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꽃씨의 묻힘
무더운 여름임이 틀림없지만,
그가 그곳에 도착했을 때 내리쬐는 햇볕은 유난히 뜨거웠다.
한창 복구 중인 서대문 형무소 역사관에 여러 장비들의 소리와 인부들의 움직임이 바빴던 것도 사실이지만, 오히려 그 모습이 이곳을 생동감 있게 만들고 있었다. 역사 속으로 사라져버린 사람들이 다시금 살아서 움직일 것만 같았다.
‘서대문형무소’.
그에게 이곳은 여타 다른 유적지들과는 사뭇 다른 느낌을 주는 장소였다.
이름만 들어도 뭉클해지며 애틋해지는 곳.
이곳에서 오늘 그는 고난과 시련이 많았을 지라도 자신이 속했던 시대를 사랑하며 살았던
수많은 익명의 사람들을 만나며 오늘날 자신과 세상 사람들에게 주는 메시지를 찾으려 했다.
그에게 ‘서대문 형무소’가 좀 더 특별한 이유는
오래된 유적지들이 주는 우리네의 고유하고, 슬기로운 아름다움이 엿보이는 곳이 아니기 때문이다.
물론 그런 곳이 주는 가치와 아름다움은 자랑스러운 유산임에 틀림없지만,
이곳은 어둡고, 비장한 기운만이 감돌지만 소리도 없이 흘러가는 시간 속에서 멈춰져있는
역사의 장면들이 다시금 생생해진다.
그는 ‘서대문 형무소’ 를 거쳐 간 수많은 인물들과 새로운 커뮤니케이션을 시도했다.
그들은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을지라도 그와의 대화에 동참했고, 오히려 그를 격려해주기까지 했다.
연꽃씨의 틔움
‘서대문 형무소’는
대한제국 말에 일제의 강압으로 지어진 감옥으로
80여 년 동안 우리 역사의 수난이 고스란히 서려 있는 곳이다.
옛 모습들을 생생하게 간직하고 있는 옥사 3개동과 사형장이 사적 제324호로 지정되어 있다.
일제에 대항해 나라를 되찾고자 했던 독립 운동가들이 무고히 탄압을 받았던 곳.
이곳은 아이러니하게도 청으로부터 독립을 보여주려 했던 대한제국의 독립문 근처에 지어져있다.
독립을 외치고 외쳐도 공허했던 그 소리들이
이제는 대한민국에 사는 그로 하여금 이곳을 기념하게 만들었으니,
그 소리들은 더 이상 공허한 것이 아닌, 빈틈없이 꽉 찬 멜로디였다.
그는 천천히 ‘서대문 형무소’를 둘러보기 시작했다.
맨 처음 역사관에서 만난 것은 순국선열들이 그곳에서 신었던 고무신, 밥을 담았던 밥그릇 등
사소한 것들이었다. 하지만 그는 순국선열들의 손때가 묻은 이 사소한 것들을 가슴으로 만난다.
고무신, 밥그릇으로 순국선열들은 살아 그에게 당시의 일들을 이야기해주고 있다.
분명 아름답지도, 곱지도 않은 물건들이지만 그는 오래도록 그것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것들을 바라보며 그의 머릿속에 스치는 질문 한 가지가 있다.
‘가치란 무엇일까’
사람들은 살아가면서 인식하든, 하지 못하든 저마다의 가치의 기준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다. 어떤 가치에 가볍고 무거움, 옳고 그름을 두고 살아가는 것일까.
그리고 이곳에서 기념되고 있는 이들의 가치는 무엇이었을까.
우리는 가깝게는 가족으로부터 멀게는 민족이라는 둘레 속에 살고 있다.
가족에 큰 가치를 두는 사람, 이웃에 큰 가치를 두는 사람, 민족에 큰 가치를 두는 사람들이 있을 텐데,
이들은 자신보다, 가족보다, 민족에 큰 가치를 두는 사람들이었다.
그는 역사관을 지나 지난 세월을 고스란히 담고 있는 타임캡슐과도 같은 옥사를 둘러보았다.
차가운 철문을 만져보기도 하고, 감방 안에 들어가 창문에 그어진 창살 틈으로 밖을 보기도 한다.
수감자들과 간수들이 이야기를 나누는 ‘불멸의 빛’이라 명명된
직사각형의 작은 구멍이 있다.
이 구멍을 통해서는 그저 눈밖에 보이지 않을 것 같다.
하지만 그들의 눈은 정말 멸하지 않는 빛이 아니었을까.
그들이 사수한 그 가치 덕분에
우리는 이렇게 당당한 우리나라에 살고 있으니 말이다.
그는 옥사들을 찬찬히 둘러보며 정신의 격동을 느낀다.
어쩌면 나라와 사회에 당면한 많은 문제들을 그저 눈감아 버리며 살고 있는
많은 현대인들을 대표해 부끄러움을 느끼는 건지도 모른다.
연꽃으로의 탄생
그는 독립투사들은 그들이 사는 세상이 왜 그래야만 했는지 그 문제점들을 자각한 사람들이라고 생각한다.
아렌트가 ‘평범성은 악이다.’ 라고 이야기 한 것처럼
자각한 사람이 눈을 감으면 악이 될 수 있는 그런 절박하고 비장한 상황.
그러한 상황 속에서 지식인으로서의 의무를 다한 사람들이 이곳에 있었던 것이라고.
그는 자신이 생각한 가치들을 실천에 옮긴 사람들을 보며
행동하는 지식인과 행동하지 않는 지식인에 대한 깊은 생각에 빠진다.
시골의사로서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고, 끝도 없는 많은 사연들을 만났던 그.
사람들을 둘러싸고 있는 환경과 사회에 대한 깊은 고민에도 빠져본 그에게
가장 중요한 가치는 ‘시민정신’이었다.
일제 강점하에는 민족정신이, 독재정권하에는 자주, 민주화정신이 당시대의 중요한 가치였다면,
이 시대에 시골의사에게 중요한 가치는 ‘시민정신’이었다.
시민은 기득권에 저항하는 사람들이다.
그리고 평등한 인간을 사랑하는 정신, ‘우리’를 생각하는 정신, 함께 가는 정신이다.
혼자만 배부르고, 혼자만 가려는 것에 대항하는 ‘시민정신’이 그가 생각한 이시대의 가치였고,
앞으로도 그가 추구하며 살고자 하는 가치였다.
‘서대문 형무소’에는 상징이 곳곳에 숨어있다.
그는 이곳을 찾는 사람들은 그것을 읽을 수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어른이라면 말할 것도 없지만, 아이들이라면 그저 이러한 것들이 전시에 지나지 않는 것임을
꼭 설명해 주어야 한다고. 독립, 민족, 사상에 대한 것들이 드러나 있지만
진정한 가슴으로 만나려면 꽁꽁 숨어있는 정신을 만나야 한다.
그것은 바로 타인에 대한 이타적인 사랑이라는 것이다.
자기만을 위해 사는 사람들로 인해 어두워져만 가는 세상에 이곳에서 찾은 자기애를 버린 사랑은
오늘날에도 실천되어야 하는 사랑이라고 되뇌었다.
더러운 연못에서 아름다운 연꽃이 핀다.
더러운 연못 속에서 연꽃 씨가 되었던 순국선열들을 만나고 돌아가는 길.
연꽃으로 피워진 아름다운 마음을 품고 다시 세상 밖으로 나간다.
글· 김진희 / 사진· 최재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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