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자호란 다시 읽기]

삼전도비는 청나라의 강요에 의해서 세웠는가?

Gijuzzang Dream 2009. 6. 6. 13:10

 

 

 

 

 

 

 삼전도비(三田渡碑)는 청나라의 강요에 의해서 세웠는가?

 

 

 

-  김기남        

 

 

 

삼전도비는 서울특별시 송파구 석촌동 289-3(당시 경기도 삼전도)에 있는 청나라의 전승비이다.

 

병자호란 때 승리한 청나라 태종이 자신의 공덕을 알리기 위해 조선에 요구해 1639년에 세워졌다고

역사교과서나 문화재청 홈페이지의 삼전도비 소개 내용에 수록되어 있고,

1963년 1월21일 사적 제101호로 지정되었다.

머리와 받침돌 조각이 정교해 조선 후기의 뛰어난 비 중 하나로 손꼽힌다.

치욕비라고도 불리며, 비를 만들 당시의 이름은 '대청황제공덕비(大淸皇帝功德碑)'였다.

내용은 청나라가 조선에 출병(出兵)한 이유, 조선이 항복한 사실,

항복한 뒤 청태종이 피해를 끼치지 않고 곧 회군(回軍)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비의 높이는 3.95m 폭은 1.4m이다.

비문은 당시의 이조판서였던 이경석이 지었고, 글씨는 오준이 썼으며,

대청황제공덕비라는 제목은 여이징이 썼다.

비석 앞면의 왼쪽에는 몽골글자, 오른쪽에는 만주글자, 뒷면에는 한자로 쓰여 있다.

 

삼전도비는 인조반정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데

인조반정의 표면상 명분은 폐모살제를 범한 광해군을 단죄한다는 성리학적인 것이었지만,

실상은 권력의 중심에서 소외된 서인세력들이 능양군(인조)을 옹립해 일으킨 왕좌찬탈 쿠데타였다.

반정세력들은 곧바로 광해군 대의 모든 외교노선을 폐지하고

숭명반청의 시대착오적인 노선을 견지함으로서 정묘, 병자 양대 호란을 불러왔고,

그 결과물로 남은 것이 바로 삼전도비인 것이다.

 

그런데 청일전쟁 후 고종 32년(1895)에 치욕의 산물인 이 비를 강물 속에 쓰러뜨렸으나

일제는 무슨 고약한 심보였는지 1913년에 다시 세우고,

1916년에 '고적급유물보존규칙'이 제정되자 바로 삼전도비를 '등록번호 제11호'로 등재하여

적극적인 보호대상으로 삼았다.

그리고 다시 '조선보물고적명승천연기념물보존령'에 따라

조선의 많은 고적과 유물이 '보물'로 지정될 때 이 삼전도비도 그 대열에 포함되었으니,

이 때가 1395년 5월25일이었으며,

'삼전도청태종공덕비'란 명칭으로 보물 제164호에 등록된다.

우리에게는 치욕의 산물이었지만 일본의 입장에서는 일찍이 타국의 예속국이었음을 강조할 수 있는

호재로 삼기에 안성마춤이었을 것이다.

 

1945년 8월 광복이 되자

지역주민들은 이 치욕의 비를 그냥 두고 볼 수 없다는 생각으로 땅속에 묻어버리게 된다.

그러나 1963년에 대홍수로 묻혀있던 비석이 씻겨 내려간 흙 사이로 모습을 드러내어 세상에 알려지자,

당시 문교부에서는 치욕의 역사도 교훈으로 삼아야할 우리의 역사라는 인식으로 다시 세우고

사적 제101호로 지정하게 된다.

 

치욕의 역사도 역사라지만 거대한 크기만큼이나 큰 아픔을 간직하고 서 있는 '대청황제공덕비'이다.

이제 글씨도 마멸되어 희미하듯 우리의 기억속에서도 차츰차츰 멀어져가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예나 지금이나 힘의 논리만이 지배하고 있는 국가간의 현실을 감안하여

삼전도비(대청황제공덕비)를 청나라의 강요에 의해서 세웠는지

아니면 우리나라가 필요에 의해서 세웠는지를 밝혀 보존함으로서,

우리의 역사에서 교훈으로 삼아야 한다.

 

 

삼전도비의 위치변경 과정

 

1637년(인조 15) - 삼전도의 단소를 쌓고 벽돌을 깔고 각을 만들라고 명하였다.(왕명으로)

1639년(인조 17) - 병자호란 때 청나라 태종 전승기념으로 삼전도 옛 송파나루터에 세움.

1895년 - 고종황제가 굴욕적인 비석이므로 보고싶지 않다고 하여 한강에 던져 매몰됨.

1913년 - 일제가 조선을 강점한 후 조선의 치욕을 세상에 알리기 위해 강바닥에서 발굴하여 다시 세움.

1945년 - 광복이 되어 지역 주민들이 치욕의 비로 여겨 다시 땅바닥에 매립.

1963년 - 대홍수 때 매몰된 비가 다시 모습을 드러내 당초 위치보다 약간 동쪽으로 이전 건립.

             (석촌리 51-13)

1983년 - 송파대로 확장으로 현재의 위치로 이동(전두환대통령 지시)

 

 

삼전도비의 역사적 가치

 

1636년(인조 14) 병자호란 때 청에 패해서 굴욕적으로 강화협정을 맺고

청태종의 요구에 따라 그의 공적을 기록하여 세운 치욕의 비이지만,

후세들에게 패배와 치욕의 사실을 그대로 보여 교훈으로 삼고,

자주 국가 및 국방의 중요성을 되새길 수 있는 기회로 삼고자 1963년 국가문화재로 지정, 보존하고 있다.

 

삼전도비의 비문내용 및 역사적 가치는 청나라가 조선을 침략한 이유와 조선이 부득이 항복한 사실,

항복한 뒤에 우리나라에게 해를 끼치지 않고 곧 회군하였다는 청나라 황제의 공적을 기술하였다.

비문은 3개국 문자가 새겨진 유일한 것으로,

전면 오른쪽에는 만주(여진)글자로 20행, 왼쪽에는 몽고문자 20행이 새겨져 있고,

뒷면은 한문으로 새겨져 있다.

비문은 칠분해서체이며, 문장은 이조판서인 이경석, 글씨는 서예가로 이름이 높은 오준,

두문(頭文) 대청황제공덕비는 청나라의 여이징이 써서

서체연구 및 만주(여진), 몽고어 연구에 귀중한 자료로 활용되고 있다.

 

 

삼전도비 건립의 역사왜곡

 

지금까지 우리는 역사교과서나 문화재청의 홈페이지에서,

삼전도비는 청나라의 강요에 의하여 세웠다고 배웠다.

 

병자호란이 끝난 뒤 청태종은 자신의 공덕을 새긴 기념비를 세우도록 조선에 강요했고,

그 결과 삼전도비가 세워졌다. 비문은 이경석이 짓고 글씨는 오준이 썼으며,

'대청황제공덕비'라는 제목은 여이징이 썼다.

비석 앞면의 왼쪽에는 몽골글자, 오른쪽에는 만주글자, 뒷면에는 한자로 씌어져 있어

만주어 및 몽골어를 연구하는데도 중요한 자료이다.

- 문화재청 홈페이지의 삼전도비 소개 내용 

 

 

삼전도비 건립의 역사적 사실

 

조선왕조실록에 의하면

인조 15년(1637, 정축/명 숭정(崇禎) 10년) 인조는 삼전도(三田渡)의 단소(壇所)를 고쳐 쌓고,

벽돌을 깔고 각(閣)을 만들라고 명하였다.

장차 비석을 세우고 청인의 공덕을 찬술(撰述)하기 위해서라고 기록되어 있다.

 

남한산성에 들어가 싸우던 인조가

추위와 식량의 결핍, 조선군사들의 항거(강화조약을 신속히 맺도록 항의)로 인해 산성을 나와

삼전도에서 삼배구고두의 예를 행하고 강화조약을 체결했다.

이를 정축화약(丁丑和約)이라 하고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조선은 청에 대해 군신(君臣)의 예를 할 것

2. 명의 연호를 폐하고 명과의 관계를 끊을 것

3. 조선왕의 장자, 제2자 및 諸 대신의 아들을 심양에 보내 인질로 할 것

4. 절기마다 명의 구례에 의해 사절을 보낼 것

5. 청이 정명의 출병을 요구할 때는 어기지 말 것

6. 청이 회군할 때 가도를 공략할 것이니 병선 50척을 준비할 것

7. 명인의 포로를 감추지 말 것

8. 내외 제신과 혼인을 맺어 화호를 굳게 할 것

9. 조선은 성을 수축하거나 신축하지 말 것

10. 조선의 대일무역은 종례대로 할 것

11. 기묘년부터 청에게 정액의 세폐를 보낼 것 

 

이것이 조약의 내용이다.

강화조약이라고 표현은 했지만 청나라의 요구사항을 명문화한 것이고

조선에서는 이의를 제기할 형편이 아니었다.

 

정축화약을 세밀히 살펴보면, 청나라도 심사숙고하여 미리 준비한 조약문이 아니다.

승자의 우월적 지위에서 강요한 조약 어디에도 삼전도에 공덕비를 세우라는 조항이 없다.

그런데 어떻게 해서 삼전도비가 건립되게 되었는가?

조선 강토를 짓밟은 청나라 군대가 철군을 완료한 6월26일에 인조가 승정원에 하명했다.

 

"삼전도의 단소(壇所)를 고쳐 쌓고 각(閣)을 만들라."

 

모든 신하들은 어안이 벙벙했지만 이의를 제기하는 신하는 없었다.

척화를 주장하던 삼학사(윤집, 오달제, 홍익한)는 심양으로 끌려가 참형되었고

나머지 신하는 유배되었다. 인조 역시 자신이 경멸하던 오랑캐에게 삼배구고두(三拜九叩頭)를 행한

수항단이 무슨 추억의 장소라고 수리하고 공덕비를 세우라고 했을까?

아들과 대신들이 청국에 볼모로 잡혀가 있고 조공과 군대를 보내야하는 어려움을 덜기 위해서는

비석을 세우는 것이 도움이 되리라고 판단했을 것이다.

 

이 소식을 전해들은 청나라는 대환영이었다.

자신들이 유린한 조선 땅에 전승기념비를 세워두고 싶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조약체결 당시 청나라는 그것을 미처 생각하지 못한 상태에서 조약을 체결되었고

지나간 일이 되었다. 자신들이 놓친 것을 찾아주고 스스로 세워주겠다고 하니 너무나 고마웠다.

그렇지만 속내를 감추고 '만주문자를 넣어라' '몽골문자를 새겨라' '귀부를 크게 하라' 등의 요구조건을

내걸어 조선을 몰아세우며, 비석이 적다고 다시 화강암 돌을 구해서 세우라는 주문을 강요했다.

 

역사교과서를 비롯한 모든 사서에 삼전도비가 청나라의 강요에 의해 세워진 비석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하지만 청나라의 강요는 조선이 비를 세우겠다고 제안한 이후에 나온 요구이다.

아마도 조선의 백성들은 스스로 '대청황제공덕비'를 세웠다는 내용을 기록하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역사 바로잡기 차원에서 문화재청의 홈페이지에 있는

"병자호란이 끝난 뒤 청태종은 자신의 공덕을 새긴 기념비를 세우도록 조선에 강요했고

그 결과 삼전도비가 세워졌다"라는 내용을 "조선왕조 16대 임금인 인조에 의하여 세워졌다"라고

문화재청의 홈페이지와 역사교과서를 바꾸어야 한다.

- SEMU 21호, 2009년 봄 호, 서울역사박물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