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전쟁에 대비해 우표를 준비하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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곧 전쟁이 일어날지도 모르겠다는 걱정이 들 때
사람들은 생필품을 미리 사 놓는다. 쌀이나 라면, 양초와 같은 게 사재기의 단골 품목이다.
정부는 무엇을 준비해야 할까.
챙겨야 할 게 워낙 많아 일일이 꼽기도 어렵겠지만 우표를 충분히 확보하는 것도 그중 하나다.
지금이 아니라 과거,
우리나라가 아니라 덴마크에서 그랬다는 얘기다.
북유럽의 소국 덴마크는 실제 전쟁에 대비해 극비리에 비상 우표를 만든 적이 있다.
동서 냉전이 일촉즉발의 위기상황으로 치닫던 1963년, 정부 차원에서 세운 비상계획에 우표작전이 들어있었던 것이다.
덴마크는 섬 나라는 아니지만 우리처럼 3면이 바다로 둘러싸인 반도국가다. 전쟁이 일어나 우편 왕래가 어려워지면 물자를 공급하는 배 편이 끊기게 될 우려가 있다고
덴마크 정부는 판단했다. 그래서 유사시에도 우편서비스 만큼은
국가 전역에서 정상적으로 이뤄지도록 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여기서 나온 게 비상우표 작전이다.
비상우표 작전은 비상시에 쓰일 우표를 대량으로 찍어 비밀리에 저장해 놓는 개념이다. 이때 찍은 우표는 모두 2억장. 100장짜리 시트 20만개 분량이다.
덴마크 우정 당국은 이 우표를 보안차원에서 민간인쇄소에서 찍은 뒤 비밀꾸러미에 담아
본부와 지방우체국 8곳에 분산 보관했다.
우체국 한 곳에 시트 500장씩, 나머지는 수도 코펜하겐에 보관한 것이다.
꾸러미 안에는 이 우표의 용도와 목적을 적은 설명서와 함께
비상우표가 다 소진됐을 때 추가로 우표를 찍어낼 수 있는 인쇄판이 들어 있었다.
그러나 정부의 직접 명령을 받기 전에는 누구도 열 수 없게 만들어 놓았다.
작전에서 가장 중요한 게 보안인 만큼
이 우표를 발행한 사실은 물론 수송 · 보관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을 철저히 극비에 부쳤다.
비밀꾸러미를 받은 우체국의 우체국장도 그 속에 무엇이 들어있는지 알지 못했다고 한다.
그렇게 시간이 흘렀으나 우려했던 전쟁은 일어나지 않았다. 1980년대 들면서 기술 발달로 우표 없이도 우편물을 주고받을 수 있게 됐다.
덴마크 우정당국은 비상우표가 더 이상 필요 없다고 판단했다.
그러나 그렇다고 오랫동안 비밀에 부쳐온 비상우표의 존재를 고백하기도 어려웠다.
그냥 그 상태로 다시 얼마간 세월이 흘렀다.
문제의 우표가 세상에 알려진 것은 25년이 지난 1988년 2월이다. 당시 덴마크의 한 신문 칼럼니스트는 어디서 구했는지 비상우표의 사진을 신문에 싣고
“이것이 대체 무엇이냐”고 의문을 제기했다.
우표에 새겨진 글자는 덴마크어가 틀림없지만
덴마크 우정의 발행우표 목록에는 이 우표가 들어있지 않으니 이 무슨 미스터리냐는 것이다.
당시 우정 관계자들은 어떻게 된 영문인지 실제 모르거나 알아도 말을 할 수 없는 입장이어서
전말이 알려질 때까지 한동안 혼란에 빠졌다.
덴마크 우정 당국은 이 우표를 우표수집가 단체인 덴마크우취연맹에 선물로 줬다. 쓸모없는 우표는 폐기처분하는 게 원칙이지만
그에 앞서 우취연맹에 줄 테니 팔 수 있을 만큼 팔아서 우취발전 기금으로 쓰라고 한 것이다.
우취연맹은 우표 장당 평균 가격을 30크로네(6200원) 정도로 잡고
1991년 3월부터 그해 12월 말까지 한시적으로 판매에 나섰다.
이때 팔려나간 게 14만6000여 장.
그외 일부 우정박물관에 보내진 것을 빼고는 나머지 비상우표는 전량 폐기처분됐다.
비밀 인쇄된 지 28년만이다.
이로써 비밀우표 작전은 종언을 고했지만 작전이 세워지기까지 상세한 내막은 여전히 베일에 싸여 있다.
문서 비밀보존 기간이 끝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여기서 다른 의문 하나가 떠오른다. 비상우표 작전을 세운 나라가 과연 덴마크 하나뿐일까,
다른 나라에서도 유사한 작전이 실행됐는데 비밀해제가 되지 않아 모르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점이다.
덴마크에서도 언론이 문제 제기를 하지 않았다면 정부가 먼저 나서서 관련 사실을 고백했을지 의문이다.
그렇다면 지구상 어느 외딴 곳 밀폐된 공간에 우표 뭉치가 잠자고 있는 것은 아닐까. - 2009 08/25 위클리경향 839호 |
(2) 타이타닉호의 우편영웅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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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2년 4월15일 북대서양 바다에 침몰해 1513명의 사망자를 낸 타이타닉호.
얼마전 그 타이타닉의 마지막 생존자 밀비나 딘이 97세의 나이로 숨졌다는 외신보도가 나왔다.
딘 할머니는 사고 당시 생후 두 달밖에 안 된 아기여서 아무것도 기억할 수 없지만
706명의 생존자 가운데 최후의 증인이라는 의미가 있었다.
마지막 생존자마저 저세상으로 떠나면서 인류 최대의 해양 재난은 역사에 묻힌다.
타이타닉의 비극은 영화 <타이타닉> 덕분에 모르는 사람이 없다. 주연 배우 리어나도 디 캐프리오와 케이트 윈즐릿이 선상에서 양팔을 벌려 사랑을 약속하는 장면은
많은 사람의 기억에 타이타닉의 상징처럼 뚜렷이 남아 있다.
영화가 아니어도 타이타닉은 무수한 화제를 안고 있다. 당시 세계 최대 규모로 지어진 초호화 선박이라는 점,
신(神)도 침몰시킬 수 없을 것이라고 해 불침함(不沈艦)이라는 별명이 붙었으나
첫 항해에서 빙산에 부딪쳐 맥없이 가라앉았다는 점,
그 미스터리를 풀기 위해 많은 과학자들이 연구에 연구를 거듭했고
미국과 프랑스의 합동조사대가 침몰 71년만에
수심 4000 부근의 해저에 가라앉아 있는 타이타닉호의 위치를 찾아냈다는 점,
몇차례 의회 청문회에도 불구하고 풀지못한 수수께끼가 널려 있다는 점 등 흥미를 끄는 요인이 많다.
그런데 정말 감동적인 영웅 이야기는 세상에 그다지 알려져 있지 않다. 타이타닉호에 실린 편지 꾸러미를 목숨 걸고 지키려 한 우편 영웅에 관한 이야기다.
타이타닉호의 정식 명칭은 R.M.S Titanic이다. 여기서 RMS는 영국 우편 당국인 ‘로열 메일의 배’란 뜻을 담고 있다.
타이타닉호가 여객선이지만 로열 메일과 계약을 맺고 해외로 가는 편지도 실어날랐던 것이다.
미국 뉴욕을 향해 가던 타이타닉호에는 등기우편물 200개를 포함해 3364개의 우편행낭이 적재됐다. 이 우편행낭의 처리를 위해 미국 우편원 3명, 영국 우편원 2명이 탑승했다.
모두 우편원 생활 15년 이상 된 베테랑이었다.
이들의 임무는 배가 항해하는 동안 행낭 안에 들어 있는 편지를 행선지별로 분류해 소인을 찍는 일이다. 배가 목적지에 도착하면 그 즉시 배송될 수 있도록 조치를 해 놓아야 하는 것이다.
운명의 그날은 미국 우편원 오스카 스콧 우디의 44번째 생일이었다. 5명의 우편원들이 한자리에 모여 ‘해피 버스데이’를 부르며 축하파티를 하고 있던 중
배가 빙산에 부딪치면서 심하게 흔들렸다.
사고가 났음을 직감한 이들은 곧장 우편행낭을 쌓아둔 방으로 내달렸다.
그곳에서 등기우편물 행낭을 꺼내 갑판 위로 옮기기 시작했다.
물이 발목 위로 점점 차올라 위험이 고조됐지만 이들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고객의 우편물을 지켜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다.
생존자 중 한 명인 선원 앨버트 타이싱어는 당시 순간을 이렇게 증언했다.
“나는 그들에게 빨리 작업장을 떠나라고 소리쳤다. 조금만 지나면 물이 들이쳐 탈출구를 막거나 배가 폭발할지도 모르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머리를 흔들며 하던 일을 계속했다. 나는 더이상 그들을 보지 못했다.”
이들의 영웅 스토리를 전시해 놓고 있는 미 국립우편박물관에는 사고 1주일 뒤 발간된 신문기사도 있다. 거기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상황이 점점 위급해지자 그들(우편원)은 선원들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중요한 우편물을 갑판 위로 옮기게 해달라고.
그러고는 마지막까지 일을 계속했다. 그들은 모두 숨졌다.”
생일이 사망일이 된 우디의 시신에서 우편물의 행선지를 표시해 주는 전표가 발견됐다. 현장에서 목숨을 바쳤음을 보여주는 유품이다.
이들이 목숨 바쳐 지키려 한 우편물 780만통도 바다 손님이 됐다.
일부 우편행낭은 구조대가 올 때까지 조난자들을 물 위에 떠있게 해주는 역할을 하기도 했다.
사고 당시 미국 우정청장이던 프랭크 히치코크는 “이들이 보여준 용기는 우정청 전체의 자랑”이라고 말했다.
영국은 배가 출발한 곳에 명판을 세워 이들의 정신을 기렸다.
남의 나라에서 일어난 사건이라고는 해도 ‘비가 오나 눈이 오나’라는 모토를
세계 공통으로 가지고 있는 집배원들로서는 자부심을 가져도 좋은 이야기인 것 같다.
- 2009 09/22 위클리경향 843호
(5) 우정주권 침탈 100년
![]() 조선총독부 체신국과 한국이 일본영토로 표시된 일본우표
2010년은 조선이 일본에 강제 병합된지 100년 되는 해다. 이를 계기로 100년 전 경술년(庚戌年)에 일어난 국치(國恥)의 의미를 되새기고
한국 근세사 100년의 행보를 돌아보는 역사 기획물이 새해 벽두 신문·방송에 쏟아지고 있다.
경술국치로 우리 우정(郵政)은 어떻게 됐을까. 나라가 통째로 일본에 넘어간 마당에 우정 주권이라고 성할 리 만무하다.
그러나 일제 치하 우정의 실상은 그다지 알려져 있지 않다.
우편은 19세기 제국주의 국가가 식민지를 통치하는 데 있어 중요한 관리 대상 인프라였다. 피식민지 국민의 동향을 파악하고 언제 터질지 모르는 항거를 조기에 억제하려면
우체국 조직을 활용한 첩보 수집이 다른 무엇보다 효과적이기 때문이다.
일제가 1910년 조선 병합과 더불어 신속하게 우체국 장악에 나선 이유다.
당시 조선에는 독자적인 우편법규가 마련돼 있었다. 근대우편제도가 재개된 1895년에 칙령 125호로 우체사관제(郵遞司官制),
칙령 124호로 우체규칙을 각각 공포하고 우체물의 종류와 요금, 우표, 우체물 발송법, 등기우체물,
벌칙 등 80개 조항의 우편법규를 갖춰 놓고 있었다.
1984년 정부가 펴낸 <한국우정100년사>에 따르면 일본은 조선을 삼킨 뒤 이 법규를 전면 폐지했다. 그리곤 일본에서 사용하는 우편법을 그대로 가져와 대체 시행하면서 우편용어를 일본식으로 바꿨다.
그때까지 사용하던 ‘우체’(郵遞)라는 말을 ‘우편’(郵便), ‘등기’(登記)를 ‘서류’(書留)로 바꾸는 식이었다.
편법에 이어 우편물발송 및 배달 등에 관한 세부사항을 담은 우편규칙을 제정,
식민지 우편의 틀을 갖춰 나갔다.
조직의 물갈이도 실시했다. 우편소장의 자격 요건을 ‘자기 자산 300원 이상인 자’로 정해 한국인 우편소장의 채용을 사실상 봉쇄하면서 우체 당국의 간부 자리를 일본인으로 바꿔 나갔다.
병합 1년이 됐을 때 통신관서 직원 3185명 가운데 한국인은 250명에 불과했다는 기록이 있다.
경술국치로 조선이 패망했지만 나라의 주권이 일본에 넘어간 것은 사실 그 이전이다. 우정 주권도 1905년 4월 외무대신 이하영과 일본공사 하야시 곤스케 사이에 체결된
‘한 · 일통신기관협정’으로 상실했다. 이 협정은 제1조에서 한국의 우편 · 전신 · 전화사업의 관리를
‘일본 정부에 위탁한다’고 적고 있다. 당시 통신 당국의 책임자인 장화식이 이 협정을 보고
“통신은 나라의 이목(耳目)이다. 이목이 없으면 사람이 어찌 사람이겠는가”라고 한탄했다는 게
실감나는 대목이다.
한 · 일통신기관 협정이 체결된지 석 달 만에 일본은 조선의 우표 발매를 금지시켰다. 대신 협정 체결을 기념하는 우표를 발행했다.
일본은 이 우표를 첨부한 한국우표첩을 발행해 조정과 각 도 관찰사, 군수, 각국 공관 등에 보내
한 · 일 통신사무의 통합을 공표했다.
우표가 주권 국가의 상징이라는 것을 당시에도 일본은 잘 알고 있었다는 얘기다.
이미 발행된 조선의 우표는 4년의 유예기간을 거쳐 사용을 금지시켰다. 일본에서 발간된 <조선근대우편사>(미즈하라 메이소 저)에 따르면
유예 기간에 일본이 거둬들인 조선 우표는 951만7559장이다.
어떤 어려움이 있더라도 조선 우표의 싹을 자르려고 한 것이다.
1909년 8월 31일 이후 우리 땅에서 편지를 한 장 부치려 해도 일본 우표를 붙여야만 했던 것이다.
체국 관서 역시 일본에 넘어갔다. 일본은 1905년 5월 한성우체총사(지금의 우정사업본부격)를 손에 넣은 뒤
7월 2일 강계 우체사(우체국의 당시 명칭)를 마지막으로 385개 전 우체국을 남김없이 인수했다.
여기서 기억해야 할 것은 이 협정 체결 이전에 일본의 우체국이 한국에 수십개 설치 · 운용되고 있었다는 점이다.
일본 거류민의 편리를 위함이라는 이유를 댔지만
멋대로 남의 나라에 우체국을 설치하고 우편물을 배송한 명백한 불법이다.
조선 당국은 일본 우편국의 철폐를 몇차례 요구했으나 번번이 묵살됐다고
<한국우정100년사>는 적고 있다. 일제의 침략이 우체국으로부터 비롯됐다는 비극의 역사인 셈이다. - 이종탁 경향신문 사회에디터 jtlee@kyunghyang.com - 2010 01/12ㅣ위클리경향 858호 ⓒ 위클리경향 & 경향닷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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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중국우표가 5억7000만원에 팔린 까닭
![](http://img.khan.co.kr/news/2010/01/18/20100118001485_r.jpg)
세계적으로 비싼 우표는 거의 에러우표다.
최근 홍콩 경매시장에서 또 한 번 이런 사례가 나왔다.
이번에 대박을 터뜨린 우표는 중국에서 문화혁명이 한창이던 1968년에 발행된 것이다.
그러나 이 우표가 서울의 아파트 한 채 값에 팔린 이유는 명작이어서가 아니다.
우표디자인에 오류가 있다고 해서 다 거둬들이는 것은 아니다.
이번 문화혁명 우표의 오류는 민감한 영토 문제다.
제작 실수를 한 우표 디자이너는 어떻게 됐을까.
그렇다면 거액을 주고 우표를 손에 넣은 사람은 과연 누구일까.
- 이종탁 경향신문 사회에디터 jtlee@kyunghyang.com
- 2010 01/26 위클리경향 860호ⓒ 위클리경향 & 경향닷컴
(7) 아이티와 도미니카의 우표전쟁
![](http://img.khan.co.kr/newsmaker/861/66_a.jpg)
아이티와 도미니카의 국경 분쟁을 부른 지도우표(왼쪽)와
아이티가 적십자 모금을 위해 발행한 우표.
요즘 아이티 현지 참상을 전하는 TV 뉴스를 보면
현재 아이티 국민은 95%가 흑인이다.
물론 이들이 이스파니올라 섬의 원주인은 아니다.
같은 섬에 살지만 도미니카 공화국의 인종은 아이티와 다르다.
흑인 독립국가가 된 아이티는 1822년 도미니카를 침공, 22년 동안 식민 통치한다.
아이티 내정 또한 안정된 적이 없다. 잦은 지진과 태풍 피해, 독립 이후 34번 일어난 쿠데타,
놀라운 것은 이런 아이티가 세계 수준급의 우표를 발행해 왔다는 사실이다.
이처럼 우표를 중시하다 보니 우표 주권을 놓고 도미니카와 싸움을 벌인 적도 있다.
이처럼 앙숙 관계인 아이티와 도미니카가 이번 지진 참사 지원을 계기로 화해할 수 있을지 주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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