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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학과 함께하는 인문학 강좌’ - 이태수 교수/ 니코마코스 윤리학강연

Gijuzzang Dream 2009. 7. 8. 22:21

 

 

 

 

 

 

한국학술진흥재단 제2기 ‘석학과 함께하는 인문학 강좌’

 

 이태수 인제대 교수(서양철학)

- 니코마코스 윤리학 강연 -

 

 

 

 

 

 

 (1) ‘최고의 행복’ 지금 가능하다

 

 

 

‘니코마코스 윤리학’은 도덕에 관한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을 담은 책이다.

서양 사상사 최초로 윤리 문제를 포괄적, 체계적으로 다루고 있는 고전 중의 고전이다.

서울역사박물관에서 열린 ‘석학과 함께하는 인문강좌’에서 첫 강의를 시작한

인제대 이태수 교수(서양철학)는 “이 책이 서양 윤리학의 모든 사조를 대표한다고는 할 수 없지만,

이 책을 거쳐야만 서양 모든 사조의, 기저에 해당하는 부분에 대한 이해를 갖출 수 있다”고 말했다.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우),

라파엘의 '아테테학당' 중에서 

이 교수는 오늘날 아리스토텔레스 윤리학을 재조명하는 것이 역사적인 것처럼 보이지만, 그것이 전부는 아니라고 말했다.

현재적 적실성(的實性, relevance)을 지닌 새로운 윤리이론으로 재등장할 수 있는 힘도 지니고 있다는 것.

서양의 윤리이론을 이끌어왔던 세 가지 윤리이론으로

아리스토텔레스의 ‘덕(德)의 윤리학’,

칸트의 법치주의적 ‘도덕철학’,

그리고 제러미 벤담과 존 스튜어트 밀에서 비롯된 '공리주의(功利主義, utilitarianism)'가 있다.

칸드의 법치주의적 도덕철학과 관련,

이 교수는 “윤리 문제에 관한 우리의 시각을 예리하게 하고,

논의를 정치(定置)하게 만든 대신, 논의의 범위를 대폭 줄여버렸다"고 말했다.

 

공리주의 역시 인간의 사회적 행태, 즉 경제와 깊이 관련돼 있지만, 그 이상 복잡한 인간 삶의 문제, 특히 복잡한 문화적 행태에 관한 한 너무 소박한 환원주의적 입장을 취하고 있다고 했다.

20세기 후반 재등장하고 있는 아리스토텔레스 윤리학은 시간적으로 보면

박물관 유물에 가장 가까운 유물이겠지만,

후대에 등장한 다른 어떤 윤리학보다 인간 삶에 활력을 넣어줄 수 있는 내용을 담고 있다며,

현대 윤리학의 한계를 극복할 수 있는 대안으로 아리스토텔레스 윤리학에 관심을 가져줄 것을 주문했다.

 


인간은 어떻게든 ‘좋음’을 추구하고 있다

이창우, 김재홍, 강상진, 세 사람이 옮긴 번역본 ‘니코마코스 윤리학(2006년 서울)’은

다음과 같은 문장으로 시작된다.

“모든 기예와 탐구, 또 마찬가지로 모든 행위와 선택은 어떤 좋음을 목표로 하는 것 같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들은 좋음을 모든 것이 추구하는 것이라고 옳게 규정해왔다.”

이 문장에서 역자는 ‘좋음’이란 말을 사용했는데,

‘좋은 것’이란 용어 대신에 ‘좋음’이란 번역어를 사용한 것에 대해 고심한 흔적이 나타나고 있다며

거기에 대한 설명을 이어나갔다. 
 
대장장이가 칼을 만들 때 그가 목표로 하는 것은 좋은 칼이겠고,

그것을 ‘좋은 것’이라고 부르는 것은 아무 문제가 없다.

그러나 이창호가 정성껏 바둑 한 판을 둘 때

그가 목표로 하는 것이 우승배이거나 상금이 될 수 없다고 말했다.
사실 그가 진정으로 목표로 하고 있는 것은 문제의 상황에서 최선의 수를 찾아 두는 것이고,

그런 수가 계속 이어져야 (승리로 마무리되는) 멋진 한 판의 대국이 될 것이다.

그에게 있어 목표는 바둑 두는 행위 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 행위 자체에 내재해 있다는 것.

사기도박단과 같은 집단이 조직적으로 하고자 하는 의도도 ‘좋음’이라고 할 수 있느냐는 반론이 나올 수

있다. 그러나 그들에게 진정 원하는 것이 무엇이냐는 질문을 한다면

누구나 다 가짜가 아닌 정말 좋은 것이라고 대답할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그의 윤리학에 있어

다음의 논의를 전개해 나가기 위해 결정적 중요성을 지닌 명제를 제시한다.

즉 행위의 목표인 ‘좋음’은 내용적으로 여러 가지일 수 있는데,

그 사이에는 위계적인 차등 관계가 성립한다는 것이다.

 


‘최고선’이 과연 존재하는 것일까

아리스토텔레스의 주장은 어려운 것이 아니다.

예를 들어 마구(馬具) 제작에 있어 중요한 것은 좋은 말안장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그것은 승마를 잘 하는 데 있어, 싸움터에서 승리하는 데 있어 좋은 결과를 얻어낼 수 있다.

이태수 인제대 교수

(서양철학) 

그런데 아리스토텔레스는 별 문제가 없는 것 같은 이 사실에 근거해 철학자들 사이에 많은 논란을 불러일으킨 다음 명제를 도입한다. 즉 좋은 것에 대해 더 좋은 것이 있고, 또 거기에 대해 그보다 더 좋은 것이 있겠는데, 그런 식으로 한없이 갈 수는 없고, 결국 최종적으로 가장 좋은 것이 있을 것이며, 결국 인간이 하는 모든 일은 바로 그 가장 좋은 것을 목표로 수행된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수단과 목적, 또는 과정과 목표의 연쇄가 무한히 이어지게 될 것이며, 그렇다면 인간이 하는 모든 일은 사실상 궁극적인 목표가 없는 셈이 될 것이고, 그것은 인간이 하는 모든 일이 공허한, 즉 무의미한 일이라는 것을 의미하게 될 것이라는 것이 아리스토텔레스의 생각이었다.

이 명제는 헬레니즘 시대와 로마시대에 ‘가장 좋은 것(summum bonum)'이란 용어로 나타난다.

윤리학 논의에 있어 ’가장 좋은 것‘은 중심적인 개념으로 공인된 키워드라고 할 수 있었다.

국내에서도 그 점을 존중한 듯 한문 번역으로 ’최고 선(善)‘이란 말을 고안해 쓰기도 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인생을 너무 단순하게 보지 않았느냐는 의문이 생길 수 있다.

그가 가치다원주의를 용납하지 않는, 중대한 논리적 오류를 범하고 있다는 주장이 제기되기도 한다.
 
이 같은 주장에 대해 이 교수는 아리스토텔레스가 논리적 오류를 범하지도 않았고,

 인생을 너무 단순하게 보는 답답한 인생관을 갖고 있지 않았다고 말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하는 ‘최고선’ 또는 ‘가장 좋은 것’은

인간의 삶을 전체로서 시야에 담았을 때 비로소 그 의미가 드러나는 것이라고 말했다.

소크라테스는 삶 전체를 시야에 담고, 그 의미를 문제 삼을 것을 촉구했으며(플라톤 아폴로기아 참조),

소크라테스의 제자인 아리스토텔레스는

그의 윤리학에서 스승의 관점에서 스승의 관점을 충실히 따르고 있다고 주장했다.

 


‘행복’은 최고선으로부터 나온다

그리이스어로 행복을 뜻하는 말은 ‘에우다이모니아(eudaimonia)’다.

이 말은 한국어의 ‘행복’, 영어의 ‘happiness'와 의미상 일치하지 않는다.

보통 ‘행복(happiness)’란 말은 주관적 심리상태를 의미한다.

그러나 ‘에우다이모니아’는 주관적이면서, 또한 객관적인 의미를 담고 있다.

우리는 보통 우리가 바라는 것을 실현했을 때 진정한 행복을 달성했다고 믿는다.

그러나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있어서는 그것이 행복일 수도 있으며, 행복이 아닐 수도 있다.

진정한 행복은 주관적이기도 하지만 객관적이기도 하기 때문이라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다.

일차적 ‘바람’이란

본능적인 욕구, 돈, 명예, 좋은 경치를 보고 싶어하는 것, 명곡을 듣고 싶어하는 것 등이 될 수 있다.

이차적 ‘바람’이란 과연 그 바람이 정말 좋은 것인지, 바람직한 것인지 확인하는 일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이 일차적 바람과 이차적 바람이 모두 충족돼야 진정한 행복이 이루어진다고 보았다.

‘에우다이모니아’는 시간적 의미에 있어서도 ‘행복(happiness)’과 다소 다른 의미를 지니고 있다.

일상적 어법에 있어 순간적인 행복도 있을 수 있겠으나,

‘에우다이모니아’는 인생 전체에 걸쳐 가능한 것이다.

의미에 있어 ‘잘 지내는 것’, ‘잘 사는 것’에 더 가깝다.

부모는 자식이 우승을 한 마라토너처럼 인생을 잘 기획해, 그것을 성공으로 이끌기를 바랄 것이다.

한마디로 ‘잘 살기’를 또는 ‘잘 해나가기’를 바랄 것이다.

여기서 아리스토텔레스가 왜 ‘에우다이모니아’란 단어를 사용했는지 그 의미를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이태수 인제대 교수는 서울대학교 대학원장, 한국철학회장 등을 역임한 바 있다.

5월30일 ‘최선의 삶과 행복에 관하여’란 주제로 첫 강연을 한데 이어 6월 13일 '실천적인 덕',

20일에는 '지성의 역할', 27일에는 '인간의 행동기제'에 관해 강연을 이어나갈 예정이다.

 

 

 

 

 

 

 

 (2) 행동하지 않으면 행복도 없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을 담은 '니코마코스 윤리학'에 따르면

인간 삶의 '행복'은 '최고의 선'을 통해 이루어진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또 이 '최고 선'으로서의 '행복'이 성취되기 위해 무엇보다 '덕(德)'이 필요하며,

이 '덕'을 통해 정의, 용기, 절제 등의 덕목들을 실천할 수 있어야 한다고 보았다.

'석학과 함께하는 인문강좌'에서 인제대 이태수 교수(서양철학)는

덕의 실천 과정 중 첫 번째 과정인 '탁월성'이란 단어가 국내에서 보통 '덕'이란 말로 번역되고 있는데,

실제로는 그리스어 '아레테(arete)'를 번역한 것이라고 말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동상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의 탁월성을 지적인 탁월성과 (실천적 의미의) 성격적 탁월성으로 구분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지적인 탁월성에 앞서 성격적 탁월성을 강조했는데,

이 교수는 이 '탁월성'을 일종의 '영혼의 성향(hexis)'으로 규정할 수 있을 것 같다고 말했다.

이 교수가 말하는 '성향'이란 선천적으로 보유한 능력을 연마한 결과로 달성된 영혼의 상태를 의미한다.

애당초 타고난 성격을 좋은 방향으로 완성시키는 일을 시작도 안 할 수 있고,

또 중도에서 얼마든지 그만 둘 수도 있고, 그 일을 끝까지 수행할 수 있는데,

이처럼 다양한 태도를 '성향'이란 말로 설명했다.

실제로 아리스토텔레스는 어린 아이가 나쁜 성품을 갖기 전에 덕행을 실천하는 교육을 수행하는 일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일정한 나이가 지난 뒤에 실천적 덕에 대해 이론적으로 아무리 설득한다 하더라도

(삶의 성향을 바꾸는데) 별로 효과가 없다는 것.

 


중용은 인간 삶의 중요한 척도 

아리스토텔레스는 그러나 이 '성향'을 덕에 있어 최종적인 완성으로 보지 않았다.

"당연히 그 덕을 발휘할 수 있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여기서 '활동(energeia)'이란 개념이 등장한다.

이 말은 아리스토텔레스가 처음 고안해 낸 말로 '기능을 수행 중임', 혹은 '작동 중임'이란 뜻을 갖고 있다.

가령 안다는 행위를 생각해봤을 때 이 말이 쉽게 이해된다.

무엇인가 알아냈으면 아는 것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계속 그것을 알고 있게 된다.

덕에 의거한 행위를 '활동'이란 말로 규정했다고 볼 수 있다.

결과적으로 '활동'은 덕의 최종적 완성 상태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덕의 최종적 완성상태로 가기 위해서는 조건이 있다.

그 조건이란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하는 '중용(中庸)'을 말한다.

아리스토텔레스 이론에 따르면 '중용'이란 최고 선에 이르는 인간의 도덕적인 성향을

다른 성향과 구별하게 해주는 가장 특징적인 것이다.

'중용'의 의미는 강한 것과 약한 것을 피해 중간에 위치할 자리를 찾아내는 일이 아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중용'에 대해 "마땅히 그래야 할 때, 또 마땅히 그래야 할 일에 대해,

마땅히 그래야 할 사람에 대해, 마땅히 그래야 할 목적을 위해서,

 또 마땅히 그래야 할 방식으로 감정을 갖는 것은 중간이자 최선이며,

바로 그런 것이 탁월성에 속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중용은 이성(logos)에 의해, 실천적 지혜를 가진 사람(phronimos)이 규정할 그런 방식으로 규정한 것"

이라며, '중용'을 규정하는 것이 참으로 간단치 않음을 강조하고 있다.

그러면 실천적인 덕목이란 무엇인가. 이와 관련, 아리스토텔레스는 '용기'를 가장 먼저 논한다.

여기서 말하는 '용기'란 두려움이라는 감정과 관련된 것이다.

두려움이 지나치면 비겁이 되고, 너무 없으면 만용이 된다.

둘 다 악덕이고, 두려움이 그 중간에 위치하도록 조절해야 '용기'가 성립되는 것이다.

 


용기, 절제, 관대함, 자긍심 등 실천해야

용기 다음에는 '절제'가 논의된다. 용기가 두려움과 관련된 것인데 비해

'절제'는 즐거움과 관련된 것이다.

즐거움에 너무 탐닉하는 것이 무절제, 방종한 것이고, 또 너무 무심한 것이 몰취미다.

'절제'란 그 중간 적절한 선에서 즐거움을 누리는 것, 그러나 약간은 후자 쪽에 가까운 것으로 설명된다.

절제 다음으로 '관대함'과 '통 큰 것'이 논의된다.

'관대함'은 인색하게 돈을 너무 아끼는 것과 헤프게 쓰는 것의 중간 성향으로 약간 쓰는 쪽에 기울어진다.

'통 큰 것'이란 기본적으로 쓰는 돈의 규모에 관련된 것으로서,

일상적인 소소한 지출보다는 큰 공공사업에 거금을 쾌척하는 것을 말한다.

비슷한 것을 둘로 나누어 '통 큰 것'을 따로 설명하고 있는 것은

조세보다 유력 인사의 기부 행위에 의해 공공사업 자금을 마련했던 당시 아테네 정치사회적 관행으로부터

비롯된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에 있어서도 그런 덕이 전혀 낯선 것이라고 할 수 없다.

다음에 논의되는 '자긍심' 또는 '자존심'의 덕도 당시 엘리트들의 사회적 지위와 관련됐다는 점에서

특히 주목해야 할 부분이다.

이 덕은 주로 각 개인이 받아야 할 사회적인 인정, 그리고 누려야 할 명예에 관련된 것이다.

합당한 경계선을 지나쳐 너무 많이 바라고 요구하는 것은 지금의 말로 바람이 가득 들어간 상태이고,

처음부터 기가 죽어서 자기의 몫을 포기하는 것 역시 비굴함으로 설명된다.

둘 다 보기 흉한 악덕이라고 할 수 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하고 있는 덕에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정의'에 관한 논의다.

'니코마코스 윤리학'은 열 권으로 돼 있는데, '정의'에 대한 내용이 책 한 권에 이르고 있다.

'정의'는 덕의 이론의 틀을 벗어날 만큼 광범위하면서도 매우 중요한 의미를 담고 있다.

그리스어로 정의를 뜻하는 '디케(dike)'는

넓은 뜻으로 이해했을 때와 좁은 뜻으로 이해했을 때 그 의미가 달라진다.

넓은 뜻으로 이해했을 때 사람의 성품을 뜻하는 것으로 '바르다', 혹은 '의롭다'란 뜻이 된다.

그러나 좁은 뜻으로 이해했을 때 여러 가지 의미를 담고 있다.

 


덕에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정의'

그 중 배분(配分)적 정의와 시정(是正)적 정의가 있다.

이 둘은 모두 재화를 얻거나 내주는 일과 관련돼 있다.

배분적 정의의 핵심은 한정된 재화를 사람들에게 공정하게 나누어주는 데 있다.


 

석학과 함께하는 인문강좌 


그러나 상거래가 이루어질 경우 강압적 방식에 의해 손해를 보는 경우가 발생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일이 일어날 경우 어떤 방식으로든 보상이 이루어져야 한다.

그것을 공정한 방식으로 해결하는 것이 시정적 정의라고 할 수 있다.

아리스토텔레스에 따르면 더 많이 가지겠다는 탐욕도 부정의지만,

지나치게 덜 가지겠다는 마음가짐 역시 부정의로 규정된다.

그 사이에서 어느 정도 감정의 중용을 지닐 수 있느냐 하는 것이

정의를 향한 아리스토텔레스의 접근 방식이라고 할 수 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아테네 자유시민의 삶을 대상으로 덕목을 이야기했다.

그러나 그들은 당시 식민지 사회에서 특권을 누리던 지배층이었다.

때문에 피지배층에 위치한 사람들은 자신이 삶의 주인공이 될 수 있는 자격을 박탈당했기 때문에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한 덕목들을 적용하기 힘들었다.

식민지 백성에게 있어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한 '용기'는 그렇게 중요하지 않았다.

용감하게 행동할 경우 오히려 사회적인 문제를 일으킬 소지를 안고 있는 성품이었다.

'절제' 역시 마찬가지였다.

어차피 고통으로 가득 차 있는 삶 속에서 즐겁게 살지 말라는 것은 죽으라는 말과 같았을 것이다.

'관대함' 역시 가난의 밑바닥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해당되지 않는 이야기였다.

'자존심'이나 '정의'를 추구하는 것 역시 피지배층에게 있어서는 매우 위험스러운 생각이었다.
지배층에 의해 이 같은 덕목들을 배웠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한 인간에 대한 배려라기보다는 '게으르고, 불성실하며, 정직하지 못한'

피지배층에게 복종심을 강요하기 위한 수단이었을 가능성이 매우 크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제시한 덕목들이 많은 연구자들에 의해 비판을 받고 있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러나 이처럼 여러 가지 문제점을 안고 있다고 하더라도

아리스토텔레스가 제시한 덕목들이 지금까지 살아서 현대 사회에 영향을 미치고 있는 것은

지금 우리 사회가 식민사회가 아니기 때문이다.

이태수 교수는 "식민사회에서 볼 때 아리스토텔레스의 덕목들이 말도 안 되는 이야기지만,

스스로 삶의 주인공이 돼서 살 수 있는 민주사회에서는 그가 말한 자유시민의 덕목들이 매우 중요한

시민의 자격요건이 될 수 있음을 쉽게 발견할 수 있다"고 말했다.

 

 

 

 

 

 

 

 (3)  당신은 지혜를 갖고 있는가?

 

 

'석학과 함께하는 인문강좌'에서 아리스토텔레스의 '니코마코스 윤리학'을 강의 중인

이태수 인제대 교수(서양철학)는 20일 열린 세 번째 강연에서

아리스토텔레스는 이성의 기능을 '헤아림(logistikon)'과 '앎(epistemonikon)'으로 구분했다고 말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이성의 기능을 둘로 구분한 것은 존재의 영역에 변치 않는 '필연(必然)의 세계'가 있고,

다른 한편에는 이렇게 될 수도 있고, 저렇게 될 수도 있는 '가변(可變)의 세계'가 있다는

소크라테스 이전 철학시대 전통적 구분을 받아들인 데 따른 것이다.

불변의 필연 세계에서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은 조용히 관조(觀照)하면서 진리를 인식하는 일이다.

이 같은 기능을 '앎'으로 구분했다. 그러나 가변의 세상에서는 인간이 어떤 행동을 선택할 수 있으며,

주변 환경을 좋은 방향으로 바꿔놓을 수도 있다.

이때 어떤 행동을 취할지 선택할 수 있는 지혜를 '헤아림'으로 보았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윤리적 관점은 '미래'

플라톤은 필연의 세계를 통해 참된 인식이 가능하지만,

가변의 세계에 대해서는 오직 의견(doxa)만 가질 수 있다며

가변의 세계를 '그저 모자라기만 한' 세계로 보았다.

그 결과 진정한 '앎'이야말로 실물을 포착할 수 있는 것이고,

인간의 의견(아리스토텔레스의 헤아림)은 기껏해야 실물의 그림자만을 상대하는 단계에 머물러 있었다.

독일 프라이브르쿠 대학의 아리스토텔레스 동상 

그러나 아리스토텔레스는 플라톤과처럼 가변성을 '시간을 벗어난

필연의 영원한 법칙성과 대립된' 항으로 설정하지 않고,

'(필연적인) 시간의 질서와 밀접하게 연관시켜' 보았다.

이미 일어난 일, 저질러진 일을 놓고는 헤아릴 것이 없다.

헤아림은 열린 미래를 전제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의 삶이 시간 속에 처한 방식,

즉 과거를 뒤에 두고, 인간이 자신의 삶을 미래를 향해 던지는 방식에 주목함으로써 스승 플라톤을 넘어설 수 있었다.

아리스토텔레스에 있어 '헤아림'의 역할은

'실천(praxis)'과 '제작(poiesis)' 두 가지로 나뉜다.

'실천'이란 특정한 목표를 향해 행위하는 것을 말한다.

목표가 행위 안에 내재해 있다.

반면 '제작'은 목표가 행위 밖에 존재한다.

무엇인가를 제작해서 그 때까지 세상에 없던 것을

새로 생겨나게 하는 것을 말한다.

앎의 능력이 연마돼(sophia) 발휘되는 분야가 곧 이론적 '학문(theoria)'이다.

반면 헤아림에 있어 '실천'은 '윤리도덕(eupraxia)'으로, '제작기술'은 '기술(techne)'로 나타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현재 윤리도덕이란 의미로 해석되고 있는 '유프락시아(eupraxia)'란 단어를

'잘 실천함'이란 의미로 표현했다.

이 말 속에는 아리스토텔레스가 의도한 특별한 의미가 담겨 있다.

이태수 교수는 '유프락시아'란 단어와 관련해 "굳이 이 말을 쓰게 된 까닭은

아마 윤리도덕의 핵심인 최선 또는 행복의 실현 실천 이외에도 이론적인 앎이 결정적인 몫을 한다는 것.

그래서 실천을 잘 하는 것이 윤리도덕의 전부가 아닌 그 일부일 뿐이라는 것으로 의식하고 있었기 때문"

이라고 풀이했다.

 


지혜로운 사람은 올바르게 숙고한다

헤아림의 기능을 잘 연마해 획득한 성향이 곧 '지혜(phronesis)'다.

여기에서 말하는 지혜는 이론적인 앎의 그것과 유사한 것 같으면서도 다른 점이 있다.

이론적인 앎보다는 기술 분야에서 발휘되는 전문적 기량에 더 가깝다.

지식과 지혜를 구분하지 않는 플라톤은 기술도 거기에 섞어 놓고 있다.

그의 저술 도처에서 그가 앎에 관한 논의를 진행하면서 기술을 모델로 하고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그러나 아리스토텔레스는 지혜를 학문적인 앎과 확실히 다른 것으로 취급하고 있다.

이태수 인제대 교수

(서양철학)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있어 지혜는 헤아림으로부터 비롯된 윤리도덕적인 '지혜(phronesis)'만 있는 것이 아니다.

헤아림으로부터 발생했지만 제작기술로부터 발생한 '의문이 제기되는 지혜'도 있다.

이태수 교수는 이 지혜의 개념을 설명하는 데 능숙함, 솜씨 좋음으로 번역되는 '데이노테스(deinotes)'란 말을 써도 문제는 없을 것으로 보았다.

의문이 제기되는 지혜란 전문적 기량으로 설명된다.

예를 들어 로켓 기술자는 자신의 기술을 우주탐사에 유용하게 쓰이게 할 수도 있고, 또한 핵탄두를 나르는 무기 제작에 사용할 수 있다.

의술에 능한 사람은 사람을 살릴 수도 있고, 죽일 수도 있다.

간단히 말해 전문가의 기량은 가치중립적이다. 그 기량을 좋게도, 나쁘게도 사용할 수 있다.

의문이 제기되는 지혜인 것이다.

이 지혜가 제대로 쓰여지기 위해서는 윤리도덕적인 측면의 '지혜(phronesis)'가 무엇보다 필요하다.
그래서 지혜로운 사람은 자신에게 좋고, 유리한 것에 대해 올바르게 숙고(熟考)한다.

'숙고(bouleusis)'란 말은 헤아림과 다른 의미로 사용되는데, 일상생활에서도 얼마든지 볼 수 있는 경우다.

누가 직장 상사와 충돌이 잦아 퇴직을 고민하고 있다면,

그에게 있어 사표를 던지는 일은 많은 고민이 필요한 일이다.

사표를 던지는 일은 쉽지만 가족들의 생계가 문제다.

그러나 사표를 던지지 않으면 계속 하급 사원으로 직장을 다녀야 하고, 그것은 비굴한 일이다.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다 시간이 지난다면 그것은 시간을 낭비하는 것이다.

덕을 발휘하려면 어떻게든 "잘 숙고해서(euboulia) 올바른 선택(prohairesis)"을 해야 하는 것이다.

그것을 가능하게 해주는 것이 곧 지혜다. 지혜가 없으면 행동에 대한 결정을 할 수 없다.

한다고 해도 덕을 발휘하기는커녕, 문제만 더 일으킨다.
 
마음가짐만 잘 하면 그만이라고 말 하는 사람이 있는데, 천만의 말씀이다.

아리스토텔레스에 따르면 마음가짐도 있어야 하지만, 지혜가 있어야 하고,

그래야만 윤리적으로 성공을 거둘 수 있다.

지혜가 없으면 용기, 절제, 관대함 등 모든 가치들이 공중에 떠버린다.

 


최고선은 인간 이상이 되려고 했을 때 가능

아리스토텔레스는 자신의 윤리학에 실천 삼단논법을 적용했다. 전형적인 예는 이런 것이다.

"기름지지 않은 고기가 건강에 좋다. 그런데 바로 내 앞에 있는 닭고기는 기름지지 않다.

고로 이 닭고기는 건강에 좋다"라는 것이다.

석학과 함께하는 인문강좌 


첫 문장은 원론에 해당하는 대전제이다. 두 번째 문장인 소전제는 구체적이고 개별적인 것을 다루고 있다.

여기서부터 도출된 결론을 갖고 내가 닭고기를 먹는 실제적인 행동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실천 삼단논법을 구성하는 문장 중에는

행동할 당사자의 상황과 관련된 구체적인 내용이 포함돼 있어야 한다.

훌륭한 법률가가 되려면 육법전서만 아는 것으로 부족하다.

그 법률조항이 어떤 케이스에 속하는지 인식할 수 있어야 한다.

윤리적인 실천 행위도 개별적인 것까지를 포착해 원론적인 사항과 연결하는 일이 매우 중요하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자신의 윤리학을 통해 우리를 끈질기게 설득하려고 했다.

"인간이니 인간적인 것을 생각하라" 혹은

"죽을 수밖에 없는 운명이니 죽을 수밖에 없는 것들을 생각하라"고 권고하는 사람들을 따르지 말고,

오히려 우리가 할 수 있는 데까지 우리들이 불사불멸의 존재가 되도록,

또 우리 안에 있는 것들 중 최고의 것에 따라 살도록 온갖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이 최고의 것이 크기에서는 작다 할지라도 그 능력과 영예에 있어서는 다른 모든 것을 능가하기 때문이다."
인간으로 태어나서 가장 지고한 덕은 인간이 인간 이상이 되려고 했을 때 가능하다는 말이다.

인간을 넘어선 신적인 것을 최고선으로 설정하고, 그 목표를 향해 초월적인 방향으로 나아갔을 때

인간이 더 훌륭한 존재가 될 수 있다는 것이 아리스토텔레스의 믿음이고, 그의 윤리관이었다.

 

 

 

 

 

 

 

 (4) ‘6가지 유형의 인간’이 있다

 

 

 '니코마코스 윤리학'은 인간의 행동에 관한 이야기로 시작된다.

인간의 행동은 '좋음'이란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수행된다는 것이 바로 첫 구절의 내용이다.

이후 한동안 '덕(德)'에 대한 논의가 이어지지만, 행동의 개념이 뒷전으로 밀려나는 일은 한 번도 없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오히려 실제 행동을 통해 '덕'이 발휘될 때 행복이 성취되는 것이라고 규정함으로써

행동의 중요성을 충분히 강조하고 있다. 그러면 행동이란 무엇인가.

서울역사박물관에서 열린 '석학과 함께하는 인문강좌'에서 이태수 인제대 교수(서양철학)는

행동에 대한 아리스토텔레스의 생각을

그의 (니코마코스 윤리학이 아닌) '영혼론'에서 찾을 수 있다고 말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영혼론'에서 모든 생명체의 영혼을 생명체가 수행하는 행동(기능)으로 설명했다.

 

아리스토텔레스 (Leinwand, Metropolitan Museum of Art) 


모든 생명체가 자기 보존이라는 기본적인 목적을 위해 행동하는데,

'식물적 영혼'은 영양섭취와 번식을 전담하고, '동물적 영혼'은 영양섭취와 번식을 하면서,

또한 주변 세계를 인지하고, 장소 이동을 비롯한 복잡한 운동을 수행하고 있다고 보았다.

동물에게 있어 '욕구(orexis)'라는 것은 즐거운 것을 좇고, 괴로운 것을 피하는 영혼의 움직임을 말한다.

이것이 바로 신체를 특정한 방향으로 움직이는 엔진 역할을 하는데,

이 욕구가 없어지면 동물의 생명도 끝이 난다고 보았다.

그러나 인간의 경우는 사는 것이 한층 더 복잡해진다.

인간에게는 욕구와 함께 '좋은 것에 대한 바람'이 추가된다.

이 '바람'은 즐거운 것을 좇는 욕구와 항상 일치하지 않는다. 경우에 따라서는 비록 괴롭더라도,

도덕적 판단에 의해 괴로움을 향해 나아가는 사람들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인간의 德은 영혼이 움직인 결과

이 같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생각은

근세 이후 사람들 사이에 많이 일반화돼 있는 행동 관념과는 약간 다른 면을 보인다.

이성과 비이성적인 정열이 서로 긴장 관계를 일으키면서 행동,

특히 윤리적인 행동을 불러일으킨다는 것이 근세 이후 일반화된 관념인 반면,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의) 바람'과 같은 이성이 아닌

(비이성적인) 마음의 움직임들이 이성과 대립하는 것으로 보지 않는다.

아리스토텔레스가 보기에는 애당초부터 이성을 따르도록 돼 있는 '바람'이 영혼에 들어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다른 동물에게는 없고, 오직 인간에게만 있는 특징이라고 보았다.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있어서 인간이 이성적인 동물이라는 것은,

인간이 이성을 보유하고 있다는 의미라기보다는 비이성적인 부분에도 이성을 따르는 부분이 있어,

그야말로 이성적으로 행동할 수 있는 바탕이 처음부터 갖추어졌다는 뜻으로 해석할 수 있다.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있어 덕이 드러나는 행동은 근세 이후 대표적인 철학자 흄이 주장하는 것처럼

이성과 비이성의 대립을 통해서가 아니라,

'좋은 것에 대한 바람'으로 나타나는 인간 영혼의 움직임에 의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아리스토텔레스의 덕이 드러나는 행동, 즉 윤리적인 영역은 칭찬과 비난이 성립하는 영역이다.

덕이 드러나는 행동은 칭찬을 받고, 악덕이 드러나는 행동은 비난을 받는다.

또한 덕이 드러나는 행동은 장려해야 하고,

악덕이 드러나는 행동은 억제해야 하기 때문에 이를 판별한 수단, 즉 법이 요구된다.

그런데 법의 영역이든, 윤리의 영역이든 칭찬과 비난을 하기 위해 고려해야 할 점이 있다.

나쁜 맘을 먹고 한 짓이 우연히 좋은 행위로 보일 수 있고, 그 반대의 경우도 있을 수 있다.

때문에 칭찬과 비난을 하기 위해서는 그 행동이 있기까지의 의도도 고려해야 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행동에 대한 판단에 앞서

'헤쿠시아(hekousia)'가 있는지 없는지의 여부를 기준으로 삼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 '헤쿠시아'란 용어를 한국말로 번역하는 데 많은 사람들이 애를 먹고 있는데,

이태수교수는 강상진 서울대교수의 번역에 따라 '자발성(自發性)' 또는 '자발적'을 사용하겠다고 말했다.

'자발성'이란 행위자가 행위의 '주인(kyrios)' 노릇을 하고 있다는 의미를 함축한 말이다.

 


오이디푸스는 동정 받아야

실제로 만원 버스 안에서 어쩔 수 없이 남의 발을 밟는 행위를 자발적인 행위라고 볼 수 없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그런 경우 행위를

능동적으로 행한 것이 아니라, 일을 당했다고 하는 편이 더 정확하다고 본다.

그러나 상황이 어쨌든 해서는 안 될 일이 있다.

어떤 압력이 있었더라도 자신의 어머니를 살해하는 일은 변명의 여지가 없다.

알지 못해서 한 행위는 좀 더 미묘한 문제가 발생할 수 있다.

무지로 인해 저지른 나쁜 행위는 가끔 동정을 받기도 한다.

그러나 인정해줄 무지와 그렇지 않는 무지가 있다.

예를 들어 술이 만취해 저지른 추행을 무지의 탓이라고 돌릴 수 없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자발성'의 문제를 다루면서, 고려 범위에 넣을 수 있는 '무지'를

"무엇을, 누구에게, 어떻게 등의 사항과 관련된 것"이라고 규정하고 있다.

실제로 행위는 이런 사항에 따라 다르게 기술될 수 있다.

상대가 자신의 어머니인줄 모르고 결혼한 오이디푸스의 경우는 동정을 받을 일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행동에 대한 판단기준으로 '자발성'의 문제를 설명한 후 이어

'숙고(熟考, euboulia)'와 '선택(prohairesis)'에 관해 논한다.

덕 있는 행동을 하기 위해서는 생각만 해서는 안 된다.

모든 상황을 잘 고려해서(숙고), 적절한 행동을 취해야만(선택) 한다.

특히 '선택'은 다른 행동기제들인 '욕망(epithymia)', '기개(thymos)', '바람(boulesis)', '의견(doxa)'

등과는 다른 특징을 지니고 있다.

다른 행동기제들이 동물적이고, 비윤리적인 측면이 있는 반면 '선택'은 행위 주체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

선택에 의한 행위는 행위 주체자인 인간이 문자 그대로 전적인 책임을 져야 한다.

선택에 의한 행동은 오늘날 우리가 말하는 '책임져야 할 행동'과 그 외연(extention)이 완전히 일치한다.

'니코마코스 윤리학'의 제7권은 인간의 등급을 열거하면서 시작된다.

나쁜 쪽부터 시작하면, 가장 먼저 '짐승처럼 정말 흉악한 자'가 있는데,

이는 구제불능으로 감옥이나 정신병원에 수용해야 할 경우다.

그 다음으로 '악덕의 소유자'가 있는데

이는 비굴하고, 쩨쩨하고, 무절제하고, 도량이 협소하며, 비굴한 품성 등이

천성으로 굳어진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다음 등급으로 '자제력 없는 경우'를 열거한다.

이는 어떻게 사는 것이 잘 하는 것인지 알고, 그렇게 하려고 애쓰지만 항상 뜻대로 되지 않아,

나쁜 짓도 종종하게 되는 그런 경우를 말한다.

 


짐승 같은 인간에서 신 같은 인간까지

앞에서 말한 3가지 등급과 짝을 이루는 좋은 쪽의 3가지 등급이 있다.

자제력이 없는 것과는 반대로 '자제력이 있는 경우'다.

즉 나쁜 짓을 할 기회가 많았는데도, 자제해서 좋은 쪽으로 자신을 이끌어간 경우로

성공을 거둔 많은 양식 있는 사람들 가운데 자신이 자제력이 있다고 판단하는 경우가 많이 있다.

다음은 '이론적 덕과 실천적 덕을 다 갖춘 경우'다.

쉽게 말해서 스스로 '덕 있는 행동'을 하고 있는 경우로, 많지 않은 경우다.

 

마지막으로 '신적인 또는 영웅적인 수준의 덕을 완비한 경우'인데,

현실보다는 영화나, 소설 등에서 발견할 수 있는 경우라고 할 수 있다.

자신을 이 같은 수준으로 판단할 사람은 없겠으나,

혹시 있다면 '짐승처럼 정말 흉악한 자'들과 함께 감옥이나 정신병원에 갈 가능성이 매우 크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 행동에 있어 갈등을 일으키는 원인에 대해

사람들이 항상 최선이라고 알고 있는 것을 목표로 삼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끔 최선과 반대되는 행동을 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보았다.

예를 들어 갑돌이란 사람이 불륜을 저지르고 있다고 가정할 때,

보통 다음과 같은 두 개의 실천삼단논법이 서로 갈등을 일으킨다.

한 가지 생각은 "사랑하는 사람과 성 행위를 하는 것은 아름다운 것이다.

나는 갑순을 사랑한다. 고로 갑순과의 성행위는 아름답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를 반대하는 또 하나의 실천삼단논법은 "남의 아내와 성행위를 하는 것은 간통이다.

갑순은 남의 아내다. 고로 갑순과의 성행위는 간통이다"라는 결론이다.

만일 이 같은 소전제들이 계속 갈등을 일으킨다면

갑돌은 방을 뛰쳐나가지도 못하고, 그냥 우물쭈물하기만 할 것이다.
갑돌이가 어떤 행동을 하기 위해서는 한 가지 전제를 없애야만 한다.

예를 들어 술에 잔뜩 취한다던지, 이성을 잃어버리는 방법도 한 수단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아리스토텔레스는 자제력을 발휘할 경우에 "갑순과의 성행위는 간통이다"란 대전제와

"갑순과의 성행위가 아름답다"는 소전제가 다 사용될 수 있다고 본다.

그런 경우 갑돌이는 갑순과의 성행위를 하지 못하는 것 때문에 고통을 겪지만

그 소전제가 잠재태로 들어가 성공적으로 불륜을 피할 수 있다고 보았다.

 

 

 

 

 

 

 

 (5) 신이 없으면 윤리도 불가능

 

아리스토텔레스

서울역사박물관에서 열린 '석학과 함께하는 인문강좌'에서

이태수 교수는 그동안 강연한 '니코마코스 윤리학'과 관련,

강상진 서울대 교수, 반성택 서경대 교수, 손병석 고려대 교수,

그리고 청중들과의 종합토론 시간을 가졌다.



참석자들의 가장 큰 관심은 아리스토텔레스의 행복론이었는데,

강상진 서울대 교수는 "행복의 조건으로 내적인 조건도 있지만

외적인 조건 역시 큰 영향을 미치고 있다"며 이 두 가지 조건에 대해

아리스토텔레스적인 관점의 명확한 답변을 구했다.

이와 관련, 이태수 교수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답변 역시 복잡 미묘한 것이 아니라고 말했다. "자신의 뜻과는 상관없이 큰 불운이 닥치면, 행복해질 수 없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또 가령 처음부터 너무 흉측한 용모를 가지고 태어났다면, 그것도 어쩔 수 없는 것이다.

듣기에 냉정하지만 아리스토텔레스의 답변은 사실상 그것뿐"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주의를 기울여야 할 대목이 있다고 말했다.

즉 외적인 요인 때문에 행복을 성취하기 힘들더라도 덕을 쌓은 사람은 아주 비참해지지 않는다는

대목으로, '덕(德)은 이 경우 적극적인 행복을 가져다주지는 못하지만,

적어도 불행을 감해주는 효력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아리스토텔레스는) 이해하고 있다고 말했다.

 


철학과 신앙은 서로 보완적

"'관조(觀照)'에 관해 아리스토텔레스의 설명이 불충분하다"는 손병석 고려대 교수의 질문에 대해서는

자신도 같은 생각을 갖고 있다고 말했다.

이 교수는 그러나 '관조' 자체가 실천윤리의 영역 밖에서 성립하는 것으로 보고 있다고 말했다.

도덕 중립적이라는 것.

이 교수는 이어 "아리스토텔레스의 최고 선은 이성을 통한 관조지만,

그 계산을 담당하는 것은 지혜니까, 지혜가 어떤 점에서는 관조의 위쪽에 위치하고 있는 것 같다"

고 말했다. 관조가 킹이라면 지혜는 킹메이커 같다며,

아리스토텔레스 윤리학에 있어 관조보다는 지혜의 우위성을 강조했다.

종합토론으로 진행된

'석학과 함께하는 인문강좌' 

한편 청중들과의 대화를 통해 서양 철학에 있어 가장 민감한 문제인 철학과 신앙과의 관계를 답변했다.

"도스토옙스키의 글 중 하느님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윤리도 존재할 수 없다는 요지의 말이 생각난다"며 "절대자에 대한 진정한 의미의 신앙 이외에 또 무엇이 과연 인간에게 윤리적 행동을 할 이유를 줄 수 있는지 사실 난 잘 모르겠다"고 말했다.

철학과 신앙 간의 우위성에 대한 질문에 접해서는

서양 철학에 있어 철학과 신앙은 대립적인 것이 아니라, 상호 보완적이며, "이성에 신적인 요소가 있다는 상정했을 때 이성에서 윤리적 근거를 찾을 수 있다는 것이 나의 답변"이라고 말했다.

 


다음은 청중들과의 일문일답 내용을 요약한 것이다.

- 아리스토텔레스 이외에 행복론을 주창한 철학자가 있는가.
"행복에 대한 다른 견해로 가장 먼저 꼽아야 할 것이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의 기치를 내건 공리주의다. 공리주의의 행복은 기본적으로 '쾌락'이다.

공리주의는 쾌락, 그것도 원칙적으로 양적 측정이 가능한 그런 쾌락을 행복의 기준으로 삼는다.

개인적으로 볼 때 공리주의보다는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하는 행복이 진정한 행복이라고 생각한다."


- 서양의 윤리사상이 기독교 윤리관에 의해 지배돼왔다고 볼 수 있지 않은가.
"서양 윤리사상사에 아리스토텔레스 윤리학의 영향력은 지대하지만,

그의 윤리학은 여러 철학자들이 구상한 이론 중의 하나일 뿐이다.

나는 아리스토텔레스 외에 다른 철학자 모두의 영향력을 다 합쳐도

기독교의 지배적인 영향력보다는 적으리라는 것을 부인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독교 윤리관과 아리스토텔레스 류의 윤리관이

모든 면에서 서로 대비되는 것은 아니다.

기독교 윤리관 중 상당 부분이 아리스토텔레스적 요소를 포함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 윤리와 신앙과의 관계는 어떤가.
"어려운 질문이다. 도스토옙스키의 글 중

하느님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윤리도 존재할 수 없다는 요지의 말이 생각난다.

정말 우리가 그 앞에서 내 행위에 대해 답변을 해야 할 최종적 권위인 절대자가 없다면,

우리는 무엇을 하든지 상관없을 것 같다.

절대자에 대한 진정한 의미의 신앙 이외에 또 무엇이

과연 인간에게 윤리적 행동을 할 이유를 줄 수 있는지 사실 난 잘 모르겠다.

오늘날 서양의 지식인들 사이에는

대체로 이성이 인간의 윤리적인 행동을 확보해줄 수 있다고 믿지 않는 분위기가 팽배하다.

적어도 그렇지 않다고 공언하는 사람들이 더 많이 눈에 띈다. 답변을 마무리하면 이렇다.

이성에 신적인 요소가 있다는 상정했을 때

이성에서 윤리적 근거를 찾을 수 있다는 것이 나의 답변이다."


-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하면 식물과 동물에 영혼이 있다고 하는데,

영혼은 인간에게만 있는 것 아닌가.

이태수 교수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있어 영혼이란

사실상 생명 기능을 수행하는 주체를 뜻한다.

생물학 연구의 대상이 되는 생명체는 다 영혼이 있는 것으로 본다."


- 인간을 동물로 분류하는 것은 모순이라고 생각한다.
"인간을 동물로 분류할 수 없는 근거로 인간의 양심과 자유의지를 들 수 있지만, 인간의 양심과 자유의지가 어떤 것인지 문제가 될 수 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윤리학에서는 거기(양심과 자유의지)에 꼭 일치하는 개념이 없다. 그는 그런 개념이 아닌 다른 개념을 동원해 인간의 윤리적인 행동을 설명하려고 하고 있다. 이성을 말하는데, 양심과 자유의지만큼 이성도 인간에게 독특한 것이다."


- 이기적이고 악한 사람은 선과 악을 분별할 수 있는 판단력이 없다고 봐도 좋은가.
"소크라테스의 입장에서 당연히 그렇다고 대답할 것이다.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는 소크라테스만큼 선명하지는 않지만,

역시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고 믿는다."


- 인류의 보편적인 윤리관은 동양과 서양이 거의 비슷하다고 생각해도 괜찮은가.
"싱거운 답변으로 들리겠지만 비슷한 면도 있고, 또 다른 면도 있다는 것이 정답이라고 생각한다."

 

- 이강봉 편집위원 aacc409@naver.com

2009.06.01/ 06.15/ 06.22/ 06.29/ 07.06  ⓒ ScienceTim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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