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자호란 다시 읽기]

(104, 끝) 조선을 알았던 청, 청을 몰랐던 조선

Gijuzzang Dream 2009. 5. 14. 07:33

  

 

 

 

 조선을 알았던 청, 청을 몰랐던 조선

 

 

“인조가 강화도로 들어갔다면 전쟁 양상 달라졌을 것”

 

 

 

조선이 병자호란을 맞아 일방적으로 몰리고 항복할 수밖에 없었던 까닭은 무엇일까?

우선 생각할 수 있는 것은

당시 청군이 조선이 상대하기에는 너무 버거운 강적이었다는 점이다.

청군은 병력의 수, 무기 체계, 전략과 전술, 사기 등 모든 면에서 조선군을 압도했다.

그들은 교전 경험도 풍부했다.

1618년 무순성(撫順城)을 점령했던 이래 수많은 공성전(攻城戰) 경험을 갖고 있었다.

 

 

복원된 남한산성의 행궁.

행궁은 병자호란 당시 인조가 머물던 ‘임시 조정’이었다.

행궁의 복원을 맞아 병자호란이라는 ‘아픈 역사’에서 역사의 교훈을 제대로 배울 수 있는 마음가짐도 함께 ‘복원’되기를 기대한다.
(류재림기자 jawoolim@seoul.co.kr)

 

남한산성 공성은 1631년 홍타이지가 주도했던 대릉하(大凌河) 공략전과 흡사했다.

대릉하전 당시 청군은 성을 물샐 틈 없이 포위하고,

산해관 쪽에서 몰려오는 명 지원군의 접근을 차단했다.

남한산성을 고립시키기 위해 판교와 광주 쪽에서 삼남으로 이어지는 길을 차단한 것과 똑같다.

외부와의 연결을 끊고 성 내부의 식량이나 연료가 떨어지는 정황을 정확히 파악하면서

수시로 투항을 권유하는 심리전을 폈던 것도 비슷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전쟁을 시작하기 전 청이

이미 조선이 사용할 ‘카드’를 간파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그들은 조선 조정이 유사시 강화도로

들어갈 것이라는 점도 1627년 정묘호란의 경험을 통해 알고 있었다.

청군은 그 때문에 서울을 신속히 점령하고 인조를 사로잡는 것을 전략 목표로 삼았고, 그것을

달성하기 위해 조선군의 청야견벽 작전을 무시하고 서울로 치달리는 속전속결 전술을 구사했다.

 

이러한 정황을 고려하면 병자호란 당시 조선이 저지른 실책이 무엇인지는 명확히 드러난다.

우선 오랫동안 막대한 물력을 기울여 강화도를 정비했으면서도

정작 청군의 침입이 시작되자 그곳으로 들어가지 못한 것은 명백한 과오였다.

만약 인조와 조정이 강화도로 들어갔다면 전쟁의 양상은 확연히 달라졌을 것이다.

우선 해로를 통해 삼남 지방과 연결됨으로써 물자 조달이 훨씬 용이했을 것이다.

또 김경징 같은 용렬한 인물에게 섬의 방어를 맡기지도 않았을 것이다.

삼남 지역의 수군도 훨씬 효율적으로 활용할 수 있었을 것이다.

 

당시 淸의 배후에는 엄연히 明이 있었다.

청은 ‘뒤를 돌아보아야 할(後顧) 위험’ 때문에 속전속결 전술을 구사할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만일 인조가 강화도로 들어갔다면 조선은 더 많은 시간을 확보할 수 있었고,

후금은 초조해질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러면 설사 강화(講和)를 맺더라도 훨씬 완화된 조건으로 화약을 체결할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역사에서 가정이란 부질없는 것이다.

강화도로 들어가지 못하고 남한산성으로 내몰린 것은 결국 인조와 조선 조정의 실책이었다.

적은 나를 아는데, 나는 적을 모르고 거기에 안일하기까지 했던 정황이 불러온 필연적인 귀결이었다.

 

1623년 3월 김류가 이끄는 인조반정의 거사군이 창덕궁으로 들이닥쳤을 때

광해군의 부인 유씨는 반문했다.

“지금의 거사가 종사(宗社)의 미래를 위한 것인가? 아니면 그대들의 영달을 위한 것인가?”

반정세력은 거사가 성공하던 당일에는 그 뜻을 잘 몰랐을 것이다.

인조반정은 분명 나름대로 명분과 정당성이 있는 정변이었다.

그 주도 세력들이 광해군 집권기에 자행된 실정과 난맥상을 바로잡으려는 의지를 갖고 있었던 것도

인정할 수 있다. 하지만 거기까지였다.

반정공신들을 비롯한 주도 세력들은 집권 이후 ‘자기 관리’에 실패했다.

‘광해군대의 부정과 비리’를 소리 높여 질타했으되,

자신들 또한 비슷한 잘못을 저지르고 있다는 사실은 깨닫지 못했다.

 

반정 이후 영달한 공신들 가운데 최명길과 이귀 정도를 빼면 나머지 사람들은

무능하고 문제가 많았다. 나아가 공(公)과 사(私)를 제대로 분별하지 않았다.

청군의 침략 소식을 제때 보고하지 않고 저항마저 포기함으로써

청군의 신속한 남하를 방조했던 김자점,

강화도 검찰사라는 감투를 자기 집안의 식솔과 재산을 보호하는 데 남용했던 김류와 김경징 등의

행적은 그 상징이었다. 인조는 그럼에도 김류와 김자점 등 공신들을 끝까지 편애했다.

종묘사직을 도탄에 빠뜨리고, 수많은 생령들을 고통의 구렁텅이로 몰아넣은 그들을

처벌하려 들지 않았다.

 

청은 달랐다. 그들은 전승국임에도 병자호란이 끝나자마자 ‘과거 청산’을 철저히 시도했다.

조선의 전장에서 과오를 저지르거나 태만했던 지휘관들을 가차없이 군율로 처벌했다.

사정(私情)에 눈이 멀어 공신들을 끝까지 비호한 결과는 무엇이었던가?

훗날 인조 정권과 효종 정권을 뒤엎으려는 역모를 시도했던 심기원(沈器遠)과 김자점이

모두 공신 출신이었다는 사실은 너무 역설적이다.

 

1627년의 정묘호란과 1637년의 병자호란을 돌아보면 오늘이 보인다.

1627년은 상대하기 버거운 청의 전면 침략을 미봉책으로 잠시 멈춰 놓았던 해였다.

이후 10년은 당연히 ‘외양간을 고쳐야 했던’ 시간들이었다. 하지만 조선은 그러지 못했다.

‘개돼지만도 못한 오랑캐와 관계를 계속 유지할 수 없다.’는 ‘총론’의 목소리는 높았다.

그러나 그들의 침략을 막아낼 방도에 대한 ‘각론’은 존재하지 않았다.

그 귀결이 처참한 항복이었고 수많은 환향녀와 ‘안추원’, ‘안단 ’ 등을 만들어 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는 역사에서 제대로 교훈을 얻고 있을까?

1997년 혹심한 외환위기를 겪었음에도 10년 만에 경제가 휘청대는 상황을 다시 맞은 것을 보면

도무지 그런 것 같지 않다.

1627년과 1637년, 1997년과 2008년.

권력을 가진 사람들은 이 숫자들을 보면서 생각해야 한다.

 

“역사를 두려워하고,역사 앞에 무한 책임을 져야 한다.”는 사실을.

추위와 굶주림 속에 절망과 슬픔을 곱씹으며 심양으로 끌려가야 했던

수많은 선인들의 고통을 추념(追念)하며 글을 마친다.

- 한명기 명지대 교수

 

 

“지금의 경제위기도 10년 전 IMF 원인 규명 미흡했기 때문”

   - 연재 마치는 한명기 교수의 소회

 

“병자호란(1636)은 10년 앞서 일어난 정묘호란(1627) 당시 조선에 주어진 과제를

제대로 해결하지 못한 뼈아픈 결과입니다.

지금의 경제난국도 10년 전 IMF 외환위기 때 책임 소재와 원인에 대한 규명이 부족했기 때문에

되풀이된 것으로 볼 수 있다는 점에서 시사하는 바가 매우 큽니다.”

 

한명기 명지대 교수

 

한명기(46) 명지대 사학과 교수가 서울신문에 매주 연재한

기획시리즈 ‘아픈 역사에서 배운다-병자호란 다시 읽기’가

31일자로 마침표를 찍었다.

2007년 1월11일 첫 회를 시작으로 꼬박 2년간 모두 104회에 걸쳐 철저히 사료에 입각해 병자호란에 얽힌 이야기를 꼼꼼히 풀어낸 한 교수는

“비극의 역사인 병자호란을 되돌아보면서 과거의 잘못을 뿌리 깊이 성찰하지 않으면 위기는 언제든 반복된다는 교훈을 새삼 되새겼다.”고 소회를 밝혔다.

 

한 교수는 수많은 민초의 죽음과 10만명이 넘는 포로를 발생시킨 병자호란의 원인이 조선 지배층의 무능과 무책임에 있다고 지적한다.

정묘호란의 굴욕을 겪고도 이들은 명·청 교체기 급변하는 국제 정세에 신속히 대처할 방법을 강구하기는커녕 책임 회피에만 급급했다.

위정자들의 이같은 안이한 태도는 병자호란 이후에도 마찬가지였다.

인조는 청태종에게 세 번 큰절을 하는 치욕을 겪었지만 잘못된 정책 판단으로 환란을 자초한 정책담당자들에 대한 책임 추궁은 소홀히 했다.

일례로 인조반정의 1등 공신인 김류는 아들 김경징의 안일한 처신으로 강화도가 함락돼

비난이 들끓는데도 자리를 보전했다.

 

반면 백성들의 고통은 극심했다.

청으로 끌려갔다 탈출한 포로들은 다시 청으로 끌려가 발뒤꿈치를 잘리는 혹형을 당했다.

안추원과 안단은 무려 28년, 37년 만에 탈출에 성공했지만 끝내 고국 땅을 밟지 못했다.

조선으로 되돌아온 포로 여자들(환향녀)은 가족에게조차 버림받았다.

 

한 교수는 “청에 항복한 이후에도 오랑캐라고 혐오하기만 했지 왜 당해야 했는지 알려고 하지 않았다.

위기의 원인을 찾아 철저히 반성하고, 미래를 준비하는 자세가 결여됐던 것이

조선이 동아시아 3국 가운데 근대화가 가장 늦을 수밖에 없었던 이유”라고 분석했다.

그러면서 “위기가 닥쳤을 때 이를 확실히 극복하는 DNA가 부족한 것 아닌지 자성해볼 필요가 있다.” 고 목소리를 높였다.

 

병자호란의 전말을 학술논문이 아닌 대중적인 글로 집대성해서 풀어쓴 사례는 드물다.

한 교수는 “조선왕조실록을 기본으로 병자호란에 관한 모든 자료를 취합해서 철저히 사료에 근거해

글을 썼다.”고 밝혔다.

‘임진왜란과 한중관계’ ‘광해군’ 등의 저서를 쓴 한 교수는

앞으로 임진왜란에 관한 대중서를 쓰고 싶다고 말했다.

강대국 사이에서 생존의 방법을 모색해야 했던 조선의 운명은 수백년이 지난 지금도 변함이 없다.

때문에 현재 병자호란과 임진왜란을 다시 읽는 것은

과거가 아닌 미래를 향한 길이라고 한 교수는 강조했다.

이순녀기자 coral@seoul.co.kr / 사진 이언탁기자 utl@seoul.co.kr

- 서울신문,  

2008-12-31