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주짱의 하늘꿈 역사방

알아가며(자료)

팜파탈(femme fatale) 미실

Gijuzzang Dream 2009. 8. 30. 00:26

 

 

 

 

 

 

 

 희대의 팜파탈 미실


1500년 만에 화려하게 부활한 살인미소

 

 

 

 

 


요즘 안방 드라마의 화제는 단연 고현정이 연기하는 ‘미실’이다.

타고난 외모와 교태로 1500년 전 신국 신라를 주무른 것으로 알려진 미실은

뜻밖에도 실존 여부가 불명확한 인물.

웃으면서 칼을 찌르는 ‘살인미소’ 여인을 둘러싼 궁금증을 풀어본다.


 

 
 

드라마 ‘선덕여왕’에서 미실역

(탈렌트 고현정)

요즘 방영되는 역사 드라마 ‘선덕여왕’이 폭발적인 인기를 끌고 있다. 그동안 중국의 동북공정에 대항해 주몽, 광개토대왕, 연개소문, 대조영 등 강한 남성 영웅을 주인공으로 한 마초 드라마가 대세를 이뤘지만 최근 TV 드라마는 강한 여성성을 부각시키며 여성의 사회 진출에 따른 가부장사회의 쇠락을 보여주는 내용이 많다.

여기에 ‘선덕여왕’도 가세했다

 

7월7일 방영된 14회분에서 ‘선덕여왕’은 마(摩)의 시청률로 불리는 30% 벽을 돌파했다. 사실 이처럼 가파른 고공행진은 주인공인 선덕여왕(585?~647, 재위 632~647)이 아닌 희대의 ‘팜파탈(femme fatale · 요부)’인 미실(美室 · 547?~621?) 덕분이다.

 

드라마에선 아직 덕만(선덕여왕의 본명)이 어린 상황이고,

이 틈을 타서 농염한 여인으로 등장한 미실의 치명적이고 고혹적인 자태와 카리스마에

시청자들이 빨려들고 있는 것이다.

 

 

‘화랑세기’에만 전하는 인물

 

그런데 미실은 누구인가.

정사(正史)인 <삼국사기>와 일사(逸事)인 <삼국유사>에는 언급되지 않지만

성덕왕 때 진골 출신 역사가 김대문(金大問)이 쓴 <화랑세기(花郞世記)> 필사본에

전하는 신라 최고의 경국지색으로 신라 왕실의 혼인 인맥인 인통(姻統) 중 하나인

대원신통(大元神統)을 대표하는 색공지신(色供之臣)이다.

여왕도, 왕후도 아닌 미실이

타고난 미도(媚道 · 방중술)와 미소(媚笑 · 아양을 떨며 웃는 웃음)로

신국(神國) 신라를 주물렀다는 게 오늘날 우리에게는 쉽게 다가오지를 않는다.

 

더구나 ‘선덕여왕’에서 사극(史劇)에 처음 도전해 미실 역을 맡은 고현정의 변신은

시청자에게 파격적이고 신선한 감동을 준다.

‘여명의 눈동자’(1991) 안명지 역, ‘모래시계’(1995)에서 윤혜린 역에 익숙한 시청자에게

고현정은 청순가련한 이미지를 과감하게 벗어던지고 국정을 농단하고

화랑의 막후 실력자로서 웃으면서 칼을 찌르는 소리장도(笑裏藏刀)로

살인미소(殺人媚笑)의 절정을 보여주고 있다.

 

그런데 화랑은 누구이고

한창 진위논쟁 중인 <화랑세기>는 어떤 역사서이며, 미실은 어떤 인물인가.

<삼국사기> 설총 열전을 펼치면

끄트머리에 김대문에 대해 다음과 같이 간략히 소개돼 있다.

 

“김대문은 본래 신라 귀문(貴門)의 자제로서 성덕왕 3년에 한산주 도독이 되었다.

전기 약간을 지었는데,

그의 <고승전(高僧傳)> <화랑세기> <악본(樂本)> <한산기(漢山記)>는

아직도 남아 있다.”

 

이 기록을 근거로 살펴보면

김대문이 성덕왕 3년(704)에 한산주(경기도 광주)의 지방장관인 도독(사실은 총관)이

되었다고 하니 그가 살았던 시기는 신문왕대(재위 681~692)~성덕왕대(재위 702~737)로

통일 후 전제왕권 확립기로 보인다.

 

김대문은 위 4권 외에도 거서간, 차차웅, 이사금, 마립간 등의 신라 고유 왕호와

불교 수용 사실을 수록한 <계림잡전(鷄林雜傳)>을 저술했다.

김대문은 국가가 주도한 관찬 사서가 아닌 개인의 독자적인 의지에 따른 역사 서술을

한 인물로, 우리나라 최초의 역사가로 볼 수 있다.

 

고려 인종 23년(1145)에 김부식이 편찬한 <삼국사기>에는

설총, 강수, 최치원 등 유학자의 열전은 있지만 김대문의 경우 독자적 열전이 없다.

‘바보 온달’과 여성인 ‘효녀 지은’도 삼국사기에 열전을 갖고 있는데

진골 경주 김씨인 김대문이 열전에 누락된 것은 미스터리가 아닐 수 없다.

이는 당시 대다수 유학자가 성당문화(盛唐文化)에 심취해 있을 때

유독 김대문은 군계일학으로 신라의 한문학을 주체적으로 펼쳐나갔기 때문이 아닐까.

이러한 그의 캐릭터가 12세기 금(金) 압박기에 유교보수사관의 시각으로

<삼국사기>를 편찬할 때 결격사유가 되지 않았을까 유추해 본다.

 

여하튼 <고승전>은 고승의 전기를 다루었고,

<화랑세기>는 신라사의 빛인 화랑들을 기록했으며 <악본>은 음악(예악)을 다루었다.

<한산기>는 한산주의 인문지리를 기술했을 것으로 짐작된다.

특히 <화랑세기(681~687년 저술)>는 그 전후의 인물도 다수가 포함됐을 것이나

신라 진흥왕대로부터 통일을 완성한 문무왕대까지의 화랑들을 소개했으리라 추측된다.

 

 

‘화랑은 요즘의 F4’

 

<삼국사기> 진흥왕 본기 37년(576) 기사를 보면

화랑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봄에 비로소 원화(源花)를 받들었다.

처음에 임금이나 신하들이 인재를 알아낼 수가 없는 것을 결함으로 여겨

친구들끼리 여럿이 모여 놀도록 하고 그들의 행동을 살펴본 후 천거하여 쓰기로 했다.

이리하여 드디어 예쁜 여자 둘을 골랐는데

하나는 남모(南毛)라 부르고 다른 하나는 준정(俊貞)이라 불렀다.

두 여자가 미모를 다투어 서로 질투하다가 준정이 남모를 자기 집으로 유인해

억지로 술을 먹여 취하게 하고 그를 끌어내어 강물에 던져 죽였으므로

준정은 사형을 당하고 무리에 가담한 사람들은 해산하고 말았다.

그 후 다시 얼굴이 예쁘게 생긴 남자를 택해 곱게 단장을 시키고

이름을 화랑(花郞)이라 불러서 받들었다.…(중략)…

김대문의 <화랑세기>에 말하기를 ‘어진 재상과 충신이 여기로부터 나고

좋은 장수와 날랜 군사가 이로부터 생긴다(賢佐忠臣從此而秀 良將勇卒 由是而生)’

라고 하였다.

최치원 <난랑비> 서문에 이르기를

‘우리나라에 현묘한 도가 있으니 이를 풍류(風流)라 하였다.

이 교를 창설한 내력은 ‘선사(仙史)’에 자세히 밝혀져 있으니

실상인즉 유불선(儒佛仙) 3교를 포함하여 인간을 교화하는 것이다.…(중략)…

당나라 영고징의 ‘신라국기’에 이르기를 ‘귀인 자제 중에 고운 자를 택해 분을 발라

화장을 시키고 이름을 화랑이라 불러 나라 사람들이 모두 떠받들어 섬겼다’라고 했다.”

 

김대문이 지은 <화랑세기> 필사본의 일부.

이러한 사실을 토대로 봤을 때

화랑은 <삼국유사>에 나오는 꽃 같은 여자인 화랑(花娘)보다는 오늘날 드라마 ‘꽃보다 남자’에 나왔던 ‘F4’와 같은 귀공자였던 것 같다.

 

김대문의 저술들은 김부식이 <삼국사기>를 찬술할 때까지 남아 있었음이 분명하나 그 후 사라져 전하지 않는다고 알려져왔다.

 

그런데 1989년 2월 1300여 년 만에 부산에서 <화랑세기> 필사본(발췌본)이 발견,

이어 1995년 4월에 또 다른 <화랑세기> 필사본이 공개됐다.

<삼국사기>에는 <화랑세기(花郞世記)>라고 나오나

1989년 발췌본은 <화랑세기(花郞世紀)>로 표기되었고

1995년 필사본은 앞부분이 없어 제목을 확인할 수 없다.

 

그러면 <화랑세기> 필사본은 어떻게 발견되었을까.

<화랑세기>의 원 소장자는 일제강점기 궁내부 왕실도서관에 사무촉탁으로

근무했던 박창화(朴昌和 · 1889~1962)인데,

그가 일본 황실 문서 보관창고인 정창원에서 일제가 약탈해 간 <화랑세기> 원본을

보고 필사를 했다는 것이다. 박창화는 한국 역사학계의 전설적인 기인으로

6·25전쟁 이후에는 충북 괴산중고등학교에서 역사 교사로 근무했다고도 한다.

 

1995년 <화랑세기> 필사본이 서강대 이종욱 교수(현 서강대 총장)에 의해

번역 출간되면서 <화랑세기>의 실체가 밝혀지고

그 신빙성을 놓고 진위논쟁이 학계에서 뜨겁게 진행됐다.

진본을 주장하는 쪽에서는 잃어버린 신라사를 복원하게 됐다고 고무되었으나,

위작(僞作)이라고 주장하는 쪽에서는 성애소설이라고 매도하고 있다.

여하튼 <화랑세기> 필사본의 내용이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교태, 가무, 방사 갖춘 요부

 

<화랑세기>는 진흥왕 원년인 540년 - 신문왕 원년인 681년까지 140년에 걸쳐

왕이 아닌 화랑의 우두머리인 풍월주(風月主) 32명의 전기 인데,

1세 풍월주 위화랑(魏花郞)에서 32세 풍월주 신공(信功)까지 세보(世譜)를 밝히면서

진골정통(眞骨正統), 대원신통 또는 가야왕실 계보 등을 언급하고 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화랑세기>에 20세 풍월주인 예원공(禮元公)의 아들인

오기공(吳起公)이 김대문을 낳았다고 기술한 점이다.

 

<화랑세기>를 토대로 김대문의 가계를 정리하면

내물왕-미해-백흔공-섬신공-위화랑-이화랑-보리공-예원공-오기공-김대문으로

이어진다.

그중 위화랑이 1세 풍월주, 이화랑이 4세 풍월주, 보리공이 12세 풍월주,

예원공이 20세 풍월주, 오기공이 28세 풍월주였다.

그야말로 김대문은 풍월주 가문으로

<화랑세기>를 저술할 수 있는 모든 조건을 갖추고 있었다.

 

<화랑세기> 필사본에 가장 많이 등장하는 여인은 단연 미실인데,

미실은 진흥왕 8년(547)에 옥진(玉珍 · 미실의 외할머니)의 딸인 묘도(妙道)와

법흥왕의 외손자인 미진부(未珍夫) 사이에서 태어났다.

<화랑세기> 11세 풍월주 하종조를 보면 옥진의 꿈에

칠색조가 묘도에게 들어가는 것을 본 후 묘도가 임신해 미실을 낳았다고 한다.

 

<화랑세기>는 미실의 아름다움에 대해

“용모가 절묘하여 풍만함은 옥진을 닮았고,

명랑함은 벽화(碧花 · 소지왕의 후궁)를 닮았고,

아름다움은 오도(吾道 · 옥진의 어머니)를 닮아서 백화(百花)의 영험함으로 뭉쳤고,

세 가지 아름다움을 모았다고 극찬하고 있다.

옥진이 ‘이 아이는 오도를 부흥시킬 만하다’고 말하고,

좌우에서 떠나지 않으며 교태를 부리는 미도와 가무를 가르쳤다.

태후의 명으로 세종의 궁으로 들어가려 할 때 옥진이 근심하여

‘내가 너를 가르친 것은 장차 너의 숙모의 잉첩이 되게 하려는 것이지,

어찌 전군을 섬기라고 한 것이겠느냐’하니,

미실이 말하기를 ‘빈첩의 도는 색공에 있는데, 어찌 제(帝)를 받들지 못하겠습니까’

하였다. 옥진은 크게 기뻐하여 등을 어루만지며 말하기를

‘이 아이는 족히 미도를 말하니 나는 근심이 없다’라고 했다."

 

교태와 가무, 방사 이 세 가지 조건을 모두 갖춘 미실은

왕과 왕비, 풍월주와 관계를 맺으면서 자신의 영역을 확대시켜나갔다.

 

 

신통력도 발휘

 

더구나 드라마 ‘선덕여왕’ 13회분에 나오는 기우제 장면은

미실의 신통력을 유감없이 보여준다. 진평왕이 기우제를 올려도 내리지 않던 비가

미실이 기우제를 올리자 쏟아지기 시작했다.

 

그런데 미실이 무슨 재주로 천기를 읽었을까.

바로 ‘사다함의 매화’라는 책력(달력)을 가졌기 때문이다.

고대국가에서는 천명사상(天命思想)에 따라

천문(天文)은 하늘의 뜻을 묻는다는 의미로

정치적 안정과 천재지변의 상관관계가 매우 중요한 만큼

미실은 책력을 이용해 왕을 능가하는 신성불가침의 신통력을 보여줬다.

 

사실 삼국시대에는 천문학이 발달했는데

백제는 중국 남조 송(宋)의 역법인 원가력(元嘉曆)을 수입해 활용했음이

무령왕릉 매지권(買地券 · 토지거래증서)에서 확인되고 있고,

미실이 백제를 통해 책력을 구입했을 개연성은 충분히 있다.

 

미실이 살던 당시 신라는 유교적 금욕주의가 안착되기 전으로

성(性)문화가 상당히 개방적이라, 마복자(摩腹子 · 임신한 여자가 보다 높은 지위의 남자에게 사랑을 받은 후 낳은 아들), 근친혼, 형사취수제, 자매혼 등이 성행했다.

미실은 이사부의 아들 세종과 결혼했으나 일찍이 터득한 방중술로

진흥왕의 태자인 동륜, 5세 풍월주인 사다함, 7세 풍월주인 설원랑과 관계를 맺었다.

또 진흥왕, 진지왕, 진평왕 3대에 걸쳐 진흥왕을 유혹하고,

진지왕을 폐위시켰으며, 열세 살 소년 진평왕의 동정을 빼앗으며

색공으로 신라를 자신의 치마폭에서 주무른 ‘팜파탈’이었다.

 

또한 미실은 여러 왕실과 풍월주와 관계를 맺어 여러 명의 자식을 두었는데

진흥왕과의 사이에서 수종과 난야, 반야공주,

동륜태자와의 사이에서 애송공주, 세종과의 사이에서 목종과 하종,

설원랑과의 사이에서 보종, 그리고 아버지를 모르는 딸 애함 등을 낳았다.

미실의 출산은 권력을 더욱 확고하게 유지하는 방편으로 작용해

색공으로 많은 아이를 낳으면, 나중에 그들이 자라

왕실의 패밀리가 되거나 풍월주가 되었다.

 

 

신라를 치마폭에서 주무르다

 

당시 미실의 권력이 얼마나 막강했는지를 보여주는 한 사례로

미실의 종자매인 윤궁(允宮)이 골품이 낮은 문노(文弩)를 마음에 두자

진지왕을 폐위시키는 데 공을 세웠다는 이유로

신분이 미천한 문노를 아찬 이상의 진골로 승격시켰다.

이후 문노는 8세 풍월주가 되었다.

 

그러나 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이라 했던가.

미실의 아들 11세 풍월주 하종과 동생 보종의 불화로 세력이 점차 약해지고

대원신통이 진골정통에게 밀리면서 미실의 힘도 약화되었고

역사의 중심이 진골정통인 만호태후와 가야계의 거두인 김유신으로 옮겨가는

추세였다.

그러던 중 김유신이 15세 풍월주로 있던 612년부터

미실의 막내아들인 보종공이 16세 풍월주를 마치던 621년 사이에

미실은 70세를 전후해 세상을 떠났다.

 

<화랑세기>에 나타난 미실의 삶은

그야말로 권력과 사랑을 추구한 집념이 강한 여성이지만

드라마는 미실을 냉혹한 악녀 분위기로 몰아

선덕여왕과 선악 대립의 마니교적 이원론으로 전개되고 있다.

 

2005년 소설 ‘미실’(문이당)로 미실을 널리 알린 김별아씨는

최근 ‘주간동아’(691호)와 한 인터뷰에서

“나(소설)의 미실과 드라마 속의 미실이 전혀 다르다”면서

“드라마에서는 미실의 캐릭터를 악녀처럼 다룬 것 같다. 그렇게 해석할 수도 있겠지만,

내가 해석한 미실은 고려의 불교, 조선의 유교가 확립되기 전

삼국통합 이데올로기를 가장 잘 구현한 정치적 인물이면서 사랑의 여인이다”라고

규정했다.

 

김씨는 또 ‘주간동아’ 694호에서

“미실은 본질적인 여성 그 자체로 성녀이면서 요부이고, 어머니이면서 정부(情婦)다.

그동안 문학에 등장했던 여성들은 성녀 아니면 창녀로 구분됐지만,

나는 모든 여성이 이 두 가지 측면을 다 갖고 있다고 본다.

모성에 대한 욕망도 있지만, 성적 매력에 대한 갈망도 있고,

사회적 성공을 꿈꾸면서도 한 남성에게 완벽한 사랑도 받고 싶어한다.

미실의 권력욕은 역시 단지 왕후가 되기 위해 발현된 것은 아니라고 본다.

화랑 사다함과 첫사랑을 이루지 못한 이유가 자신에게 힘이 없기 때문이라는 걸

깨달은 후 미실은 ‘내 사랑을 지키기 위해’ 권력과 정치에 개입한다.

이런 모든 욕구에 충실한 여성을 그리고 싶었고, 그 여성이 바로 나의 미실”이라고 했다.

‘선덕여왕’ 드라마 작가가 귀 기울일 만한 내용이 아닐까.

 

 

‘선덕여왕’ 드라마의 진로

 

방짜(질 좋은 합금)가 퉁짜(질 나쁜 합금)가 되지 않기 위해서

구리와 주석의 합금 비율을 78대22로 유지해야 하듯이

‘선덕여왕’ 같은 역사드라마가 성공하기 위해서는

팩트(fact)와 픽션(fiction)의 효율적인 배합이 필요하다.

역사드라마는 역사가 던지는 메시지와 드라마가 주는 재미가 적절하게 혼합되었을 때

역사적 감동을 불러일으킨다.

 

또 역사드라마가 역사적 사실을 기초로 하지만 드라마이기 때문에

작가의 상상력이 동원되는 것은 불가피하나

드라마를 핑계 삼아 역사적 사실을 지나치게 임의로 복원하여 호도하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되고 역사드라마인 만큼 철저한 고증이 요구된다.

얼마 전에 종영된 ‘연개소문’ 드라마에서 수양제가 앉아 있는 황궁에

마오쩌둥의 낙관이 찍힌 병풍이 쳐져 있었다니 코미디가 따로 없다.

 

‘서태지와 아이들’의 성공비결이 서태지만 잘해서가 아니라

‘아이들’인 양현석과 이주노가 제 역할을 잘했기 때문이듯

‘선덕여왕’ 드라마가 성공리에 피날레를 장식하려면 큰 뼈대를 이루는 주연급 못지않게 뼈대를 받쳐주는 조연급 배역들에 대한 세심한 배려도 수반돼야 할 것이다.

- 이영철, 목원대 겸임교수

- 2009.08.01 신동아, 통권 599호(p490~497)

 

 

 

 

 

 미실과 클레오파트라 

 
팜파탈과 카리스마, 그 영원한 매혹

 

  

나는 다스리는 것이 소망이다,

비록 지옥에서나마, 천국에서 섬기는 것보다는 지옥에서 다스리는 것이 좋다.
- 밀턴, ‘실락원’ 중에서

 

 
 

영화 ‘클레오파트라’(1961)에서 클레오파트라 역을 맡은 엘리자베스 테일러.

그녀의 강렬한 눈빛과 마주치는 순간, 우리는 선과 악을 가르는 판단의 잣대를 잃어버린다. 그녀의 잔혹하지만 아름다운 독설, 타인의 안녕 따위는 안중에도 없는 소름끼치는 무심함 앞에서도, 사람들은 선뜻 반기를 들지 못한다.

 

올여름 안방극장에서 가장 매혹적인 캐릭터 중의 하나는 단연 ‘선덕여왕’의 미실이다.

주인공 선덕여왕보다 오히려 강렬한 흡인력으로 시청자를 끌어당기는 미실의 매혹, 그 비밀은 무엇일까. 왜 시청자는 미실 앞에서 윤리적 잣대를 슬그머니 내려놓는 것일까.

그녀가 잔혹한 살인조차 서슴지 않는 줄 알면서도 왜 우리는 미실의 카리스마와 관능적 매혹에서 눈을 뗄 수 없는 걸까.

왜 우리는 순수하고 지혜롭고 강인한 선덕여왕보다

‘색공술(色供術)’로 권력을 얻은 악녀 미실에게 이끌리는 것일까.

아니, 미실은 정말 상상을 초월할 ‘사악함’ 때문에 매력적인 것일까.

 

‘악녀’라는 단순성의 베일을 벗겨내고 보면

미실의 복잡다단한 매력이 드러나지 않을까.

요부이자 악녀로 유명하지만 천하를 호령한 정치가로도 악명 높은

한국의 클레오파트라, 미실.

 

우리는 미실의 매력과 클레오파트라의 매력을 비교하면서

강력한 카리스마와 팜파탈적 매력을 동시에 지닌 두 사람이

현대사회에서도 대중에게 갖는 짙은 호소력의 진원지를 밝혀보고자 한다.

 

그녀들은 색공술로 권력을 얻었기 때문에 나쁜 것이 아니라

남성 중심의 사회에서 남성도 얻기 힘든 권력을 쟁취했기 때문에

남성들의 공포와 혐오감을 자극했던 것이 아닐까.

흥미롭게도 미실과 클레오파트라의 중요한 공통점 중의 하나는

두 사람 모두 살아서는 최고의 권력을 얻었지만

죽어서는 승리한 남성들의 역사에서 철저히 배제당한 역사의 타자가 되어버렸다는

점이다. 그녀들은 남자도 아닌 여자가, 정당한 방법이 아닌(?) 육체적 사랑으로,

국가와 민족의 정체성을 더럽혔다는 역사적 혐의로 소환되곤 했다.

 

 

팜파탈의 끝없는 귀환

 

안토니우스와 이집트 여왕의 관계는 추문 성격이 지나치게 과장되었다.

기원전 37년, 안토니우스가 클레오파트라에게 처음으로 영토를 내준 일은

이집트 여왕을 유리하게 해준 것으로,

로마 영토를 탕진하기 시작한 것으로 간주되었다.

요컨대 안토니우스가 맹목적인 정열로 인해 나쁜 영감을 불러일으키는 악녀에게

영토를 탕진한 것으로 여겨졌던 것이다.

…이들의 진짜 목표는 클레오파트라를 악녀로,

이집트를 로마를 위협하는 왕국이자 라틴 문명의 미덕을 타락시키는 나라로

만들어야 했기 때문이다. 여기에는 세 가지 요소가 밀접하게 결합되었다.

동방에 대한 혐오감, 이방적인 것에 대한 공포감 그리고 여성 혐오증이 그것이다.

(‘마지막 파라오 클레오파트라’, 마르탱 콜라 지음, 임헌 옮김, 시공사, 267쪽 인용)

 

미실은 한국사에서 철저하게 은폐 · 말살되었다.

미실이라는 인물이 있었다는 사실 자체가

동방예의지국의 이름을 더럽힌다고 여겨졌기 때문일까.

현대 한국은 국가라는 이데올로기를 세우는 데 역사를 동원했다.

삼국시대와 고려, 조선시대에도 엄연히 그 나름의 법률과 도덕이 존재했으나

민족사는 단군 이래 한국사의 무대에 등장한 모든 사람들에게

현대의 윤리, 도덕의 옷을 입혀버렸다.

따라서 현대 한국사학의 학문적 권력을 장악한 연구자 집단이 만든 역사체계로는

미실이란 존재를 도무지 설명할 수 없다.

그렇기에 그들은 미실 이야기가 담긴 <화랑세기>를 한낱 소설이라고 주장한다.

이렇게 되면 미실의 존재는 근원적으로 부정된다.

(‘색공지신 미실’, 이종욱 지음, 푸른역사, 7쪽에서 인용)

 

버나드 쇼는 ‘시저와 클레오파트라’(1898)에서 시저의 남성적 카리스마를 강조하기 위해 클레오파트라를 강인한 팜파탈이 아닌 새끼고양이처럼 깜찍한 어린아이로

만들어 그녀의 성적 매력을 은근슬쩍 삭제해버리기도 했다.

 

셰익스피어의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1607)에서는

스물한 살의 요염하고 성숙한 여성으로 그려졌던 클레오파트라가,

쇼의 작품에서는 위급할 때마다 유모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철부지 16세 소녀로

폄하되었다. 클레오파트라의 나이를 줄임으로써 천하의 시저와 안토니우스마저

무장해제시켜버린 팜파탈의 공포감을 지울 수 있었던 것일까.

그러나 흥미로운 점은 승리자의 역사 속에서 아무리 제2, 제3의 클레오파트라를

마녀로 몰아붙여도, 그녀들의 숨길 수 없는 매력에 중독된 수많은 예술가가

매번 그녀들을 다른 빛깔로, 각 시대의 가장 위력적인 담론과 예술사조로

다시 소환해냈다는 것이다.

 

낭만주의 시대에 가장 인기 있는 주제가

클레오파트라와 안토니우스의 비극적인 사랑이었으며,

오랫동안 <화랑세기>의 위작 논쟁으로 역사의 테두리 바깥에 추방되어 있던 미실은

‘알파걸의 시대’ 21세기 한국에서 다시금 화려하게 부활했다.

 

셰익스피어가 클레오파트라에게 바친 찬사는

아마도 미실에게 매혹된 수많은 신라남자에게도 해당되지 않았을까.

 

“나이도 그녀를 시들게 하지 못하고,

아무리 자주 만나도 그녀의 무한한 변신은 지겹게 여겨지지 않아요.

다른 여자들은 그들이 채워주는 욕망에 싫증나게 하지만,

그녀는 가장 만족스럽게 채워주었을 때 오히려 더 큰 욕망을 느끼게 하지요.

가장 야비한 일도 그녀에게는 그럴듯하게 어울려서 거룩한 사제들도

그녀의 방종을 축복해줄 정도랍니다.”

(셰익스피어,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 중에서) 

 

이종욱 서강대 사학과 교수가 저서

‘색공지신 미실’(푸른역사)에서 정리한 내용.

 

[보기] 1. ~ 는 미실이 색공한 순서(세종은 성골도 아니고

미실이 그의 정비였기에 색공관계는 아님)

2. [ ]는 왕의 대수

3. 점선은 동일인물

 

 

 

 

 

내 앞을 가로막는 자들에겐 죽음뿐

 

남성이 남몰래 품고 있는, 강한 여성에 대한 근원적 공포와 적대감이 투사된

캐릭터가 바로 미실과 클레오파트라다.

드라마 ‘선덕여왕’에서 미실은 첫 회부터 왕을 암살할 계획을 세우고,

왕의 유서를 은닉한 후 다음 왕좌에 오를 사람까지 자신이 직접 결정하며,

그가 자신의 요구를 들어주지 않자 화랑, 즉 군사력을 동원해

멀쩡한 국왕을 왕좌에서 끌어내리는 쿠데타를 감행한다.

천하를 호령하던 최고의 남자를 둘이나 제거해버린 미실의 강력한 힘 앞에서

대적할 사람은 없다.

 

그녀는 천하의 모든 것을 가졌지만 황후가 아닌 것이 싫다. 그녀의 유일한 결핍을

채워줄 사람을 찾기 전까지 그녀는 어떤 잔혹함도 불사할 것이다.

진흥대제의 유훈을 저버리고 금륜태자를 유혹해 동침한 그녀는

그를 ‘진지왕’으로 만들고 그의 아기까지 낳았지만 황후로 만들어주겠다던

애초의 약속을 들어주지 않자 자신의 아기까지 서슴없이 유기한다.

“미안하구나. 아가야, 난……. 이제 더 이상 네가 필요 없다.”

자신의 아기까지 버린 마당에 남의 아기가 눈에 들어올 리 없다.

 

“미실을 대적할 자! 북두의 일곱 별이 여덟이 되는 날 오리라!”라는 신탁을

실현할지도 모르는 쌍둥이가 진평왕과 마야부인 사이에서 태어나자

미실은 불안에 휩싸인다.

쌍둥이가 태어나면 성골 남자의 씨가 마른다는 끔찍한 금기 때문에

아이를 숨길 결심을 한 진평왕은 시녀 소화를 시켜 미래의 선덕여왕을 데리고

멀리 도망가달라고 부탁한다. 그 쌍둥이를 찾아 없애기 위해 혈안이 된 미실은

궁궐의 입구를 철저히 통제하여 쓰레기 한 조각도 바깥으로 나가지 못하게 하지만,

풍월주 문노와 소화의 협동작전으로 아기는 무사히 궁을 빠져나가고 만다.

끝내 아기를 찾지 못한 미실은 궁궐의 출구를 제대로 지키지 못한 병사들을

무참히 학살한다.

 

“사람은, 능력이 모자랄 수 있습니다. 사람은, 부주의할 수 있습니다.

사람은, 실수를 할 수도 있습니다.” 그녀는 한 치의 망설임 없이 병사의 목을 벤다.

그녀의 얼굴 또한 죽은 병사의 피로 얼룩져서 한층 그로테스크해진다.

“사람은…. 그럴 수 있습니다. 하지만, 내 사람은! 그럴 수 없어! 칠숙! 지금 당장!

그 계집과 쌍둥이의 한쪽을 찾아와라! 얼마가 걸리든, 얼마가 죽든 상관없다!

반드시 찾아 내 앞에 데려와라! 알겠느냐?”

 

흥미로운 점은 미실은 늘 수많은 사람 앞에서 대사를 읊지만,

단 한 사람도 미실에게 ‘예, 아니오’ 이외의 다양한 의견을 내놓지는 않는다는 것.

그녀는 수많은 사람 앞에서 말하지만 사실 대화는 없고

오직 추상같은 명령과 독백에 가까운 선언만이 난무한다.

그리하여 그녀는 모두를 지배할 수 있지만, 그래서 더더욱 철저히 외롭다.

궁궐 안의 모든 비밀, 왕실 사람들의 모든 치부와 아킬레스건을 샅샅이 알고 있는

미실은 자신이 알고 있는 운명의 덫에 걸려 신음하는 영혼들을 한껏 비웃는다.

비밀의 열쇠는, 오직 미실의 것이라고, 그녀는 믿고 있기 때문이다.

 

왕조차 숨죽여 지내게 만드는 미실의 권력,

그 배후에는 ‘사랑의 기술’이 있었다고 전해진다.

미실이 신라의 권력을 제패하게 만든 첫 번째 색공의 대상은 진흥왕이었다.

이미 세종의 아내이면서 게다가 금륜태자의 아이를 가진 상황에서도,

미실은 진흥왕의 몸과 마음을 완전히 사로잡는다.

 

“진흥제가 한 번 사랑하고 두 번 사랑하고는 곁을 떠나지 못하도록 하였다.

…그리고 미실에게 전주의 이름을 내렸는데(그 지위는 황후와 같았다).

미실을 총애함이 사해를 뒤집을 만하였다.”

(<화랑세기>, 김대문 지음, 이종욱 옮김, 소나무, 123쪽에서 인용)

 

 

타인의 욕망을 읽는 기술

 

신라의 권력자들이 하나같이 미실의 색공에 무장해제당했듯이,

로마 최고의 권력자 안토니우스 또한 이집트 여왕의 매력에 기쁘게 굴복한다.

로마의 영광을 부르짖던 남성들은 하나같이 안토니우스가 아닌 클레오파트라를

비난했다.

로마 역사가들은 클레오파트라의 침실에 들어간 것은

분명 카이사르와 안토니우스였음에도 그들의 욕망이 아니라

‘이집트 여자’의 유혹만을 단죄했다. 마치 클레오파트라에 대한 비난이

로마의 역사를 구하기 위한 미션이라도 되는 듯이.  

총명하고 용감했던 안토니우스가 클레오파트라의 마력에 홀려 로마를 도매금에

팔아넘겼다는 식의 묘사가 로마 측 기록에 난무하는데, 예를 들면 이런 식이다.

 

“한 이집트 여자가 만취한 로마 장군에게 로마 제국을 통째로 요구하게 되었다.

그녀의 애정을 받는 대가로 그는 그 괴물에게 자신을 완전히 내주고 말았다.”

(플로루스)

 

그러나 클레오파트라의 매력을 묘사하는 문헌들에서

그녀는 단지 색공의 화신으로 나타나지 않는다.

오히려 클레오파트라의 가장 큰 매력은 그녀의 화술에 있었다고 한다.

그녀의 매력은 미모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었다.

 

플루타르크에 따르면

“모두들 이야기하는 그녀의 아름다움은 비할 데 없이 뛰어난 것도,

보는 순간 사로잡힐 만한 것도 아니었다”고 한다.

그녀는 “미모로도, 기품으로도 옥타비아(안토니우스의 아내)를 능가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플루타르크는 클레오파트라가 상대를 놀라게 하고

‘넋을 빼앗을 수 있었던’ 이유는 그녀의 화술이 뛰어났기 때문이라고 전한다.

지적이고 생동감 있는 그녀의 이야기는 ‘그녀의 말하는 모든 것의 묘미를 돋우는’ 달콤한 목소리를 타고 듣는 이를 사로잡아서 ‘그녀에게 벗어날 수 없게 만들었다’고

한다. (‘클레오파트라’, 에디트 플라마리옹 지음, 지현 옮김, 시공사, 117쪽 인용)

 

마찬가지로 미실이 사람들을 사로잡은 또 하나의 무기는

바로 뛰어난 독심술과 현란한 화술이다.

수많은 은유와 상징을 품어 안은 말들을 단 한순간 짧은 문장으로 툭 내던지는

미실의 화술은 클레오파트라가 남성들을 매혹시킨 화려한 화술과도 일맥상통할 것이다. 미실 또한 자신을 위협하는 천명공주의 성장 앞에서 매혹적인 화술을 유감없이

발휘한다. 거의 독백과 다름없이 진행되는 그녀의 연설 앞에서 미실파 남자들은

그저 머리를 조아리고 그녀의 전광석화 같은 두뇌회전에 감탄할 뿐이다.

 

“천명이 꼭 어린 날의 저 같지 않습니까?

어린 시절 지소태후께서 날 궁에서 쫓아낸 적이 있었습니다.

난 궁을 쫓겨나면서 만약 다시 돌아온다면 그때의 나는 예전의 미실은 아닐 거라,

다짐했지요. 그리고 그리했습니다. 헌데 보니, 천명공주가 그랬습니다.

용수공을 잃고 아기를 가진 채 궁을 나가면서,

다시 돌아올 땐 예전의 천명이 아닐 거라 다짐한 겁니다.

천명은 지난 1년 동안 온몸의 피를 돌리고, 뼈를 깎고, 살을 태우며,

큰 그림을 그렸을 겁니다. 그런 자의 도전이라. 그런 공주의 도전….”

 

모두들 미실의 미소 뒤에 감춰진 진의를 몰라 전전긍긍하며 공포에 사로잡힌다.

미실은 적의 능력이 뛰어날수록 흥분하는 승부사의 기질을 감추지 못한다.

그녀는 자신의 권력을 탐내는 모든 남자, 그중에서 자신이 쓸만하다고 믿는

유능한 인재들을 자신의 색공으로 사로잡는다.

그녀는 남편이 있지만 남편에게도 다른 남자와의 관계를 암묵적으로 공인(?)받을

정도로 거침없는 캐릭터다.

 

“이제 저는 백정왕자의 황후가 될 것입니다.

제가 또, 다른 사내의 부인이 되는 것이 마음 쓰이십니까?”

세종은 고개를 가로젓는다.

“진흥대제께오서 말씀하셨습니다. 미실 공주는 어느 사내든 혼자는 차지할 수 없는

여인이라고요. 다만 내가 왕도 성골도 아닌 것이 한스러울 뿐이오.”

 

 

시간을 지배하는 기술

 

<화랑세기>에는 미실의 현란한 미색과 남다른 문장실력이

그녀를 최고의 자리에 오르게 했다고 나와 있지만,

드라마 ‘선덕여왕’에서는 미실의 매력을 좀 더 합리적인 근거에서 찾아낸다.

미실의 용병술과 독심술이 아무리 뛰어나다 하더라도,

미실에게 ‘시간을 관리하는 기술’이 없었다면 미실은 왕을 위협하는 권력까지 갖지는

못했을 것이라는 관점, 그것이 드라마 ‘선덕여왕’이 보여주는 현대적 역사의식이다.

 

아직 농경사회였던 신라사회에서 백성들의 생사고락을 틀어쥐고 있는

가장 커다란 권력은 왕권도 부권도 아니었다.

바로 ‘날씨’야말로 농경사회의 숨은 신이었던 것이다.

농경만이 유일한 경제적 원천이었던 사회에서

국왕이 아무리 몸 바쳐 기우제를 지내도 비가 오지 않는 상황이 계속된다면,

누가 그 왕을 믿고 따르겠는가.

 

미실의 비밀병기, 그것은 바로 언제 비가 내리고, 언제 비가 그칠지를 비롯하여

시간에 따른 기후의 변화가 촘촘히 기록되어 있는 명나라의 비밀문서 책력(대명력)이었다.

명나라의 책력만으로는 신라의 상황에 맞는 기후 대응전략을 짤 수 없기에

드라마 ‘선덕여왕’은 또 하나의 서사적 포석을 깔아놓는다.

사다함, 바로 미실의 첫사랑이다.

그녀의 이루어질 수 없었던 첫사랑의 마지막 선물 사다함의 매화,

그것이야말로 미실의 마르지 않는 권력의 원천이다.

천하에 현존하던 모든 책력 중 가장 정확하다는 대명력을 손에 넣음으로써,

미실은 신라를 지배할 수 있는 강력한 지식을 독점하게 된 것이다.

‘앎의 권력’을 십분 활용했던 미실의 지혜를 완성한 것은 바로 그녀의 첫사랑이었다.

미실의 첫사랑이 그녀에게 몰래 남긴 가야의 책력이 없었다면

대명력은 신라에 직접 적용될 수 없었던 것이다.

 

“사다함 그 충성스러운 분이 가야를 정벌한 후

진흥대제를 속이면서까지 저에게 빼돌린 마지막 선물.

전쟁에 나간 정인(情人)을 배신하고 다른 사내의 부인이 된 저에게 가야의 책력을

남겨주었지요. 우리에게 그 가야의 책력이 있기에

대명력을 삼한 땅에 맞게 수정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시간을 지배하게 된 미실 또한 또 다른 시간에 지배당할 수밖에 없다.

그것이 그녀의 비밀병기이자 유일한 아킬레스건이다.

지금은 미실에 비해 한없이 연약한 천명공주이지만,

그녀는 미실의 아킬레스건을 알고 있다.

용수공의 유복자를 낳은 후 천명은 자신의 아들에게 이름을 지어준다.

“미실 공주가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지요. 가장 강한 것은 세월이다.

미실도 세월 앞에서는 어쩔 수 없다. 하여 세월을 뜻하는 이름을 지었지요.

이름을 ‘춘추’라 지었습니다.”

천명(하늘의 운수)과 춘추(자연의 시간)를 당하지 못하는 것이

미실의 유일한 아킬레스건이었던 것이다.

 

미실과 클레오파트라는 ‘사랑의 달인’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도 ‘지식의 달인’이었다.

언어와 예술, 과학과 철학을 비롯한 거의 모든 학문에 통달해 있었던

미실과 클레오파트라의 ‘지식권력’이야말로 그녀들의 진정한 무기였다.

말하자면 ‘색공’은 그녀들의 방대한 지식권력의 아주 작은 ‘일부’였을 뿐이다.

색공술에 가려 그들의 르네상스적 지식의 힘은 은폐되었던 것이 아닐까.

미실은 문장과 언변이 유창해 700권이 넘는 문서 기록을 남겼으며

그녀의 아들 보종이 한때 그녀의 기록을 필사하여 보관했을 정도라고 한다.

 

클레오파트라와 미실의 힘은 예술과 학문에 대한 감식안에 있었다.

클레오파트라는 지덕체의 완벽한 일치를 위해 프로그래밍된 백과전서식 교육을

받았을 뿐 아니라 전무후무한 외국어의 달인이었다고 한다.

 

 

만인의 사랑, 만인의 두려움

 

“그녀의 혀는 마치 각기 다른 음을 내는 여러 개의 악기와도 같다.

그녀는 별다른 어려움 없이 여러 나라 말을 구사했다.”

“클레오파트라는 호메로스의 서사시를 비롯하여 헤시오도스와 핀다로스의 작품,

당시 아이스킬로스와 소포클레스보다 더 사랑을 받았던 에우리피데스의 비극,

메난드로스의 희극, 헤로도투스와 투키디데스의 역사서를 읽고 공부했다.

그리고 데모스테네스의 대화집으로 수사학을 배웠다.

과학 교육 역시 중시되어 대수와 기하, 천문학과 의학 수업을 받았다.

예술 분야에도 특별한 소질이 있던 그녀는 그림 그리는 법, 7현 리라 연주법,

노래하는 법 등을 배웠으며…, 특히 말타기를 아주 잘했다.”

(‘클레오파트라’, 에디트 플라마리옹 지음, 33쪽 인용)

 

미실은 앞서 살펴봤듯이 제왕이 되기 위한 모든 요건을 갖추었다.

모든 면에서 웬만한 남자보다 나으므로

그녀가 여자라는 치명적 약점은 그녀에겐 핸디캡 축에도 들지 못한다.

그러면 미실에게 부족한 것이 무엇일까.

진정하게 마음을 나눌 사람이 없다는 것,

권력을 얻었으나 백성의 마음까지는 얻지 못했다는 것이 그녀의 약점이었다.

권력으로 사로잡은 마음이기에 아무도 그녀를 진심으로 위해주지 않는다.

 

그녀에게는 덕만처럼 “사막에선 눈물을 아껴야 해”라고 말해주는 엄마도 없고

“내가 그 모든 사람들을 미실에게 잃고 오직 하나 지킨 것은 천명 너뿐이다”라고

말해주는 아버지도 없다.

미실은 색공으로 정치적 발판을 마련했기 때문에 실패한 것이 아니라

만인의 ‘사랑’이 아닌 만인의 ‘두려움’으로 권력을 장악했기 때문에

그토록 외로웠던 것이 아닐까.

 

분명한 것은

그녀들의 수많은 능력 중 ‘색공’ 즉 사랑의 기술은 ‘일부’일 뿐이라는 것이다.

그녀들은 ‘고작’ 색공술로 세상을 정복한 것이 아니라,

그녀들이 가지고 있는 수많은 능력 중 유독 ‘사랑의 기술’이

세상 사람들의 입방아에 오르내리기 좋았던 것뿐이 아닐까.

그녀들은 색공의 화신이기 이전에 화술의 달인이었고 문장의 달인이었으며

외교술과 용병술뿐 아니라 예술과 지식에 있어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르네상스적 지식인이었다.

 

전혜린은 말했다.

“성이란 화폐처럼 중성적일지 모른다. 거기에 색채를 부여하는 것은 인습 같다”고.

이것이야말로 우리 모두가 알지만 모른 척하는 ‘섹스의 상대성’이다.

 

절대로 일부일처제가 아니었던 신라사회에서

미실의 색공은 다소 무분별하긴 했으나 치명적인 허물은 아니었다.

문제는 미실의 권력을 탐하는 남성들의 욕망이었고,

이집트 여자에게 로마를 빼앗겼다고 생각하는 남성들의 정치적 박탈감이었던 것.

미실과 클레오파트라, 이 세기의 팜파탈들이 끊임없이 예술의 소재가 되는 것은

그들이 오직 밀실의 감정으로 제한된 개인의 육체적 사랑을 공동체의 구경거리로,

희대의 스캔들로 비약시켰기 때문이다.

그녀들이 예술의 영원한 주제가 될 수 있는 것은

섹스야말로 인간이 모든 지성과 감성을 총동원해도 그 실마리를 풀어낼 수 없는

영원한 신비이기 때문이 아닐까.

섹스는 인류 역사상 가장 많은 찬사와 가장 혹독한 비난을 동시에 받은 테마였으며

바로 이 섹스를 정치의 중심으로, 세계의 중심으로 끌어올린 희대의 팜파탈들은

예술의 영원한 테마가 될 수밖에 없지 않을까.

 

학자들은 입 모아 말해왔다.

섹스는 인류의 옆구리에 입을 벌리고 있는 신비한 상처라고.

섹스는 우리 인류의 모든 결함의 근원이요 원리라고.

인류 역사상 남성에게 여성의 육체만큼 ‘찬양의 대상’이자 ‘저주의 대상’이 된

지속적인 예술의 테마는 없었다.

그러나 톨스토이 같은 멋진 사람들은 솔직하게 인정했다.

“성욕과의 싸움이 가장 어려운 투쟁”이라고.

인류에게 섹스가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로 남아 있는 한,

섹스에 대한 모든 비밀이 밝혀져도 여전히 섹스가 인류 공통의 화두인 한,

미실과 클레오파트라는 영원한 만인의 연인으로, 팜파탈의 화신으로 기억될 것이다.

 

그녀들에게 사랑과 정치는 분리된 기술이 아니었다.

그녀들의 관능이 곧 그녀들의 지식이었으며 그녀들의 사랑이 곧 그녀들의 정치였다.

결국 그녀들이 이긴 것이다.

세상을 뒤흔든 그녀들의 사랑도,

도무지 남성들은 따라갈 수 없었던 그녀들의 정치술도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이었던 것이다.

- 정여울, 문학평론가 suburbs@hanmail.net

- 2009.08.01 신동아 통권 599호(p408~4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