

배로 납치했다는 점, ‘기능’ 때문에 강제로 끌고 간 것도 닮은꼴입니다.

도공의 제도(製陶) 기술을 노린 것이나 일본 습관에 익숙한 일본인을 남파요원화하려고 한 것

모두 인권 유린이란 측면에선 다 비슷하지 않냐고 생각하는 한국인도 있습니다.

400년의 시차 때문에 TV가 있냐 없냐, 여론이 형성되냐 안 되냐의 차이가 있을 뿐

본질은 마찬가지라는 인식도 한국에는 있습니다.

나는 대한민국 외교관이 아니므로 기자로서 남으로부터 듣고 느끼는 것을 말할 수 있습니다.

지나친 말입니까. 일본은 왜 자기가 한 짓은 잊어버리고 남이 한 짓만 범죄시합니까.

그걸 말하는 겁니다.”

자리를 함께한 K경무관의 중재로 가까스로 언쟁은 멎었지만 찜찜하게 헤어진 기억이 생생하다.

일본정신으로 무장한 고위직 인사가 혹시 나를 ‘동포애에 사로잡힌 친북인사’로 오해할지 모른다고

생각하면 지금도 뒷맛이 씁쓸하다.

 

14대 심씨에게 북한의 일본인 납치문제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물어보았다.

웃는 얼굴로 즉시 대답이 돌아온다.

“삼백수십년 전 조선 정부는 피랍자 송환을 위해 세 번이나 교섭사절단을 보냈지요.

고이즈미 총리는 두 번 평양에 갔습니다. 그렇지요.”

그러더니 이런 말이 보도되면 일본 내에서 오해를 받을까 걱정이 되는 듯

“쓰지 마세요…이건…” 하고 또 한 번 웃는다.

정치다 외교다 범죄다 논평하지 않고 선문답처럼 말하면서 웃기만 한다.

정경학부에서 공부한 덕분일까.

 

 

배 밑창에 간직해온 언문(諺文)책

 

커다란 두 폭 병풍에 넉 자의 휘호가 새겨져 있다.

‘百世淸風(백세청풍)’.

“저것은 주자의 글씨입니다.”

주자학의 비조(鼻祖)인 주희(朱熹)의 글씨라는 설명이다.

황해도 해주에서 아버지 13대 심수관이 탁본을 떠서 병풍을 만든 것이라고 한다.

다시 설명하겠지만,

13대는 도공의 아들로 일제시대 명문 가고시마고교(제7고)를 나와 교토대 법학과를 졸업한 수재다.

하지만 결국 향리에 돌아와 도자기를 구우며 아들 14대를 와세다대 정경학부에 진학시켰다.

참으로 명석하고 학구적인 인물이다.

 

‘백세청풍’ 비(碑)는 중국 고사에서 연원한다.

충절을 지키기 위해 수양산에 들어가 굶어죽은 백이(伯夷) 숙제(叔齊)를 기리기 위해

1738년(영조 4) 해주에 세웠다.

그 작은 비석 하나도 허술하게 보아 넘기지 않고 탁본을 떠 조선 ‘핏줄기행’의 기념으로 삼은 13대.

그의 정성이 고스란히 이 방에 전해지고 있다고 생각하니 옷깃을 여며야 할 듯하다.

 

시바 료타로 얘기로 질문을 시작할 수밖에 없었다.

“그 책이 지금도 우리집 전시장에서 팔리고 있어요.”

‘고향을 어찌 잊으리’ 소설은 심수관 도자기가 일본에서 명품으로 인정받는 계기를 만들어줬다.

그 글이 없었다면 국영 NHK가 심씨만을 놓고 8시간짜리 특집 프로그램을 만들었겠는가.

이 프로그램을 본 홍콩에서도 그를 취재해갔다. 기실 나의 이 인터뷰도 바로 그 소설이 연원이다.

 

시바는 1967년 2월12일 처음 이 곳을 방문했다. 심씨는 날짜도 선명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오늘은 매화가 비에 젖어 있지만 그날은 매화가 만개해 있었지요.

그 꽃 밑에 새하얀 머리카락의 시바가 낡은 트렌치코트 차림으로 서 있는 것을 우리 집사람이

발견했어요. 나는 첫눈에 알아봤어요.

그는 벌써 ‘올빼미의 성(城)’같은 대작으로 상을 받은 유명한 작가였으니까요.”

 

집주인은 신문에서 보아 익히 알고 있었다며 인사를 건넸다.

차와 소주를 대접하는 동안 이런저런 질문을 받았다.

그러나 시바로부터 소설을 쓰겠다거나 하는 소리는 전혀 없었다.

다만 그는 “가고시마현(縣) 초청으로 강연하러 온 길에 들렀다. 돌아가는 비행기 시간까지

여유가 있어서…. 20년 전부터 나에시로가와에 관심을 갖고 있었다”고 했다.

 

시바는 마을에 남아 있는 조선의 흔적을 물었다.

집주인은 아마도 한어(韓語)일 것이라고 대답해줬다.

가마 일을 할 때 쓰는 기구와 동작에는

조선 중기(임진왜란과 정유재란 시기)의 조선말이 그대로 살아 있다.

예를 들어 ‘앉을통’은 가마 일을 할 때 걸터앉는 걸상이다.

가마에 불을 지피는 마른 장작토막은 ‘찍순’이고, 막대기는 ‘찔래’, 물통은 ‘불삭’,

흙을 두들길 때 쓰는 연장은 ‘슐래’, 가마의 공터, 즉 구운 도기를 놓는 자리는 ‘바닥’,

흙덩이는 ‘동구래’로 쓴다.

모든 일은 이들 한어로만 이뤄지며 이 용어를 모르면 심부름조차 시킬 수 없다.

 

심씨가 1965년 한국의 초청으로 시범을 보일 때, 마른 장작을 달라며 ‘찍순’ 하고 외쳤더니

그 자리에 있던 한국사람들이 놀란 표정으로 “사람은 제 핏줄을 따른다”며 웃더란다.

그도 그럴 것이 메이지 유신 이전까지 이 마을은 한어를 쓰면서 살아왔고

당시의 한글 교본으로 대대손손 한글을 익혀왔다.

 

놀라운 것은, 1597년 왜병의 손에 끌려올 때 배 밑창에 책을 간직해왔다는 사실이다.

노획당한 짐승처럼 갇혀 몇 날 몇 달이 걸릴지 모를 여정을 떠나면서 책을 챙겨오다니,

먹을 것 입을 것, 밥그릇 수저 같은 물건들과 함께 언문(諺文) 책을 쑤셔 넣을 생각을 하다니….

이 집의 수장고(守藏庫)에는 한글판 ‘숙향전’이 전시되어 있다.

펼쳐진 한글 교본 <한어훈몽(韓語訓蒙)>에 옛 글자가 눈에 들어온다.

“ 을 닐러라”(책을 읽어라)

“ 을 잘 닐럿냐”(책을 잘 읽었느냐)

이 마을의 향학열을 읽을 수 있다.

 

오래 전부터 가고시마의 행상들은

‘나에시로가와를 지나칠 때면 글 읽는 소리를 들을 수 있다는 소문을 냈다고 한다.

그도 그럴 것이 번주(藩主) 시마즈 요시히로(島津義弘) 시절부터

번의 규칙으로 학문이 강조됐기 때문이다.

도공의 윗대가 죽었을 경우 무조건 아들들에게 상속하지 않았다.

도자기를 만드는 기술과 학문을 테스트해서 통과하는 자에게만 녹봉을 후하게 내려

가업을 잇게 했다. 또 장남이라고 해서 누구나 가업을 이어받는 게 아니었다.

고향 남원에서부터 책을 품고 온 정신, 행정 차원의 학문 장려, 이것이 면학 전통의 토대였다.

 

도자기에 얽힌 한자와 한글도 보인다.

‘磨(마) : 로기를 자조 하면 빗티 난다’(갈기를 자주하면 빛이 난다)

‘甕(옹) : 독이라 하여도 적은 거슨 옹이라 하느니’

堈(강) : 큰 독을 강이라 하느니’

들여다보고 있노라니, 책 읽는 청년들의 낭랑한 목청이 들려오는 듯하다.

 

 

‘도공 사냥’ 부른 ‘문화취미’

 

1597년 8월 조선의 전라도 남원성(南原城).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보낸 10만 군대가 공격을 개시했다.

1592년 임진왜란 이후의 재침, 이름하여 정유재란이다.

임진왜란 초전의 쓰라린 경험을 바탕으로,

명나라의 조선 도독-지금의 연합사 사령관 격이라고 할까-유정(劉綎)은

1594년경 사령부를 경상도 성주에서 남원으로 옮겼다.

남원은 양도의 중앙에 자리잡아 군대를 지휘하는 데 편리할 것으로 판단했기 때문이다.

 

남원성이 공격당할 때의 명군 조선 도독은 양원(楊元).

조선군 장교는 ‘연합사’측에 “평지에 있는 남원성은 왜의 10만 대군과 맞서 싸우기에

적합하지 않다. 성 밖의 산성으로 나가 적을 방비해야 한다”고 건의했다.

이것이 고래(古來)의 한국형 도시방어 전술이다.

하지만 연합사는 이를 무시했다. 그리고 결국 명조 연합군은 궤멸당하기에 이른다.

 

고니시 유키나가가 선봉에 서고,

명조 연합군이 석만자(石曼子)라며 두려워하던 시마즈 요시히로가 뒤를 받쳤다.

이 시마즈 군대가 바로 심수관 등 70명을 납치한다.

나에시로가와 마을의 선조들이 남원성 전투에서 관군을 도와 분전했다는 전설이 지금도 전해온다.

그러나 어디서 어떻게 싸웠고 누구에게 붙잡혀 어떤 경로로 왔는지는 알 길이 없다.

 

그 당시 일본에는 차를 기품 있게 마시는 다도(茶道)가 유행하고 있었다.

히데요시의 권력과 리큐(利休·일본 다도의 완성자로 불리는 인물)의 문화!

그 센노 리큐(千利休)의 문화란 바로 다도였고

황족, 장군, 거상(巨商)들이 경쟁하듯 거기에 빠져들었다.

차 그릇(茶器)은 외국의 것이라야 가치 있게 보였다.

그래서 조선에서 나뒹구는 밥 사발 하나라도 리큐 같은 다도 명인들이 보증서만 붙여주면

보석처럼 취급됐다. 시바의 글에 따르면 다기가 무공의 상으로 내려지기도 했으며

일국(一國) 일성(一城)과 맞먹는 엄청난 다기도 있었다고 한다.

그러므로 흙과 불로 가치를 창조하는 도공들은 사냥감이 됐다.

사쓰마는 교토 중앙과도 멀리 떨어진 변방이어서 그릇이라곤 온통 나무로 만든 것뿐이었다.

태수(太守)의 밥그릇도 나무를 파낸 목기였고, 술을 담는 그릇도 나무 표주박 정도였다.

“다들 운동신경이 둔했던 것 같아요.”

심수관씨는 약간의 농을 섞어 말한다. 선조들의 불운에 대해서다.

아프리카에서의 흑인 노예 사냥, ‘뿌리’라는 영화에 나오는 한 장면 같았을 것이다.

시마즈 군대가 눈에 불을 켜고 잡아들일 때

도망치지 못하고 납치당한 도공과 부녀자들의 아우성과 울부짖음을 상상해보라.

 

 

돌덩이보다 조금 값진 ‘인간 더미’

 

사쓰마의 전설에는 일본군의 납치행위가 조선에 보낸 군량선(軍糧船)이 빈 배로 돌아오면

너무 가벼워서 가라앉을 가능성이 커 배 밑창의 밸런스를 맞추기 위해 이뤄졌다고 한다.

그렇게 무차별적으로 가둬진, 돌덩이보다 조금 값진 ‘인간더미’들은

규슈 도처에 내려져 도진쪼(唐人町)를 이룬다.

당인(唐人)이란 말이 토박이가 아닌 외국인, 특히 조선인을 일컫는 보통명사가 됐다.

 

히데요시의 본거지 오사카. 잘 다듬어진 오사카성 내부에는 지금도 그 시대의 증빙이 남아 있다.

일반 관광객의 눈에는 쉽게 들어오지 않겠지만

히데요시의 도장이 찍힌 명령서 한 장이 전시되어 있다.

‘잡아온 조선 부녀자들 가운데 바느질 같은 손재주가 뛰어난 것들은 상부(오사카)로 바쳐라’는

내용이다. 솜씨 좋은 많은 조선의 아녀자들이 히데요시 처소에까지 끌려가

잡일을 했을 것으로 추측하기는 어렵지 않다. 그녀들은 어떻게 살다 죽었을까.

결국은 오사카 근방의 일본 핏줄에 스며들고 만 것일까.

하긴, 변방에서 번주 같은 높은 사람 근처에는 얼씬도 못하고 말단관리에게 핍박만 받았던

피랍자들보다는 대우도 받고 상대적으로 안일을 누릴 수 있었다고 생각해야 하는 것일까.

 

 

표류, 그리고 인적 없는 해변

 

정유재란은 히데요시의 급사로 막을 내린다.

왜군은 명 · 조 연합군과 강화를 맺고 철수하게 된다.

그러나 일선의 전투는 멎지 않아서 시마즈 군대는 노량해전에서 이순신 장군 부대에 대패해

병선 200척을 잃고 50여 척으로 간신히 탈출에 성공한다.

이런 상황에서 도공들을 태운 배가 어떻게 조선 해역을 벗어날 수 있었는지 알는 수 없다.

분명한 것은 시마즈 군대의 철수 선단에 도공들은 없었다는 점이다.

어찌 된 일인지 도공들은 시마즈 군대가 귀환한 하카타(후쿠오카)에 내린 것도 아니다.

누구의 배로, 누구의 안내에 따른 것인지는 모르되,

도공들은 멀리 규슈의 서해안을 따라 남하를 거듭해

사쓰마 반도의 구시키노(串木野)에 표착하게 된다. 그들은 시마즈에게도 잊힌 존재가 되고 만다.

 

시바는 추측한다.

‘아마 중간에 풍랑을 만나 사가현이나 나가사키 언저리의 섬에 일단 표착한 것은 아닐까.

그 섬에서 조개와 물고기로 연명하고 있던 중에 일본인 사공은 달아나버리고,

고국으로는 돌아가지도 못하고, 그래서 결국 도공들 손으로 배를 고쳐서

규슈 서해안 섬들을 지나 남으로 남으로 내려간 것 아닐까.

그 시절의 항해조건으로 따지면 이 추측이 가장 개연성이 있을 것이다.’

 

구시키노 어촌은 후미지고 한적한 곳이다.

그 어촌 남쪽에 시마바라(島平)라는 인적 없는 해변이 있다. 도공 일행은 이곳에 표착한다.

불러도 대답 없는 황량한 바닷가. 천지분간도 할 수 없는 이방인들은 헤맸을 터이다.

 

‘가고시마라는 지명도 몰랐고 방향도 몰랐을 것이다.

어느 누구를 찾을 길도 없이 흰 옷자락을 밟아가며 모래사장을 헤매었을 것이다.

아무튼 일행은 거기서 하룻밤을 지새웠다.

병자는 쓰러지고, 아낙네들의 애절한 울음소리는 해변을 뒤덮었을 것이다.

날이 밝아도 모래사장은 그저 모래사장. 그중 몇 사람은 미친 듯이 배를 바다에 띄웠으나

작은 배는 물결에 밀려 다시 제자리로 돌아왔다고 전한다.

이때의 망향의 슬픔은 그들 각자의 집에 전승되어 지금도 혼령처럼 숨쉬고 있을 터이다.

병자 일부는 여기서 죽었다. 그 유해를 솔밭에 묻고 언문(한글)으로 죽은 자의 이름을 새겼다.

그 무덤이 지금도 거기 남아 있다.’ (소설 ‘고향을 어찌 잊으리’ 일부)

 

 

도공 후예인 심수관 14대

대한민국의 명예총영사가 되고,

그의 집은 명예총영사관이 되었다.

경작지도 없는 무인 황무지.

그들은 본능처럼 자기를 구우려고 가마를 쌓았고,

노인들은 흙을 찾아 그릇을 구웠다.

모토쓰보야(舊壺屋)라는 지명이 거기서 유래한다.

 

“천주교 옹기 마을이라는 것이 한국에도 있지 않습니까. 관헌에 쫓긴 크리스천들이 산속으로 달아나 깊은 곳에 피신해 있다가, 나무숲 사이에서 생계수단으로 옹기를 굽게 된 것 말입니다.”

심씨의 말이다.

과연 14대의 상상력과 발상은 남다른 데가 있다.

강원도 양양이나 경기도 광주의 옹기마을을 예로 들어 설명해준다.

 

도공들은 8년 세월을 거기서 보낸다. 그러나 정착하기까지는 멀고도 험한 길이었다.

무언가 이상한 빛깔이 나는 그릇을 만드는 외계인 같은 벤처 집단.

말도 통하지 않는 원주민들의 텃세와 이지메가 끊이지 않았다.

무작정 가마에 들어와, 흙으로 도기를 빚는 모습을 신기한 듯 바라보다가는

손으로 만져 무너뜨린다. 말려도 듣지 않고 날이면 날마다 되풀이 되는 실랑이다.

떠밀고 큰 소리로 저항하면 원주민들은 떼로 몰려와 도공들의 움막을 짓밟아 버린다.

사쓰마 관리들의 기록에도 ‘원주민들이 말이 통하지 않는 도공촌에 난입해 보복하기를 거듭했다’는

대목이 있다. 다시 이주의 길을 떠날 수밖에 없었다.

 

“아마도 당시 원주민들로서는 혁명적인 제품을 만드는 것이 못마땅했을 겁니다.

그들에게 물항아리 같은 것은 듣도 보도 못한 것이었을 테죠.

말하자면 1960년대의 세탁기나 냉장고 같은 생활혁명 기기 같은 것이었으니

주민들이 이래저래 질시하고 구박했을지도 모르죠.” 14대 심수관의 해설이 그럴 듯하다.

아무튼 도공촌의 원로가 이주를 결정하자

저마다 봇짐을 지고 20리 떨어진 나에시로가와에 정착하게 된다.

 

시바 료타로는 소설가답게, 한 마을 사람들이 무작정 부대처럼 행진하다가 선두에서

‘아, 고향산천과 너무 닮았다’고 탄성을 지르자 발길을 멈추고 정주하게 되었다고

드라마틱하게 적고 있다. 하지만 그보다는 이미 8년을 인근에서 살면서

혹은 도기용 흙을 구하러 다니면서 미리 눈여겨보아둔 터라고 봐야 하지 않을까.

 

 

이상한 그릇을 굽는 ‘외계인’

 

그곳에서 ‘양삼년(5, 6년을 뜻하는 듯)’을 사는 동안 드디어 시마즈 번주가 관심을 보였다.

나무 밑에 기대어 사는 이들의 정경이 처량하기 짝이 없다는 기록이 있는 걸 보면 동정적인

관심이었을 것이다. 시마즈 번주는 도공들에게 가고시마 성내에 들어와 살 것을 명령했다.

그러나 그 명령을 전하기 위해 도공촌에 간 관리는

“높으신 은혜는 감사하나 성내에는 들어가고 싶지 않다”는 도공들의 답변에 그만 기겁하고 만다.

“이건 상부의 명령이다. 목숨을 부지하지 못할 짓이다.”

그래도 도공들은 막무가내로 거부했다. 이유를 물으니 두 가지 때문이라고 했다.

“우선 주가전(朱嘉全)이라는 한인이 있다고 들었는데 그는 반역자다.

군부(君父)의 원수와 같은 하늘 아래 살 수 없다.”

이역만리에 끌려와 도기나 굽는 주제에 대단한 소리를 지껄이고 있었다. 관리는 경악했다.

 

주가전은 남원 태생으로 관의 녹을 먹던 자인데,

시마즈 군대의 공격에 즈음해 이들과 내통하는 반민족행위를 했다.

왜군이 패주할 무렵 보복이 겁난 주가전은 시마즈에게 빌고 빌어 가고시마에 정착하게 됐고

이후 일본 이름을 쓰며 살고 있다는 것이었다.

관리는 이 ‘웃기는 작자’들의 가슴속에 숨겨진 칼날이 번뜩이고 있음을 감지하며

“두 번째 이유는 무엇이냐”고 물었다. 대답은 이랬다.

“고향이, 고향이 그립소이다….”

관리는 반문했다.

“여기서 가고시마는 60리밖에 안 된다.

여기는 고향과 가깝고 거기는 고향과 멀다는 게 말이나 되느냐.”

도공들은 언덕을 가리키며 대답했다.

“저 언덕 이름이 ‘산자락(山侍樂)’입니다.”

언덕에 오르면 동지나해가 보인다, 동지나해 아득한 저쪽에 조선의 산하가 있다,

우리는 천운(天運)을 잘못 타고나 조상의 무덤을 모시지 못한 채 이역만리에 끌려왔으나,

저 언덕에 올라 거기 제단에 제사를 모시면

아득히 먼 조국의 산하도 감응하여 그곳에 잠든 조상의 넋을 달랠 수 있으리라!

떨리는 목소리에 사쓰마 관리들은 할 말을 잃었다. 그대로 상부에 보고할 수밖에 없었다.

번주 시마주의 반응도 뜻밖이었다. 그야말로 도공들의 읍소에 ‘감응’한 것이다.

 

“그렇다면, 그곳에 살게 내버려두어라. 녹봉도 주고 부족한 점은 언제나 보고케 하라.”

매화가 피어 있는 정원을 가리키며

작가 시바 료타로가 찾아왔던 날을 회상하는 심수관14대.

그리하여 표착민 17개 성(姓) 70명의 신분이 결정된다. ‘조선계열’이라는 호칭으로, 계급은 무사와 동급이었다. 대문을 만들고 담을 쌓는 것도 허락됐다.

의관(醫官)과 같은 급으로 무사라고 해도 군역은 면해지는 비전투 공익근무요원 같은 향사(鄕士) 대우였다.

 

 

핏줄 타고 흐르는 망향의 한

 

이 도공 마을에 관해 18세기의 여행기가 전해진다. 1780년경 의사였던 다치바나 난케이(橘南谿)가 쓴 것이다.

당시 일본은 번과 번의 장벽이 높아 국경을 방불케 하는 상황이었으나,

난케이는 의사라는 직분을 활용해

사쓰마의 나에시로가와라는 특수 취락에까지 들어갈 수 있었던 것 같다.

 

‘온 마을이 고려인이다.

조선 풍속을 그대로 계승해 의복에서 언어에 이르기까지 모두 조선식이며,

날이 갈수록 번창해서 수백 호를 이루고 있다.

처음 납치되어온 성씨는 17개성, 신(伸) 이(李) 박(朴) 변(卞) 임(林) 정(鄭) 차(車) 강(姜) 진(陣)

최(崔) 노(盧) 심(沈) 김(金) 백(白) 정(丁) 하(河) 주(朱) 등이다.’

 

난케이는 마을 어른에 해당하는 신무둔(伸屯)의 집에 안내됐다.

한의사였던 그는 조선이나 중국에 관한 지식도 나름대로 해박한 편이었다.

그래서 신무둔의 신씨 성에 어디에도 없는 ‘사람인 변(伸)’이 붙은 것을 궁금해하며 물었다.

원래 조상의 성씨는 신(申)이었다고 한다.

그런데 사쓰마 관리가 호명할 때 ‘신(申)’자를 보고 “사루(원숭이)!”라고 부르는 게 아닌가.

비록 납치되어온 처지지만 원숭이라고 불리다니 천부당 만부당하다고 생각한 끝에,

성씨에 사람 인 변을 붙여 살기로 했다는 것이다.

신무둔은 망건을 기품 있게 쓰고 있었다.

오가는 부인네들은 조선 풍속 그대로 머리를 뒤로 땋아 말아올린 헤어스타일이었다.

남녀 모두 널따란 소매를 펄럭이며 거니는 풍경 때문에

난케이는 스스로 ‘당나라를 여행하는 기분’이라고 적고 있다.

 

신 노인에게 난케이가 물었다.

“일본 온 지 몇 대째가 되나요?”

“5대째니까 200년이 됩니다.”

“그러면 고국 조선은 이미 잊은…”

말이 끝나기도 전에 신 노인이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한다.

“천만의 말씀! 그 일은 참 기묘하더이다.

이 나라에 건너온 지 200년이나 되었고, 별 불만 없이 지내는 터이지만,

인간의 마음이란 실로 묘한 것이어서 고국에 대한 상념을 잊을 길이 없더이다.

때로는 꿈속에 나타나기도 하고 낮에 그릇을 굽다가도 불현듯 떠오르는 것이 고향이더이다.”

여행기 필자인 난케이는 ‘나 또한 슬픈 마음 가득하여…’라고 소회를 적고 있다.

 

 

매화향 가득한 뜰에 서서

 

논리적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것이 고향인지도 모르겠다.

5대가 지난 손자의 손자 대에 어찌하여 죽어 흙이 된 선조들만이 아는 고향을 기억하고

그 남원 산천을 그리워할 수 있단 말인가.

아마도 타향살이의 서러움, 배려를 받아도 어쩔 수 없이 겪는 차별의 아픔,

그것이 ‘고향을 어찌 잊으리’로 이어진 것은 아닐까.

 

갑자기 심씨가 의자에서 일어나서더니 뜰로 나서는 문을 연다. 함께 나가보자고 한다.

여전히 비가 오고, 한국말로 떠들던 관광객은 떠나고 없다.

시바가 감탄하던 매화꽃이 고즈넉이 비에 젖어 있다.

“향기가 나지요? 매화 향기가….”

심씨가 냄새를 맡는 표정으로 말하면서 시바가 서 있던 자리를 가리킨다.

“그 시바씨 말입니다, 자기 멋대로 남의 집에 들어와서는 기웃기웃하고 있었어요.

그러고선 이 집에는 현관이 없다고 소설에 썼더라고요.”

심씨가 즐거운 듯이 당시를 회상하고, 나는 카메라를 꺼내 정원을 배경으로 그를 촬영했다.

 

 

“한세상 어느 때나 꼭 같은 그날, 고수레 고수레 자나깨나 잊지 않으리…”

조선에서 가져간 흙과 유약으로 구워 ‘오로지 불만’ 일본 불이라는 이름을 가진 도자기 ‘히바카리’.
400년이 흐른 뒤 선친의 유언을 따라 14대 심수관은 선조들의 고향 남원에서 불을 채화해

‘오로지 불만’ 조선의 불로 도자기를 굽는다.

아들의 아들, 그 아들의 아들에게 이어지는 조선 출신 도공들의 끝없는 예술혼, 그 두 번째 이야기.

400년 전 선조들이 조선으로부터 끌려와 처음 닿았던 사쓰마의 시마비라 해안에 서서 한국쪽을 바라보고 있는 14대 심수관.

심수관(沈壽官) 14대는 중학교에 입학하던 날의 쓰린 추억을 잊지 못한다.

나에시로가와(苗代川)에서 초등학교를 마치고, 60리나 떨어진 가고시마 제2중학교에 입학하던 날이었다.

이 시골 중학교는 억센 아이들의 주먹자랑 때문에 학교폭력이 말도 못했다. 전국시대 시마즈(島津)번의 강병책(强兵策)이 남긴 영향인지, 아이들의 첫 학기는 싸움으로 시작해 학기가 끝날 무렵 강약 서열이 정해지고 나서야 잠잠해지곤 했다.

 

심수관의 학급에 몇 녀석이 들어와 말했다.

“이 반에 조선놈이 있지? 손 들어봐!”

신입생 명부에서 석 자짜리 조선 이름을 보고 온 것이었다. 열 명쯤 되는 아이들에게 붙잡혀 옥상으로 끌려갔다.

그러곤 실신할 때까지 얻어맞았다. 깨어났을 때는 혼자였다.

학교를 나와서 기차를 타고 구시키노를 지나 히가시이치키(東市來)역에서 내렸다.

2km 떨어진 집으로 터덜거리며 걸어가는데, 동구 밖에 아버지와 어머니가 서 있었다.

두 분은 사태를 예견하고 있었다.

아버지가 중학교에 들어가던 첫 날, 꼭 같은 이지메를 당했던 것이다.

소년은 우물가에서 얼굴을 씻었다. 눈물을 감추려 해도 소용이 없었다.

끊임없이 흘러내리는 눈물. 아버지가 수건을 내밀었다.

아버지는 고개를 끄덕이며 “그래, 그래, 그럴 테지” 하고 달랬다.

소년은 학교에 다시는 가지 않겠다고 했다. 집에서 공부하면 되지 않냐고.

그러자 아버지는 엄한 얼굴로 꾸짖었다.

“그런 소리 말아라. 그런 근성은 개에게나 주어라. 네 핏줄에는 조선의 피가 면면히 흐르고 있다.”

아버지의 훈계는 계속됐다. 선조 대대로 내려온 자긍심 이야기였다.

 

전라도 남원성에서 납치되어온 후 계속된 피눈물나는 고생,

나에시로가와에 정착해 번주로부터 가고시마에 나와 살라는 명령을 받고도

‘민족반역자 주가전(朱可全)과 이웃해서 살 수 없다’며 거절한 용기,

죽음도 각오한 그 기백이 너의 핏줄에 흐르고 있지 않으냐!

“일등을 해라. 공부도 일등, 싸움도 일등. 그러면 상대도 달라진다. 그 수밖에 다른 도리가 없다.”

 

아버지는 수재였다. 가고시마 일대에서 알아주는 명문인 제7고(일본 전체의 7대 명문고 중 하나)를 거쳐 교토대 법학부를 나왔다. 비록 도공으로 가업을 잇는 아버지지만,

소년은 아버지의 두뇌와 실력을 자랑스럽게 여기고 있었다.

그렇다, ‘문무겸전(文武兼全)’이다. 싸움도 잘하는 거다. 소년은 결심했다.

그날 이후 소년은 싸움꾼이 되어, 좀 세다는 놈들을 찾아다니며 도전했다.

가고시마의 아이들은 마주 서서 오른쪽 어깨를 한번 치켜올리는 것으로 도전하겠다는 의사를

나타냈다. 일단 도전을 받으면 결투를 치러야 한다.

그런 일상적인 폭력에 빠져들면서 소년은 늘 조선 핏줄과 일본 핏줄에 대해 생각했다고 한다.

뼈가 부서지더라도 항복할 수 없다는 각오로 싸웠다 한다.

 

 

아버지의 유언

 

작가 시바 료타로에 대한 심수관씨의 추억은 각별하다.

그도 그럴 것이 심수관 도자기, 나에시로가와의 도공 신화(!)를 소설로 써서 널리 알린

‘연출가’가 바로 시바이기 때문이다. 시바는 이후로도 심씨에게 아이디어와 조언을 아끼지 않았다.

“1967년 2월12일 시바가 처음 와서 이것저것 묻고 돌아갔는데,

3월 중순께 부인과 함께 다시 왔어요. 보충 취재를 위해서였지요.”

시바의 취재 방식은 매우 독특했다고 한다. 수첩 대신 스케치북처럼 큰 지도를 들고 다니며,

그 여백에 지렁이 달려가듯 알아볼 수 없는 글씨로 조금씩 보충해 메모해 나가는 식이었다.

아닌게아니라 신기해보일 법도 하다.

 

다시 두어 달 지난 5월 하순에 시바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심수관씨, 다 썼습니다.”

“뭘 쓰셨다는 겁니까?”

“당신과 나에시로가와 얘기 말입니다.”

“예에?”

심씨의 부인은 웃었다. 당신과 이 동네가 어떻게 소설의 소재가 되겠냐고 빈정대며 킥킥거렸다.

‘문예춘추’에서 나온 시바의 책을 찾으러 가까운 서점에 갔더니 두 권이 진열되어 있었다.

심씨는 두 권을 다 샀다.

혹시 창피한 대목이라도 있을까 봐 남이 보지 못하게 ‘증거인멸’ 차원에서 그랬다고 한다.

책을 안고 집으로 돌아와 숨죽인 채 자신의 라이프 스토리를 눈물을 글썽이며 읽었다.

 

심수관 14대는 시바에게 자신의 인생 목표와 도공으로서의 사업적 진로를 어떻게 하면 좋을지에

대해서도 물었다고 한다.

돌아가신 13대 심수관(14대의 부친. 1964년 4월1일 75세를 일기로 작고)의 유언을 소개하면서.

아버지가 임종하실 무렵 아들은 “다른 도예가들처럼 전람회를 열고 싶다”고 말했다.

아버지는 평소 전람회 따위를 열어 예술가인 척하는 것은 의미도 없고 가풍에도 맞지 않다며

반대해왔다. 그러나 아들은 재차 건의했다. 아버지는 쇠약해진 목소리로 말했다.

“우리 심가 십수대의 예풍(藝風)이 미약하다면 모르겠다만….”

나와 네가 만든 것을 포함해, 언뜻 보기에는 조상 대대로 그냥 물려받은 것 같아도

흙이 다르고 솜씨가 달라 다 개성이 있다.

그 한 대, 한 대가 모두 산봉우리가 되어 집안이라는 산맥을 형성하는 것 아니겠느냐. 그

봉우리 하나로도 훌륭한 인생이 되지 않겠느냐…. 그런 의미였다.

 

아들은 이미 전람회 출품을 권유받은 상태였다.

뭔가 아버지대와는 다른 길을 걷고 싶은 충동도 있었다.

“그렇다면 아버지, 저라는 존재는 무엇을 위해 살아가야 합니까.”

아버지, 모든 것을 가르치고 일깨우신 아버지, 저에게 삶의 빈 구석을 채울 길을 가르쳐주소서.

최후의 기도를 하는 심정으로 아들은 되물었다.

대답은 짧은 한마디였다.

“네 아들을 도공으로 만들어라. 내가 할일도 그것뿐이었고, 네가 할일도 그 것뿐이다.”

그가 시바에게 들려준 이야기는 여기까지였다.

 

그러자 시바는 아이디어를 줬다.

가업을 계승하라는 유언은 지키되,

전람회는 남과 함께 하지 말고 개인전을 개최해 활로를 열어야 한다는 충고였다.

이는 결코 아버지의 유언에 어긋나는 것이 아니며 새 시대의 조류에도 맞는 것이라는 취지였다.

“심 선생, 개인전을 여시오.

한 점에 샐러리맨의 한달 월급, 가령 30만엔쯤 되는 것을 만들어보시오.

그런 정도의 물건이 팔릴 만큼의 평판을 쌓으시오.”

그는 용기를 내어 후쿠오카에서 첫 개인전을 열었다.

그러자 시바는 부부동반으로 찾아와 ‘선전부장’이 되어줬다.

백발의 대작가가 들렀다는 것만으로도 홍보효과는 대단했다.

시바로서는 개인전을 권유한 데 대해 약간의 책임을 느꼈을 법도 하다.

TV 방송국에서 시바가 왔다고 취재해 방영하는 바람에 개인전은 대성공을 거뒀다.

원래는 7일 예정이었지만 사흘 만에 전시한 작품 50점이 매진됐다.

 

 

예술적 완성 이룬 12대

 

심수관가(家)의 기예적 완성은 12대 할아버지가 이룬 것이라고 한다.

그의 도예 솜씨와 경영수완은 대단했다.

메이지 유신이란 천황 중심주의, 국가주의로 무장하는 일이었다.

이 회오리바람 속에 나에시로가와 마을은 미야마(美山)로 이름이 바뀌고,

일본 제일주의에 발맞춰 조선 전통에도 제한이 가해진다.

폐번치현(廢藩置縣 · 번을 없애고 현을 설치한 조치)에 따라 번이 몰락하자

번의 보호를 받던 도공들은 시린 세상에 내던져졌다.

그 와중에 12대 심수관은 번에서 운영하는 도자기 공장(藩營陶瓷器處)의 주재자가 되어

기술적으로 완성의 경지를 개척했다.

특히 도자기에 아름답고 미세한 구멍을 뚫어 굽는 투조(透彫),

표면 그림을 입체화하는 부조(浮彫) 등의 기법을 개발했다.

이런 공적이 인정되어 상공장관의 공로상을 받고 황실에 그릇을 납품하기에 이른다.

 

1873년에는 오스트리아 만국박람회에 역작 대화병 한 쌍을 출품해 절찬을 받았다.

일본 국보인 높이 1m55cm의 이 대화병은 사면에 새겨진 사계절 그림이 너무나 정교하고 화려해

보는 이의 찬탄을 자아낸다. 12대의 타고난 창조성과 유연한 예술적 응용력이 배어 있는 작품이다.

 

그는 메이지 시대에 들어온 서양 사진에서 고층건물이나 교회를 보고 놀랐다.

기껏해야 2층 목조가 고작이던 일본에 비해 유럽의 건축양식은 그 높이와 크기가 경이롭기만 했다.

이처럼 커다란 건물 속에 놓인 도자기가 키가 작으면 주목도가 떨어진다.

도자기의 높이를 키워야 한다.

그러자니 김칫독이나 된장독을 만드는 항아리 기법을 응용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결론이 나왔다.

14대 심수관의 아들 15대. 본명은 심일휘다.

컬럼버스의 달걀 같은 발상이다.

 

한국의 명공 류해강도 이렇게 평가했다고 전해진다.

“항아리처럼 말아올려 높고 크게 만드는 기법은 한국에도 남아 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중국이나 한국에서는 이 기법을 일상용품을 만드는 데 쓰지, 미술품을 만드는 데 쓰는 것을 터부시해 왔다.

한국 도예가들이 까닭 모를 터부 때문에 스스로 손발을 묶고 있다가 머리가 유연하고 사고의 폭이 넓은 그에게 기선을 제압당한 셈이다.”

 

12대의 성공은 잇달아 오스트레일리아, 러시아, 미국 등지로 수출길을 트고, 세계적으로 사쓰마 도자기를 브랜드화하는 데 이바지했다.

1875년 번영도자기처가 폐지되자 12대는 사재를 털어 그 가마를 고스란히 인수, 나에시로가와 도자기의 부흥에 모든 것을 걸었다.

이처럼 전환기에 사쓰마 도자기의 명맥을 잇기 위해 몸부림친 그는 이제 ‘중흥의 조(祖)’로 받들어지고 있다.

 

 

혼불 되어 나타난 단군신령

 

나에시로가와에는 단군을 모시는 옥산궁이라는 사당이 있다. 1673년에 세워진 것이라고 한다. 1598년 피랍되어 끌려왔지만 그릇 굽고 먹고살기 팍팍했던 까닭에 그렇듯 늦어진 것이리라.

이 단군사당에는 ‘혼불’ 전설이 깃들여 있다. 그 옛날 도공 70여 명이 표착한 직후의 일이다.

어느 날 밤 바다 저편에서 혼불이 날아와 산꼭대기에 머문 채 며칠 동안이나 사라지지 않았다 한다.

점을 칠 줄 아는 이가 있어 점을 쳐보니 단군의 신령이 혼불이 되어 가엾은 일행을 보살피기 위해 백두산에서 여기까지 날아왔노라는 괘가 나왔다고 한다.

그래서 바로 그 혼불이 머문 자리에 사당을 지었다는 것이다.

 

심수관요(窯)의 전무격인 다카하마 아키노부(高濱昌信)씨의 안내를 받아 사당으로 향했다.

사당은 이미 일본풍 신사로 변해 있었다. 이름도 ‘옥산신사’로 바뀌었다.

입구에는 커다란 도리이(鳥居 · 신사 입구의 장식)가 서 있다.

2월이니 아직 겨울이건만, 짙푸른 아열대성 수목이 건물 주변에 들어서 있어

사당 안은 아무것도 식별할 수 없을 정도로 어두컴컴했다.

시바의 소설에는 ‘멀리 하늘이 그대로 넓게 열려 기리시마(霧島)의 산줄기가 보인다’고

묘사되어 있지만, 이후 40년 세월이 흐르는 동안 나무숲이 우거져 시야를 가렸다.

해마다 음력 8월15일, 한반도의 추석 때 도공들은 여기서 제사를 올렸다.

그들은 한복으로 차려입고 고국으로 돌아갈 수 있게 해달라고 기원했다.

 

오늘이 오늘(제삿날)이라
제물(祭物)도 차려놓았다
오늘이 오늘이구나 모두 함께 노세
오는 날 오는 날의 하루하루가
오늘 이날과 무엇이 다르리
해가 지고 해가 뜬다 오늘은 오늘
한세상 어느 때나 꼭 같은 그날
고수레 고수레 자나깨나 잊지 않으리라

 

 

1975년, 훗날 국회의원을 지낸 조일제 당시 오사카 총영사가 이 제사에 초대된 적이 있다고 한다.

조씨는 내게 “도공들의 제사는 일본식 마쓰리(축제)도 겸한 것이어서

400년 전 정유재란 때 굴비두릅처럼 엮이어 끌려오는 장면을 재연하는 춤도 있는데,

어찌나 실감나든지 눈물이 날 정도로 감동했다”고 말했다.

단군을 모시는 이 신사는 마을 도공들이 먼 여행을 떠날 때 반드시 들르는 코스였다고 한다.

여정의 변고를 피하기 위해 미리 단군 할아버지께 빌고 떠났던 것이다.

 

심씨가 처음으로 고국 방문길에 오른 것은 1974년이다.

서울대, 고려대, 부산대 미술사 연구자들의 초청에 따른 것이었다.

청와대에도 초대받아 박정희 대통령으로부터 만찬을 대접받았다.

아마 정치인이 아닌, 일반 ‘일본 국적자’가 일대일로 대통령 박정희를 만난 유일한 사람이 아닐까.

 

박 대통령은 몇 장의 지도를 펼쳐보이며 심씨 선조들이 피랍될 당시의 전투에 대해 들려줬다.

마치 육군대학에서 전술강의를 하듯 남원성 전투의 치열했던 상황을 설명했다.

심씨는 궁금한 것 한 가지를 물었다.

“한국의 박물관에 가니 창이나 칼 같은 무기를 구경할 수 없습니다.

일본 박물관에는 무기가 많은데 왜 한국에서는 무기를 전시하지 않습니까?”

박 대통령은 대답했다.

“아무리 훌륭한 무기라도 사람을 살상하는 도구일 뿐 결코 예술품이 될 수는 없는 거지.

박물관이나 미술관에 있는 게 오히려 이상한 것 아닌가.

꼭 보고 싶다면 육군사관학교 전시장에 가서 보게나.”

만찬이 끝나고 박 대통령이 막걸리를 마시냐고 물었다.

“네. 저도 막걸리를 좋아합니다.”

박 대통령은 흡사 형님 같은 말투로 “막걸리를 잘못 마시면 배탈이 나니 조심하라”며

술잔을 건넸다. 심씨는 넉살 좋게 받아넘겼다. 술이 거나해지자 심씨는 혈기가 발동했다.

이야기 끝에 노래가 화제가 되자 한 곡조 부르겠노라고 나선 것이다.

심씨는 만주군 출신인 박정희의 추억을 꿰뚫어보았다.

태평양전쟁 당시 ‘애창곡’이라고 할 군가 ‘보리와 병정’을 목청껏 불렀다.

 

산동(山東 · 중국의 산둥성)으로 인마(人馬)가 간다
산동은 있기 좋을까 살기 좋을까
멋진 한마디에 뒤로 돌아보니
너의 고향은 니가타(사도가시마)로군
(깎지 않은) 수염이 미소 짓는 보리밭

전우를 뒤로하고 길 없는 길을 가면
전장(戰場)에는 밤비 내리고
전진 마라, 가지 마라, 등 뒤로 들려도
바보소리 하지 말라며 다시 전진
병사 진군의 믿음직스러움

 

심씨는 조선 핏줄의 어리광삼아, 형님 앞에서 재롱 피듯, 그렇게 일본군가를 불렀다.

박 대통령은 사연 있는 ‘가수’의 한 곡조이기에 그저 미소로 경청했다.

심씨는 관저를 떠나면서 기분에 취해 너무 큰소리로 부른 게 아니었나 싶어 미안해했다고 한다.

 

박 대통령을 만나던 날 낮엔 서울대 에서 연설도 했다.

대학생들에게서 일제 36년 지배를 어떻게 생각하냐는 질문을 받고는 이렇게 답했다고 한다.

“한국에 와서 여러 차례 그 질문을 받았다.

지당한 얘기이고 과연 질문대로 (일본이 저지른 죄가 큰 것)이기는 하나,

거기에만 얽매일 경우 젊은 한국은 어디로 갈 것인가.

맞는 말도 지나치면 후퇴가 시작된다. 새로운 국가는 전진해야 하지 않겠는가?”

그리고 덧붙였다.

“여러분이 36년을 말한다면, 나는 370년을 말해야 하지 않겠나!”

그 말에 청중은 박수 대신 노래를 합창했다.

‘노란 샤쓰 입은 사나이’였다. 노랫말 중 ‘어쩐지 나는 좋아’가 젊은 학생들의 답사였을 것이다.

후일담이지만 이 노래는 일본에서도 한국인의 애창곡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1980년대 나카소네 야스히로 총리가 한국을 방문해 전두환 대통령과 만날 때 부른 노래가

바로 ‘노란 샤쓰 입은 사나이’였다. 나카소네는 차 안에 테이프를 넣고 다니며 애써 노래를 익혔고,

그 한 곡으로 좌중을 감동시켰다는 것이다.

 

심수관 14대가 필생의 사업으로 추진한 일이 하나 있다.

1998년, 납치 400년을 기념해 이른바 400년제(祭)를 연 것이다.

그것은 아버지의 유언이기도 했다.

아버지는 15대에게도 가업을 잇게 하라는 당부와 함께 조상과 후손들이 400년간 지켜온

도예기술과 업적을 세상에 알리는 400년제를 열어달라는 뜻을 남겼다.

유언을 지키기 위해 14대는 두 갈래 이벤트를 기획했다.

하나는 심수관가의 역대 작품을 모아 한국에서 전시회를 갖는 것,

다른 하나는 한국 남원의 불을 채화해다가 도자기를 굽는 것이었다.

 

 

400년 만의 귀향

 

“막상 기획을 해보니 결국 돈문제로 귀착되고 말았습니다.

얼추 계산해보니 7000만~8000만엔(7억~8억원)이 드는 것이었어요.

소중한 도자기를 포장해 비행기로 보내려면 수송비와 보험료가 이만저만이 아니고,

‘남원의 불’ 채화도 인건비가 적지 않게 소요되는 행사였습니다.

여기저기 말을 건넸지만 문전박대만 당했지요. 그래서 솔직히 집어치울까도 생각했습니다.

한데 집사람(1999년 작고)이 180도 다른 얘기를 하는 거예요.

‘왜 당신 선조 일을 하는 데 남의 돈 쓸 생각을 하냐, 우리 돈으로 해야지. 혼자서 하라’는 거였죠.

그 말을 듣는 순간 눈물이 났습니다.”

그때를 회고하는 순간 심씨의 눈가가 촉촉히 젖었다.

아내가 ‘조상과 가문의 일에 재산을 몽땅 털어넣어도 된다’고 나오니 너무나 고마웠다는 것이다.

   

1998년 4월 한국도자기 일본 전래 400년을 맞아 전북 남원에서 채취한 ‘조선의 불씨’가 대한해협을 건너 일본 가고시마현 구시키노시 시마비라 해안에 도착했다.

결국 이대순씨(전 의원, 전 경원대 총장)의 소개로 서울 광화문의 일민미술관에서 전시회를 열게 됐다.

 

이대순씨와의 인연은 멀리 1993년 대전엑스포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이씨가 대전 엑스포의 홍보위원장을 맡았을 때의 일이다.

이씨는 대전 엑스포 홍보를 위해 일본에 갔다가 재일 상공인들의 소개로 심수관씨를 만났고, 가고시마의 수관도원을 방문하게 된다. 거기서 선조들의 갓과 망건까지 정갈하게 보전하는 14대 심씨의 정성에 감동을 받았다.

이씨는 심씨에게 피랍 도공들의 후예들이 만든 도자기 작품을 대전 엑스포에 전시해줄 것을 권했다.

 

그렇게 해서 아리타야키(有田燒), 사쓰마야키(薩摩燒) 등 규슈 일대 도자기 명가들이 대전에 작품을 내놓았다. 이 무렵 심씨는 아버지의 유언과 400년제의 꿈을 이씨에게 넌지시 털어놓았다.

‘400년 만의 귀향 - 일본 속에 꽃 피운 심수관가 도예전’.

1998년 8월 일민미술관 전시회의 타이틀이다.

심씨는 이 전시회를 ‘귀국 보고전’이라 명했다.

 

140점이 전시되는 행사 첫날 한국 대통령이 참석했다.

“테이프 커팅을 하는데 김대중 대통령이 오셨습니다. 나로서는 상상도 못한 영광이었어요.

특히 김 대통령이 각별히 옆자리에 서게 하고 가위도 잡게 해 더욱 잊지 못합니다.

그런데 그분 말씀이 참 감동적이었습니다.

‘세계에 이름을 떨친 사쓰마 도자기는 한국 핏줄이 만들고 일본인이 키워서 여기까지 왔다.

얼마나 멋진 결합인가. 두 나라가 이 결합처럼 서로 힘을 보태고

윈윈 전략으로 미래를 향해 나아간다면 반드시 성공하고 말 것이다.’

짧지만 대단히 멋진 연설이었습니다.”

심씨는 “그런 김 대통령이니까 오부치 게이조 일본 총리와 함께

‘21세기를 향한 한일 파트너십 선언’을 만들어낼 수 있었던 것 아니냐”고 말했다.

 

남원의 불씨를 옮기는 행사는 그해 10월에 치러졌다.

당시 선조들은 납치되면서도 조국의 흙과 유약을 가지고 갔다.

나중에 다 떨어지자 도토(陶土)를 구하기 위해 가고시마 천지를 헤매게 된다.

그때 가지고 간 흙과 유약으로 구워낸,

일본 것이라고는 오로지 불만 써서 만든 도자기가 지금도 남아 있다.

이름하여 ‘히바카리’(‘오로지 불만’이라는 뜻) 다완이다.

 

이제 흙과 유약은 일본 것을 쓰고, 불만 한국 불로 굽는 400년제.

남원에서 시작하는 이벤트이므로 전라북도의 협력이 관건이었다.

황인성 지사가 앞장서서 도와주고 추진위원장을 맡아주었다.

물론 그 뒤에서 이대순씨와 이연택씨(전 대한체육회장)가 지원했다.

심씨도 이미 유명인사가 되었다.

일민미술관 전시회에 대통령이 참석하고

일본의 주요 언론사와 한국 신문들이 크게 소개했기 때문이었다.

 

일은 순조롭게 진척되는 듯했다.

그러다 뜻하지 않은 난관에 봉착했다. 남원의 유림이 들고일어난 것이다.

“불은 그야말로 우리의 혼인데 거저 줄 수 있는가.

왜놈들이 이 땅에서 전란을 일으켰고, 평화롭게 살아가는 도공과 농민을 납치해간 것 아닌가.

그렇다면 아무리 세월이 흘렀어도 사죄의 말 한마디 없이 불을 건네줄 수는 없는 노릇이다.

놈들은 이 땅의 무고한 백성들의 귀와 코를 베어 전공(戰功)의 징표로 삼기 위해

이총(耳塚 · 귀무덤), 비총(鼻塚 · 코무덤)을 만든 자들 아닌가.”

 

 

“사죄 없이는 불씨도 없다”

 

유림의 주장엔 한치도 틀린 게 없었다.

아무리 심수관이라는 도공 후손의 갸륵한 정성이 담긴 이벤트라 할지라도

일본측의 사과나 사죄의 말 한마디도 없이 공식적으로 불씨를 주는 행사는 반대한다는 것이었다.

부랴부랴 일본의 사죄 사절로 미야마의 자치단체 의회의장과 여성대표가 나섰다.

이들이 남원 향교동 만인의총에 배례하고 납치를 사죄하는 절차가 끝난 뒤에야

채화 봉송이 이뤄지게 됐다.

 

1998년 10월19일, 남원 교룡산 산신단에서 일곱 명의 선녀가 부싯돌로 ‘조국의 불’을 채화했다.

도공의 한을 달래는 무용에 이어 제사를 올리고 나서

최진영 남원시장이 ‘조국의 불’이 담긴 항아리를 심씨에게 건넸다.

항아리에는 ‘남원 도혼 신화로(薪火爐)’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신화로는 도공들이 끌려갔던 길을 따라

전남 구례와 광양, 경남 마산과 진주를 거쳐 부산으로 릴레이 되었다.

부산에서는 해양대 실습선 ‘한나라호’에 실렸다.

‘씩씩한 대한 건아들이 조국의 불을 운반하는 데 앞장서주었으면 한다’는

심씨의 희망에 따른 것이었다.

 

불씨를 실은 배가 가고시마의 구시키노항에 도착한 것은 사흘 뒤인 21일 오후 6시경.

NHK를 비롯한 방송 · 신문사 기자 30여 명이 열띤 취재경쟁을 벌였다.

한복 차림의 심씨 14대, 15대 부자가 실습선에서 불씨를 내려 나룻배에 옮겨 탔다.

석양을 배경으로 400년 전의 역사를 재현하는 풍경은 보는 이를 숙연케 하는 그 무엇이 있었다.

궂은 날씨는 어느덧 개어 있었다. 덕분에 미야마의 도원까지 순조롭게 불을 옮길 수 있었다.

“단군 할아버지가 도와주셨다!”

15대 심수관의 입에서 나온 말이었다.

아버지 14대가 이대순씨에게 말했다.

“나는 선대의 유언을 지켰습니다. 내 아들 입에서 ‘단군’이라는 말이 나왔어요.”

14대는 울먹이고 있었다.

 

이 마을에서 그해 11월19일 한일 양국 각료간담회가 열려

김종필 국무총리와 오부치 게이조 일본 총리가 ‘사쓰마 도자기 전래 400주년’ 행사를 참관하고

소나무와 벚나무를 기념으로 심었다.

“가고시마 역사에 없는 국가간 각료간담회가 저희 마을에서 열렸지요.

양국 외무장관을 비롯해 장관 수십명이 우리집 뒤편의 팔각정에 올라 차를 마시고 사진을 찍는

광경을 보면서 감회가 깊었어요. 역사란 무엇이며 문화란 무엇인가 새삼 생각해봤지요.”

심씨의 어조는 선대가 부여한 사명을 어느 정도 해냈다는 자부심에 가득찬 것이었다.

 

“이제 나에시로가와 사람들은 자부심이 대단합니다.

옛날에는 도쿄의 긴자 거리에서 고향사람을 마주치면 도망치듯 피하는 게 보통이었지요.

너무 깊은 시골 마을 출신인 걸 남들이 알까봐 창피해한 거죠. 지금은 반대입니다.

내가 도쿄 긴자에서 개인전을 열면 동향 출신 사장이 직원들을 데리고 와서

고향 사람 심수관이라고 자랑합니다.”

 

 

“도자기는 정치를 반영한다”

 

심수관가의 도자기는 일본적인 분위기를 풍긴다.

일본화에 흔히 나타나는 금색화와 채색화, 지극히 정치(精緻)하고 섬세한 조각과 투각(透刻)기술은

한국적이라고 하기에는 조선백자의 전통과 이어지지 않는다.

그래서 그가 자주 받는 질문이 있다. 실은 필자도 그것이 알고 싶어 묻고 말았다.

“왜 한국 핏줄이면서 일본적인 도자기를 굽는가.”

“도자기든 뭐든 모든 문화유산은 주어진 환경의 산물입니다.

도자기 역시 도토와 가마, 사람의 기술이라는 세 가지 요소가 합쳐져서 만들어지죠.

한국처럼 도토가 흔치 않은 가고시마 화산지대에 떨어져 주어진 흙을 살리는 방식을 쓸 수밖에

없었죠. 조선백자처럼 멋지고 하얀 도자기는 구울 수 없게 된 겁니다.”

그는 ‘일본인의 취향에 맞춰 상품화하다보니 일본화했다’고 직설적으로 말하지 않는다.

래서 나는 ‘일본의 번주를 상대로, 일본인 고객을 상대로 팔다보니 일본화한 것 아니냐’고

묻고도 싶었다. 하지만 묻지 않았다. 너무 잔혹한 질문 같아서 물을 수 없었다. 다만 이렇게 물었다.

“남원 도자기는 수백년 지나 쇠퇴했는데, 어째서 사쓰마야키는 세계적인 상표가 되었을까요.”

“일본이라는 나라는 한국과 다릅니다.

나라 전체가 번으로 나뉘어 다이묘(大名 · 번주)가 지배하는 봉건체제였지요.

번은 국경을 둔 개별적인 나라입니다. 그러므로 재료와 환경이 제한적이고,

그 번에서 얻을 수 있는 흙과 도토에 맞추어 기술을 집어넣어야 도자기가 됩니다.

태생적 비극성이라고 할까요. 그러면서도 번끼리의 경쟁이 대단했어요.

전쟁도 하고 국력경쟁도 하고 다이묘간 자존심 경쟁도 치열했고요.

도공들은 그런 환경에서 정성을 불태우며 자기를 굽고 살았습니다.

번(국가)끼리 균형을 이루는 안정사회의 다양한 경쟁이 빚어낸 경쟁력,

그것이 사쓰마야키건 아리타야키건 가라쓰야키건 살아남게 만든 원동력 아닐까요.”

 

심씨는 중앙집권의 전통이 강한 한국에선 자기도 왕조 단위로 바뀐다고 본다.

고려청자가 조선 건국과 더불어 조선백자로 바뀐 것을 한반도 정치의 특성으로 이해하고 있었다.

아버지(14대)의 생각을 이어받은 것일까.

아들 15대 심수관도 한 인터뷰에서 같은 취지로 이렇게 말했다.

“도자기는 정치를 반영합니다. 한국 도자기는 고려청자나 조선백자처럼 시대구분이 분명합니다.

과거를 강하게 부정함으로써 새로운 것을 창조하는 패턴입니다.

그러나 일본 도자기는 다릅니다. 그런 경향이 없습니다.

에도시대 번의 영향을 반영해 지역별로 특화해서 발전해가는 특징이 있습니다.

그래서인지 제가 보기에 한국 도자기는 힘이 넘치고 속도감이 있지만 다양성이 모자랍니다.

하지만 반대로 일본 도자기는 다양하지만 힘이 떨어지는 느낌입니다.”

 

 

납치 800년, 30대 심수관은?

 

아들 15대는 1959년생으로 와세다대 교육학과를 나왔다.

가업을 잇기 위해 대학졸업 후 교토 도공(陶工) 고등기술전문학교를 다시 마쳤다.

이탈리아에도 건너가 3년간 머물며 국립미술도예학교(Gaetano Balladini)를 졸업했다.

이탈리아에서 귀국한 지 2년 뒤에는

경기도 김일만(金一萬) 토기공장에 들어가 김칫독 만드는 공부를 한 적도 있다.

서른 살이 되던 1999년 1월15일, 그는 제15대 심수관 이름을 얻는 습명(襲名) 절차를 밟았다.

25명의 수관도원 가족을 먹여 살리는 한편 가업을 승계해 발전시켜 나가야 하는

무거운 책무를 지게 된 것이다.

 

직원수 ‘25명 정원’은 12대 때 정착된 것으로 더 번창하더라도 늘어나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한다.

14대는 말한다.

“12대 할아버지가 발견하고 체득한 분업의 적정선(適正線)이 25명이었지요.

인원이 많으면 많을수록 생산이야 늘고 쉬워지겠지요.

하지만 품질을 철저히 관리해가며 그릇 하나하나에 심수관 도장을 찍어 넣을 만큼의 신뢰를

손상시키지 않으려면 더는 늘릴 수 없다고 봅니다.”

아들 15대도 벌써 프로의 체취를 물씬 풍긴다.

“도자기는 보는 이와 만드는 사람의 거리감을 고려해 만들어야 합니다.

만드는 사람은 30cm 앞에서 만들지만 보는 사람은 1m 앞에서 관람하지요.

따라서 도공 자신의 거리감과 눈높이에 집착하지 말고

1m 너머에서 감상하는 관람객을 생각하며 제작해야 하는 것입니다.”

 

추적추적 비가 내리는 나에시로가와를 뒤로하면서 생각한다.

수관도원과 심수관의 이름은 언제까지 이어질까.

납치당한 지 800년이 되는 30대 심수관에 이르면 어떤 작품이 나올까.

그 미래에도 도자기는 예술로 존재할 수 있을까.

쌩뚱맞지만 14대에게 물어볼 걸. 아쉽다. 

 

 김충식 동아일보 도쿄지사장 seescheme@donga.com
 신동아 통권 547호-548호
 [열도의 한국혼] 468~481쪽 / 470~481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