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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아가는(문화)

수중문화재의 보물창고 - 태안 앞바다

Gijuzzang Dream 2009. 7. 15. 12:47

 

 

 

 

 

 

옛부터 험한 조류에 선박들 침몰지역 /  안갯속에 떠있는 형형색색 부표
도자기 등 '해저보물섬' 지도 / 청화백자ㆍ분청사기 등 다량 출토

고려ㆍ조선인의 삶과 숨결 고스란히 / 韓ㆍ中ㆍ日도자기 변천사 귀중한 자료

 

 

버뮤다에 '마의 삼각지대'가 있다면, 충남 태안군 마도 부근에는 '도자기 삼각지역'이 있다.

넓이 15만934㎡(약 4만5657평)가량의 이 삼각지대에는

풍부한 갯벌에 묻혀 1000년을 잠들어온 한ㆍ중ㆍ일 삼국의 청자, 청화백자, 분청사기 등이

다량 출토되면서 학계의 비상한 관심을 끌고 있다.

태안 마도는 한마디로 '해저보물섬'인 셈이다.

한ㆍ중ㆍ일 삼국의 도자기 변천사는 물론이고, 각국의 생활상 및 무역 교류와 관련된 '잊힌 이야기'가

마도 '도자기 삼각지대'에서 천 년의 잠을 깨고 용틀임을 하고 있다.

문화재청 산하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가 지난달 태안 마도 해역에서 고려와 조선시대 도자기는 물론,

중국ㆍ일본산 도자기 등 총 380여 점의 도자기를 발굴한 현장으로 가기 위해

최근 태안 안흥항을 찾았다.

안흥항에서 인양선 씨뮤즈호에 올라 바다로 나가자 안개가 자욱하게 끼기 시작했다.

불과 500m 앞도 안 보이는 상황. 그러나 함께 배를 타고 간 문환석 해양문화재연구소 과장은

"안개가 꼈지만 이 정도면 날씨가 좋은 편"이라고 말했다.

안개가 심할 때는 300m 앞도 전혀 안 보인다는 것.

 

 

원래 이 지역은 안개가 짙고 급류가 심해 배가 다니기 힘든 곳으로 유명했다.

예로부터 '난행량(難行梁)'이라 불렸을 정도니, 조류가 얼마나 험한 곳인지 알 만하다.

 

조선왕조실록을 보면 태종 3년(1403) 한 해에만 이곳에서 34척에 이르는 선박이 침몰했으며,

태종 14년(1414)에는 그 배에 해당하는 66척이 침몰하거나 좌초된 것으로 전해진다.

또 조선 태조부터 세조까지 60년간 '난행량'에서 선박 200여 척이 파손되거나 침몰해 1200여 명이

숨졌고 쌀 1만5800섬이 수장됐다는 기록도 있다.

왕실과 귀족들에게 바칠 도자기와 곡물을 실어 나르는 선박(조운선)의 파손ㆍ침몰도 잇따랐다

마도에서의 도자기 발굴은 마도 북서쪽 300여m 떨어진 곳에 있는 1구역과

여기서 900m 정도 동쪽으로 떨어진 2구역에서 진행되고 있다.

1구역에서는 1×1m 간격으로 나눠 세밀하게 조사하는 정밀조사가 실시되고 있으며,

2구역에서는 20×20m 간격으로 광역조사가 한창이었다.

이날 기자에게 공개된 곳은 마도 2구역이었다.

바지 위에 오르니 주변 바다에 군데군데 떠 있는 형형색색의 부표가 눈에 띄었다.

이곳에서 잠수부로 문화재 발굴을 하고 있는 이동현(45) 씨는

"저 부표들은 전부 유물이 발견됐지만 건져 올리지 못해 표시만 해둔 곳"이라며

"앞으로 이 부근은 10년간은 계속 발굴해야 할 정도로 유물이 풍부하다"고 말했다.

바지 위에서는 첨단 모니터로 발굴 광경이 중계되고 있었다.

수심 6~7m 아래 바닥을 자세히 들여다보자 나무 닻에 매달아 사용한 닻돌이 모습을 드러냈다.

잠수사들은 인양선 크레인에 연결된 밧줄을 돌에 묶고, 에어백을 서둘러 장착한다.

에어백에 자신들이 물고 있던 산소 호스를 대자 공기가 주입되며 닻돌이 물 위로 떠오르기 시작했다.

닻돌이 물 위까지 올라오자 인양선은 크레인을 잡아당겼고

이와 동시에 해초로 뒤덮인 닻돌이 올라왔다. 육중한 닻돌은 가로 172㎝, 세로 77㎝의 크기였다.

성낙준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장은 "자연석을 대충 다듬어 쓴 것으로 봐서 우리나라 배의 닻돌로,

무게가 200㎏은 족히 돼 보인다"고 설명했다.

마도 해역에서 최근 2개월 사이 건진 닻돌은 5개,

아직 바닷속에 남아 있는 것만 6개로 총 확인된 닻돌은 11개다.

배에는 보통 앞, 뒤에 닻을 준비하기 때문에 배당 2개씩 사용했을 거로 추정해도

마도 삼각지역에는 적어도 배가 5~6척은 가라앉았다는 뜻이다.

이번에 인양된 도자기들은 대부분 생활용품으로 사용된 것들이다.

김영원 국립전주박물관장은 "고려 말에 퇴락해가던 청자나 조선 초 분청사기로 이행되는 과정에서

만들어진 초기 등은 현재 얼마 남아 있지 않은 귀중한 유물"이라며

"생활용품으로 사용된 도자기이지만 당시에도 귀한 중품 이상, 상품에 해당하는 것들로 보인다"고

말했다. 이어 "중국에 수출되던 물건이 아니면, 강진 부안 등에서 싣고 개경(현재의 개성)으로 가던

물건일 가능성이 크다. 이 경우 왕실이나 귀족 관료들이 사용하려던 물건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고

설명했다.

특히 중국 도자기들에는 밑면에 '강'(상인집단)이란 성이 적혀 있어

당시 중국 거상들의 성씨를 알려주는 자료로 평가되고 있다.

 

 

 

마도에서는 도자기뿐 아니라 당시의 선박 몸체, 맷돌, 석탄, 볍씨 등이 함께 출토돼 관심을 끌고 있다.

성 소장은 "석탄이 소량씩 발견된 것으로 보아 수출입품이 아니라 배에서 취사용으로 사용하기 위해

싣고 다닌 것으로 추정된다"며 "그간 우리나라에는 석탄을 사용했던 기록이나 흔적이 전혀 없었는데

이번에 석탄을 사용한 흔적이 처음으로 발견됐다"고 설명했다.

 


이처럼 고려의 삶을 보여주는 유물들이 1000년 만에야 발견된 이유는 무엇일까?

 

전문가들은 1993년 건설된 마도~신진도 간 연륙교 덕이라 말한다.

양순석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 계장은 "1993년 연륙교가 만들어지고 안흥 내항이 생기면서

이 부근의 조류의 움직임이 바뀌었다"며 "그 결과, 갯벌에 묻혀 그대로 잠자고 있던 유물들이

갯벌 밖으로 모습을 서서히 드러난 것"이라고 설명했다.

특히 목재인 선박의 경우 바닷속에 사는 '배좀벌레' 등 유공충의 습격을 받아

바닷속에선 5년이면 쉽게 망가져 버리지만 갯벌에 묻혀 있었기 때문에

그동안 벌레들의 습격을 막을 수 있었다는 것이다.

서해안에 넓게 형성된 갯벌이 소중한 우리 선조의 문화유산을 1000여 년간 지켜왔다는 얘기다.

자연과 역사는 이렇듯 많은 결을 감춘 채 오늘도 도도히 흐르고 있다.

 

 

*** 16人 잠수부

고려청자, 조선의 분청사기, 중국 송ㆍ원ㆍ청대의 도자기 및 일본의 19세기 청화백자까지

한ㆍ중ㆍ일의 다양한 도자기가 쏟아져 나오고 있는 태안군 마도 앞바다.

그곳에는 급류 속에서도 문화재가 다칠까 두려워 생명줄만 잡은 채 반쯤 떠서

문화재를 건져 올리는 잠수부들의 활약이 눈부시다.  

도자기를 찾기 위해 물속을 누빈 지 벌써 3개월째.

매일 3시간씩 '물일'에 여념이 없는 마도의 잠수부들은 총 16명.

이들은 뻘이 떠다녀 흐릿한 물속에서 몸을 반쯤 띄운 채 작업을 한다.

 

양순석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 계장은

"라이트를 비춰도 물속 가시거리는 겨우 50~60㎝밖에 되지 않아 손으로 더듬거리며 찾는다"며

"발로 땅을 밟으면 문화재가 손상될까 봐, '중성부력'이라 해서 몸을 띄운 채 작업하는데

조류가 시속 1~2노트(시속 1.8~3.6㎞) 정도로 빨라 통합 라인을 생명선처럼 꼭 잡고

떠 있을 수밖에 없다"고 설명했다.

 

 

 

 

16명의 잠수부 중 8명은 연구소 직원이고, 8명은 잠수용역회사에서 파견된 이들이다.

연구소 직원 중 '잠수 특채'로 들어온 사람은 홍광희(33) 씨가 유일하다.

대학(조선대) 1학년 때 스쿠버 동아리에 들어가면서 잠수와 연을 맺었다는 홍씨의 잠수 경력은

10년이 넘는다. 그의 임무는 유물 수중촬영이다.

유물을 건져 올리기 전 물속에 있었던 모습을 사진과 캠코더로 꼼꼼히 기록해야 한다.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 문환석 과장과 양 계장 등 나머지 7명의 직원은

원래 잠수를 할 줄 몰랐지만 용역회사 직원들에게 배워 이제는 어지간히 이력이 붙었다.

이들은 "원래 육지에서만 발굴조사할 줄 알았지, 다이빙까지 하게 될 줄 몰랐다"며

"소중한 문화유산이 물속에 있으니 당연히 해야 할 일"이라고 말했다.

 

잠수용역회사 직원은 총 8명. 이들은 2인1조로 움직인다.

한 명이 물에 들어가면 한 명이 물 밖에서 산소ㆍ통신선ㆍ라이트 전원선 등을 묶은 '통합 라인'을

잡아주는 역할이다. 80~90여분간의 잠수가 끝나면 둘이 임무를 맞교대한다.

3시간의 오전근무가 끝나면 1시간30분 정도 쉬고, 다시 3시간의 오후근무에 들어간다.

 

이날 통합 라인을 밖에서 잡아주던 이동현(45) 씨는 잠수 경력 28년의 베테랑.

그는 "이 지역은 급류가 무척 심해 조류 속도가 전국 3위에 해당될 정도"라며

"생각보다 힘든 작업이지만 중요한 일을 한다는 자부심에 차 있다"고 말했다.

이들 대부분은 HID나 UDT에서 근무한 국가유공자들이다.

 

문 과장은 "2008년 잠수부 중 한 명이 유물을 훔쳤다가 헬멧에 달린 CCTV 판독을 통해 붙잡힌 적이

있었다"며 "유물 도난 사고 등을 막기 위해 도난 사고 발생 시 특권을 박탈당하는 국가유공자 위주로

잠수부를 선발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 김재현 기자 

 2009.07.15 ⓒ 헤럴드경제 & heraldbiz.com

 

 

 

 

 

‘보물창고’ 태안의 5가지 비밀

 

 

보물선을 찾아라! '수중문화재의 보고'로 떠오른 충남 태안 앞바다에서는

고려청자 등 보물을 가득 싣고 항해하다 침몰한 고선박 발굴작업이 한창이다.

2007년 태안군 근흥면 대섬 해상에서 청자 2만3000여 점을 쏟아낸 '태안선'이 인양된 데 이어

지난 7월2일에는 마도 북동쪽 400m 일대에서 2척의 고선박과 함께 각종 유물 380여 점이 발견됐다.

이후 조류 변화 때문에 잠시 중단된 발굴작업은 지난 10일부터 재개됐다.

 

태안 앞바다에서 보물선이 잇따라 발견되는 이유는 무엇일까.

'선박들의 무덤'으로 불리는 태안의 비밀을 5가지 문답으로 알아본다.

 

 

①침몰한 고선박은 몇 척?
지금까지 이곳에서 발견된 선박은 3척이다.

2007년 태안선과 이번 마도 Ⅰ구역 선박은 고려시대 것으로 확인됐고,

Ⅱ구역 선박은 아직 조사 중으로 제작시기가 밝혀지지 않았다.

그동안 서해안에서 발견된 우리나라 고선박은 완도선(1982) 목포 달리도선(1999) 목포 안좌선(2005)

안산 대부도선(2007) 등 4척(이상 고려선박)을 포함해 총 7척으로 절반가량이 태안에서 나왔다.

최근 마도 해상에서 인양한 닻돌(배를 정박할 때 쓰는 닻을 물속에 잘 가라앉히기 위해 매단 돌)은 11개.

보통 배 한 척당 한두 개의 닻돌을 두기 때문에

침몰한 고선박은 적어도 5∼6척이 더 있을 것으로 추정된다.

또 조선태종실록에는 1403년 한 해에만 태안 앞바다에서 34척, 1414년에는 66척이 침몰 또는 좌초했다는

기록이 있어 이곳에 묻혀 있는 선박은 수십 척에 달할 것으로 예상된다.

 


②왜 태안 앞바다인가?
태안은 고려시대부터 국가 간 사신선 및 국제 무역선의 중간 기착지이자

경상도와 전라도 조운선의 주요 통과 해역이었다.

전남 강진 도요지에서 청자 등을 만들어 왕궁에 바치거나 일반인들의 그릇으로 공급하기 위해

개성으로 항해하는 코스로 반드시 거쳐야 하는 곳이 태안이었다.

그러나 조수간만의 차가 크고 조류가 빨라 무역선 조운선 청자운반선 등의 침몰이 빈번했다.

특히 마도 앞바다는 해저지형이 복잡하고 급한 조류에 의한 해난 사고가 잦아 '난행량(難行梁)'이라

불렸던 곳이다. 이 때문에 '안흥량(安興梁)'이라고 이름을 바꿔 선박 운행의 안전을 빌기도 했다.

또한 이곳에는 고려시대부터 '안흥정(安興亭)'이라는 국제 객관(客館)을 두었다.

이번에 인양된 유물은 고려청자를 비롯해 송대부터 청대에 이르는 다양한 중국 도자기가 포함돼

이 지역이 국제 무역 항로의 주요 지점이었다는 사실을 입증하고 있다.

 


③피해갈 수는 없었나?
보물선이 번번이 침몰하는 것을 알면서도 굳이 이곳으로 항해한 까닭은 무엇일까. 우회할 수는 없었을까.

서쪽 해역으로 몇 ㎞만 나가도 안전하게 운항할 수 있는 데도 이 항로를 강행한 것은

당시 항해술이 발달하지 않아 연안 운항이 일반적이었기 때문으로 분석된다.

당장 육안으로 보이는 바다는 큰 파도 없이 잔잔하기 때문에 앞으로 나아가다

조류나 암초를 만나 조난을 당한 경우가 많았다는 것이다.

고려와 조선시대에 선박 침몰이 잇따르자 태안 앞바다에 운하를 굴착해 새로운 안전항로를 만들려고

시도했다. 고려사에는 운하를 만들기 위해 300여 명의 인부가 동원됐으나 해저 암반을 만나

공사가 중단된 것으로 기록돼 있다. 태안 앞바다를 피해 가기는 어렵고, 침몰이 우려되는 상황에서

얼마나 고심했는지 알 수 있게 하는 대목이다.

현재 마도 앞바다에는 어항기지가 구축돼 일반 선박의 출입이 금지된 상태다.



④보물선 어떻게 찾나?
그 넓은 해역을 일일이 수색하기는 어렵다. 금속성 유물은 전파탐지기로 확인이 가능하지만

침몰한 고선박이 바다 밑 펄에 묻혀 있는 데다 고려청자 등 도자기에는 무용지물이다.

2007년 태안선은 주꾸미 잡이를 하던 어부가 고려청자를 건져 올리면서 발굴이 시작됐다.

이번 마도 보물선도 지난해 도다리를 잡다 청자접시 등을 건져 올린 어부의 신고로

선박의 침몰 위치가 확인됐다.

선체발굴을 위해 마도 Ⅰ구역의 경우

주변 해상 100×100m에 20×20m 크기의 그리드(격자)를 설치하고 1×1m의 세부구획틀을 획정했다.

Ⅰ·Ⅱ 구역당 잠수사는 2인1조로 하루 4명씩 8명이 투입된다. 촬영과 기록 등 조사원도 함께 들어간다.

 

수심은 15∼20m. 발굴작업은 오전과 오후 1시간30분씩 두 차례 한다.

작업 과정은 수중 발굴조사선 시뮤즈호에 연결된 모니터를 통해 볼 수 있다.

폭풍이 일거나 썰물과 밀물의 차가 큰 사리 때는 작업이 중단된다. 이번 발굴작업은 10월 말까지 계속된다.

이 일대 전체 발굴작업은 10년 이상 걸릴 것으로 예상된다.

 


⑤인양된 유물의 가치는?
상태가 비교적 양호한 고려청자의 경우 한 점에 1000만원은 호가하는 것으로 평가된다.

2007년 태안선에서 쏟아진 고려청자가 2만3000점이니 돈으로 환산하면 천문학적인 액수다.

이번에 인양한 유물은 11세기 고려청자와 14세기 상감청자, 15세기 분청사기와 18세기 백자,

청자호편과 백자퇴화문발 등 중국 송나라 도자기, 뱃사람들이 쓰던 항아리 철제솥 숟가락 등 다양하다.

모두가 가격으로 따지기 어려운 귀중한 문화재다.

수중 문화재를 발견해 신고하는 사람에게는 최고 1억원까지 포상금이 주어진다.

포상금은 유물의 가치평가 결과에 따라 차등 지급된다.

유물의 가치평가는 문화재위원 등으로 구성된 감정평가단이 한다.

그러나 유물의 가치를 알고 신고를 꺼려하는 경우가 있기 때문에 평가액은 공개하지 않는다.

2007년 태안선 발굴의 단초를 제공한 주꾸미 잡이 어부에게는 당시 최고 포상금인 2000만원이 지급됐다.

이후 포상금이 최고 5배까지 껑충 뛰었다.

◇도움말 주신 분=성낙준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장, 문환석 해양문화재연구소 수중 발굴과장,

                           김영원 국립전주박물관장, 윤용이 명지대 교수

 - 2009.07.12 국민일보

 

 

 

 

 

"고려 태안선, 사람도 익사했다"

 

 

선박 밑에 깔린 채 사망, 인골 수습

2007년 충남 태안군 근흥면 대섬 앞바다에서 주꾸미잡이를 하던 어부가

주꾸미 대신 고려청자를 건져 올림으로써 발견된 고려시대 고선박 '태안선'은

국립해양유물전시관(현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이 이듬해까지 발굴조사를 벌인 결과

무려 2만3천여 점에 이르는 도자기를 쏟아냈다.

이 수중 발굴에서는 도자기와 선체, 그리고 선원들이 사용하던 각종 기물 외에도

선박 침몰과 함께 선원으로 추정되는 사람도 해저에 깔려 사망한 것으로 밝혀졌다.

 

이런 사실은 해양문화재연구소가 최근 발간한

'태안 대섬 수중발굴 조사보고서'인 '고려청자 보물선'을 통해 밝혀졌다.

본문 편과 도판 편의 전 2권으로 구성된 이번 보고서는

인골이 "해저에서 확인되는 것으로 보아 선박 침몰 시에 유물과 함께 침몰되면서 사망한 것으로 추정"

되며 "더욱이 인골의 출토상태에서 처음 선박 침몰 시에 유물 아래에 깔린 채로 사망한 것으로

추정되는 것이다"(본문편 402쪽)고 말했다.

인골은 상당 부분이 없어진 가운데, 상지골과 체간골만 확인되며,

특히 체간골 중에는 척추뼈가 비교적 온전한 상태로 수습됐다.

보고서는 인골이 수습된 지점이 선박 아래이며, 그것이 발견된 상태로 보아

"마치 팔을 길게 펼친 것처럼 옆으로 길게 편 상태"이며,

익사한 사람을 기준으로 본 얼굴 방향이 "좌측으로 틀어진 상태로 검출되는" 점을 중시했다.

이로 볼 때 이 사람은 선박 "침몰 이후에 빠져 나오기 위해 바다 속에서 좌측으로 몸을 틀어,

상반신을 일으키려는 얼마간의 노력을 하는 도중 사망한 것임을 짐작하게 한다"고 보고서는 덧붙였다.

인골에 대한 정밀 분석 결과, 성별로는 남성으로 추정되며,

나이는 척골에서 골화가 완성된 점 등을 고려할 때 성년 후반(30대)이며,

키는 160.1㎝ 가량이었을 것으로 추정됐다.

나아가 "상완골이나 척골, 척추에서 육체적 노동에 의한 발달이 현저함을 알게" 하므로

이 인골 주인공은 "매우 건장한 신체의 소유자임을 알 수 있다"고 보고서는 말했다.
해양문화재연구소 문환석 수중발굴과장은

"인골은 조사 막바지인 지난해 선체들을 수습할 때 발견됐다"고 전했다.

- 연합뉴스, 김태식기자, taeshik@yna.co.kr

- 2009.07.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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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중문화재의 보고(寶庫) - 태안 마도 : http://blog.daum.net/gijuzzang/85146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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